로맨틱 코메디 시리즈/의사와 의사동기

의사와 의사 동기와 조폭이야기 7

seta9 2016. 5. 3. 20:49

 
<의사와 의사 동기와 조폭이야기 7> 

 

 병원에서는 지금 츠키시마 케이 대피령이 내려져 있었다. 시작은 여느 때처럼 사전 점검을 받으러 츠키시마에게 갔던 간호사가 눈물이 그렁그렁해서 뛰쳐나온 일이었다. 미리 계산해 놓은 마취약 용량에서 약간의 실수가 있었는데, 평소에도 찬바람이 쌩쌩 부는 얼굴이 그렇게까지 될 수 있다는 것을 처음 깨달았다는 감상평이 있었다. 그건 사실 기상이변 같은 일이었다. 츠키시마는 냉정하기로 이름 높았지만, 한편으로는 이성적이라서 필요 이상으로 누군가를 다그치는 일이 없었기 때문에 병원 내에서는 같이 일하기 나쁘지 않은 쪽에 속해 있었다. 마취약의 용량 실수가 위험하기 그지없는 실수라곤 해도, 사실은 오차 범위인 것도 맞았다. 그때까지만 해도 사람들은 오늘따라 예민하시네. 정도였다. 그런데.

 “다시 해오세요. 아니면 학교를 다시 가시는 것도 좋겠네요.”
 “이걸 일이라고 하신건가요? 이런 건 ‘방해’라고 부르는 편이 더 정확할 것 같은데요.”
 “그냥 그만두는 게 어떠세요? 그 편이 좀 더 생명을 구하는 쪽 같은데.”

 독설은 쉬지 않고, 불철주야 부지런히 일을 했다. 그에 간호사들과, 레지던트들과, 필요에 따라서는 동료교사까지 자존심이 산채로 화형당해야만 했다. 그것이 벌써 2주일 가까이 되어 가고 있었다. 휴가를 떠났다던 사람이 불시에 휴가를 철회하고 돌아왔을 때만 해도 ‘허허, 역시 천성이 의사셔.’라는 반응 일색이었던 것이, ‘우리를 벌하기 위해서 휴가를 접고 돌아온 도S 의사새끼.’가 되는 것은 얼마 걸리지 않았다. 사람들은 얼마든지 츠키시마의 휴가를 위해 자신의 월차를 포기할 생각이 있었고, 혹은 봉급을 털어 휴가비를 마련하자는 움직임도 작게나마 있었다. 비구름을 몰고 다니는 것 같은 저기압의 인상은 어떻게 해도 펴지지 않은 채, 시간이 지나가고 있었다. 이제 사람들은 서로의 얼굴만 봐도 한숨을 지었다. 예전에는 ‘카게야마 토비오의 일기도’가 있었는데, 요새는 ‘츠키시마 케이의 기상예보’가 선풍적인 인기를 끌었다. 물론 예보를 할 것도 없이 매일매일 저기압에 태풍상태였지만 말이다.

 게다가 오늘은 그 ‘폭군’이 복귀하는 날이었다. 사람들은 ‘병가를 내지 못해서 왔소.’라는 표정으로 출근했다. 이른 아침부터 카게야마 토비오의 방의 문패는 ‘OPEN’이라고 돌려져 있었다.

  

***


 “츠키시마.”
 “...”
 “나랑 얘기 좀 해. 츠키시마.”
 “...”

 에스프레소처럼 보이는 진한 커피를 벤티사이즈 컵으로 마시면서 차트를 확인하고 있는 츠키시마는 자신을 계속 부르는 카게야마를 없는 사람처럼 대했다. 있을 수 없는 풍경에 흥미를 느낀 것도 잠시, 차트를 전해주러 왔던 간호사는 불안에 차서 눈동자를 굴리고, 침을 삼켰다. 폭탄 돌리기 게임을 보는 것 같은 기분이었다. 츠키시마는 무표정한 얼굴로 차트를 간호사에게 건넸다.

 “이대로 진행하면 되겠네요. 두 시간 후로 준비해 주세요.”
 “츠키시마!”
 “일 하는 중이잖아. 기다려. 그 쪽은 이제 나가줄래요?”

 간호사는 그 말을 기다렸다는 듯이 고개를 꾸벅하고는 급한 걸음으로 방을 나갔다. 엑스레이 사진을 확인하느라 스탠드 불을 뺀 다른 불을 꺼두어 방은 어두웠다. 책상에 몸을 기대고 선 채, 츠키시마는 차갑기 그지없는 눈으로 카게야마를 내려 보았다. 여전히 커피를 입에 대고 마시면서 시선만 카게야마를 보는 것이 이제 ‘얘기해 봐’라고 말하는 듯한 태도였다. 카게야마는 왠지 주눅이 들어 두 손을 마주잡고 손가락 끝을 만지작거렸다.

 “왜 그냥 갔어?”
 “...”
 “연락도 안 받고..”
 “...”
 “지금도 말... 안 하고.”

 점점 수그러드는 목소리가 기어이 문장을 전부 꺼내지 못할 정도로 사라지자, 츠키시마는 마시던 커피 잔을 탁자에 올려두고, 팔짱을 깊이 꼈다. 좀 더 단호하게 닫힌 태도에 카게야마의 고개가 땅으로 떨어졌다. 숙여진 고개만큼 조그마해진 입술이 뭔가를 말하려는 듯이 달싹이고 멈추고를 반복했다. 츠키시마는 한 마디도 하지 않고 끈질기게 기다렸다. 그리고.

 “...미안해.” 마침내 카게야마는 항복 선언을 했다.
 “...” 물론 츠키시마는 상대방의 백기를 받아줄 생각이 없었다.

 “내가 잘못했어.”

 어깨까지 수그러들어서 더 작아 보이는 동기는 평소와 달리 완전히 저자세였다. 그것이 그 날의 일을 더욱 확실히 반증해 주는 것 같아서 츠키시마는 진정할 수 없을 만큼 분노가 치밀었다. 그 밤 이후로, 자신은 계속 화를 발산하고 다녔는데도, 화수분처럼 자꾸 채워지는 화는 이제 폭발을 한 걸음, 아니 반걸음도 남겨두지 않고 있었다.

 “뭘 잘못했어?”
 “내가.” 손에 핏대가 하얗게 솟을 만큼 강하게 쥐어 잡고.
 “쿠로오씨랑 기분 좋은 일을 해 버렸어.”

 동기는 여전히 제대로 말을 하는 법이 없었다. 츠키시마는 이를 악물고 웃었다.

 “기분 좋은 일? 너한테는 그게 기분 좋은 일이었어?”
 “그게 아니라..” 이제 실수를 깨달아 봐도 소용이 없었다.
 “몰랐네. 그리고 나한테 그걸 왜 사과하는지도 모르겠어.”

 그래, 더 화가 나는 것은 자신이 동기에게 이 사과를 받을만한 관계의 사람도 아니라는 것이었다.

 “애초에 네가 누구랑 술을 마시든, 섹스를 하든, 나랑은 상관없잖아.”
 “츠키시마, 화 내지 마.”
 “...그렇지, 생각해보니 내가 화 낼 일이 아니네.”

 신랄하게 말꼬리를 잡자, 동기의 눈동자는 패닉이 되어 뱅글뱅글 돌고 있었다. 츠키시마는 여기에 있는 것을 다 집어 던지고 싶은 기분이 들었다. 너는 왜 나에게 사과를 하고, 나는 너에게 왜 화를 내고 있는 거지. 사실은 그럴 일이 아니잖아. 계속 츠키시마를 괴롭히던 생각이 분노의 심지에 불을 붙였다. 이대로 계속 동기의 얼굴을 보는 것이 괴로웠다. 그래서 새파랗게 된 얼굴로 방을 나가려는 츠키시마의 팔을 카게야마가 잡았다. 아, 제발 이러지 마. 츠키시마는 끊어지려는 선을 간신히 붙잡으면서 매몰찬 얼굴로 카게야마를 보았다.

 “가지 마. 내가 다 잘못했어.”
 “너..”
 “내가 잘못했어.”

 츠키시마는 지금 자신이 보고 있는 동기의 표정이 무엇을 의미하는지 알고 있었다. 카게야마는 원하는 한 가지를 위해서 다른 모든 것을 포기할 수 있는 아이였다. 성격이기도 했고, 한 편으로는 그렇게 태어난 것이기도 했다. 눈을 가려놓은 타조처럼 앞으로만 달려가게 설계되어 태어났다. 그리고 그 길은 항상 의사였다. 그런데 지금은.

 지금은 자신이었다.

 츠키시마는 피식 헛웃음을 지었다. 카게야마에게 잡혀 있는 손을 빼어내서 결 좋은 머리를 쓰다듬자 무언가 기대하는 눈빛이 용서를 조르며 자신을 향해온다. 그대로 뒷머리를 잡고 확 당겨 고개를 꺾었다.

 “그 일을 용서받고 싶어?”

 아파하면서도 고개를 끄덕이는 동기를 보면서 츠키시마는 짓궂게 웃었다. 이미 심지는 모두 타 버렸고, 아무 소리 없이 폭탄은 터진 후였다. 휘몰아치는 감정에 자신을 놓아버리자, 자아는, 여태까지 쌓아왔던 모든 것들은 태풍 속의 연처럼 이리저리 찢겨 조각이 되고, 원래의 모양을 찾을 수도 없이 흩날렸다.

 “그럼 내 기분도 좀 좋게 만들어 줄래?”

 회의를 위해 방 한가운데 마련되어 있는 커다란 책상에 몸을 밀쳤다. 모서리에 부딪쳐 비틀거리는 몸을 살짝 들고 밀어서 무릎께까지 완전히 그 위에 눕히자, 깜짝 놀라 있는 눈동자가 바르르 떨렸다. 필요이상으로 묵직해서 청소 때마다 욕을 얻어먹던 데스크가 오늘만큼은 제대로 효용을 발휘하고 있었다. 단추를 잠그지 않고 입었던 흰 가운이 이불자락처럼 펼쳐진다. 고개를 들고, 몸을 일으키려는 동기 위로 올라타면서 츠키시마는 죄책감 없이, 그러나 애정이 아닌 다른 이유로 카게야마와 입을 맞췄다. 어깨를 잡고 밀려는 손목을 휘어잡아 귀 옆에 내리 누르고, 위라는 유리한 위치를 이용해서 사정없이 무게를 실었다.

 “츠키시마, 하지 마-”
 “왜 기분 좋은 일이라며.”

 그 사람이랑 기분 좋은 일을 했다며. 손목 두 개를 머리 위로 모아 한 팔로 내리 누르면서, 츠키시마는 자신의 목 끝까지 꽉 조여져 있던 넥타이를 더듬어 잡았다. 자꾸 손이 미끄러지려는 것에 신경질을 내며 확 당기자 그제야 매듭이 풀어지며 넥타이가 긴 끈처럼 변해 늘어졌다. 카게야마는 몸서리를 치면서 몸을 비틀었다.

 “무서워- 하지 마, 그만 해!!”
 “나랑은 싫어서 그래?”
 “하지 마!!!”

 결국 새된 소리를 내며 말끝이 올라갔다. 감정을 주체하지 못하는 손아귀에서 카게야마의 손이 빠져 나갔다. 츠키시마가 그것을 다시 잡기도 전에.

 
 철썩.

 뺨이 제대로 돌아갔다. 누군가 버튼이라도 누른 듯이 모든 행동이 정지되고, 무겁고 거북한 정적이 흘렀다. 거칠게 오르내리는 가슴에 맞추어 소리 나게 뱉어내는 숨소리만이 들리는 전부였다. 츠키시마는 다시 냉정해진 시선을 카게야마에게 돌렸다. 눈물이 그렁그렁 맺혀 있었다. 그에 한없이 더 차가워진 츠키시마가.

 “널 정말 이해 할 수 없어.”

 그건 카게야마가 제일 상처받아 하던 말이었다. 천천히 동기의 위에서 내려온 츠키시마는 방을 나섰다. 쾅, 하는 거친 소리와 함께 방에는 적막이 찾아왔다. 카게야마는 몸을 일으키려다가, 그대로 다리에 힘이 풀려 바닥에 넘어지듯 주저앉았다. 그리고는 혼자 남은 방에서 숨을 고르려고 애쓰면서 몸을 웅크렸다. 제대로 되는 일이 하나도 없었다.

 나도 잘못했지만, 너도 잘못했잖아. 사실은 그렇게 생각했다. 그렇지만 츠키시마는 사과를 할 때에는 자신의 잘못만 이야기하는 거라고 누누이 말해줬었다. 그래서 그런 건데. 억울하고 속이 상했다. 말을 들어주지 않으려는 것도 화가 났다. 다짜고짜 하려고 하는 것도 싫었다. 제일 싫어하는 말을 던지고 가는 것도 너무 억울했다.

 카게야마는 결국 참지 못하고 자리를 박차고 일어났다. 문도 거의 차버리듯이 열고는 성큼성큼 걸어가는 조금 더 키가 큰 동기를 쫓아서 달음박질쳤다. 막 업무를 시작한 종합병원의 복도에는 분주함이 가득했다. 환자와 의사, 그리고 간호사들이 지뢰처럼 펼쳐져 있는 복도 저 멀리 츠키시마가 보였다.

 
 “츠키시마!!!!!!!!!”

 고함에 가까운 소리에 멈칫 하면서 몸을 돌리는 순간, 카게야마 또한 동기의 바로 앞에 도착했다. 망설이지도 않고 카게야마는 온 무게를 실어 얼굴에 주먹을 날렸다. 몸이 그대로 넘어지고, 안경이 반짝 빛을 내며 날아가 저 멀리 떨어졌다. 바삭, 하고 부서지는 소리가 났다.

 종말인가?

 복도에 있던 모든 사람들의 머리속에 떠오른 단어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