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오이카게]

 

승자독식

 勝者獨食

 

 

 

0.

 

 “가자, 쿠니미.”

 

 어깨를 잡으며 킨다이치가 하는 말에, 쿠니미는 고개를 끄덕였다. 팀은 패배했고 제왕은 쫓겨났다. 적을 뿌리치기 위한 빠른 토스가 가져온 것은 팀원들의 외면이었다. 스스로에 대해서 오만했던 것은 아니지만, 또한 오만했던 천재의 과거는 쐐기처럼 박혀 코트를 박살내었다. 만지는 자를 다치게 할 것이 분명한 간극을 메울 수 있는 방법은 더이상 없었다.

 

 감독은 세터를 교체했다. 그리고 팀은 패배했다.

 

 “그래.”

 

 가지고 있던 물을 두어 번 꿀꺽 마시고, 뚜껑을 닫으며 쿠니미가 일어섰다. 유니폼은 축축했고 온 몸에 땀 냄새가 진하게 났다. 나도 열심히 했다는 반증이라서 자랑스럽기도 하고, 아무렇지 않기도 했다. 소금기가 짭짤하게 느껴지는 입술과 이마를 수건으로 닦아내며 그는 자신의 가방을 들었다.

 

 “카게야마는?”

 쿠니미는 아무렇지 않게 물었다. 킨다이치는 눈에 띄게 고개를 훽 돌렸다. 얼굴이 붉어지고 있었다.

 알게 뭐야, 그런 녀석 따위.”

 이상할 정도로 과한 흥분 속에서 죄책감이 옅게 비친다.

 

 “그 자식도 이제 정신을 차리겠지.”

 “애초에 그런 토스 말도 안 되고.”

 “윽박지르기나 하고 말이야. 누군 놀고 있는 것처럼.”

 

 줄줄줄 이어져나가는 말도 다를 게 없었다. 쿠니미는 어깨에 걸린 스포츠백을 열어 놓은 채, 소지품 중 빠진 게 없는 지 꼼꼼하게 체크하고 있었다. 흘려들은 것은 아니었다. 그렇지만.

 

 “그래서 카게야마는 어디 갔는데?”

 

 대충 다섯 마디 정도를 듣고 나서 그는 다시 한 번 물었다. 킨다이치의 입술이 한일자로 다물어졌다. 사실 이미 벌어진 일이었다. 가장 잔인한 형상으로 깨어진 컵에 관심은 없었다. 다만 궁금했다.

 

 “몰라. 하지만 뻔하지.”

 

 왜 이렇게까지 되어 버렸는지가 궁금했다.

 

 “오이카와 선배한테 가지 않았겠냐?”

 

 인과를 구성하는 비하인드 스토리는 반드시 있는 법이었다.

 

1.

 

 “자자, 정렬, 정렬.”

 

 때는 여름이었다. 인터하이가 얼마 남지 않은데서 기인한 열기는 고스란히 연습으로 치환되어 체육관을 달구고 있었다. 이제 막 입부한 1학년은 그들 나름대로의 패기를, 2학년은 이제 곧 3학년의 자리를 대신해야 한다는 부담감을. 3학년은 마지막 기회라는 절박함을 서로 겨루고 있는 시기였다. 어느 때보다 강한 유대와 함께 끝이 따가운 긴장이 포효하고 있었다. 짙은 파랑의 유니폼을 입은 주장은 그 가운데로 확실하게 등장하며, 주의를 집중시키는 박수를 쳤다.

 

 “오늘 부 활동은 여기서 끝이야. 개별 연습을 할 부원들은 뒷정리 잊지 말고.”

 “감사합니다!!!”

 “고생하셨습니다!!!”

 

 철저한 위계질서가 있는 운동부였다. 정해진 시간이 되어 훈련이 끝난다는 간단한 지시도 주장의 입에서 떨어져야 의미가 있었다. 마무리 스트레칭을 하던 부원들은 큰 소리로 인사를 복창하고 뒷정리를 시작했다. 오이카와도 스포츠 타월로 이마의 땀을 닦았다. 더운 숨이 같이 묻어 나왔다. 오늘도 끝이다.

 

 “오이카와 선배!!!”

 

 아닌가. 익숙한 목소리에 귀가 바짝 섰다.

 고작해야 13. 어리고 쪼그만 꼬맹이는 득달같은 기세로 2년 연상의 중학생 앞으로 걸어왔다. 하아. 쿠니미는 한숨을 쉬었다. 주장은 눈에 힘을 풀고 눈썹을 치켜 올렸다. 더할 나위 없이 비꼬는 표정이 된 얼굴로 돌아선 그의 앞에는 아니나 다를까. 지 얼굴만 한 공을 들고 있는 동그란 얼굴이 천진하며 무지한 표정으로 서 있었다.

 

 “오늘도 헛수고네, 토비오쨩~ ~무리 끈질기게 물어봐도 오이카와상은 어차피 안 가르쳐 줄 건데~.”

 

 그는 후배의 손에 들린 공을 재빨리 빼앗아 들고 손가락 위에 올렸다. 솜씨 좋게 회전하는 손목에 공이 뱅글뱅글 위태롭게 돌았다. 그러나 정작 빼앗긴 상대는 미간을 좁히고 고개를 기울였다.

 

 “? 뭘 안 가르쳐 주시는데요?”

 “뻔하잖아. 서브 토스 요령 물어보는 거잖아요?”

 “?? 저 그 거 아닌데요.”

 “.”

 

 , 통통. 통통, 데구르르르.

 손에서 떨어진 배구공이 모두의 생각 위로 한 번씩 튀어 올랐다. 활동은 끝났지만, 정리가 끝나지 않아 부원들이 거의 남아 있는 시간이었다. 볼 바스켓에 공을 주워 넣던 킨다이치도, 네트를 품대로 접어 넣던 쿠니미도 사이좋게 시선을 둘에게 돌렸다.

 

 그렇게 수많은 관심 속에서, 주인공인 카게야마 토비오.

 

 “오이카와 선배!”

 매번 악당 선배의 역할을 하던 오이카와 토오루에게.

 좋아합니다!!!”

 갑작스러운 히로인 역할을 부여했다.

 

 “저랑 사귀어 주세요!”

 

 불쌍한 킨다이치. 급작스럽게 자신의 동기에게 서브 남주인공 역할을 안겨주며 쿠니미 아키라는 입술 끄트머리를 올렸다. 배구 밖에 모르는 줄 알았는데 생각보다 훨씬 무대포인 구석이 있었다.

 

2.

 

 부활동이 시작되기 한 시간 전이었다. 쿠니미는 손목시계를 한번 확인하고 체육관을 다시 보았다. 이미 네트도 준비되어 있었고, 배구 볼통도 가득가득 채워져 가지런히 놓여 있었다. 누가 했는지는 뻔했다. 쿠니미는 스트레칭 중인 카게야마 곁에 스포츠 백을 소리 나게 내려놓았다. 어제 대히트를 친 스캔들의 주인공이 거꾸로 된 시선을 던져왔다. 터무니없이 천진한 눈이었다.

 

 “오이카와 선배랑은 풀었어?”

 쿠니미는 담백하게 직구를 던졌다.

 “므어?”

 허리가 잔뜩 늘어난 채인 동갑내기 부원은 멍청한 반문을 했다. 멍청한 목소리였다. 그럴 줄 알았다. 쿠니미는 배구화를 신고, 끈을 꽈악 당겼다.

 

 “어제 일.”

 “어제? . 그거.”

 

 이번에는 옆구리를 확 늘려 발끝을 잡으며 동기는 대수롭지 않은, 그러나 애매모호한 대답을 내어 놓았다. 운동화 매듭을 두 번 단단히 묶은 쿠니미는 일어서서, 무릎 끝으로 카게야마의 허리를 꾹 눌렀다.

 

 “.....”

 

 고양이 허리처럼 계속 늘어난 옆구리가 유니폼 밑으로 비쳐보였다. 쿠니미는 눈을 깜박였다. 여름이라 그런지 모기에 물어 뜯겨 있었다. 고개까지 완전 수그린 카게야마의 손끝이 발가락도 넘어 바닥에 닿아 있었다. 유연했다. 얼굴은 왕에게 진상될 소나무처럼 딱딱한데 말이다.

 

 “못 풀었어?”

 

 당장이라도 한 대 때릴 기세처럼 붉어졌다가 곧 냉정해지던 선배의 얼굴을 상기하며, 쿠니미가 다시 물었다. 우으응. 이상한 소리를 한번 낸 카게야마의 몸이 고무줄처럼 탄력 있게 제자리로 돌아왔다. 약간 상기된 얼굴이 스트레칭을 도와주던 동기를 올려 보았다.

 

 “오해? 그런 거 없었는데.”

 “그럼 혼 안 났어?”

 “혼났어. 그런 건, 남들 있는데서 하는 거 아니라고.”

 “흐응.”

 

 오이카와 선배다운 대답이었다. 쿠니미는 자리에 주저앉았다. 자세를 잡자 카게야마가 어깨에 손을 올려왔다. , 작은 무게가 실렸다. 쿠니미는 탄력 받은 고양이처럼 날렵하게 앞으로 상체를 내리 눌렀다. 생각보다 시시했다.

 

 “, 그리고 거절당했어.”

 “당연하잖아.”

 

 좀 더 극적인 전개도 재밌을 것 같았는데.

 

 당연해?”

 “당연하지.”

 “난 받아주실 때까지 할 거야. 서브토스도 배울거고.”

 

 아, 그렇게까지 극적일 필요는.

 

3.

 

  “오이카와상!! 서브 토스 요령 가르쳐 주세요!”

  “싫거든요! 얄미운 토비오쨩에게는 절대로, 안 가르쳐 줄 건데?

  “오이카와!! 1학년 괴롭히지 말라고 했잖아!!”

   

 여느 때와 다름없는 흐름이었다어떤 부끄럼도 보이지 않는 얼굴로 카게야마는 다시 오이카와의 뒤를 쫓았다. 적어도 토비오쨩은 뻔뻔하다.’는 오이카와의 평가에 쿠니미는 동의를 표했다.

 

 “혹시 어제 일, 헛것이었냐?”

 “아니.”

 

 공을 정리하던 킨다이치가 긴가민가한 표정으로 물어오자, 쿠니미는 간단하게 답했다. 이미 기울어져 있던 고개가 한층 경사를 높였다. , 파앙, . 쿠니미는 손에 들어 있던 공을 땅으로 내리치고 가볍게 몇 번 미팅시켰다. 조금 친해진 동기는 옆에서 떠나지 않고 서성거렸다. . 그는 마침 돌아오는 공을 두 손으로 잡았다.

 

 “신경 쓰이기라도 해?”

 “? 아니? 아니? 내가 왜?”

 “난 좀 쓰이네.”

 “진짜?”

 “안 쓰이는 쪽이 이상한 거 아닌가?”

 

 좋다고 했다. 눈에 띄게 실력이 출중한 동갑내기 사내아이가 같은 배구팀 주장이 좋다고 고백하고는 차였고, 그럼에도 불구하고 오늘도 뒤를 쫓아다니는 상황이었다. 신경이 쓰이지 않는 쪽이 부자연스럽다. 무기력한 눈동자를 잠깐 동그란 뒤통수에 두었던 쿠니미는 곧 돌아섰다. 물론 개입할 생각은 없었다. 킨다이치가 어깨를 툭 쳤다. 쿠니미.

 

 “설마 진짜 사귀진 않겠지?”

 

 3명에서 2명이 된, 유망한 신입 둘은 서로 눈을 마주했다. 눈동자에는 같은 결론이 들어 있었다. 그럴 리 없다. 그런데. 

 

4.

 

 사귄대.

 

5.

 

 “정말?”

 어금니에 카라멜이 쫘악 달라붙었다. 혀로 살살 문질러 녹이면서, 쿠니미는 기가 막힌 소문을 되새겼다.

 

6.

 

 어쩔 수 없었다고 생각한다.

 

7.

 

 졸졸졸졸. 주어 뒤에 동사가 오는 것처럼 당연하게 카게야마는 오이카와의 뒤를 쫓았다. 그러니까 일종의 문법이자 공식이었다. 오이카와 뒤의 카게야마, 오이카와 옆의 카게야마, 때론 오이카와 앞의 카게야마 토비오. 오이카와의 팬클럽을 헤치고 들어가는 카게야마 토비오. 13. 이제 막 초등학교를 졸업한 배구부 1학년.

 

 “토오루쨩, 오늘 저녁에 같이 영화 보러 갈래?”

 “으응? ?”

 “그건 안 됩니다.”

 “꺄앗!”

 

 가끔은 좀 웃겼고,

 

 “오이카와 선배는 저와 사귀고 있어서 안 됩니다.”

 

 가끔은 좀 위태로워 보였다.

 

 “토비오쨩,”

 

 다른 사람 눈을 의식하여 후배의 팔을 잡고 종종종 사라지는 쪽은 언제나 오이카와 쪽이었다. 그는 뒤돌아서 마음이 상한 여학생들에게 입모양으로 미안이라고 말하고 있었다. 2년 치보다 더 컸던 체격 차에 그 일은 언제나 수월했다. 마치 그걸 겨냥한 듯 보이기도 했다. 두 사람이 사라진 풍경 속, 남은 사람들은 그들에 대해 또 소문을 만들어 내었다. 마침 그 자리에 있던 쿠니미는 그저 소금 캬라멜을 씹었다.

 

 “쟤 도대체 왜 저래.”

 “뭐가?”

 

 또 우연히 옆에 있던, 킨다이치는 질색하는 얼굴을 하고 있었다. 그는 소름이 오소소 돋은 팔을 슥슥 쓸어내렸다.

 

 “자랑할 일이야? 적당히 해야지.”

 “서브 가르쳐 달랄 때도 저랬잖아.”

 “그거랑 이거랑 같아?”

 “다를 게 있어?”

 

 쿠니미는 간단하게 답했다. 카게야마 토비오의 세계는 원래 단순하고 무지했다. 무식하게 보일 정도로. 타인의 이해도 바라지 않았다. 왕에게 그런 걸 요구하면 목이 날아가지. 그는 코웃음을 쳤다.

 

 “카게야마는 그런 거 구분 못 할걸.”

 

 무릇 어떤 왕이든지 공평하게 가지고 있는 특성으로, 그 애는 배구를 독식하고 싶어 했다. 승리에 대한 탐욕, 뒷받침해 주는 재능, 아직 덜 자란 몸, 성장은 시작도 못한 사회성, 덜 떨어진 표현력. 하나하나 열거하다 보면 그게 카게야마 토비오였다.

 

 “난 쟤가 왜 저러는지 알겠어.”

 그러니까 결국 같은 문제였다. 독식하고 싶은 거다. 오이카와 토오루를. 그가 생각하는 가장 완벽한 배구를. 쿠니미는 카라멜 껍질을 주머니에 구겨 넣었다.

 

 “이해하는 건 아니지만.”

 “민폐잖아. 오이카와 선배에겐.”

 “그러게.”

 

 도대체 왜 장단을 맞춰주는 거지. 쿠니미는 가끔 동기가 버거웠다. 자신에게도 그럴 진데, 선배는 어떨까 상상해본 적이 있었다. 그렇게 모든 것을 가진 후배가 전력으로 뒤를 쫓는다. 그것도 애정까지 요구하면서. 끔찍할까. 패배감을 느낄까. 아니면, 그 역시 자신을 독보적이라고 느껴서 아무렇지 않을까.

그는 오이카와 뒤를 쫓아 멀어지는 카게야마를 보았다. 주장의 뒷모습을 쫓았다. 사실 그가 이해하지 못하는 것은 주장 쪽이었다.

 

8.

 

 “토비오쨩을 왜 받아 주냐고?”

 

 오이카와 선배는 특유의 장난스러운 표정을 지으며 어깨를 들썩였다. 쿠니미는 잠자코 기다렸다. 숙제를 하지 않아 담임교사에게 잡혀 있는 카게야마는 아직 오지 못한 시간이었다. 둘만 있는 부실에서 선배는 개인 라커의 문을 닫았다.

 

 “아직 어린 아이잖아. 어쩔 수 없지.”

 “저도 동갑이에요.”

 “나이가 같다고 해서, 다 똑같이 대하긴 어렵지.”

 

 그야말로 나이답지 않은 이야기를 꺼내면서 오이카와는 가방에서 유니폼을 꺼내 입었다. 성장기의 2년이란 차이가 크게 지는 법이라 쿠니미와는 달리 근육이 단단히 완성되어 있었다. 그렇지만 카게야마와 달리 쿠니미는 그런 것을 질투하거나 동경하지 않았다. 어차피 날 격차에 대해서 흥분하고 노력으로 이겨보려고 하는 건 카게야마 토비오 정도니까.

 

 “글쎄. 사귄다고 해도 뭘 하고 있는 것도 아니고. 토비오쨩. 아마 소꿉장난 같은 생각을 하는 거 아닐까. 넌 엄마 역할 해, 나는 아빠 역할 할 거니까. 뭐 그런 거 있잖아요?”

 

 글쎄요.

 

 “어차피 나 곧 졸업이고, 계속 뒤에 달고 다닐 수는 없잖아. 졸라지는 건 서브토스요령만으로도 벅차거든. 그나저나.”

 

 그는 침착한 미소를 지으며 쿠니미의 어깨에 손을 올렸다.

 

 “쿠니미쨩이 이런 걸 물어오다니 의외인데.”

 “소문을 듣는 거 보다야 이편이 정확할 것 같아서요.”

 “. 소문 꽤 무성한가 보네. 그래서, 보기에 어때?”

 “소문이요?”

 “아니, 배구부원으로서의 토비오쨩.”

 

 고쳐보니 어느새 주장의 얼굴이었다. 역시 상대하기 녹록한 사람이 아니었다. 쿠니미는 일학년이 되어 발끝으로 시선을 모았다. 질문의 답은 쉬웠지만 내밀기가 쉬운 것은 아니었다. 카게야마 토비오는 별로 좋은 평을 받지 못 했다. 처음에는 선망과 질투가 섞여 있던 것이, 지금은 혐오가 좀 섞였다. 그러니 최초의 감정들은 이제부터 더 탁하고 어둡게 변색을 시작될 것이다. 쿠니미는 입을 꾹 다물었다. 오이카와는 그 대답 없는 얼굴에 등을 돌리고 저지를 걸쳤다.

 

 “가엾고 단순한 토비오.”

 등 뒤에 1번이 빛나고 있었다.

 “조금 걱정이 되네.”

 

 존경할만한 주장이고 선배였다. 그런데. 연인에게는 어떨까. 라이벌에게는?

 

 

9.

 

 시라토리자와에게 패배했고, 오이카와 선배는 최우수 세터상을 수상했다. 운 것은 딱 그 날뿐이었고, 선배도 후배도 모두 다시 연습에 매진했다. 어차피 다들 배구는 계속 할 거니까. 기회는 끝이 아니지. 목도리 위로 입술을 끄집어내며, 쿠니미 하얀 숨을 흘려보냈다. 겨울이었다.

 

 “우아, 우아아, 우아아아.”

 

 두고 온 게 있다며, 부실로 돌아갔던 킨다이치가 헐레벌떡 뛰어왔다. 쿠니미는 그의 긴 다리가 이상한 방향으로 꼬이고, 마침내 서로에게 튀어나온 돌이 되어 넘어지는 것을 보았다. 긴 몸은 넘어지는 것 이상의 속도로 일어섰다. 얼굴이 시뻘개져 있었다.

 

 “우허어어.”

 

 손가락은 제멋대로 이상한 방향을 가리켰다. 커다란 손이 머리 양옆을 잡았다가, 체육관을 향했다가, 입을 막았다가. 아주 바빴다. 쿠니미는 그저 고개를 끄덕였다.

 

 “두고 온 거, 교복 마이지?”

 “, 우어어, , 아니야, , 집에 있어.”

 “같이 등교했었잖아. 너 입고 있었거든.”

 

 쿠니미는 무음의 난동을 부리는 중인 킨다이치 옆을 쿨하게 지나쳤다. 그런데 팔이 잡혔다.

 

 “가지 마!!”

 결국 직접적인 요구 사항이 입에서 흘러 나왔다.

 “?”

 가지 말라면서도 차마 따라오진 못하는 얼굴이 벌겋게 익어 있었다. 한겨울인데 말이다. 쿠니미는 주머니에서 소금 카라멜을 꺼내 킨다이치에게 던졌다.

 

 “그거나 먹고 있어.”

 

 저벅저벅. 뽀작뽀작. 발밑에서 눈이 짓눌리며 소리를 내고 있었다. 어제 내린 눈이었는데, 날이 추워서인지 녹지 않았다. , 오이카와 선배와 카게야마는 아직 사귀고 있었다.

 

10.

 

 부실 문은 열려 있었다. 그러나 쿠니미는 들어가지 않았다. 들어갈 필요까지는 없었다. 킨다이치를 쫓아낸 그것이 생각보다 시끄러웠기 때문이었다.

 

 “, 으읏.”

 

 그는 머리카락을 한번 뒤로 쓸어 넘겼다. 머리 스타일 때문에 손가락 사이를 빠져나온 것이 다시 시야를 가리는 것은 순식간이었다. 부실의 철제 데스크가 철컹거리는 소리가 났다. 어쩌면 개인 라커일 수도 있었다. 소리는 어설펐다. 그러나 제법 요란한 움직임에 문틈이 조금 더 밀렸다. 그래서 그저 아주 약간. 눈동자만 돌리면 되었다. 초점만 잘 맞춰주면 볼 수 있었다.

 

 바닥을 나뒹구는 최우수 세터상패와,

 금속 책상에 올라앉은 길고 늘씬한 다리 두 개와,

 그 다리 사이에 있는.

 

 “.”

 

 작고 가느다란 팔이 자신보다 한 품 이상 큰 상대를 가두려고 애쓰고 있었다. 그것이 버거워 바둥거리면서도 포기하지는 않는 행동들에는 집념이 고스란히 묻어 있었다. 탐욕스러워. 배구와 애정에 대해서. 고작 12살이면서도 대단히 탐욕스러웠다.

 

 “오이, 카와 선배.”

 “토비오쨩은 왜 자꾸 날 부를까. 아직도 부족해?”

 “.”

 

 쿠니미는 조용히 부실의 문을 닫았다. 손잡이를 꽉 잡아 소리가 나지 않게, 문을 다물린 후에 조심스럽게 놓았다. 그것만으로도 안과 밖이 조금은 분리되는 기분이었다.

 

 “좋아. , 해요.”

 

 그럼에도 불구하고 어린 탐욕은 넘실거리며 문과 벽, 바닥의 틈을 비집고 흘러 나왔다. 저런 애정을 받는 게 좋을까. 저런 애정을 주는 게 좋을까. 배구도 그렇지만. 사랑도 참 귀찮게 하는 동기였다 좋아해요. 좋아해요, 오이카와 선배. 좋아합니다. 끊기지 않은 말이 새록새록 새어 나왔다. 손을 내밀면 잡힐 것 같은 그 직선적인 애정에도 상대는 답을 주는 법이 없었다.

 

 어쨌든 선배의 말처럼 소꿉놀이는 아니었다. 별다른 것을 안 하는 것도 아니었다. 어쩌면.

 오이카와 선배는 카게야마를 얕본 것인지도 몰랐다.

 

11.

 

 “적어도 부실에서 그러는 거 아니지!”

 “?”

 “거긴 공동장소잖아!”

 “다 집에 갔었는데. 그 후에도 공동장소냐?”

 “, 누가 올 수 있잖아!!!”

 “누가 왔었는데?”

 “, 내가 왔!!!”

 “봤어?”

 “중요한 건 그게 아니잖아!!”

 

 ! 밀쳐진 몸이 사물함에 부딪쳤다. 순간 쿠니미는, 그 앞에서 키스하던 두 사람이 떠올랐다. 그리고 그것은 킨다이치도 마찬가지였는지, 본인이 밀쳐놓고 아무 말도 하지 못하고 있었다. 넘어지지 않게 라커의 손잡이를 뒤로 잡은 채로, 카게야마는 자신보다 키가 훨씬 큰 동기를 노려보았다. 매번 그쯤이면 말을 접던 킨다이치였지만 이번만큼은 지지 않았다.

 

 “, 배구부에 왔으면 배구만 하란 말이야!”

 “너 지금 배구라고 했냐?”

 

 얼음장보다 차가운 대답이었다. 몸을 제대로 세운 카게야마는 바닥에 떨어져 있던 무릎보호대를 주워들었다. 그리고 거친 손놀림으로 먼지를 털어냈다.

 

 “, 그래!!”

 셋 중에 가장 작은 애한테 잠시라도 눌렸던 것에 대한 반발심인지, 킨다이치가 더 큰 소리로 외쳤다.

 요새 네 토스 치기가 얼마나 힘들어졌는지 알아?”

 “그게 내 탓이야?”

 “?”

 

 안 그래도 새파란 눈동자에 날이 섰다. 동그랗게 느껴지던 눈매가 날카로워 지고 있었다. 그래. 키가 작아 눈에 띄지 않았지만, 조금씩 하고 있었을 신체적 성장은 그렇게 가장 불편한 상황에서 모습을 드러냈다. 카게야마는 턱을 치켜들었다. 그것만으로도 상대를 내려다보는 듯 했는데.

 

 “네가 느린 게 아니라?”

 가시 왕관이 조금씩 동그란 머리를 감싸며 자라나고 있었다.

 

12.

 

 “좀 더 빨리 뛰란 말이야!!”

 더 빨리!”

 빨리!!!!!”

 

13.

 

 가끔은 생각했다. 누구라고 해도, ‘오이카와 토오루의 뒤를 잇는 세터라면 부족했을지도 모른다고. 하지만 카게야마 토비오는 그런 정도가 아니었다. 팀을 비정상으로 만들고 있었다.

 

 ….

 

 가끔은 생각했다. 문제는 카게야마 토비오만은 아니었을 거라고. 여러 가지 다른 이유가 있었을 거라고. 하지만 찬찬히 돌이킬 여유가 우리는 없었다. 가장 좋은 핑계가 앞에 있었다. 흠 잡을 게 그거 밖에 없었을지도 모른다.

 어쨌든 둘은 나쁜 방식으로 계속 비교되고 있었다. 2년 차이 연인들은 졸업 후에도 라이벌이었다. 입방아에 내리 찧어지는.

 

14.


 “, 끝났습니다.”

 

 조그맣지 않은 목소리가 찬물처럼 주변을 고요하게 만들었다. 눈치가 없는 세터는 곧 가겠습니다.’하는 말로 짧은 통화를 끝냈다. 그리고 자신에게 꽂혀 있는 시선들을 털어내지도 않고, 부실을 나갔다. 소리 나게 닫힌 문이 시작점이었다. .

 

 “아직도 오이카와 선배냐.”

 “저 새끼는 오이카와 선배 밖에 없지.”

 

 점점 더 불쌍해지는 오이카와 선배. 쿠니미는 입 속에 소금 카라멜을 털어 넣고 우물거렸다. 달콤쌉사름한 맛이 동그란 입 안에 퍼졌다.

 

 “헤어지자고 해도 계속 찾아왔다던데.”

 “진짜? 누가 그래?”

 “누구더라. 모르겠네. 어쨌든 나 오이카와 선배 집 앞에 서 있는 거 봤어. 편의점 가는 길이었거든. 한 밤중에.”

 “, 코트에서만 자존심 부리나 봐.”

 “고백도 계속 했었잖아.”

 

 쿠니미는 입을 우물거리다가 내리 걸리던 것을 손바닥 위에 뱉어냈다. 미처 다 벗겨내지 못한 은박지 조각 두 세 개가 눅눅히 젖어 있었다. 무릇 훌륭한 왕일지라도 사생활은 흠이 되는 법인데, 불만이 극에 달한 제왕에게 스캔들이란 얼마나 까기 좋은 소재인가. 상대가 오이카와 토오루만 아니었으면 이 정도로 끝나지 않았겠지. 아니, 어쩌면.

 

 “오이카와 선배도 진짜 피곤하시겠다. 졸업 후에도 뭔.”

 “아오바죠사이에서 고백도 많이 받으셨다고 했는데.”

 

 상대 때문인가.

 

15.

 

 정신을 차려보니, 혼자 남아 있었다. 킨다이치는 감독님의 호출에 등떠밀려 나간 모양이었다. 쿠니미는 천천히 경기장 문을 빠져나갔다.

 

 “얏호, 쿠니미쨩 아냐? 오랜만이야.”

 “오이카와 선배?”

 “키가 꽤 컸네? 오이카와상의 초섬세함이 아니면 못 알아볼 뻔 했어~?”

 

 여전히 조금 시끄럽고 밝아 보였다. 그리고 아오바죠사이의 운동복이 잘 어울리는 체격이 되어 있었다. 쿠니미는 손가락으로 걸고 있던 수건이 툭 떨어지자 얼른 허리를 굽혀 주워 올렸다.

 

 “여긴 어쩐 일이세요?”

 “후배들의 경기인데 보러는 와야지. , 늦어서 결과만 들었지만.”

 “카게야마는요?”

 

 그는 킨다이치에게 물었던 질문을 똑같이 돌려 보았다. 경기 내용에 대해서 더 물어보려던 선배의 얼굴이 의아함에 펼쳐졌다가, 곧 원래대로 돌아왔다.

 

 “아아, 토비오쨩이라면 여기서 보기로 했는데 어쩐지 없네. 전화도 안 받고.”

 

 오이카와는 곤란하다는 듯 웃었다. 부드러운 미소였다.

 

 “경기 중에 무슨 일이라도 있었어?”

 

 당연히 있었다. 그 애는 열심히 했는데 거부당했다. 혼자서 싸우고, 혼자서 저버렸다. 배신을 당했다. 당신이 아군의 박수갈채를 받으면서 최우수 세터상을 받은 그 대회에서. 패배하고 배신당하고. 망신도 당하고. 뭐 그랬다.

 

 “최악이었어요.”

 “으응?”

 “당연한 결과에요.”

 “?”

 “걔는 3년 내내 당신이랑 코트에 섰거든요. 우리가 아니라.”

 

 아시잖아요. 당신만 봤어요. 쿠니미는 차근차근 담아 두었던 말을 내뱉었다. 키타이치 배구부 전체를 대표해서 그렇게 말했다. 우리의 세터가 당신 뒤만 쫓느라고 우리는 보지 않았다고. 거절하지 그러셨어요. 받아주지 않으셨으면 되는데. 그럼 배구로만 쫓아갔려 했을텐데. 전부를 독식하려고까지는 하지 않고.

 

 “토비오쨩이. 그랬어?”

 

 그는 미묘하게 입술 끝이 틀어져 있었다. 여기는 코트 밖인데, 쿠니미는 극렬한 패배감을 느꼈다.

   

 “그래서. 선배는, 카게야마랑 계속 소꿉놀이중이신 거예요?”

 “어라. 쿠니미쨩. 그게 무슨 소리야.”

 “.”

 “보지 않았어?”

 

 오이카와는 눈이 보이지 않을 정도로 생글생글 웃었다.

 

 “그 날 말이야. 부실 앞에서.”

 

 ….

 

 “안 떠나고 계속 있었잖아.”

 

 알고 계셨구나.

 

16.

 

 그것은 자리를 떠나기 직전의 일이었다. 덜커덕. 커다란 소리가 났다. 쿠니미는 돌리려던 몸을 잠시 멈췄다. 급격한 방향 전환에 운동화 속 발가락이 꼿꼿하게 섰다. 그건 분명 앞뒤가 바뀌는 소리였다. 그러니까 위아래가, 안고 있던 자와 안겨 있던 자가 뒤바뀌는 그런 소리였다. 그리고.

 

 “토비오.”

 “, 아악, .”

 “토비오쨩.”

 “아아, 아아아,”

 “토비오.”

 

 아까와는 비교도 안 될 만큼 커다란 잡음이 쿵쿵쿵 울리기 시작했다. 신음이라고 생각되던 소리에 물기가 배여 들었다. 쿠니미는 상상할 수 있었다. 근육이 이제 막 형성된 가느다란 다리가 열리는 것을. 커다란 손아귀에 잡혀 있는 발목을. 분홍색의 흉터 없는 무릎이 어깨 너머로 제껴져 가는 것을. 그리고 그 사이에 자리 잡은 남자가 주장의 유니폼 바지를 조금 내리는 장면 같은 것을.

 

17.

 

 “그런 걸 토비오쨩이 할 수 있을 리 없잖아.”

 

 오이카와는 웃으면서 그렇게 말했다. 오른손 두 번째 손가락을 살랑살랑 흔들면서 날 가르쳤다. 소꿉놀이로 시작했을 것이 분명한 그 애의 연정을 그 이상의 것으로 부러 격상시켰노라. 더 집요한 뿌리를 내리도록 잘 키워냈노라. 라고.

 

18.

 

 생각해보면.

 

19.

 

 사랑과 동경을 구분한다는 것은 쉽지 않은 일이었다. 그런 위태로운 경계에서 네가 가지고 있는 동경이, 사실은 사랑이었음을 처음부터 알지는 못했을 거다. 그 애는. 그러니까 누가 가르쳐 줬겠지. 몰랐었는데.

 

20.

 

 그게 당신이었다. 일은 그렇게 된 거였다. 사실.

 

.

 

당신이 그 애를 독식했던 것이다.

 

 

 

 

 

 

==

리퀘 글이었습니다.ㅠ0ㅠ 너무 늦게 드려서 죄송해요!!ㅜㅜ

 

  Blind Game


-1-


“도대체 무슨 일이 있었던 거냐.”

할아버지는 엄한 목소리로 물었다. 미야는 잠자코 고개를 들었다. 뽀얗게 세탁된 와이셔츠 위에는 검은색 카디건이 단정하게 입고 있었다. 아버지가 사망했다고 발표된 날이었다. 조부는 집안의 명예를 택했다. 생명은 붙어 있었지만, 혹여 기적적으로 살아난다 해도, 반푼이가 되어 버린 아들을 집안의 대표로 세울 생각이 그에겐 없었다. 그래서 장례가 치러졌다. 가장 무난하게 봐줄 수 있는 교통사고로 의사와 입을 맞췄다. 아들의 졸업식에 참석했다 귀가 하는 중에 일어났던 심각한 교통사고로 인한 사망. 그것이 부친의 사망신고서에 기록된 내용이었다. 학교도 이에 동의했다. 원래 권력은 한통속이 되는 법이었다.

“정말 실수였어요. 그 날, 바람이 많이 불었어요. 옥상이라 더 심하다는 것을 제가 생각하지 못했어요. 제 트로피를 안아보고 싶다고 해서 드렸는데 생각보다 무거우셨나 봐요. 휘청하셨어요. 손을 내밀었는데, 제가 같이 떨어질 까봐, 잡지 못하셨어요. 그래서.”
“아아….”

며칠 전보다 훨씬 늙고 수레 해진 얼굴을 마주보며 미야는 군데군데 의도적으로 끊어가며 말했다. 아버지는 독자였고, 자신도 그러했다. 아무리 조부가 정정한다고 한들, 새로운 아들은 언감생심, 꿈도 못 꿀 일이었다. 콧대 높은 그가 미야家의 거대한 부를 친척들에게 줄 리도 만무했다. 사회에 환원한다는 것은 아예 옵션에서도 빠져 있었다. 선택권은 자신 밖에 없었다. 그러니 의심은 되겠지만, 착각을 선택해주길 바랐다. 그 결정을 돕기 위해 아츠무는 슬픈 표정을 지어냈다.

“아버지께서 하루 빨리 깨어나셨으면 좋겠어요.”

식물인간 상태로 누워 있는, 몸의 반 이상이 박살나고 흉하게 일그러진 아버지의 얼굴을 보는 건 생각보다 떨리지 않았다. 완전히 죽었으면 더 깔끔했겠지만, 손을 더 댈 순 없다는 것을 17살의 아이는 이미 알고 있었다. 적어도 지금은 댈 수 없었다. 미야는 영악하고 예쁜 표정을 지어 보였다.

“할아버지. 아버지의 공백이 크신 거 알아요.”
그리고 슬픔으로 약해진 마음을 살며시 손에 쥐었다.

“당장 중앙지부와의 일도 그렇고, 후원의 일도 그렇고. 요원을 양성하셨던 일에도 차질이 있으시겠죠.”
“…그런 건 어떻게 다 알고 있었느냐.”
“저, 그렇게 어리지 않아요. 아버지께서 종종 저에게 상담을 해오시기도 했었고. 학교도 졸업했구요.”

조부가 자신에 대해 가지고 있던 자부심을 부채질하고, 아들의 부재로 허물어진 빈 곳에 열심히 채워 넣었다. 당신은 무너지지 않아야 한다. 나를 미워해서도 안 된다.

“다행히 할아버지께서는 아직 정정하시니 복귀하셔도 괜찮잖아요.”
그 막강한 권력을 손에 잘 쥐고 있다가.

“앞으로는 아버지 몫까지 제가 더 열심히 할게요.”

나에게 넘겨 줘. 직접 준비한 찻잔을 권하며 아츠무는 마음속으로 그렇게 되뇌었다.

-2-



“토비오?”

비어 있던 자신의 방에 불을 켜자 동그랗게 웅크려 있던 까만 그림자가 화들짝 놀래며 고개를 돌려왔다. 카게야마였다.

“왜 여기 있었어?”

미야는 헝클어져 있는 까만 머리카락과 붉어져 있는 눈 주변을 보았다. 계속 웅크리고 있었는지 옷도 마구잡이로 구겨져 있었다. 그는 문가에 있던 작은 거울에 자신의 모습을 비쳐보았다. 말끔했다. 누가 보아도, 아버지가 다친 것은, 혹은 죽은 것은 자신이 아니라 카게야마 쪽이라고 생각할 것 같은 대비였다.

“난 괜찮아.”

상대가 얼토당토않은 위로를 꺼내기 전에, 그는 선수를 쳐서 말했다. 담담한 대답에 턱 밑이 바짝 당겨졌다. 부스스 일어나는 머리카락이 화가 난 것 같기도 하고, 슬퍼 보이기도 해서 오묘했다.

“….”

그렇다고 감정을 표현해내는 말재간은 없는 아이였다. 미야는 침대 위로 올라가 카게야마를 끌어안았다. 하루 종일 볕 하나 받지 못했는지 수더분한 향이 났다. 담뿍 들이마시고 있자니 팔 밑에서 손이 쭉 빠져 나오더니 등을 가만가만 만지고, 쓸어내렸다. 뭐하자는 거지. 설마.

“토비오, 혹시 날 걱정해 주는 거야?”

손이 멈칫하더니, 얌전히 허리를 끌어안았다. 먼저 안아주는 것은 처음이라 기분이 좋아졌다. 미야는 목덜미에 코를 파묻었다.

“고마워.”

병원에는 같이 들렸었다. 워낙에 참혹한 상태라 걱정했던 것이 무색하게 무표정한 얼굴이었는데, 병실에서 나오자마자 주저앉아서는 숨을 헉헉거렸다. 과호흡 증세였다. 쉬라고 집에 두었더니 하루 종일 나를 기다리며 울고, 슬퍼하고. 안아 주고. 깜찍한 검은 고양이. 아버지가 그렇게 된 게 너 때문인지도 모르고. 작은 주인은 물기가 쭉 빠져 있는 몸을 더 꽈악 끌어안으며 웃었다. 평소처럼 아프다는 소리도 하지 않았다.

“슬프긴 하지만, 나 정말 괜찮아.”
그는 기쁘게 웃으면서 말했다.

“진짜 괜찮아.”
진심이었다.

-3-


아츠무의 아버지는 내 세계에서 가장 강한 사람 중 하나였다. 그런데 교통사고가 그 사람을 깨어날 수 없는 깊은 곳에 잠들도록 만들어 버렸다. 팔이 잘리고, 얼굴이 짓이겨 졌다. 본인의 힘으로 할 수 있는 것은 아무것도 없는 상태로, 마냥 죽음이나 혹은 기적을 기다려야 하는 그런 존재가 되어버렸다. 내 부모님도 그렇게 돌아가셨었다. 거기까지 생각이 흐르자 잠이 오지 않았다. 피곤함에 억지로 잠을 청하면 어김없이 악몽이었다. 귀에서 차가 미끄러져 생기는 그 소리가 들리고, 커다란 게 부딪치는 소리가 들리고, 비명 소리가 들리고. 눈 앞에 팔이 나뒹구는 그런 꿈. 차라리 몰랐을 때는 아무렇지 않았는데, 알게 되니 무서워졌다. 슬퍼졌다. 저런 일을 부모님이 겪으셨다는 것이 '인지'된 것이다.

책을 뒤져보니 이것은 ‘트라우마’라고 했다. 이성으로는 알 수 없는 나의 저 안 쪽, 가장 깊은 곳에 부모님이 살아계시는 것이라고 했다. 죽고, 다시 죽고, 그리고 다시 살아나신다. 그렇게 갑자기 찾아온 ‘슬픔’이라든지, ‘두려움’은 너무 괴로워서 마음이 뭉개져 버렸으면 좋겠다고 생각했다. 아니면. 그럴 수 없다면. 차라리 나쁜 기억을 다 지울 수 있으면 좋겠다고 생각했다. 컴퓨터처럼 ‘Delete’시켜 버릴 수 있으면 얼마나 좋을까.

그럼 ‘트라우마’에 걸리는 사람은 없을 텐데.

-4-


“여기냐?”
“핸드폰의 기록으로는 그렇지.”

묘한 말을 하며 하나마키는 차에서 내렸다. 갓길에 세워진 차량은 그들의 것 하나였고, 지나다는 것 또한 드물었다. 이와이즈미는 잔해 하나 없이 깨끗한 도로에서 막막한 기분으로 팔짱을 끼었다.

“확실히.”

그의 눈은 가드레일을 살피고 있었다. 사내답지만 키에 비해선 작은 손이 잿빛 광택이 도는 표면을 한번 쓸어내린다. 손바닥을 뒤집자 미량의 먼지가 묻어 나왔다.

“여기만 새 거긴 하네.”

장시간의 운전에 뻐근한 어깨를 붕붕 돌리며 하나마키가 다가왔다. 힐끗 목을 빼내어 밑을 보자, 현기증이 날 정도로 깊은 절벽이 보였다. 수풀더미 같은 것으로 가려 놓았지만, 잘 보면 허리통만한 굵은 가지가 뚝뚝 끊어져 있는 나무들도 눈에 띄었다. 충돌의 흔적들이었다. 아래에서 올라오는 형형한 바람이 머리카락을 흩날렸다. 서포터는 묵묵히 자신의 탭북을 켰다.

“역시 내려가 봐야 하나.”

소매를 살짝 걷으며 길을 살펴보던 팀장은 발랄한 전원 음이 들리는 쪽으로 고개를 돌리고는, 한껏 인상을 찌푸렸다.

“…포켓몬 잡는 중이면 죽인다.”
“무슨 소리야. 팀장. 업무 시간 중에는 안 하거든.”
“지난 번 회의 때에, 오이카와 머리 위에 푸린이 앉아 있다며 요란법석을 떨어댄 건 어디의 누구였지?”
“세이죠 팀의 하나마키였습니다~.”

시원시원하게 대답한 그는 탭북을 연신 두들기더니 화면을 팀장에게 돌렸다.

“팀장. 사실 나도 불법적인 일은 좀 했는데.”

화면에는 이 지역의 지도가 떠올라 있었다. 그리고 20km 정도 떨어진 곳에서 빨간 점이 깜빡이고 있었다. 이와이즈미는 눈 사이를 좁혔다. 동그란 점 가장자리에는 작은 글씨로 ‘맛층’이라고 적혀 있었다.

“너 이거.”
“맛층의 손목시계에 위치 추적기를 넣어두었지.”

엄지손가락을 치켜들며, 하나마키가 씨익 웃었다. 팀장은 아무 대답도 하지 않고 두 손으로 탭북을 꽉 잡아 얼굴 앞으로 가져왔다.

“첫째로, 추적 반경 범위를 넘어서지 않아서 다행이야.”
서포터는 사근사근한 표정으로 웃었다.
“둘째로, 시체를 유기하려 20km나 이동했다는 것은 아무래도 무리지. 그렇게 많은 사람이 살 거 같아 보이진 않지만, 어쨌든 주택가이고 말이야.”
하나마키는 팀장의 등을 철썩 쳤다.
“즉, ‘마츠카와 잇세이 요원은 무조건 살아있다.’고 한 팀장의 강력한 주장은 사실일 확률이 높을 것 같거든.”

등을 얻어맞으면서도 이와이즈미는 계속 화면만 보고 있었다. 콧잔등을 살살 긁적거리던 하나마키가 한숨을 푹 내쉬며 어깨를 꽉 잡았다.

“그러니까 울지 마.”

신뢰란 때때로, 무게가 되는 법이었다. 여기까지 오면서 누구에게도 추적기에 대해 말하지 못했던 것은 혹시라도 죽음에 대한 확실한 증명이 되지 않을까 싶었던 마음 때문이었다. 팀장도 같은 생각으로 외려 큰 소리를 탕탕 쳐댔을 것이 분명했다. 자신의 기대가 타인의 지지대가 되길 바라고, 기대에 대한 무게는 온전히 스스로가 지고자 하는 무식함을 하나마키는 그에게 배웠다. 한결같이 우직한 남자였다.

“팀장, 오늘 철철 울었다고 오이카와한테 이른다.”
“닥, 닥쳐라.”

포켓몬이 판을 치는 이 때, 아직도 고질라나 좋아하는 팀장의 약점을 공략하며 하나마키는 푸른 하늘을 올려 보았다. 그리고는. 만약 살아 있지 않으면, 죽여 버릴 거라는 허무맹랑한 협박을 마츠카와에게 날렸다.

-5-


“이제는 알아차렸겠지. 아츠무의 이야기에는 있어도 말이 되지만, 없어도 괜찮은 존재가 하나 있네.”
“…네. 알 것 같습니다.”

마츠카와는 고개를 천정으로 돌렸다. 물 얼룩이 져 있는 흰 벽이었다. 요원은 천천히 목을 가다듬었다.

“미야 아츠무가 죽였다고 하는 17살짜리 남자애는 허구입니다. 당신의 이야기를 덧씌운 것뿐입니다.”

그는 다시 한 번 꼼꼼하게 생각을 더듬었다. 이야기에서 17살에, 학교 옥상에서 죽은 아이의 존재를 배제하고 그 자리에 지금 들은 이야기를 끼워 넣으면 모든 것은 정배열 되었다. 그러니까 처음부터 그런 아이는 없었던 것이다.

“하지만 그는 아예 없는 이야기를 만들어 내지 않습니다. 그러니까 사진 한 장으로 남아 있는 17살의 ‘오이카와 토오루’는 분명 그들의 과거 속 등장인물이 맞을 겁니다.”

다만 그 등장시기가 달랐을 뿐이다. 미야 아츠무는 일부러 오이카와의 사진을 준비해 놓았다. 의심으로써 견고한 팀을 깨려는 의도를 가지고. 미야家의 남자는 천천히 고개를 끄덕였다.

“자네의 말이 맞아. 사진 속 그 아이는 나도 알고 있네. 미야家에서 후원하던 아이 중 하나였지.”
“후원이라구요?”
“카게야마의 경우와는 조금 달랐지만 말일세. 아, 이 이야기를 자네가 믿게 하려면 이것부터 보여야 하겠군.”

그는 와이셔츠에 달린 주머니에서 색이 바래고 부서진 아이디카드를 꺼내보였다. 마츠카와가 가진 것과 동일한 디자인이었지만, 색깔이 달랐으며 직급에는 ‘수석연구원’이라고 적혀 있었다.

“우리 가문은 대대로 자네가 몸을 담고 있는 에이전트사에서 ‘인재 양성’을 담당하고 있네. 드러나지 않게 하고 있는 많은 후원들은 사실. 미래의 연구원이나 요원들을 선발하기 위한 테스트 같은 것이었지.”

남자는 아이디카드를 잘 볼 수 있도록 마츠카와에게 넘기며 말을 이어 나갔다. 요원은 그나마 멀쩡한 손 안에서 그것을 돌리며 이리저리 살펴보았다. 아무리 봐도 진짜였다.

“나는 오이카와 토오루가 15살이었을 때, 이미 그를 요원의 재목으로 추천했었네. 하지만 나이가 어렸던지라 실제로 테스트를 받고 정식 훈련을 받은 것은 17살이었다고 알고 있네. 그러니 그 사진은 그 때 입수한 것이겠지. 아츠무는 그때, 이미 관여할 수 있었던 거야. 에이전트 업무에.”
“….”
“그런 눈으로 보지 말게나. 내 꼴을 보면 알겠지만, 나는 쭉 혼수상태였네. 기적적으로 깨어난 것은 아츠무와 카게야마는 22살, 오이카와 토오루는 20살이었지.”

아버지는 위스키가 동이 난 빈 잔을 바라보며 말을 이었다.

“물론 나는 내가 깨어났음을 아츠무에게 알리지 않았네. 다시 죽을 것이 뻔했으니까. 식물인간으로 기억되는 편이 좋았지. 재활이 필요하기도 했었고. 그렇게 3년간을 꼬박 투자해서 어느 정도 회복되자마자 나는 서버에 접속했어. 그동안 어떤 일이 일어났는지 파악하고 싶었거든.”
“가능했습니까?”
“카게야마 덕분이었지.”

그는 잠시 숨을 길게 쉬고 말을 이어나갔다.

“완전히 아츠무와 갈라서던 그 때에, 카게야마는 중앙지부의 서버를 모두 폭파시키고 자료를 날려 버린 후 잠적했다네. 그 난리 통과 교묘히 시기가 맞아 떨어지는 바람에 내가 숨어들어갔던 건은 카게야마의 짓으로 감출 수 있었지.”
“혹시 그게, 중앙지부의 메인 서버를 갈아 치우게 했던 그 사건이 되는 겁니까?”
“그랬을 걸세. 어떻게 한 건지 몰라도 복구가 아예 불가능하게 해두었더군. 그러니까 자네가 들었다던 그 ‘모든 것을 불태우고 자료를 날리고 사라진 이야기’는 사실 집이 아니라, 본부에 대한 이야기였던 거지.”

때에 맞지 않게 쾌활한 웃음을 터뜨리던 그는 잠시 미간을 찡그리며 팔의 절단부를 움켜쥐었다. 환상통이었다. 아직도 팔이 붙어 있고, 상처가 지속되는 것처럼 이어지는 환상이 그를 단기간에 깊은 고통 속으로 몰아세웠다. 시익시익. 숨소리가 새었다. 마츠카와는 끈질기게 사내가 고통을 이겨내길 기다렸다.

“하.”

얼마 지나지 않아 그는 짙은 한숨을 내뱉으며 식은땀으로 젖은 고개를 젖혀 올렸다.

“미안하네. 이야기를 계속하도록 하지.”
“조금 쉬었다 하셔도 됩니다.”
“아니야. 내 몸은 느긋하게 무엇을 기다릴 만큼 상태가 좋지 못해. 호전되었을 때, 마무리를 짓겠네.”

올리브색의 눈동자가 마츠카와를 부드럽게, 그러나 단호하게 바라보았다.

“미야家의 추천을 받은 ‘오이카와 토오루’는 카게야마가 하고 있던 연구에 실험체로 동원되었다네.”

그것은 어느 봄날로 기록되어 있었다. 20살의 오이카와 토오루, 22살의 카게야마 토비오. 서로에게 사랑 비슷한 것도 기대할 수 없는 관계로 둘은 삭막한 연구실에서 첫 만남을 가졌다.


-6-


“카게야마 연구원님.”
“?”
“여기, 일전에 실험하신 결과입니다.”

허벅지까지 오는 하얀 가운은 이지적인 생김새에 잘 어울렸다. 단정하게 잘린 까만 머리카락 사이로 날카로워 보이는 눈매가 강렬하게 자신을 쏘아보고 있었다. 최대한 정중하게 건넨 말인데, 그는 마치 시비라도 당한 것 같은 표정이었다. 그런 서늘함 속에서 상대의 손으로 결재 판이 넘어갔다. 거의 빼앗아 가는 것 같은 움직임이었다. 물론 그 과정에서 생긴 불만을 바깥으로 꺼낼 수는 없었다. 그의 목에 걸린 아이디카드에는 ‘특별 연구원’이라는 직책과 ‘카게야마 토비오’라는 이름이 정면 사진과 함께 박혀 있었다. 이제 막 들어와 통계나 결과 전달 등의 뒤처리만 전담하고 있는 새끼 연구원으로서는 하늘과 같은 직급이었다. 그는 감히 더 말을 붙이지 못하고 다만 초조하게 특별 연구원의 답을 기다렸다.

“틀렸네.”

한번 죽 훑어보았을 뿐인데, 그는 쉽사리 결과의 오류를 찾아낸 듯 했다. 안 그래도 상대를 편하게 해 주는 법이 없는 이목구비가 더욱 개성을 빛냈다. 자신의 잘못인 양, 움츠린 상대에게 카게야마는 차트를 휙 도로 내밀었다.

“폐기해.”
“네? 네네.”
“그리고 기본 설정 수정해서 다시 보낼 테니까 준비하고.”
“네! 아, 저기!”

가차 없이 돌아서려던 특별연구원이 뒤를 돌았다. 크게 반짝이는 법이 없는 푸른 눈동자에는 냉기가 가득했다. 기세에 눌려 쭈볏거리면서도 연구원은 결국 조심스럽게 입을 열었다.

“실험에 사용되었던 동물들은 어떻게 할까요? 몇 마리는 상태가 괜찮은 거 같던데.”
“…? 원칙적으로 전체 폐기잖아?”

불필요한 질문이라고 생각하는 듯 어리둥절한 표정을 하고, 카게야마는 고개를 갸웃했다. 괜한 질문을 던진 것 같아 더 수그러드는 상대에게 그는 다시 한 번 물었다.

“예외가 필요한 상황이라도 있어?”
“아, 아닙니다.”
“그럼 원칙대로 해. 쓸데없이 물어보지 말고.”

연구원에게 주어진 가운 주머니에 손을 넣은 채, 상관은 퉁명스럽게 죽음을 결재했다. 재고의 여지가 없다는 깔끔한 태도였다. 이제 막 보송보송한 털이 올라오고 있던 어린 동물들을 떠올리며, 연구원은 크게 숨을 내쉬었다. 그가 개발하고 있다던 무언가는 이제 생물을 단계로 하는 실험 단계에 들어가 있었다. 뭔지 까지는 알 수 없었지만, 하루에도 몇 십 마리씩 온갖 동물이 죽어 나갔다. 그렇게 뒤에서 산처럼 시체를 쌓아가면서도 상관의 곧은 허리는 굽어지는 법이 없었고, 차가운 푸른 색 눈동자는 따뜻해지는 법도 없었다. 사실.

피는 그의 눈동자처럼 푸를 것이다. 라는 설도 돌았다. 기계처럼 정확한 생활 패턴이나, 인간의 범위를 넘어선 것 같은 일처리 능력 등까지 더해져서 생긴 소문이었다. 연구원은 상관이 엉망진창인 글씨체로 결재한 문서를 품에 끌어안았다.
그러고 보니, 자신보다 한참 어린 상관이었다.

-7-


“이제 슬슬 인간한테 실험을 진행해보는 건 어때?”
“임상실험? 아직 안 돼.”

카게야마는 자판을 두드리며 짧게 대답했다. 미야는 가지고 온 커피 잔을 화면 정 가운데에 내려놓았다. 눈앞을 스쳐가는 인영에 집중력이 깨져버린 상대는 사나운 시선을 돌렸다.

“왜?”
그러나 생글생글 웃으며 살갑게 말을 걸어오는 낯에 침을 뱉기란 생각보다 쉬운 것은 아니었다. 그는 화면의 반을 가리며 책상 가장자리에 허벅지를 기대고 서 있었다. 연구원은 의자를 조금 밀어 책상에서 떨어지며 상대의 얼굴을 마주 보았다.

“…아직 완벽하지 않아.”
“제대로 된 실험을 하지 않으니까 그렇지 않을까?”
“무슨 소리야?”
“동물의 기억이 삭제되었다는 것을 알아내기란 쉽지 않잖아. 행동만으로 보이지 않는 기억의 존재 여부를 찾아내는 건 불확실성이 너무 많아.”
“….”

틀린 말은 아니었다. 카게야마는 손을 뻗어 따끈한 잔을 쥐었다. 커피 잔이긴 했지만, 안에 들어 있는 것은 우유일 것이다. 그가 커피를 잘 먹지 않는다는 것을 상대가 모를 리가 없었다. 꿀이 적당히 섞여 달콤하고 따뜻한 우유를 한 모금 마시며 카게야마는 미야를 고집스럽게 바라보았다.

“이 연구는 내가 알아서 할 거야.”
“토비오, 너 사실은 ‘생존’했다는 것 자체를 실험의 성공으로 삼고 있지?”
“….”
“기억을 지운다는 게 결국은 뇌세포를 죽이는 일이 될 텐데, 그것도 나쁜 지표는 아니지. 오, 생존확률 꽤 높아지고 있네.”

그는 화면에 띄워져 있던 자료를 손가락으로 주욱 따라가며 말을 이었다. 카게야마는 잠자코 우유를 비우고만 있었다. 뱃속이 뜨끈해져 왔다. 그 역시 모르는 결론은 아니었다.

“하지만 정확하게 하려면 역시 슬슬 임상실험을 들어가야 한다고 봐.”
“실패는 곧 ‘죽음’이야. 생존확률이 극단적으로 높아지면 그 때 할 거야.”
“불필요한 시간 낭비야.”

미야는 아이디카드의 목줄을 잡아 자신에게 당겼다. 훽 당겨졌지만 책상을 잡아 완전히 끌려가는 것은 막은 상대는 끝이 올라간 매서운 눈매로 차분하게 그를 바라봐왔다.

“시작 해. 사람은 내가 준비해 줄게.”
“뭐?”
“도심만 몇 바퀴 돌아도 한 박스는 만들어 올 수 있어. 노숙자들도 있고, 버려진 아이들도 있고. 겨울이기도 하니, 사실 언제 죽어도 이상하지 않는 사람들 좀 쓸어 담아오면 될 것 같은데.”

여유롭게 풀어진 눈매로 웃고 있었다. 끔찍한 소리를 하면서도 손이 다정하게 머리카락을 어루만지고 뺨으로 내려갔다. 목이 빳빳하게 긴장해 있었다. 아, 좀 위험한가. 미야는 부모보다 오랜 시간 상대를 길들여 왔던 미소를 능란하게 지어 보였다.

“토비오, 요새도 잠을 잘 못 자?”
“…아니.”
“너는 거짓말을 차라리 안 하는 게 좋겠어. 수면제를 처방받아 보는 건 어때? 담배에 의존하지 말고.”
“…별로 안 피워. 약을 먹을 정도도 아냐.”
“요 며칠, 하루에 3시간씩 자면서도 그럴 정도는 아니라는 거지.”

그대로 볼을 주욱 당기려는 손을 카게야마가 천천히 거두어냈다. 속이 들킨 것은 기분 좋은 일이 아니었다. 미간에 몇 개의 주름이 만들어졌다. 고양이의 콧수염 같은 느낌이었다.

“상관없어. 할 수 있어.”
“알아.”

미야는 그 고집에 상상의 입맞춤을 더하며 대답했다.

-8-


“여기냐?”
“일단, 맞는 거 같은데.”

하나마키와 이와이즈미는 벽 뒤에서 고개만 슬쩍 내밀어 표적이 된 주택을 확인했다. 문에는 안이 보이지 않게 흐릿한 유리창 하나가 작게 나 있었다. 인적은 없었다. 이름 모를 새들이 떼를 지어 전선줄에 앉아 있는 을씨년스러운 동네였다. 팀장은 침착하게 품 안으로 손을 넣었다. 총은 하네스 안에 잘 들어가 있었다. 그립감도 나쁘지 않았다.

“들어가는 건 나뿐이야.”
“뭐?”
“너는 여기서 대기하다가 신호가 오면 움직여.”
“안에 몇 명이 있는지도 모르는데, 혼자 가겠다고?”
“그러니까 혼자 가는거야. 너는 현장 뛰어본 경험도 없는데 어떻게 달고 가. 여기 있다가 만약 내가 5분 내로 안 나오거나.”

팀장은 인 이어를 착용하고 팔을 걷어붙였다.

“통신이 끊기면 경찰에 연락해. 어차피 저 쪽도 합법은 아닐 테니까 경찰 눈치는 보겠지.”
“그래도 팀장. 같이 가는 게 좋을 거 같은데.”

하나마키는 내키지 않는 듯 작게 반론을 펼쳤지만, 이미 팀장은 차비를 모두 끝낸 상태였다. 그는 서포터의 머리를 한번 누른 후, 자리에서 일어나 벽을 돌았다. 정면에 집이 보였다.

“하아.”

얼마만의 느끼는 현장의 긴장감인가. 싶은 생각을 하면서 그는 최대한 자연스러운 걸음으로 문 앞으로 다가섰다. 명패에는 아무것도 쓰여 있지 않았지만, 초인종은 있었다. 팀장은 천천히 손가락을 들어 벨을 울렸다.

삐이이이.
문 너머에서 날카로운 소리가 울렸다. 정적이 흐른 것은 잠시, 한껏 세운 청각 너머로 누군가의 움직임이 잡히기 시작했다.

[팀장. 뭐야, 무슨 일이야.]
[도와주러 갈까?]
[그냥 있어?]

인 이어에서 하나마키도 난리가 나 있었다. 아니, 이제 겨우 2분이 지났을까 말까인데 왜 이리 법석이냐. 오이카와 같은 녀석. 이라고 말을 해 주고 싶었지만 이를 악물어 참았다. 문을 부서 버려야 하나 싶은 생각이 들었을 때 즈음.

“누구십니까.”
안에서 침착한 목소리가 들렸다. 나이가 든 남자의 목소리였다. 팀장은 유리창 너머 흐릿한 회색 인영을 바라보았다.

-9-



“아, 윽. 으윽. 윽.”

천정이 빙글빙글 돌았다. 원래도 높았고, 무슨무슨 유명한 화가가 그렸다던 복잡한 그림이었다. 어렸을 적에는 거기에 그려진 사람의 명수나 동물을 세며 놀기도 했었다. 지금도 그랬다. 카게야마는 눈을 똑바로 뜨고, 그림 속 날아가고 있는 새의 마릿수를 세었다.

“아, 아.”

등이 아팠다. 아니, 따가웠다. 러그가 아니라 짐승의 털가죽으로 만든 것이라서 그럴 것이다. 보통 사용하는 여우의 부드러운 털가죽이 아니라, 늑대의 것이었다. 이 산에서 살던 것을 사냥하여 만들었다고 했었다. 회색, 검은색, 은색. 그런 색깔의 털이 곱지 못한 결을 가지고 벗은 등을 찔러 왔다. 피부는 발진이 돋은 듯 빨갛게 변해 있었다.

“토비오.”
“으, 으으….”
“내가 죽였어야 하는 사람이 두 명 있었거든.”

발이 번쩍 들려 어깨에 실렸다. 오래된 상처가 있는 쪽이었다. 잡힌 무릎이 시큰거렸다. 카게야마는 외로 기우는 몸을 멈추려 급하게 바닥을 짚었다. 핑, 머리가 다시 한 번 돌았다.

“근데 둘 다 죽이진 못했어.”
“아,”

상대는 끊임없이 몸을 괴롭혔다. 이런 게 기분이 좋아질 수 있었던 것은 딱 두 번뿐이었다. 그 애와 했던 두 번 뿐이었다. 정신으로 그 날을 헤매며 애써 균형을 다시 잡아 보려 했지만 상대는 봐주지 않았다. 한층 엉망으로 상체가 무너졌다.

“짜증이 많이 났었지만.”

아프고, 피곤했지만 상대가 놓아주지 않아 잠이 들 수가 없었다. 하나, 둘, 셋. 이제 셀 수 없는 천장의 무늬를 대신해서 카게야마는 러그의 털을 의미없이 헤어라 보기 시작했다. 다섯, 여섯.

“어쨌든 다 잘 풀렸네.”

비명이 나올 것 같아서 수의사는 입술을 잔뜩 말아 세게 물었다. 손은 짐승의 털을 한 움큼 모아 쥐고 있었다.

“으으….”
“그렇지만 토비오, 나는 실패를 3번 할 것 같진 않아.”

가까스로 돌릴 수 있는 시선 속 남자는 웃고 있었다. 즐거워하고 있었다.

“그게 네가 나한테 잘 해야 하는 이유야.”

-10-


오이카와는 침대에 누워 있었다. 잠이 오지 않았다. 수면 마취의 영향인지도 몰랐다. 어쨌든 몸은 피로하지 않았고, 정신 또한 그러했다. 탁상시계의 규칙적인 울림을 들으며 그는 자신의 손을 펴 보았다.

“….”

까만 털이 아주 조금 쥐어져 있었다. 옆집 남자가 데려왔던 고양이의 것이었다. 의탁할 만한 곳에 맡기면서, 요원은 그 털을 조금 보관해 이곳으로 왔었다. 그리고 그것을 쥔 채, 마취에 들어갔다. 이유는 간단했다. 확인하고 싶었기 때문이었다.

“정말, 토비오쨩이야?”

그는 혼잣말을 중얼거리며 손바닥 속 까만 털을 오랫동안 바라보았다. 일부는 사라지고, 일부만 남아 있었다. 자신을 진찰했던 의사는 그것의 일부만 가져가고 나머지는 남겨 두었다. 요원은 그것이 나름대로의 답변이라고 생각되었다. 그러니까 정말로 카게야마 토비오였다. 그렇다면 그 사실은.

“나한테 없어진 기억이 있는거야?”

로 수렴되었다. 오이카와는 눈을 감았다. 그리고 아주 어린 시절부터 천천히 떠올려 가기 시작했다.

-11-


“오이카와 토오루입니다~”

그 아이는 명랑하게 인사를 했었다. 앞으로 자신이 어떻게 될 지도 모르고 싱글싱글 웃으면서 말이다. 부드럽고 말랑말랑한 생김새에 눈이 반짝반짝 빛났다. 카게야마는 왠지 시선을 조금 미끄러뜨려 땅을 보았다.

"인사할 필요 없어. 얼굴을 대고 만나는 건 지금 뿐이니까.”

그리고 부러 훨씬 무뚝뚝하게 대답했다.

“우선은 네가 실험에 적합한지 볼 거야.”
“으응.”

고개를 끄덕이며 주의 깊게 듣는 모습은 제법 똑똑하고 눈치가 있어 보였다. 나이는 두살 어려도 체격은 자신보다 더 크고 건장한 남자애였다. 원래는 요원으로 선발될 예정이었다고 들었다. 그걸 원한다고 했다. 나는 이리저리 활달하게 움직이는 눈동자를 내게 고정시키기 위해 볼펜 뒤로 톡톡 손에 들고 있던 파일을 두드렸다.

“실험에 통과하게 되면, 소비재를 거치지 않고 바로 정식 요원이 되는 특혜를 가지게 된다는 말은 들었지?”
“네. 앗, 그런데.”

손을 번쩍 들며 그 애가 설명을 막았다. 솔직히 조금 짜증이 났었다. 그런데.

“아까부터 신경 쓰였는데, 이거 사진 바꾸면 안 돼요?”

그 애는 내 목에 걸려 있던 아이디카드를 잡아채어 당기고는 스스럼없이 웃으며 상황에 맞지 않은 말을 건네 왔다. 순식간에 다가온 홍차색 눈동자가 아이디카드 속 사진과 나를 번갈아 바라본다.

“이거 너무 못생기게 나왔잖아요. 와, 심하네. 이런 사진을 프로필로 어떻게 써요?”

우유냄새가 났다. 그러고 보니 프로필에 좋아하는 것이 우유빵이라고 적혀 있었더랬다. 다른 것도 최고점이었지만, 인성과 친화력 부분이 유별나게 높던 후보생이었다. 키, 몸무게, 성격, 성향. 프로파일은 당연히 몇 번이나 읽어 봤었다. 사진도 잔뜩 받아 골고루 분류하고 눈에 익혀 두었었다. 그런데.

“카게야마 토비오? 토비오?”

실제의 그에겐 문서의 어떤 것으로도 파악되지 않은 특별한 것이 있었다.

“그럼 나 이제부터 ‘토비오 쨩’이라고 불러도 되요?”

그리고 자꾸 관계를 요구해 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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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사실 피드백 댓글로는 몇 번 말씀드렸지만 저는 이 이야기 속, 미야 아츠무는 싸이코패스와 소시오패스의 중간 즈음으로 생각하며 쓰고 있습니다. :) 멋지고 좋은 캐릭터로 쓰지 못하게 되어 아쉬운 감은 있지만.ㅠ0ㅠ...인상적인 악역이 될 수 있게 잘..!!ㅠ0ㅠ!!
2. 마감을 ...할 수 있을...까요? 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 하고 싶습니다..!! 행사 참여는 처음이 되는건데, 정말 마감할 수 있으면 좋겠습니다.ㅠ0ㅠ...
3. 언제나 감사합니다.

Blind Game


◆◆◆


“나.”
“….”
“…네가 좋아.”
실로 바보같은 고백은 놀라울 정도로 쉽게 마음을 훔쳤다.


◆◆◆


“깨어나셨습니까?”
“….”
“식사는 도련님께서 늘 좋아하시던 것들로 준비해 두었습니다.”

카게야마는 손을 들어 눈앞으로 가져왔다. 깨끗하게 손질되어 있었다. 작고 약한 동물들을 다루는 직업이라 바짝 깎는 것까지는 자신의 버릇이 맞았으나, 자잘한 스크래치 없이 매끈하게 정리하는 것은 다른 자의 솜씨였다. 이를테면 지금 자신에게 넥타이를 건네고 있는 이 남자. 수의사는 온화하다 할 수 있는 표정의 중년남자를 가만히 올려 보다, 그의 손 위에 놓인 넥타이를 거칠게 낚아챘다. 그는 입술 끄트머리로만 슬쩍 웃어 보였다.

“쓸데없는 일은 하지 마세요.”
“큰 주인님의 몸에 자국이 남게 할 수는 없습니다.”
“…싫으면 그 쪽이 안 하면 되잖아?”

그는 단추가 아직 하나 잠겨 있지 않은 와이셔츠 카라에 손가락을 걸고 당겨 내리면서 비꼬았다. 목에 남아 있는 지난 일의 흔적은 이빨자국이었다. 애정보다는 조금 더 진득하고, 까탈스러우면서 위험한 감정이 남겨 놓았다. 사용인은 한층 온유하게 눈썹 끝을 내렸다.

“여전하셔서 다행입니다. 변하시기라도 했으면 놀랐을 것 같습니다.”

대답하지 않고 카게야마는 공단으로 만들어진 고급 넥타이를 카라의 밑에 대어 반듯하게 각을 잡았다. 매끈한 손끝으로 익숙하게 매듭을 지어 조이는 과정을 그는 물끄러미 바라보았다. 거액의 후원을 받고 심지어 그 몸을 의탁했으면서도 위축되는 법이 없던 당돌한 아이였다. 큰 주인과 작은 주인이 워낙에 특별하게 보았던 탓도 있지만, 타고난 성정 또한 한 몫을 했을 터였다. 관심을 요구하지도 어려워하지도 않으며 자신의 관심분야에만 혹 빠져드는 몰입도 높은 성격. 그런 건 몇 년이나 걸려도 길들이기가 쉽지 않은 것이 당연했다.

“하지만 정말 수의사는 의외였습니다.”

그는 바닥에 잘 닦은 검정구두를 놓으며 입을 열었다. 발끝을 넣으려던 수의사가 몸을 멈췄다. 사용인은 고개를 들며 눈을 똑바로 맞추고 웃었다.

“누구보다 많이 죽이시지 않았습니까?”
“….”

길들이기 쉽지 않음에도 불구하고, 포기하지 못하게 하는 포인트는 이런 것이었다. 사납게 잘만 움직이던 혀가 꼼짝없이 멈춰버리고, 차갑던 푸른 눈동자에 균열이 일어나는 지금 같은 순간만이 줄 수 있는 희열이 있었다. 보이지 않게 한 번 웃은 그는 의지를 잃은 상대의 발을 잘 받쳐 들고 구두 안에 조심스럽게 넣어 주었다. 발목에도 역시 손자국이 흐릿하게 남아 있었다. 꽉 잡아서 다리를 활짝 여셨을까. 그 사이에서 수치보다 분노로, 쾌락보단 고통으로 일그러진 얼굴을 보며 그 표정을 즐기셨겠지.

“주인님께서 기다리고 계십니다.”

자신에게도 그러할진데 미야, 그가 모시는 주인에게는 그것이 마약같이 중독적인 쾌락이었을 것이라는데 동의할 수 밖에 없었다.

◆◆◆


오이카와는 선글라스를 벗어 셔츠 사이에 끼웠다. 평소처럼 몸에 딱 맞게 재단된 양복이 아닌, 검은 색 면바지에 흰색 티셔츠 차림이었다. 군데군데 칠이 조금 벗겨져 있는 나무 벤치에 앉아 있던 그는 가지고 왔던 책을 펴들었다. 한 낮의 오후였다. 계절을 먹고 겹겹이 쌓인 잎들은 노란 색에서부터 짙은 녹색까지의 모자이크를 만들고, 그 사이로는 무정형으로 쪼개진 햇빛이 나풀나풀 떨어져 내렸다. 종이 위에 아롱진 빛살을 어루만지던 오이카와는 문득 새까맣게 지는 그늘에 고개를 들었다.

“오이카와 토오루씨?”
“그런데요.”
“와, 사진보다 훨씬 미남이시네요.”

흑발의 미인은 안경을 밀어 올리며 생긋 웃어 보였다. 요원은 못지않게 생글거리는 미소로 화답하며 그녀를 살펴보았다. 이 시간 이 곳에서 쉽게 볼 수 있는 오피스 복장에 서류가방 하나를 들고 있었다. 그녀는 목에 걸린 사원증을 뒤집어 보였다. 에이전트 마크가 진한 적색으로 박혀 있었다. 오이카와는 읽던 책을 덮어 벤치에 놓았다.

“무서운 곳으로 안내해 줄 사람인가 보네?”
“무서워하실 필요는 없어요. 그저 의례적으로 끝나는 일도 많으니까요.”
“엣. 의례적이지 않으면 무서워해야 하는 걸까?”

자리를 털고 일어서 요원이 되물었다.

“어라, 찔리는 거라도 있으신 걸까요.”

눈웃음과 함께 붉게 칠해진 입술이 날렵하게 들어 올려졌다. 오이카와는 얇은 오피스 복장 아래로 탄탄하게 자리 잡은 그녀의 실전근육들을 어렵지 않게 알아챌 수 있었다. 가슴을 타이트하게 잡아 둔 하네스에 밀착된 총기 하나, 허벅지의 가터에 달린 나이프 하나. 등급을 매길 수 있다면 이것은 특등급에 해당될 것이다. 말하자면 이제와 마음을 고쳐먹어도 보내주지 않겠다는 거네.

“오이카와씨는 그런 거 전혀 없거든.”
그는 가슴을 반듯하게 펴고 화답했다. 손을 내밀어 안내하라는 제스쳐를 보이자, 힐의 끝이 바닥을 날렵한 곡선으로 회전해 뒤를 돌았다. 뒤를 따라 걸으며 요원은 마지막 브리핑에 대해서 떠올렸다.

◆◆◆


"그래. 가."

팀장은 의외로 시원스럽게 결론을 내려 주었다. 오히려 놀란 쪽은 하나마키였다. 눈을 둥그렇게 뜬 해커는 양 쪽을 번갈아 바라보고 있었다. 걱정스럽다는 시선이었다. 숨쉬듯 사고를 치는 오이카와와 가끔씩 거대한 사고를 치는 이와이즈미의 콜라보레이션을 그는 사실 그다지 보고 싶지 않았다.

"이 일을 끝내려면 그 방법밖에는 없는 것 같으니까 말이야."

그렇지만 당사자들의 결심은 확고했다. 이와이즈미는 인이어 네 개를 꺼내어 탁자 위에 놓았다.

"하나마키. 얘네들은 우리끼리만 통신할 수 있도록 주파수를 다시 설정해 줘."
"팀장은 어려운 일을 쉽게도 얘기해."
"할 수 있지?"
"물론이지."

서포터는 네 개 째의 인이어를 들고 잠시 그것을 뚫어져라 바라보았다. 세 개가 아닌 네 개였다.

"팀장, 이건."
"당연히 마츠카와 거야."

팔짱을 꽉 낀 상태로 팀장은 담담하게 대답했다. 그는 화이트 보드를 바라보았다. 카게야마 토비오, 미야家, 중앙조직, 마츠카와 잇세이. 그가 풀어내고, 찾아와야 하는 모든 것들이 그곳에 적혀 있었다. 오이카와 역시 시선을 같이 했다. 주머니 속에서는 쉼없이 라이터가 딸깍 거렸다.

"오이카와. 네 녀석이 중앙 지부에 침투해 있는 동안, 마츠카와를 찾아낼 생각이야."

팀장의 옆모습은 빛무리가 져 있었다. 참으로 수더분하지만, 언제나 믿음을 주는 모습이었다.

"현장 뛰는 건 오랜만이겠네. 너무 무리하는 거 아니야. 이와쨩?"
"네 걱정이나 해라."

가벼이 던진 말에 묵직하게 되돌리며 그는 자신있는 미소를 지어 보였다. 오이카와는 안심한 듯 마주 웃어보였다. 팀장으로서는 드물게 현직 요원 출신인 이와이즈미였다. 높은 미션 성공률과 충성도, 그리고 높은 인성 점수로 인해 이른 나이에 팀장의 자리로 돌려지게 된 케이스라고 알고 있었다. 그 후로도 운동을 게을리 하지 않아 여전히 단단한 체격의 팀장 앞에 요원은 챙겨왔던 총을 하나 내려 놓았다.

"총이라면 나도 있어."
"이와쨩 걸로 등록되어 있는 건 보안 상 추적이 너무 쉬워서 어려울 거고, 중앙 지부에는 어차피 못 가지고 가니까."
"오이카와."
"빌려주는 거에요. 그거 오이카와씨가 제일 아끼는 거니까 꼭 돌려 주기."

한없이 가벼운 웃음으로 브리핑이 마무리되었다. 사실 따지자면, 여태까지 중에서 가장 엉망이고 부실한 브리핑이었다.

◆◆◆

익숙한 계단을 천천히 내려가자, 낯익은 풍경이 눈에 들어왔다. 카게야마는 잠시 난간에 몸을 의지하며 발을 멈췄다. 두 어 계단만 더 내려가면 도착하는 공간은 테라스와 맞붙어 아낌없는 햇살을 받고 있는 곳이었다. 높은 천정과 커다란 창, 기다란 커튼. 어린아이의 침대보다도 커다랗고 길쭉한 테이블과 단 두 개만 놓여 있던 의자. 그리고.

따악,
경쾌한 타격음과 함께 초록공단이 깔린 판 위로 하얀 공이 미끄러졌다. 반시계방향으로 회전이 걸린 상아빛 큐볼은 모서리에서 정확한 각도로 반사되어 오브젝트 볼을 차례로 맞춰냈다. 오차라고는 찾아볼 수 없는 깔끔한 움직임이었다. 공의 속도가 줄어들다 마침내 멈추자, 수의사의 눈동자 역시 아래로 내리깔렸다. 규칙 상 다시 한 번 칠 수 있는 기회가 있음에도 불구하고 남자는 검은 색으로 끝이 마감되어 있는 큐대를 내려놓았다. 그리고 천천히 뒤를 돌았다.

“좋은 아침이야, 토비오.”

유들유들하지만 날카로운 구석이 있는 목소리가 고개를 다시 들어 올렸다. 짙은 잿빛의 와이셔츠에 검은 넥타이를 매고 있는 남자는 카게야마의 머리부터 시작해 발끝까지 차례로 훑었다. 목에 남아 있는 상흔에는 제법 오랜 시간 시선이 머물렀다.

“배고프겠네. 우선 식사부터 해.”

마치 관용을 베푸는 듯한 목소리였다. 그것 또한 익숙한 것이었다. 사람을 애완동물 취급하는 오만한 목소리.

“아, 나는 먼저 먹었어. 디저트만 먹으면 될 것 같으니 기다릴게.”

대답이 없는 상대의 것까지 넘겨짚으며 그는 다시 당구대 위의 배열을 살폈다. 시선과 달리 장갑을 끼고 있는 손끝으로 가리킨 식탁 위에는 조식용으로 어울리는 여러 가지 음식이 차려져 있었다. 꿀과 여러 가지 잼이 발린 토스트, 우유, 버섯과 야채 오믈렛. 뜨끈한 온기의 향과 달큰한 냄새에 속이 뒤집힌다. 그러나 카게야마는 내색하지 않고 계단을 내려와 의자에 앉았다.

“다리. 생각보다 잘 움직이네.”
“….”
유심히 걸음을 보던 미야는 큐대의 끝에 초크를 문지르며 천천히 말을 건넸다.

“뭐, 치료를 잘 받긴 했었지.”

애써 포크를 쥔 손이 달달달 떨렸다. 카게야마는 푹신한 질감의 토스트 대 여섯 개쯤을 한 번에 뚫을 기세로 접시에 내리찍었다. 삐끗한 포크 끝이 듣기 싫은 소리를 내며 접시를 긁었다. 미야는 눈썹을 밀어올리고 슬쩍 웃었다. 그는 식탁으로 다가가 꿀을 들어 있는 단지를 들어 우유 잔에 조금씩 흘려 넣기 시작했다.

“천재 어린이께서는 그 일로 아직 화가 나 있어?”
“….”
“말은 계속 안할 생각? 정말 어릴 때랑 똑같네."
“말은 내가 아니라 네가 해야지.”

먹지도 않을 토스트를 계속 조각내며 카게야마가 차갑게 말을 끊었다. 내내 짓눌려서 비명을 참던 어젯밤의 일 따위는 아무것도 아니라는 듯한 태도에 속이 울렁거렸다. 나른해 보이는 눈매 속, 살기가 어린 눈동자에 희미한 흥분이 번져 나갔다. 면면히 흐르던 황금빛 끈적한 액체가 아주 조금 흔들렸다.

“무슨 말?”

우유가 넘치기 직전, 꿀이 든 자기단지를 확 들어 올리며 미야가 대수롭지 않게 되물었다. 그리고 카게야마에게 몸을 기울였다. 눈과 눈이 마주했다. 누구 하나 피하지 않고 곧게 부딪쳐 차가운 냉기를 만들어 내는 시선이었다.

“네가 거기 사는 줄은 언제부터 알고 있었는지? ‘오이카와 토오루’가 어떻게 살아 있을 수 있었는지? 그런 이야기들?”
“아니.”

카게야마는 포크를 손 안에서 고쳐 쥐고, 날카로운 끝을 미야의 턱 밑으로 뻗으며 나직하게 대답했다.

“네가 날 찾을 수는 있다고 생각했어. 아니, 찾을 거라고 생각했어.”
아, 이 괴물은 귀여운 생김새와 달리 도무지 길들여지지 않는다.
“하지만 왜 그걸 다시 만들려고 하는지 모르겠어.”
그리고 자신의 가치에 대해 관심이 없고, 알지도 못한다.

“그래. 재현해줄 수는 있어. 하지만 난 그 이후로 아무런 연구를 하지 않았어. 그러니 여전히. 그 기계는 불안정해. 피실험자의 집중력이 없으면 100% 실패야. 그러니까 오이카와는.”

카게야마는 잠시 말을 멈췄다. 어젯밤 한 번도 흔들 수 없던 눈동자가 사정없이 떨리고 있었다. 그래. 그 단어 앞에서만 무릎을 꿇는 단단함도 좋아.

“…오이카와가 특별했던 거야.”

그러니까 그는 카게야마의 고삐이며, 재갈이고 채찍이었다. 미야는 알 듯 말 듯 한 묘한 표정을 지으며 수의사의 손목을 잡았다. 그대로 비틀어 꺾자, 손 안에서 포크가 툭 떨어졌다. 미간을 찡그리면서도 영롱하게 빛나는 눈동자를 꺾지 않는 상대를, 미야는 그대로 끌어다 자신의 아랫배에 처박았다.

“윽.”
“시시하지 않는 내 토비오.”
“이거, 놔-”
“네가 없는 동안 너무 심심했어.”
“수작, 부리지 말고―, 윽. 대답이나. 우윽. 미야!”

동그란 머리통을 단단히 팔뚝으로 감아 꾹 끌어당기자, 뱃속이 가득 채워진 것 같은 포만감이 들었다. 나는 사실. 어쩌면 내가 너를 꺾기 위해 태어난 게 아닐까. 하는 생각을 했었다.

◆◆◆

이와이즈미는 커다란 가방을 들고 한 낮의 도로에 서 있었다. 여름이었던 작전 수행지와 달리, 이곳은 꽤 서늘해서 자켓을 입었는데도 전혀 더운 기분을 느낄 수 없었다. 스포츠 백 하나를 어깨에 둘러매고, 모자까지 눌러쓴 그는 핸드폰에서 눈을 떼지 않았다. 그러길 몇 분이나 지났을까.

 빠앙, .

요란하게 치장된 스포츠카 한 대가 경적을 울렸다. 계속 핸드폰만 확인하던 이와이즈미가 고개를 들었다. 표정은 아주 빠르고 역동적으로 변해갔다. 질색이라는 감정을 가장 효과적으로 구현해낸 얼굴 앞에서 차창이 내려갔다. 그리고 익숙한 얼굴이 싱글싱글 웃는 표정으로 나타났다.

“여, 팀장.”
“지금 이건 뭐하는 짓이냐. 하나마키.”
“마이 드림카야. 끝내주지?”
“너―.”

도대체 어디부터 손 봐야 할지 알 수 없어서 팀장은 뻔뻔한 얼굴 앞에서 한숨만 깊이 쉬었다.

“우리가 가는 게, 공식적인 일정은 아닌데다가 최대한 숨겨야 하는 일인 건 알고 있냐?”
“그럼, 잘 알고 있지. 여기까지 행적을 지우면서 오는 게 얼마나 힘들었는데.”
“그걸 아는 사람이 이렇게 화려한 차를 가져 와?! 아예 여기 있다고 광고를 하지 그러냐. 이래서야 도대체 오이카와랑 다를 게 뭐야!”
“아무리 팀장이라도 그 말은 정말 너무하다.”

하나마키는 쓰고 있던 선글라스를 벗으며 정색했다.

“평소에 입는 옷을 봐. 내가 오이카와랑 센스를 비교당할 이유가 어디에 있는데?”
“하나마키.”
“응?”

팀장은 입고 있던 자켓 한쪽을 살짝 열어 보이며 싸늘하게 웃었다. 컨실드 캐리되어 있던 글록22 권총이 위압적인 모습을 잠시 드러냈다.

“히익.”
“탄흔으로 너의 그 오이카와보다 괜찮은 취향을 박살 내버리기 전에 당장 바꿔 와.”

하나마키는 서둘러 차창을 올렸다. 부아아앙. 요란한 소리와 함께 출발한 차는 얼마 지나지 않아 가장 무난한 차종과 색깔로 바뀌어 되돌아 왔다. 그제야 차에 탑승한 이와이즈미는 CCTV의 위치에 주의하며 차창을 내려 밖을 보았다. 계절에 맞게 라벤더가 절정으로 피어 있었다. 그런 와중에도 멀리 보이는 커다란 산꼭대기에는 아직 하얀 눈이 쌓여 있는 서늘한 지역. 여기는 훗카이도였다.

“위치는 알고 있지?”
“물론.”

도로 상황용 CCTV를 간간히 확인해 길을 돌아가며 하나마키가 짧게 대답했다. 마지막으로 마츠카와의 핸드폰 위치가 잡힌 곳은 학교에서 공항으로 가는 그 중간 즈음에 있었다. 상부에서는 실종된 요원의 소재를 파악하는 일을 다른 팀에게 일임하겠다고 지침을 내렸다. 당연하게도 지킬 생각이 없는 지침이었다. 점점 더 한적한 곳으로 바뀌어 가는 풍경을 보며 팀장을 눈을 감았다.

제발 살아만 있어라.

팀원들 앞에서는 당연히 생존해 있으니 찾기만 하면 된다고 큰소리를 친 그였지만, 아무리 상황을 곱씹어 보아도 객관적 가능성은 낮았다. 살아 있을 것이다. 살아 있을 지도 몰라. 살아 있을까. 이 세 문장을 번갈아 오고 가는 괴로운 고민 속에서 차는 끊임없이, 또 끊임없이 도로를 달렸다. 점점 한적해져 가는 길이었다.

◆◆◆


“와, 이거 어떻게 알았어?”
“아츠무, 너 진짜 똑똑하다.”
“대단히 영민한 학생입니다.”

칭찬 또한 질릴 수 있는 것이었다. 아주 어렸던 시절에는 그것 한 번을 듣기 위해서 노력해 보기도 했지만, 그다지 큰 힘을 들이지 않아도 되는 일이란 것을 알고 나서는 요령을 부리는 쪽으로 방향을 바꿨다. 하지만 그렇다고 칭찬의 총량은 그다지 달라지는 것이 없었다.

“들었어? 미야家의 독자래.”
“아츠무는 진짜 잘생기지 않았어?”

태생부터 타고난 것들이 그러했고.

“어머, 올해에 아츠무 맡으셨어요?”
“1등상은 선생님 반이시겠네요. 발표회 때도 볼만하겠어요. 너무 좋으시겠다.”

재능도 그러했다. 원하지 않아도 사람들은 부지런히도 칭찬과 칭송을 가져다 바치곤 했다. 주변 사람들이 비춰주는 스포트라이트는 눈이 멀 지경이라 때때로 머리가 아팠다. 귀찮았고, 시시했다. 시덥지 않은 이야기나 하는 어린애들을 더는 견딜 수 없어 싸우고 온 첫 날, 아버지는 아츠무를 엄하게 혼냈지만 마음에 와 닿은 것은 없었다. 오히려 마음에 닿은 이야기는.

“아츠무. 그들을 같은 급으로 생각하면 안 된단다.”

할아버지에게서 나온 말들이었다. 아직 정정했던 집안의 주인은 미야에게 혈통이 보증되어 있는 훌륭한 망아지 한 마리를 선물하며 그렇게 운을 떼었다.

“하물며 말에도 있는 등급이 사람에게 없겠느냐.”

주름이 서서히 잡히기 시작한 손으로 윤기가 자르르 흐르는 말의 갈기를 쓰다듬으며 그는 아비에게 엄히 혼나 시무룩해진 어린 손자에게 미야家의 이치를 말해주었다.

“사람이 좀 나은 것은 등급이 매겨지는 걸 알면 불쾌하게 여긴다는 것 외엔 없단다. 아주 약간의 이성 같은 거지.”
“할아버지. 그럼 제가 어떻게 해야 해죠?”

맑은 눈동자를 한 검은 말에게 시선을 둔 채, 손자는 어른스럽게 되물었다. 그 질문에 대답하는 대신, 할아버지는 손자에게 말을 예뻐하는 법을 가르쳤다. 잘 보살피고, 먹이를 주고, 원하는 방향으로 움직이게 하는 법들까지 모조리. 그리고.

“지금 배운 대로 하면 어떻겠니?”
“네?”
“그냥 어여삐 여겨 주란 뜻이란다.”

아. 어린 소년은 자신의 손이 당기는 대로 따라오는 말을 보며 깨달았다. 말처럼 사람도 길들일 수 있는 것이었다. 어떤 것은 쉬웠고, 어떤 것은 조금 까다로웠다. 부드럽게 대해야 할 때도 있었고, 억누르고 격차를 보여줘야 하는 때도 있었다. 그런 것들은 똑똑한 어린 아이의 유희가 되었고, 곧 대부분의 사람이-공교롭게도 할아버지까지 포함되어- 동물과 같은 급이 되었다. 그렇게 그것 자체가 아이의 가치관이 되었을 무렵.

“카게야마 토비오란다.”
미야는 ‘카게야마 토비오’를 만났다. 세간에는 아직 잘 알려지지 않은 어린 천재였다. 그리고.

“…어.”
처음으로 체스 게임에서 동년배에게 져 보았다. 기상천외한 전술을 구상하고, 실현한 어린 천재는 벙찐 표정을 짓고 있는 미야를 똑바로 바라보았다.

“너.”
그 아이가 그렇게 새파란 눈동자를 가지고 있다는 것을 지고 나서야 알았다.

“봐주지 마.”

초반에 자신을 봐주고 있다는 것조차도 눈치 챈 어린 아이는 조그만 손으로 따박따박 체스를 정리했다. 검은 것, 흰 것을 나누고 가지런히 열을 맞추었다. 미야는 계속 그 손의 어줍잖은 움직임만을 보고 있었다. 자신의 패배가 불러일으킨 광경을, 그리고 그것이 주는 희열을 만끽했다.

“또 하자.”
조그마한 입술이 조잘거리며 사람의 말을 내뱉었다.

“네가 안 봐줘도 이길 수 있거든.”

아니, 얜 그냥 사람이었다. 미야는 잠시 고개를 돌려, 화장대 위의 거울 속 자신을 바라보았다. 동공이 있는 대로 확장되어 있었다. 그는 스스로를 보며 웃었다. 그때부터 미야는 자신이 뭘 원하는지 알고 있었다.

◆◆◆

“보채지 마. 토비오. 다 말해 줄 테니까.”

미야는 두 손으로 고개를 꽉 잡아 자신에게 들어 올리며 말했다. 짓이겨진 탓에 발갛게 달아올라 있는 얼굴은 색깔부터 시작해 이목구비 전체로 화를 내고 있었다. 자신과 달리 얇게 빠진 눈썹 위를 덧그리며 저택의 주인은 상냥하게 눈을 접어 웃었다.

“아마 말해주지 않아도 너는 다 알게 될 거야. 똑똑하니까.”
“네가 거짓말만 하지 않으면 그렇겠지.”
“응. 그건 좀 조심해. 매번 당하잖아.”

목덜미 채로 들어 올린 몸을 식탁 위로 처박으며 그가 가벼이 대꾸했다. 배에 부딪쳤던 것과는 차이를 비교할 수 없는 타격이 얼굴을 강타했다. 그나마 마지막에 고개를 돌려 코를 부딪치는 것을 피한 머리를 한 손으로 내리 누르며, 미야는 식기구를 한 번에 쓸어 바닥으로 떨어뜨렸다.

 채앵, . 챙챙.

접시는 비싼 만큼 섬세하여 오히려 깨지기 쉬운 것들이었다. 하지만 박살이 나도 얼마든지 다시 구입할 수 있는 자들에게 그것은 특별한 것이 아니었다. 미야는 수의사의 손목을 잡아 머리 양 옆에 내리눌렀다. 배 밑에서 조금 작고 얇은 몸이 꿈틀거렸다. 이틀 간 먹은 것이 하나도 없을 텐데 꽤나 거친 반항이었다.

“얌전히 있어 봐. 토비오. 계속 이렇게 잡고 있으면 다음 일을 할 수는 없잖아.”
“하지, 마-! 그만, 윽. 하라고.”
“그 날엔 잘도 했잖아. 좋다고 울면서, 더 해달라고 조르면서, 내 이름을 계속 부르면서.”
“아, 아니야.”
“그 때처럼 누가 봐줬으면 좋겠어? 사용인들이 널 잡고 있게 해줄까?”

조근조근 건네는 말에, 숨을 들이키며 좁아졌던 날개뼈가 천천히 내려앉았다. 씨근덕 거리는 숨소리 또한 잦아 들어갔지만, 살갗을 뚫고 나올 듯 솟아난 손등 뼈는 좀처럼 가라앉질 못 했다. 미야는 천천히 손목을 잡고 있던 힘을 놓았다. 깜찍하게도 손은 그대로 얌전히 그 자리에 있었다. 그 후로는 아무런 방해도 없이, 그는 잘 입혀져 있던 바지의 벨트를 풀어내고, 버클을 풀었다. 부드러운 질감의 바지는 소리 없이 발치로 떨어졌다. 수의사는 눈을 감았다.

“미야.”
이미 쉬어 버린 목소리였다.
“…?”
헐거워진 와이셔츠 밑으로 손이 들어왔다.

“나는 평생 이 짓을 용서하지 않을 거야.”

고생을 해 보지 않은 도련님의 매끈한 손끝이 척추를 하나하나 훑고 천골에 닿았다. 어젯밤 자신을 최고의 지점으로 떠오르게 했던 입구로 이어지는 곳이었다. 앞으로 일어날 일을 알고 있는 몸은 의지와 관계없이 부르르 떨렸다. 힘이 풀린 다리가 테이블에 의지해 겨우겨우 몸을 지탱했다. 미야는 와이셔츠를 걷어 올리고, 옴폭 패인 허리 부근에 입을 맞췄다. 그렇게 해.

“사실 난 그런 것도 퍽 싫진 않아. 그것도 꽤 특별하잖아?”
“그렇지만. 토비오.”
“아마 불가능할거야.”

◆◆◆


“으, 으윽. 으…. 으으.”

어떤 심정이었냐고 묻는다면 잡아먹고 싶었다고 답할 것이다. 괴로움이 일관되게 흐르는 신음을 내뱉는 까만 뒤통수를 꽉 잡으며 미야는 생각했다.

“아. ㅇ응. 으으.”

너는 자신이 가진 천재天才성이 아무것도 아니라는 듯한 그 태연함이 가장 특별했다. 그런 네 앞에서 가장 크게 느낀 것은 허기였다. 상처 같은 거 하나 없이 매끈하게 통째로 뱃속에 넣은 후, 오래토록 소화시키고 싶었다. 재능. 그리고 그 재능을 둘러싸고 있는 거죽. 꾸민 데라고는 없는 새까만 머리카락, 화려하지 않은 벽안, 건강하게 그을려 있는 아이다운 피부. 동그랗고 작은 복사뼈까지. 네 모든 것이 나에게는 허기였다. 그러니까 꽤 오래 전부터 나는 굶고 있었어.

“토비오.”

그는 입을 벌려 벗겨진 어깨를 깨물었다. 깊고 깊은 식욕을 다스리기엔 뱃속에 넣어진 것이 터무니없이 적었다. 전부 다. 모두 내 놔. 네가 가진 것들 중, 내 것이 아닌 건 없어야 해. 그야말로 전부. 하나도 빠짐없이, 남김없이. 모두 다. 내가 너에게 그랬듯이.

“왜, 날 사랑하지 않았어?”
“아. 으…. 으, 으. 너무 깊,어…. 그만-.”
“내가 너에게 잘 해줄 때, 날 사랑했으면 됐잖아.”

내가 가장 뛰어난 너를 선택했듯이, 너 또한 그러했으면 될 일이었다. 하지만 카게야마는 그러지 않았다. 그는 조금 뛰어난 실험체에 불과했던 ‘오이카와 토오루’를 선택했다. 비운이었다. 나에게도, 너에게도. 그에게도.

◆◆◆


“요원이 되실 때, 안내받으셨겠지만. 징계위원회에서는 리스트 문답을 통해 미션 실패에 대한 요원분의 책임이 어느 정도인지를 먼저 측정할 겁니다.”
“으응? 그게 측정될 수 있는 거였나.”
“본부에서는 다양한 방식의 통계 자료 합산과 슈퍼컴퓨터의 능력을 활용한 예측 시스템을 갖추고 있습니다. 오차는 당연히 있을 수 있겠지만, 크진 않다고 보고 있지요.”
“아, 그 시스템. 몇 년 전에 대파 당했다고 하지 않았어?”

오이카와는 턱을 괴고 천진하게 웃으며 답했다. 생긋싱긋 웃으면서 대화를 나누고 있긴 했지만, 장소는 제법 살벌했다. 네모 반듯한 탁자 하나, 마주 본 의자 두 개, 삿갓 전등 하나, 네 방향에서 쏘아내고 있는 CCTV, 벽의 한 면은 거울. 한 쪽만 볼 수 있을 것이 분명한 특수 거울. 그 너머로 쏟아지고 있을 것이 분명한 타인의 시선에 위축됨이 없는 요원에게 그녀는 상냥하게 웃어 보였다.

“복귀는 거의 완료되었답니다. 아, 앞으로 필요 없는 질문은 삼가주세요. 오이카와 요원님.”
“불편했어? 미안미안.”
“하나 정도는 괜찮습니다.”

세련된 미소를 짓자 보조개가 살포시 패였다. 상황을 떠나 꽤 매력적인 여자였다. 물론 요원은 큰 관심은 없었다.

“그 1차 결과를 가지고 위원회에서 실제 징계 수위를 논의하게 됩니다. 기계가 가차 없이 정한 내용을 인간이 되짚어 보는 거죠.”
“합리적으로 들리긴 하네.”
“어머, 정말 합리적이랍니다.”

웃음기가 서려 있지만 단호한 목소리였다. 오이카와는 웃는 낯을 유지하며 그녀를 마주 보았다.

“받으실 수 있는 징계 수위는 다양하여 이 자리에서 모두 설명 드리기는 힘든 관계로 파일로 보내드릴 예정입니다. 최종 결정되는 데는 대략 2주 정도의 시간이 소요되곤 하니, 그 동안은 본부에서 제공한 멘션에 계시면 됩니다.”
“으응. 나가는 건?”
“예상하셨겠지만 안 됩니다.”
“오이카와씨 조금 무서워지려고 해.”

진심의 두려움은 없는 목소리로 떠는 너스레에 그녀는 다시 보조개를 지어 냈다.

“휴식이라고 생각해 주세요. 조사를 받는 것을 제외한 나머지 시간에 요원님에 대한 건강 검진과 치료, 상담들도 계획되어 있으니까요.”
“앗? 괜찮아. 나는 건강하니까.”
“의무사항입니다.”

똑 부러지는 목소리로 정리하며, 그녀는 스케쥴 표를 내밀었다. 오이카와는 눈으로 대충 훑어보았다. 그의 눈썹이 동시에 슬쩍 밀어 올려 졌다가 내려앉았다. 예상하긴 했지만 역시. 조사 시간보다 많은 시간이 건강검진으로 잡혀 있었다.

◆◆◆


미야는 카게야마의 목에 에이전트 본부의 출입증을 걸어주었다. 다른 사람들 것과는 비슷하지만 마크의 색깔은 잿빛이었다. 기능 또한 달랐다. 연구실로 직행되는 단 하나의 문만 들어갈 수 있도록 되어 있으며, 나오는 것에 대한 권한은 하나도 들어 있지 않은 카드였다. 길이는 넉넉하여 카드는 어렵지 않게 명치 부근에 닿아 있었다. 그러나 아직 식지 못한 고통이 거친 움직임으로 가슴을 들썩거리는 통에 툭툭, 조금씩 밀리던 카드는 얼마 버티지 못하고 옆구리 부근으로 떨어졌다. 기진맥진한 가운데 몰려오는 현기증을 견디지 못하고, 카게야마는 눈을 감았다. 곧 잠들 것 같았다.

"내일은 다시 '오이카와 토오루'를 만날 수 있을거야."

혼곤한 가운데, 목소리가 나직나직 정신을 조여들어왔다.

"실험실에서 말이야. 그가 완벽히 '정상'으로 판명나게 되면 그 기계를 재현할 생각이야. 클라이언트가 완벽한 안전을 요구했거든."
"..."
"토비오."

내리 대답이 없는 상대의 볼을 툭툭 치며 미야가 다그쳐 물었다.

"그에게 말해줬으면 좋겠어? 이제부터 당신의 건강검진을 할 의사가 '카게야마 토비오'라고."
"아니, 알리지 마."

거절의 말로도 모자라 카게야마는 고개를 세차게 저었다. 예상했던 반응이었다.

◆◆◆


꿈속인 것 같은데, 노래 소리가 들렸다.

음과 박자를 모두 놓치고 있는 노래였다. 거기에 걸걸하여 바람 소리가 많이 섞인 목소리는 듣기가 괴로운 것이었다. 그것은 진공관 앰프에 고음질의 스피커로 음악 감상을 하는 것이 취미인 남자에게 고통의 극치와 비슷했다. 마츠카와는 온 몸을 뒤틀면서 괴로워했다. 아. 그만해. 제발 그만해. 제발. 제발.

“그, 그으만. 해에.”

허공에 손을 허우적거리며 그는 눈을 떴다. 온 몸이 땀으로 젖어 있었다. 눈앞에 떠 있는 두 손은 온통 붕대로 감겨 있었고, 그마저도 곧 툭 떨어졌다. 어깨가 너무 아파서 더 들고 있을 수가 없었다. 다행인 것은.

“….”

귀를 고문하던 노래가 그쳤다는 것이었다. 그는 돌아가지 않으려는 뻣뻣한 고개를 이리저리 옮겨가며 주변을 살폈다. 낡은 집이었다. 깨끗하고 넓긴 했지만, 집세가 비쌀 것 같지는 않았다. 손때가 반질거리는 가구나 스며들어 있는 냄새도 그러했다. 도대체 여기가 어디지. 마츠카와는 머리를 울리는 진통 속에서도 기억의 마지막을 찾으려고 애를 썼다.

“깨어났나?”
갑자기 목소리가 들려왔다.

“….”
그는 시선을 한껏 돌려 보았다. 아직 머리는 아팠지만 문간에 한 남자가 서 있는 광경은 틀림없이 눈에 넣을 수 있었다.

“벌써 깨어나다니. 이건 기적이군. 자네는 운이 아주 좋아.”

쇳소리가 많이 섞인 목소리는 노래 소리의 주인공이 맞는 듯 했다. 그런데. 그 모습이 기괴해서 아직 꿈을 꾸고 있는 것 같았다.

“많이 놀랐군.”
상대는 그럴 줄 알았다는 듯 태연하게 말을 받았다. 마츠카와는 경계심 어린 눈빛으로 그를 훑어보았다.

“하긴 그럴만한 몸뚱이지.”

남자에겐 팔이 하나 없었다. 무릎 밑으로 70도 가량 뒤틀린 한쪽 다리에는 철로 된 보조기구가 묶여 있었다. 그렇게 기울어 있는 몸에 붙은 얼굴 또한, 반쪽이 완전히 짖이겨진 있는 상태였다. 호감을 줄 수 있는 첫인상은 확실히 아니었다. 서포터는 아직 손끝 하나 움직일 수 없는 자신의 몸을 떠올리며 침을 꿀꺽 삼켰다. 발성이 부정확할 수밖에 없는, 반이 쪼그라들어 있는 입술로 그는 웃음을 지어 보였다.

“괴물처럼 보이겠지만 안전에 대해서라면 걱정 마시게. 자네를 구한 것은 나였으니.”
“누, 누구십니까.”
“자네가 아는 사람이지.”

그는 힘들게 걸어와 한 손에 들려 있던 쟁반을 침대 옆 좁고 작은 협탁 위에 올렸다. 약봉지와 작은 죽 그릇이 놓여 있었다. 그러나 환자는 그것에 관심이 없었다.

“제가 아는 사람이라니 무슨 말씀이십니까?”
“경험한 적은 없지만 내 얘기는 들었을 걸세.”

그럴 리가 없었다. 그는 또 한 번 입술을 뒤집으며 웃은 뒤에, 마츠카와의 상태를 살폈다. 놀랍게도 매우 전문적이며 익숙한 손놀림이었다. 혈관을 정확하게 찾아냈으며, 의료 기계를 다루는 것 또한 능숙했다. 마츠카와는 그의 눈동자에서 지성만이 줄 수 있는 영민한 빛을 읽어 낼 수 있었다.

“미야가에서 듣지 않았나. 작은 주인이 옥상에서 밀어버린 사람이 있었다고.”

그는 침착한 표정으로 마츠카와를 들여다보고 있었다. 서포터는 가까이 다가온 그의 얼굴에서 나이의 흔적을 찾아보았다. 끔찍한 사고의 흔적을 제외하고도 말투나 안광, 목의 주름 등은 그가 절대로 미야 아츠무와 카게야마 토비오의 동년배일 수 없음을 보여주고 있었다.

“내가 바로 그 일의 진실이자 실체일세. 그 외에는 모두 거짓이지. 뭐라고 꾸며내었을 지는 이제부터 들어봐야겠지만. 명심하게. 그 아이의 말에는 항상 거짓과 진실이 섞여 있으니.”

지금 하고 있는 생각을 모두 안다는 듯이 남자는 차분하게 말을 이어나갔다. 마츠카와는 순간, 그의 목소리에서 절절한 애증과 비통함을 느낄 수 있었다.

“지금.. 그 아이라고 하셨습니까?”
“그래. 누가 뭐래도 나는 그렇게 부를 수 있지.”

그는 허공을 바라보며 그렇게 말했다. 마츠카와는 무엇인가를 직감했다. 믿을 수 없었지만 들어맞는 조각 하나가 있었다. 서포터는 남자의 얼굴을 좀 더 본격적으로 뜯어내기 시작했다. 찾으려고 하니 의외로 쉽게 찾을 수 있었다.

“나는.”

남자의 멀쩡한 왼쪽 눈. 눈썹의 모양. 웃을 때, 입가의 움직임. 그 모든 것이 그 집안 고유의 생김새를 가지고 있었다.

“미야 아츠무의 아버지 되는 사람일세.”

마츠카와는 눈을 커다랗게 뜨고 그를 다시 보았다. 죽음에서 자신을 건져 올린 그는 놀랍게도. 이야기 속에 한번도 등장하지 않았던, 할아버지인 큰 주인과 손자인 작은 주인 사이의 남자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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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랜만의 블라인드 게임입니다. :)
1. 이 편부터 2부가 시작됩니다. 일주일에 한 편은 꾸준하게 올리자는 생각으로 쓰고 있는데, 금, 토 모두 일이 있었던지라 광휘는 도저히 한 편 분량을 맞출 수가 없을 것 같아, 간만에 블라인드 게임을 잡아 보았네요! 광휘는 다음 주말을 목표로!!
2. 오이카게+미야 입니다. 개인적으로 + 표시는 일방적 감정이거나 쌍방무감정을 뜻합니다. 미정(이와카게+오이)에서는 쌍방무감정에 가까웠다면, 블겜에서는 일방적 감정에 조금 더 가까울 것 같습니다.
3. 다음편은 천천히 만나요~! 하지만 요새 미야카게가 너무 칙칙폭폭인데다가 오이카게 붐도 같이 와서 정말.. 손가락이 근질근질.ㅠ0ㅠ 조금 더 덕질할 시간이 넉넉했으면 좋겠네요.ㅠㅠㅠㅠ 흑흑.ㅠㅠㅠㅠ 가장 쓰고 싶었던 과거 오이카게는 정작 시작도 못 했는데! ㅠ0ㅠ 말입니다! ㅠ0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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