의사와 의사 동기와 조폭이야기 3
의사와 의사 동기와 조폭이야기
알람 맞춰놓은 시계도 아닌데, 정해진 시간이 되자마자 카게야마는 고개를 이리저리 처박으며 졸기 시작했다. 쿠로오는 잔뜩 찡그린 얼굴의 츠키시마가 바깥쪽으로 기우는 머리를 툭 쳐서 자신의 어깨에 기대게 하는 모양을 바라보며 슬쩍 웃었다. 의도대로 예쁘게 어깨를 기대면 참 좋았겠지만, 휘청하던 카게야마는 그대로 미끄러져 고개를 츠키시마의 아랫도리에 처박았다. 감전된 것처럼 어깨와 머리카락이 한꺼번에 들썩 하는 것을 보며 쿠로오는 다시 한 번 웃었다. 반쯤 잠이 든 기색의 카게야마는 손으로 츠키시마의 다리를 여기저기 만지작거리더니 이윽고 제일 편안한 허벅지를 찾아서 머리를 완전히 맡겼다. 츠키시마는 목이 타는 듯, 스스로 술을 찾아 마셨다.
“둘이 무슨 관계야?”
“같은 과 동깁니다.”
“요새 애들은 같은 과 동기끼리 서로 이렇게 지내나?”
“‘이렇게’가 뭔데요?”
“같은 질문에 ‘사귑니다.’라고 해도 상관없어 보이게.”
“...어떻게 보이든 무슨 상관이십니까? 어차피 나갈 사람이.”
“츠키시마 선생 집이 아닌데 왜 자기 일처럼 펄쩍 뛰고 그래. 주인은 가만히 있는데.”
쿠로오는 벽에 등을 기대며 나른하게 웃었다. 술기운이 올라왔는지 시선은 말의 날카로움과는 달리 부드러웠다. 나름 배려인지 입에 물린 담배에 불을 켜지 않고 끝만 씹고 있었다. 츠키시마는 자신의 술잔에 다시 술을 채워 넣었다. 내일의 출근이나 수술을 생각하지 않아도 좋은 밤이 얼마만인지 모른다.
“옛날에, 아니 그렇게 옛날일은 아닌데. 레지던트 2년 차 때니까 3년 전쯤이네요.”
츠키시마가 손에 든 잔을 마실 생각은 하지 않고 돌리면서 말을 꺼냈다.
***
응급 수술이 하나 잡혔다. 레지던트 2년 차는 바쁠 수밖에 없어서 츠키시마는 물론이고, 카게야마 조차도 정신을 잘 못 차리던 때였다. 근무 도중에 뇌출혈이 일어나 쓰러진 50대 중반의 남자 환자였는데, 찍어본 결과 뇌종양이 있었다. 특별한 경우는 아니었다. 다만 위치가 문제였다. 수술이 까다롭기로 이름난 뇌기저부에 위치한 종양이었다. 제거가 쉽지 않아서 포기하는 것이 좋을지도 모른다는 의견이 조심스럽게 제시되었지만 환자의 가족이 강력하게 수술을 요청해 왔다. 분야의 가장 권위자와 레지던트들이 동원되어 결국 수술이 시작되었다.
“그 레지던트 중, 카게야마가 있었습니다.”
“오...역시 대단한 의사선생이었네.”
마른 오징어 다리를 씹으면서 웃는 쿠로오를 잠자코 보면서 츠키시마는 남은 술을 모두 입에 털어넣었다.
“그런데 수술 중에 문제가 생겼습니다.”
사소하다면 사소한 실수였다. 하지만 뇌수술에서 사소한 실수란 없는 것이다. 무수하게 뻗어있는 얇은 혈관 하나가 절개 과정에서 건드려졌다. 아무도 몰랐지만, 전문의는 느꼈고, 카게야마는 금세 알아차렸다. 수술 마스크 위로 놀란 눈동자 두 개가 마주쳤다.
“집도하던 의사는 그대로 덮으려고 했습니다. 어차피 가능성이 낮은 수술이어서 누구도 뭐라고 할 수 없었고, 돌이키기에는 큰 작업이었으니까요. 그런데.”
한낱 2년차에 불과한 레지던트가 그것을 뒤집었다. 이상을 보이는 바이탈 사인을 가리키고, 건드려진 혈관을 정확하게 짚어내었다. 수술실에는 CCTV가 있었다. 전문의는 결국 수술을 덮지 못하고 실패를 무릅쓰고서라도 그대로 진행시켜야 했다. 환자는 살았다. 그리고 더디지만 회복의 길을 걸을 수 있었다.
“해피엔딩이네.”
“그 환자는 제 아버지였습니다. 지금은 건강하십니다. 네, 정말 해피엔딩이죠.”
츠키시마는 쿠로오의 빈 잔에 술을 따랐다. 오오.. 쿠로오는 말 대신에 짧게 감탄한 뒤에 주어진 잔을 모두 비웠다. 잠든 의사선생과 그의 동기는 하나의 완성된 풍경처럼 자연스러워 보인다. 나는 불청객이네. 문득 그런 생각이 들 정도로.
“그래서 뭐 그런 건가.. 평생의 은인 같은 거.”
“카게야마는 선배들에게 개처럼 처맞았습니다.”
위계질서가 무서운 세계에서 있을 수 없는 일이었다. 레지던트가 수술 도중에 자신의 의견을 말하고, 관철시킨 것은. 소문은 빠르게 퍼졌고, 자신의 동기는 고립되었다. 원래도 원망을 많이 듣고 있던 동기였다. 재능은 따라잡을 수도 없이 출중하고, 사회생활 센스는 없었으며, 서번트 증후군이라는 말이 꼬리표처럼 달려 그의 노력을 깎아내린다. 개처럼 얻어맞을 이유는 충분했다. 누구나 그에게 흠집을 내고 싶어 했다. 좋은 핑계가 있었고, 그들은 좋은 기회로 그것을 이용하여 메스 대신 흉기를 들었다. 입 안이 텁텁해져서 쿠로오는 기어코 담배에 불을 붙였다. 츠키시마는 아무 말도 하지 않았다.
“의사선생의 세계도 우리랑 다를 바가 없구만. 배운 사람들은 좀 더 고상할 줄 알았더니.”
“인간이 사는 곳이 크게 다를 게 있나요.”
어딘가 감상적인 말이었다. 츠키시마는 망설이는 눈빛으로 한참이나 술잔 언저리를 더듬었다. 더 하고 싶은 말이 있나? 라고 쿠로오가 묻자 가장자리를 더듬던 눈이 가차 없이 흔들렸다.
“사실 수술실에 들어가기 전에 카게야마가 저한테 왔었어요.”
독선적이기 그지없는 눈빛이 그때만큼은 한풀 꺾여 있었다.
“‘꼭 살려줄게.’라고 말했습니다.”
위로 같은 거 하지도 못하는 왕님이 그렇게 말했다. 츠키시마는 자신이 내뱉은 말은 강박적일만큼 지키는 카게야마를 알고 있었다. 수술이 잡힌 후에, 그동안 찍은 사진과 관련 의료 사례를 밤을 세워가며 뒤져 읽고, 서툰 영어로 외국에 문의를 보내어 수술 동영상을 받고, 몇 번이나 자신이 집도의가 되어 모의로 수술을 했다는 것도 알고 있었다. 아주 작은 수술에도 최선을 다하는 모습을 우스워 하던 자신이지만, 카게야마에게 그건 사실 일상적인 일이었고. ‘정말 최선을 다하는 모습’은 그것이었다. 그 모든 게 카게야마에게 결국은 독이 되어서 매를 버는 일이 되었지만, 한 번도 츠키시마를 원망한 적도 없었다. 츠키시마는 잔뜩 가라앉은 눈으로 불청객을 응시했다.
"그게 제가 동기한테 빠지게 된 순간입니다."
***
“참 웃기는 일입니다. 사실 별로 좋아하지 않았던 동기인데.”
“안 좋아해도 이상한 일이야.”
쿠로오가 기분 좋게 웃었다. 카게야마가 이마를 여러 번 부비더니 희미하게 눈을 떴다. 츠키시마에겐 보이지 않고, 쿠로오만 볼 수 있는 변화였다.
“그래서 츠키시마선생은 의사선생이 좋아?”
눈을 마주하며 짓궂게 묻는 질문에, 잠에 취해있던 눈동자가 화하게 살아난다. 술기운인지 날카로움이 줄어든 츠키시마의 손이 카게야마의 머리카락을 한 올씩 헤집었다. 왠지 모르게 긴장해 있는 암청색 눈동자가 숨을 죽인 채, 답을 기다리고 있었다.
“그게.”
라는 말을 끝으로 츠키시마의 고개가 확 앞으로 꺾였다. 와장창 쓰러지는 술병은 덤이었다. 쿠로오는 어이가 없을 정도로 완벽한 타이밍에 뻗어버린 츠키시마와 잔뜩 긴장해 있던 카게야마가 어딘가 풀이 죽어서 천천히 몸을 일으켜 앉는 것을 바라보았다. 귀여워 죽을 것 같은 청춘이었다. 카게야마와 쿠로오의 눈이 마주쳤다.
“양치할까?”
아직은 궁금해하고 있는 답을 말해주고 싶지 않은 눈동자가 친절하다. 카게야마는 고개를 끄덕이며, 퓨즈가 나가버린 츠키시마의 얼굴에서 안경을 벗겨냈다. 잘 접어서 탁자 위로 올려두고는 어쩔 줄 모르고 안절부절하는 이유도 왠지 알 것 같았다. 쿠로오는 웃으면서 물었다.
“안경군은 양치 안 해도 괜찮을까?”
“...해야 됩니다.”
그러나 차마 깨우지 못하고 전전긍긍하는 동그란 뒤통수를 보던 쿠로오가 검지손가락을 엄지에 걸고 한껏 장전했다. 목표는 반듯하게 드러난 츠키시마의 이마였다. 이건 어디까지나 공평하고 평화로운 의사선생의 세계를 위해서. 라고 생각하면서 검지 손가락을 떠나보냈다.
따악ㅡ
이마를 부여잡고 부들부들 떠는 츠키시마를 잡고 카게야마는 진심으로 기뻐했다. 솔이 조금 낡아 보이는 파란색 칫솔이 츠키시마의 것이었다. 그것을 보며 쿠로오는 시간이 묻어난다는 생각을 했다. 과정이 다소 복잡하긴 했지만 결국은 세 명 모두 사이좋게 양치를 하고 나서야 밤이 지나갈 수 있었다. 세 번째 밤이었다. 이제 자신이 공언한 시간은 이틀이 남았다. 쿠로오는 거짓말처럼 곤하게 잠들어 있는 카게야마의 얼굴을 보면서 싱긋 웃었다. 새삼 반할 이유가 많은 사람이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