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오이카게] Blind Game 4
Blind Game
수의사는 속이 뒤집히는 것을 느끼며 눈을 떴다. 역한 내음이 식도를 타고 올라왔다. 그는 구역질과 함께 몸을 벌떡 일으켰다.
“우. 으윽.”
당장이라도 쏟아질 것 같이 몸이 들썩거렸지만 나오는 것은 마땅히 없었다. 가슴을 들썩거리며 빈 딸꾹질을 하고 있자니, 눈앞에 생수통이 내밀어졌다. 더 생각할 것도 없이 카게야마는 그것을 잡아채어 벌컥벌컥 마셨다.
“정신이 좀 들어요?”
“쿨럭, 쿠울럭, 컥, 흑.”
목소리를 듣자마자, 옆집 남자는 마시던 기세와 다를 바 없는 강도로 기침을 터뜨렸다. 물의 2/3쯤은 속으로 들어가지 못하고 밖으로 흘러내린다. 이불을 들어 입가를 닦아내고, 그대로 누른 채 카게야마는 옆을 돌아보았다.
“….”
낯선 방안에는 옆집 남자가 있었다. 꼬리가 올라간 눈매가 커다랗게 뜨여진다. 흰자를 가득채운 푸른 눈동자가 이리저리 흔들리다 결국 날카롭게 변했다. 오이카와는 눈을 가늘게 떴다.
“그 눈은 뭐에요. 생명의…. 아니, 정조의 은인에게.”
“정조? 그것보다 오이카와씨가 왜 여기 있습니까?”
“없었으면 카게야마씨가 큰일났었거든요.”
요원은 뺨에 손을 괴며 유들유들 대꾸했다. 좀 더 캐물으려고 하자마자 욱하니 속이 다시 치밀어 올랐다. 카게야마는 잠시 두 손 가득히 쥐고 있던 이불 속에 얼굴을 묻었다. 오이카와는 그의 동그란, 정말로 동그랗기 그지없는 뒤통수를 물끄러미 응시했다. 약이 섞인 술을 한 번에 들이켰으니 정신이 없을 만도 했다. 반쯤은 아직 환상 속에 있을지도 몰랐다. 그래서일까. 아니면, 지쳐서 그럴까. 거의 파묻혀 있다시피 한 그의 옆얼굴은 어딘가 더 성숙한 분위기를 풍겼다.
“카게야마씨.”
“네.”
“당신의 가장 수상한 점이 뭐였는지 알아요?”
“….”
옆집 남자는 뜬금없이 시작되는 말에도 반응이 없었다. 그는 단지 조금 고개를 들어올렸다. 핼쑥한 낯빛이었다.
“길고양이처럼 나를 피하는 당신은 밤만 되면 나랑 닮은 남자를 집으로 끌어 들였거든.”
“….”
고개가 천천히 돌려졌다. 아직은 완벽하게 직선이 아닌 시선이 어렵게 맞부딪쳤다. 어슴푸레한 전등불 빛을 모조리 빨아들이는 심연 같은 눈동자였다. 오이카와는 차분하게 그를 감상했다. 그리고 그가 자신보다 연상임을 새삼스레 느꼈다.
“왜 그랬어요?”
“….”
“사실 원 나잇을 시작한 것도 내가 이사 온 후의 일이죠? 그게 아니면, 이렇게 남자를 못 고를 수가 없지.”
아무리 물어도 옆집 남자는 대답이 없었다. 요원은 손끝 하나 움직이지 않고 있는 그에게 고개를 기울였다. 그리고 시선으로 부드럽게 남자를 쓰다듬었다. 그것은 그의 주특기였다. 길고양이 하나도 제대로 다루지 못하는 카게야마와 달리, 오이카와는 자신이 가진 외모, 분위기를 백분도 넘게 활용할 줄 알았다. 누그러뜨린 근사한 눈동자가 뺨을 한번 휘감자, 옆집 남자의 꼿꼿한 자세가 어딘가 미묘하게 어그러졌다. 민감하게 그것을 캐치한 오이카와는 속으로 쾌재를 불렀다.
“애인 있었죠.”
그는 등 뒤로 감추고 있던 칼을 훅 꽂아 넣었다.
“….”
“날 무척 닮은.”
후르륵 옆집 남자의 방어벽이 부풀어 올랐다. 그러나 고양이의 털은 요원에게 그다지 위협적이지 않았다. 오이카와는 느긋하게 그의 대답을 기다렸다.
“오이카와씨.”
한 글자, 한 글자 힘을 주어 발음하며 카게야마가 상대의 이름을 불렀다. 그는 이불 속에 깊이 얼굴을 한번 파묻었다가 들어올렸다. 몹시 피곤하고, 또한 몹시 살벌한 표정이었다.
“옛 애인을 아직 못 잊은 건 사실입니다.”
옆집 남자는 사랑을 고백하던 절절한 표정이 연극이었던 것처럼 덤덤하게 말을 꺼냈다.
“하지만 오이카와씨를 닮지 않았어요. 아니, 닮았다고 해도 아무 상관없는 일입니다.”
“그렇지만 제가 하는 일이.”
“제가. 당신이 하는 그. ‘요원’이라는 헛소리를 그냥 넘어갔듯이 ,제 이상함도 넘겨버리세요. 특히나 옛 애인이나 침대 사정 같은 사적인 일에 대해서는 더더욱. 부탁드립니다.”
엣. 그냥 헛소리 취급이었어? 요원은 머리를 철썩 때리고 가는 고양이의 꼬리를 느꼈다. 스르륵. 잘 보이지 않는 골목으로 도망쳐 버리려는 것 같았다.
“전 그냥. 조용히 살고 싶은 30세의 수의사일 뿐입니다.”
그는 최면처럼 같은 말을 내밀며 말을 끝맺었다.
◆◆◆
“…진짜 아니에요?”
재차 물으면서 요원은 어딘가 체면이 구겨지는 느낌이 들었지만 한 번 참았다. 그는 지금 옆집 남자를 옆에 태우고 운전을 하는 중이었다. 옆집남자는 당연히 혼자 가겠다고 고집을 부렸지만, 침대에서 일어서자마자 그대로 다시 넘어졌다. 약기운이 다 빠져나가지 않아 혼자 걷는 것은 불가능한 일이라는 것을 설득하는 데는 삼십 분이 걸렸고, 택시가 아닌 자신의 차를 타라고 설득하는 데 다시 삼십 분이 걸렸다. 오이카와는 이를 득득 갈았다. 내가 도대체 왜. 왜. 그렇지만.
“아닙니다.”
그게 끝이 아니라는 듯, 내리 부정만 하는 대답 때문에 다시 속에 불이 붙었다. 마치 어린 아이의 어이없는 질문에 답을 해 주는 선생님마냥 감정이 없는 목소리였다. 쳇. 핸들을 밉상 맞게 훅 돌리며 요원은 입을 삐죽였다.
“이런 일로 왜 고집을 부리는 거예요?”
“아니니까요.”
“그럼 왜 나랑 닮은 남자랑 원-나잇 하는 건데요?”
“…제가 대답해야 합니까?”
“의심받는 거 보단 낫지 않아요?”
툭툭 서로에게 던져지던 시비조의 말들이 점점 크기를 키워나갔다. 수의사는 고집으로 똘똘 뭉친 표정을 한 채, 차창 밖으로 고개를 돌려 버렸다.
“그냥 계속 의심하세요. 어차피 저 곧 이사 가니까.”
“그건 또 무슨 의도로 하는 거짓말이에요?”
“진짜입니다. 집도 이미 내어 놓았어요.”
“엣?”
“당신 옆집에서 제가 어떻게 삽니까.”
“옛날 애인이 생각나서?”
“끈질기시네요. 정말. 당신 성격 정말. 정말.”
“으응, 사실 성격 좋다는 소리는 많이 듣는 편이죠.”
카게야마는 부글부글하게 끓어오르는 눈동자를 오이카와에게 돌렸다. 싱글벙글 웃으며 상대를 조지는데 일가견이 있는 요원은 외려 그 공격적인 시선을 즐기며 태연하게 운전을 계속했다. 차는 매끄럽게 주차 차단기를 통과하여 지하주차장으로 들어섰다.
“그냥 인정하시라니까요.”
빈자리를 찾아 주차를 시작하며 요원이 붙임성 좋게 다시 말을 붙였다. 수의사는 입술을 꾸물거리며 꽉 깨물었다.
“그 쪽이야 말로 억지 부리지 마세요.”
“흐응. 곧 이사가신다면서요. 어차피 영영 안 볼 사람이 될 수도 있는데 그냥 솔직하게.”
“이사는 당신이 몰래 설치한 카메라 때문에 가는 겁니다!!”
카게야마는 안전벨트를 잡고 격양된 어조로 말을 이었다. 생각보다 달구기 쉬운 성격이었다. 때마침 주차가 끝났다. 안전벨트를 먼저 풀어낸 오이카와는 진지한 표정을 하고, 철컥철컥 벨트를 풀려하는 수의사의 손을 꾹 내리 눌렀다.
“?”
“카게야마씨.”
그리고 상체를 그에게 확 숙였다. 의자에 붙어 버릴 것처럼 옆집 남자가 뒤로 물러섰다. 차 문은 잠겨 있었고, 남자의 근력이나 악력은 오이카와의 상대가 되진 못했다. 꼼짝없이 안전벨트에 묶인 몸을 향해, 서서히 요원은 고개를 숙였다.
“….”
온 몸을 철갑처럼 두르고 있는 긴장이 느껴졌다. 가까이서 보니 정말로 잘 보였다. 격랑이 몰아치는 파도와 같은 눈동자가. 딱딱하게 굳어버린 입술이. 긴장을 여과 없이 보여주는 그런 것들. 요원은 빨개진 귀에 닿을락, 말락 하게 붙은 입술로 근사하게 웃었다. 작은 숨소리에, 귀엽게도 하얀 솜털이 오소소 섰다.
“아니면, 그냥 나한테 반했어요?”
수의사의 얼굴이 새빨갛게 달아올랐다. 순간, 오이카와는 자신이 정답을 찾았다고 생각했다. 그러나 다음 순간 그것이 아니라는 것을 깨달았다.
철썩. 얻어맞은 뺨이 화끈했다.
◆◆◆
“냐아아아-.”
검은 고양이는 당당하게 침대 위로 올라가 가운데 자리를 차지했다. 씻고 나온 카게야마는 파자마를 입고 하품을 하다가 그 모습을 보고 정신을 번뜩 차렸다. 여유롭게 꼬리를 흔드는 고양이와 잔뜩 긴장한 사람 사이에 이유를 알 수 없는 대결 구도가 생겨났다.
“….”
“웨오옹.”
주춤거리며 침대로 다가오는 수의사에게 고양이가 짧게 울었다. 호박색 홍채 안에 일자로 박힌 까만 동공이 수의사의 일거수일투족을 감시하겠다는 듯 아닌 척, 기민하게 움직였다. 카게야마는 보송한 털 사이에서 팡, 하고 튀어나와 있는 조그만 발톱을 확인했다. 상처가 채 낫지 않아 임시로 보호하려던 것뿐인데. 졸지에 본인의 집에서 잘 자리를 잃어 버렸다.
“저기.”
“웨어어어어어옹.”
타협의 여지를 보이지 않는 울음소리였다. 등등한 기세 앞에서 카게야마는 조심조심 다가가 침대 가장자리에 올라섰다. 벼랑처럼 끄트머리에 몸을 누이자, 마땅찮다는 시선이 뒤따른다. 그래도 그 이상의 행동은 하지 않음에 안심하며, 수의사는 이불 끄트머리를 잡아 당겨 몸을 덮었다. 등 뒤에서 고양이의 꼬리가 매트리스를 치는 소리가 규칙적으로 울렸다. 몸도 작고 말라서 길거리 순위에서는 최하위가 될 것 같은 고양이었는데 성질이 제법이다. 수의사는 건드리지 않으려 조심하며 베개 끝에 머리를 대었다.
그러나 쉽사리 잠이 오진 않았다. 그저 몸을 불편하게 뒤척이고 있자니 아까의 일이 떠올랐다.
‘아니면, 그냥 나한테 반했어요?’
“….”
카게야마는 이불을 한껏 끌어올려 얼굴을 덮었다. 귀가 뜨거웠다. 입김으로 금세 후덥지근해진 이불 안에서 수의사는 최선을 다해 일에 대해 생각했다. 고양이에 대해 생각했다. 조만간 백화점에 가서 고양이 용품을 사와야겠다고 한 것이 잠들기 전, 그의 마지막 생각이었다.
◆◆◆
이와이즈미는 투명 보드 앞에 섰다. 팀원들은 각자 좋아하는 음료를 하나씩 들고 자리를 잡았다. 마츠카와는 콜라, 하나마키는 스포츠 음료, 오이카와는 차가운 커피였다. 이른 시간의 소집이었다. 그러나 모두 말끔한 옷차림에 또렷한 눈동자를 하고 있었다. 비정기적이며, 급작스러운 투입은 그들에게 일상적이었기 때문이었다.
“임무 개시 시간은 내일 오후 2시 30분이야.”
“이번에도 정보를 팔아넘기는 내부자를 막는 쪽인가?”
“아니, 반대다.”
이와이즈미는 가지고 있던 펜의 뒤로 보드를 톡톡 두드렸다. 전자 펜을 인식한 보드가 보호하고 있던 화면을 띄워 올렸다. 물음표가 새겨져 있는 서로 다른 색깔의 파일 5개였다.
“말했듯이 이곳으로 모이게 되는 중요한 파일은 모두 5개야. 하나는 첫 번째 임무에서 거두어 들였어.”
팀장은 빨간색 파일에 펜을 찍었다. 활성화된 파일은 물음표를 느낌표로 바꾸며 빛과 함께 사라졌다.
“그래서 남은 것은 세 개지.”
“엣? 4개가 아니라?”
오이카와가 손가락을 흔들며 물었다. 이와이즈미는 그 옆에 위치해 있던 노란색 파일을 쿡 찍었다.
“하나는 이미 빼앗겼어.”
콰앙, 하는 효과음과 함께 화면 속 파일이 사라졌다. 저 쓸데없는 효과는 하나마키가 만들었음이 분명하다고 생각하며 오이카와는 혀를 짧게 찼다.
“대체 어떤 무능한 요원이 그랬어?”
“상대가 유능했을 수도 있지.”
마츠카와가 농담처럼 진담을 꺼내들었다.
“말하자면 1:1인 거네?”
“1:1:0일 수도 있어. 어쩌면 그 이상 일 수도 있고. 이 기술은 합쳐지기만 한다면 세계 경제와 정치를 쥐락펴락 할 수 있을 테니까 관심이 있는 사람들도 많겠지.”
“영화는 영화로 두면 좋을 텐데 말이야. 과학자들이란.”
오이카와는 한번 더 입술을 내밀고는 고개를 좌우로 저었다. 이와이즈미는 살벌한 표정을 지으며, 화면 속 초록색 파일을 두드렸다. 지도가 펼쳐졌다. 백화점과 작은 테마파크로 이어지는 전철역이었다. 하나마키가 눈을 반짝였다.
“거짓말. 백화점?”
“아니, 테마파크 아냐?”
마츠카와가 눈썹을 휘어 올리며 받아쳤다. 각자가 제일 좋아하는 장소였다. 오이카와로 말하자면 둘 다 좋아했고, 이와이즈미로 말하자면.
“쓸데없는 소리는 닥쳐라. 모두.”
둘 모두에 관심이 없었다. 요원은 ‘오이카와씨는 둘 다 좋아.’ 라고 외치려던 입을 꾹 틀어막았다. 침묵의 돌덩이가 모든 틈을 구멍 없이 메워 넣었다. 팔뚝에 주었던 힘을 풀지 않으며, 팀장은 간략하게 작전을 설명하기 시작했다.
◆◆◆
“그나저나 ‘이웃집 토비오’는 요새 어때?”
회의가 끝나자마자 마츠카와가 오이카와에게 물었다. 자료를 정리하던 이와이즈미와 포켓몬 게임을 실행하려던 하나마키의 시선이 동시에 집중되었다. 조금 부담스럽다고 느끼면서 오이카와는 고개를 저었다.
“똑같지 뭐. 어쩔 때는 뭔가 있는 것 같기도 하고…. 아닌 것 같기도 하고.”
애인에 대한 문제는 일단 보류해 두었다. 그러나 애인을 빼고서 보아도 수의사는 친구가 한 명도 없는 것 같았다. 물론 겪어 보니 이유를 알 것 같기도 했다. 그리고 또. 문란한 것처럼 보였지만, 그건 아니었다. 이후에 그 바에 발을 뚝 끊었고, 남자도 여자도 데려온 적도 없었다. 외모는 똑똑해 보였지만. 적어도 생활지능은 그렇지 않았다. 운동도 마찬가지였다. 젬병이었다. 오이카와는 사실 그렇게 달리기를 못 하는 남자는 처음이었다. 다리가 아파서 그런가. 그는 좀처럼 머릿속을 빠져 나가지 않고 뱅글뱅글 돌아다니는 수의사의 환영을 탁 잡고 상자 속에 쑤셔 넣었다.
마츠카와가 위로를 건네 듯 어깨를 툭 치고 주물렀다.
“뭐에요? 그 동정어린 시선은.”
“네 뜻대로 안 넘어가는 사람도 있는 거지. 너무 상심하지 마.”
“저기, 난 작업한 게 아니거든?”
“솔직히 그동안 너무 승률이 좋았던 게 이상했어.”
“질투하는 남자는 흉해. 맛층.”
“집착하는 남자가 더 흉하지.”
“오이카와씨는 집착 같은 거 안 하거든요?!”
“에, 에에엣 씨씨티브이….”
하나마키가 기침을 하는 척 어퍼컷을 날렸다. 퍽, 마음이 맞는 소리가 둔탁하게 울린다. 기가 막히다는 표정으로 요원은 자신의 서포터즈를 돌아보았다.
“다들 오이카와씨에게 매정해지기로 결정했어?”
“농담이야. 이번 임무가 끝나면 동물 매니아 수의사 선생에 대해서 본격적으로 파헤쳐 줄게.”
“정말?”
“사실, 카게야마 토비오의 후원자를 찾았어.”
“에에?”
그는 둥글게 눈을 키우는 오이카와에게 믿음직한 미소를 지어 보였다. 쉬운 일은 아니었지만. 그렇다고 해서 못할 만한 난이도는 아니었다. 베일 속에 감춰져 있던 후원자의 이름을 알아내자, 현재 무엇을 하고 있고, 어디에 살고 있는지 아는 것은 식은 죽 먹기보다 쉬웠다. 여전히 둘을 보고 있던 이와이즈미와 하나마키에게도 의미심장한 눈빛을 보내면서 마츠카와는 침착하고 쿨하게 손가락 브이를 그렸다.
“자, 날 찬양할 사람은 지금 하도록.”
“오이카와, 임무 동선을 체크해 보자고.”
“CCTV 보안 문제 말인데.”
그리고 자연스럽게 모두에게 무시당했다.
◆◆◆
소문은 아직 크게 나지 않았지만, 이 도시는 꽤나 부유한 계층들이 사는 곳이었다. 범죄율도 낮았고, 교통도 편리했다. 그런 도시 안에서도 가장 번화가인 곳이었다. 휴일까지 맞이한 터라 어딜 봐도 사람들이 바글바글했다. 콧대를 타고 선글라스를 슬쩍 내리며 오이카와는 주변을 둘러보았다.
“사살과 보호를 놓고 본다면, 당연히 보호 쪽이 어려운 일이지.”
이와이즈미는 그런 말로 작전 브리핑을 시작했다. 맞는 말이었다. 빼앗는 것은 언제나 지키는 것보다 손쉬웠다.
“그래서 이번 작전에서는 정보의 전달자 역시 ‘소비재’에 속해 있어.”
소비재. 그것은 작전에 투입되는 신참들을 부르는 용어였다. 드물게는, 임무를 실패한 요원들이 좌천되어 맡게 되는 역할이기도 했다. 그들은 말 그대로 소비되는 입장이었다. 일회용 젓가락과 그다지 다를 바가 없었다. 작전을 설계할 때, 소비재의 생존은 크게 중요시 여겨지지 않는 편이었다.
‘작전 수행을 최우선으로 하며, 스스로의 힘으로 살아남아라.’ 그것이 소비재가 가지는 슬로건이었다. 그렇게 몇 번의 소비재를 성공적으로 거치고 나면 정식으로 요원이 될 수 있었다. 확률은 희박했다. 오이카와는 남은 커피를 모두 마시고, 빈 컵을 쓰레기통에 던져 넣었다. 괜히 입이 썼다.
“그러니 접촉하자마자 정보부터 받아.”
정보를 넘겨받으면 전달원의 가치는 급속히 하락한다. 여차하면 미끼로 만들어 버릴 셈이다. 보일 듯 말 듯 고개를 끄덕인 요원은 선글라스를 주머니에 넣고, 천천히 백화점의 입구로 들어섰다. 직접적인 접촉을 하기로 정해진 곳은 마트의 입구 127번 라커 앞이었다. 이미 숙지한 동선을 따라 그는 여유 있게 걸음을 옮겼다. 사실 오이카와 토오루는 ‘소비재’를 경험해보지 않고 바로 선발된 엘리트이자, 베테랑이었다. 웬만한 일에는 놀라지도 긴장하지도 않았다. 하지만.
“응?”
이건 좀 놀랍다. 요원은 발을 멈추고 물끄러미 정면을 응시했다. 그의 시선 끝에는 127번 라커가 있었다. 정보전달자만이 사용할 수 있도록 비밀스럽게 세팅된 라커였다. 사전에 전달책에게 전달된 특수한 동전 외에는 모두 뱉어내고, 열쇠는 헛돌게 되어 있었다. 옆에 수많은 다른 라커가 있는데, 고장 나 있는 라커를 고집할 사람이 어디 있을까. 그런데 그런 사람이 있었다.
“?? 왜 이러지….”
동전을 계속 반복해서 넣고 있는 동그란 뒤통수가 익숙하다. 꽤나 오랜 시간을 붙잡고 있었는지, 손가락이 빨갛게 되어 있었다. 요원은 저도 모르게 입을 딱 벌렸다. 놀랍게도 이웃집 토비오였다. 수많은 다른 라커들이 보란 듯이 열려 있는데, 처음 점찍은 그것을 열겠다고 낑낑대는 남자가 세상에 있었다. 그것도 옆집에 살고 있었다. 마음껏 기가 막혀하기 전에,
드르르르.
양복 안쪽 벨트에서 진동이 울리기 시작했다. 듣지 않아도 무슨 내용인지 알 것 같았다. 약 천 오백개가 넘는 라커 중에 기가 막히게 127번을 고른 이레귤러를 즉시 치우라는 내용이겠지. 오이카와는 무의식적으로 시간부터 확인했다.
“젠장.”
이미 정시였다. 잿빛 머리에 젊은 남자. 오늘의 소비재이자 정보 전달책 역시 127번 라커에 도착했다.
◆◆◆
“목표는?”
“287°, 거리는 약 120m. 음? 잠깐만.”
사내는 별안간 작전 시작을 끊고 들어왔다. 한 단 높은 곳에서 서 있던 제복의 남자가 빠르게 손을 펴 들었다. 막 시작되려던 ‘OK’ 사인을 대신해서 ‘STAND BY’가 커다랗게 화면에 띄워졌다. 회전의자를 뒤로 쭉 밀어내 팀장에게 다가온 남자가 미간을 찡그렸다.
“좀 이상합니다. 표적이 누군지 모르겠어요.”
“모르다니?”
“제가 알기에 분명히 이 장소, 이 시간인데.”
남자는 팔걸이 밑에 부착되어 있는 리모컨을 들어, 화면을 확대시켰다. 127번 라커의 앞이었다. 그곳에는 두 남자가 있었다.
검은 머리카락에 푸른 눈의 사내는 라커를 열려고 시도하고 있었다. 그의 발밑에는 고양이용 사료, 간식 같은 것들이 잔뜩 들어 있는 쇼핑백이 놓여 있다. 아마도 그것을 넣고 마트에 가서 다른 장을 볼 생각인 듯 했다. 일반적으로는 그렇게 생각할 수 있었다. 하지만 오늘은 그런 상식적인 상상만으론 안심할 수 없는 날이다. 팀장은 눈까지 찡그려가며 화면을 유심히 살폈다.
“…생김새가 좀 다른데.”
“생김새로 맞추자면 이쪽이 맞는 것 같습니다. 얼굴인식 프로그램도 일치판정을 내렸구요.”
시간에 딱 맞춰 도착한 다른 남자를 가리키며 요원은 신중하게 보고했다. 훤칠한 키에 잿빛 머리카락을 가진 청년은 화면 밖으로도 눈치 챌 수 있을 정도로 당황한 표정을 하고 있었다.
“우연인가?”
“이 시간, 이 장소, 127번 라커. 이 모든 게 일치하는 ‘우연’이 있을 수 있을까요?”
“좀 이상하긴 하군.”
“어쩌면 교란을 위한 작전 변경일 수도 있습니다.”
“음…. 그럴 수도 있겠어. 그렇다면.”
잠시 생각에 빠졌던 팀장은 자신의 컴퓨터 데스크에 있는 키보드 중에 마이크 키를 눌렀다.
“전 요원에게 전달한다. 작전을 변경하겠다.”
그의 눈동자는 화면 속 두 남자를 향해 있었다. 그리고 어딘가 있을지 모르는 상대측 요원들도 떠올렸다. 주먹이 바르르 떨렸다. 중요한 작전이었다. 실패하느니 과하게 하는 편이 좋았다.
“지금부터 각자의 디바이스로 정보책으로 생각되는 두 인물의 사진을 전송될 것이다.”
눈동자의 온도가 급격히 내려가고 있었다.
“이번 작전에서는 두 사람 모두를 목표로 한다.”
어차피, 첫 번째 작전 때에 대로변에서 사람을 저격했었다. 숨긴다고 해서 숨겨질 사안이 더 이상 되지 못한다. 민간인 한두 명이 희생되어 복잡해지는 사정과 임무에 실패하여 복잡해지는 사정을 놓고 보았을 때. 당연히 그의 선택은 전자였다. 둘 중 누군가는 억울하게 다치거나, 심할 경우 죽겠지만 봐줄 여력은 그에게 없었다. 그는 마이크 키를 여전히 누른 채, 침착히 덧붙였다.
“반항할 경우, 사살해도 좋다.”
◆◆◆
“오이카와! 더 이상 접근하지 마.”
이와이즈미는 인 이어를 부숴버릴 듯 누르며 다급하게 말했다. 상황이 좋지 않게 흘러가고 있었다. 작전을 만들어낸 쪽에서는 ‘카게야마 토비오’가 이레귤러임이 확신할 수 있었지만, 장막 저 편의 상대는 누가 진짜 ‘표적’인지 알 수 없을 것이다. 바로 저격해 버렸던 1차 임무 상황을 생각했을 때, 가만히 있을 확률은 거의 없었다. 가장 위험한 것은.
“무슨 일이 있어도 네가 드러나선 안 돼.”
동선을 치밀하게 짜는 것, 소비재를 투입하는 것, 풍선 같은 잔재주나 CCTV를 확보하는 것은 모두 실제 수행자가 누구인지를 감추려고 하는 행동들이었다. 그것이 서포터의 임무였다. 이 바닥은 드러나는 쪽이 질 수밖에 없는 구조였다. 팀장은 이를 으득 소리 나게 갈았다. 하나마키와 마츠카와의 손도 바쁘게 돌아가기 시작했다.
“하지만 지금 돌아가면 정보는 빼앗길 수밖에 없는걸.”
“다시 찾으면 돼. 그렇게 해 왔잖아. 설마 자신 없어?”
그는 익숙하게 오이카와를 도발했다.
“그럴 리가.”
요원은 흥분하지 않고 차분하게 답했다. 마트의 안 쪽, 관찰은 가능하나 말을 걸기엔 먼 거리에서 그는 수의사와 정보 전달자를 자연스럽게 바라보다 가판대로 시선을 돌렸다. 통조림 코너였다.
“조급히 굴지 마. 오이카와. 여기서 난리가 벌어지면 깨끗하게 몸을 빼기 힘들어. 그러니 어쩌면 이건, 저 쪽이 누구인지 알 수 있는 기회야.”
팀장의 말은 틀림이 없었다. 요원 스스로도 그렇게 생각하고 있었다. 하지만. 그는 가슴이 오르내리도록 깊이 숨을 내쉬었다. 벌써 예민한 감각에 이질적인 존재들이 잡히기 시작했다. 오른쪽, 연인인 척 굴고 있는 남녀 한 쌍. 왼쪽 대각선에서는 노신사로 위장한 젊은 남자 한 명, 그리고 숙련된 솜씨로 바코드를 찍고 있는 젊은 계산원 한 명. 모두 총기를 감추기 쉬운 옷차림들이었고 필요 이상 라커 쪽을 보거나, 슬슬 가까이 가고 있었다. 그리고 그들의 표적은 현재.
“맙소사.”
아직도 그 라커를 포기하지 못하고 계속 시도 중이었다. 나한테만 수상했다면 좋았을 텐데, 불행히도 이젠 그렇지 못했다. 일촉즉발인지도 모르고, 작은 철제 문 안을 들여다보고 있는 동그란 머리가 좌로 2번, 우로 3번 굴려졌다. 어쩌면 수상한 옆집 남자는 오늘 죽을지도 모른다. 총을 맞을 때도 태평할 수 있을까. 오이카와는 앞 머리카락을 초조하게 쓸어 뒤로 넘겼다.
“엄호해 줘.”
“뭐?”
“파일은 반드시 확보할게.”
“무슨 소리를 하는 거야, 멍청카와!!”
순식간이 올라간 목소리에 마츠카와와 하나마키가 돌아보았다. 늘 감돌고 있던 웃음기가 모두 빠진 건조하고, 진지한 표정들이었다. 팀장의 목에 핏대가 섰다.
“상대에게 오이카와씨가 들키지 않는 건, 너희에게 맡겨. 약한 소리 하지 말고. 다들 프로잖아요?”
요원은 굴러다니던 카트를 잡아 이것저것 마구 주워 담기 시작하며 일방적 통보를 계속했다. 대여섯 개의 생활용품이 실렸다.
“헛소리 하지 마. 당장 철수해! 오이카와 토오루!!”
“너희는 최고의 서포터야.”
“오이카와!!”
“믿고 있어. 모두.”
그 말을 끝으로 오이카와는 인 이어의 버튼을 껐다. 그리고 막 ‘OFF’버튼을 누르려는 젊은 계산원에게 빠르게 다가가 여유 있게 웃었다. 몇 개 되지 않는 상품을 펼쳐놓자, 마침 지나가던 주임이 눈치를 주었다. 그녀는 다소 신경질적인 손으로 빠르게 물건을 찍었다.
“3450엔입니다.”
“네, 앗. 이런. 잠시만요.”
그는 최대한 느리게 지갑을 찾았다. 그러면서 품 안과 발목에 감춰둔 총기의 감각을 확인했다. 카드를 내밀며 힐끗 바라 본, 수의사는 바닥에 놓여 있던 짐을 들어 올리고 있었다. 무엇을 더 산건지, 봉지 안쪽에는 불투명한 종이봉투가 보였다. 누군가에게는 굉장히 수상해 보일 것 같은 봉투였다.
요원은 잠시 상상을 해 보았다.
사실은 카게야마 토비오가 자신처럼 비밀 요원이어서, 봉투 안에서 총을 꺼내 눈앞에 멀뚱히 서 있는 정보 전달책을 쏴 죽여 버리는 상상이었다. 그런 상상을 하는 와중에. 부스럭거리며 종이봉투를 뒤적이던 수의사가 정말로 무언가를 빼들었다.
“….”
무려 고양이 얼굴 모양의 동전지갑이었다. 오이카와는 기운 빠진 웃음을 흘리며 영수증을 받아들었다. 동전이 문제라고 생각할 바에는, 다른 라커를 찾으란 말이야. 이 요령 없는 남자야. 그러나 물론 표면적으로는 상냥하게 웃으며, 그녀에게 인사를 했다. 이것으로 완벽한 타이밍은 놓쳤을 것이다. 그리고 이제는.
오이카와는 목을 한번 꺾은 뒤에, 손에 들고 있던 짐을 259번 라커에 넣었다. 129번의 건너 건너 칸이었다. 수의사는 여전히 여념이 없어 보였다. 철컥. 동전을 넣고 열쇠를 돌리자 무리 없이 라커의 문이 잠겼다. 살짝 건조한 입술을 한번 축이고, 그는 몸을 돌렸다. 그리고는 그림같이 예쁘장한 미소를 지었다.
“앗, 카게야마씨잖아요?”
총 대신, 고양이 동전지갑을 들고 있는. 아무것도 모르는 것 같은 푸른색 눈동자가 자신을 보았다. 작은 입술이 벌어졌다가 꼭 다물어졌다. 수상한 말을 내뱉기 전, 요원이 먼저 선수를 쳐서 손을 잡았다.
“와, 여기서 다 보네요.”
“오이카와씨? 설마 또,”
“참 신기한 일도 다 있죠."
요원은 손에 힘을 꽉 주었다. 이극. 하는 이상한 소리와 함께 이웃집 남자의 말문이 막혔다.
“매번. 정말 매번 이렇게 되는 걸까요.”
정말로, 왜일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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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랜만입니다. 다른 연재와 소장본 준비로 바빴었답니다. ㅜ0ㅜ! 모두 좋은 하루 되세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