Blind Game
-1-
“도대체 무슨 일이 있었던 거냐.”
할아버지는 엄한 목소리로 물었다. 미야는 잠자코 고개를 들었다. 뽀얗게 세탁된 와이셔츠 위에는 검은색 카디건이 단정하게 입고 있었다. 아버지가 사망했다고 발표된 날이었다. 조부는 집안의 명예를 택했다. 생명은 붙어 있었지만, 혹여 기적적으로 살아난다 해도, 반푼이가 되어 버린 아들을 집안의 대표로 세울 생각이 그에겐 없었다. 그래서 장례가 치러졌다. 가장 무난하게 봐줄 수 있는 교통사고로 의사와 입을 맞췄다. 아들의 졸업식에 참석했다 귀가 하는 중에 일어났던 심각한 교통사고로 인한 사망. 그것이 부친의 사망신고서에 기록된 내용이었다. 학교도 이에 동의했다. 원래 권력은 한통속이 되는 법이었다.
“정말 실수였어요. 그 날, 바람이 많이 불었어요. 옥상이라 더 심하다는 것을 제가 생각하지 못했어요. 제 트로피를 안아보고 싶다고 해서 드렸는데 생각보다 무거우셨나 봐요. 휘청하셨어요. 손을 내밀었는데, 제가 같이 떨어질 까봐, 잡지 못하셨어요. 그래서.”
“아아….”
며칠 전보다 훨씬 늙고 수레 해진 얼굴을 마주보며 미야는 군데군데 의도적으로 끊어가며 말했다. 아버지는 독자였고, 자신도 그러했다. 아무리 조부가 정정한다고 한들, 새로운 아들은 언감생심, 꿈도 못 꿀 일이었다. 콧대 높은 그가 미야家의 거대한 부를 친척들에게 줄 리도 만무했다. 사회에 환원한다는 것은 아예 옵션에서도 빠져 있었다. 선택권은 자신 밖에 없었다. 그러니 의심은 되겠지만, 착각을 선택해주길 바랐다. 그 결정을 돕기 위해 아츠무는 슬픈 표정을 지어냈다.
“아버지께서 하루 빨리 깨어나셨으면 좋겠어요.”
식물인간 상태로 누워 있는, 몸의 반 이상이 박살나고 흉하게 일그러진 아버지의 얼굴을 보는 건 생각보다 떨리지 않았다. 완전히 죽었으면 더 깔끔했겠지만, 손을 더 댈 순 없다는 것을 17살의 아이는 이미 알고 있었다. 적어도 지금은 댈 수 없었다. 미야는 영악하고 예쁜 표정을 지어 보였다.
“할아버지. 아버지의 공백이 크신 거 알아요.”
그리고 슬픔으로 약해진 마음을 살며시 손에 쥐었다.
“당장 중앙지부와의 일도 그렇고, 후원의 일도 그렇고. 요원을 양성하셨던 일에도 차질이 있으시겠죠.”
“…그런 건 어떻게 다 알고 있었느냐.”
“저, 그렇게 어리지 않아요. 아버지께서 종종 저에게 상담을 해오시기도 했었고. 학교도 졸업했구요.”
조부가 자신에 대해 가지고 있던 자부심을 부채질하고, 아들의 부재로 허물어진 빈 곳에 열심히 채워 넣었다. 당신은 무너지지 않아야 한다. 나를 미워해서도 안 된다.
“다행히 할아버지께서는 아직 정정하시니 복귀하셔도 괜찮잖아요.”
그 막강한 권력을 손에 잘 쥐고 있다가.
“앞으로는 아버지 몫까지 제가 더 열심히 할게요.”
나에게 넘겨 줘. 직접 준비한 찻잔을 권하며 아츠무는 마음속으로 그렇게 되뇌었다.
-2-
“토비오?”
비어 있던 자신의 방에 불을 켜자 동그랗게 웅크려 있던 까만 그림자가 화들짝 놀래며 고개를 돌려왔다. 카게야마였다.
“왜 여기 있었어?”
미야는 헝클어져 있는 까만 머리카락과 붉어져 있는 눈 주변을 보았다. 계속 웅크리고 있었는지 옷도 마구잡이로 구겨져 있었다. 그는 문가에 있던 작은 거울에 자신의 모습을 비쳐보았다. 말끔했다. 누가 보아도, 아버지가 다친 것은, 혹은 죽은 것은 자신이 아니라 카게야마 쪽이라고 생각할 것 같은 대비였다.
“난 괜찮아.”
상대가 얼토당토않은 위로를 꺼내기 전에, 그는 선수를 쳐서 말했다. 담담한 대답에 턱 밑이 바짝 당겨졌다. 부스스 일어나는 머리카락이 화가 난 것 같기도 하고, 슬퍼 보이기도 해서 오묘했다.
“….”
그렇다고 감정을 표현해내는 말재간은 없는 아이였다. 미야는 침대 위로 올라가 카게야마를 끌어안았다. 하루 종일 볕 하나 받지 못했는지 수더분한 향이 났다. 담뿍 들이마시고 있자니 팔 밑에서 손이 쭉 빠져 나오더니 등을 가만가만 만지고, 쓸어내렸다. 뭐하자는 거지. 설마.
“토비오, 혹시 날 걱정해 주는 거야?”
손이 멈칫하더니, 얌전히 허리를 끌어안았다. 먼저 안아주는 것은 처음이라 기분이 좋아졌다. 미야는 목덜미에 코를 파묻었다.
“고마워.”
병원에는 같이 들렸었다. 워낙에 참혹한 상태라 걱정했던 것이 무색하게 무표정한 얼굴이었는데, 병실에서 나오자마자 주저앉아서는 숨을 헉헉거렸다. 과호흡 증세였다. 쉬라고 집에 두었더니 하루 종일 나를 기다리며 울고, 슬퍼하고. 안아 주고. 깜찍한 검은 고양이. 아버지가 그렇게 된 게 너 때문인지도 모르고. 작은 주인은 물기가 쭉 빠져 있는 몸을 더 꽈악 끌어안으며 웃었다. 평소처럼 아프다는 소리도 하지 않았다.
“슬프긴 하지만, 나 정말 괜찮아.”
그는 기쁘게 웃으면서 말했다.
“진짜 괜찮아.”
진심이었다.
-3-
아츠무의 아버지는 내 세계에서 가장 강한 사람 중 하나였다. 그런데 교통사고가 그 사람을 깨어날 수 없는 깊은 곳에 잠들도록 만들어 버렸다. 팔이 잘리고, 얼굴이 짓이겨 졌다. 본인의 힘으로 할 수 있는 것은 아무것도 없는 상태로, 마냥 죽음이나 혹은 기적을 기다려야 하는 그런 존재가 되어버렸다. 내 부모님도 그렇게 돌아가셨었다. 거기까지 생각이 흐르자 잠이 오지 않았다. 피곤함에 억지로 잠을 청하면 어김없이 악몽이었다. 귀에서 차가 미끄러져 생기는 그 소리가 들리고, 커다란 게 부딪치는 소리가 들리고, 비명 소리가 들리고. 눈 앞에 팔이 나뒹구는 그런 꿈. 차라리 몰랐을 때는 아무렇지 않았는데, 알게 되니 무서워졌다. 슬퍼졌다. 저런 일을 부모님이 겪으셨다는 것이 '인지'된 것이다.
책을 뒤져보니 이것은 ‘트라우마’라고 했다. 이성으로는 알 수 없는 나의 저 안 쪽, 가장 깊은 곳에 부모님이 살아계시는 것이라고 했다. 죽고, 다시 죽고, 그리고 다시 살아나신다. 그렇게 갑자기 찾아온 ‘슬픔’이라든지, ‘두려움’은 너무 괴로워서 마음이 뭉개져 버렸으면 좋겠다고 생각했다. 아니면. 그럴 수 없다면. 차라리 나쁜 기억을 다 지울 수 있으면 좋겠다고 생각했다. 컴퓨터처럼 ‘Delete’시켜 버릴 수 있으면 얼마나 좋을까.
그럼 ‘트라우마’에 걸리는 사람은 없을 텐데.
-4-
“여기냐?”
“핸드폰의 기록으로는 그렇지.”
묘한 말을 하며 하나마키는 차에서 내렸다. 갓길에 세워진 차량은 그들의 것 하나였고, 지나다는 것 또한 드물었다. 이와이즈미는 잔해 하나 없이 깨끗한 도로에서 막막한 기분으로 팔짱을 끼었다.
“확실히.”
그의 눈은 가드레일을 살피고 있었다. 사내답지만 키에 비해선 작은 손이 잿빛 광택이 도는 표면을 한번 쓸어내린다. 손바닥을 뒤집자 미량의 먼지가 묻어 나왔다.
“여기만 새 거긴 하네.”
장시간의 운전에 뻐근한 어깨를 붕붕 돌리며 하나마키가 다가왔다. 힐끗 목을 빼내어 밑을 보자, 현기증이 날 정도로 깊은 절벽이 보였다. 수풀더미 같은 것으로 가려 놓았지만, 잘 보면 허리통만한 굵은 가지가 뚝뚝 끊어져 있는 나무들도 눈에 띄었다. 충돌의 흔적들이었다. 아래에서 올라오는 형형한 바람이 머리카락을 흩날렸다. 서포터는 묵묵히 자신의 탭북을 켰다.
“역시 내려가 봐야 하나.”
소매를 살짝 걷으며 길을 살펴보던 팀장은 발랄한 전원 음이 들리는 쪽으로 고개를 돌리고는, 한껏 인상을 찌푸렸다.
“…포켓몬 잡는 중이면 죽인다.”
“무슨 소리야. 팀장. 업무 시간 중에는 안 하거든.”
“지난 번 회의 때에, 오이카와 머리 위에 푸린이 앉아 있다며 요란법석을 떨어댄 건 어디의 누구였지?”
“세이죠 팀의 하나마키였습니다~.”
시원시원하게 대답한 그는 탭북을 연신 두들기더니 화면을 팀장에게 돌렸다.
“팀장. 사실 나도 불법적인 일은 좀 했는데.”
화면에는 이 지역의 지도가 떠올라 있었다. 그리고 20km 정도 떨어진 곳에서 빨간 점이 깜빡이고 있었다. 이와이즈미는 눈 사이를 좁혔다. 동그란 점 가장자리에는 작은 글씨로 ‘맛층’이라고 적혀 있었다.
“너 이거.”
“맛층의 손목시계에 위치 추적기를 넣어두었지.”
엄지손가락을 치켜들며, 하나마키가 씨익 웃었다. 팀장은 아무 대답도 하지 않고 두 손으로 탭북을 꽉 잡아 얼굴 앞으로 가져왔다.
“첫째로, 추적 반경 범위를 넘어서지 않아서 다행이야.”
서포터는 사근사근한 표정으로 웃었다.
“둘째로, 시체를 유기하려 20km나 이동했다는 것은 아무래도 무리지. 그렇게 많은 사람이 살 거 같아 보이진 않지만, 어쨌든 주택가이고 말이야.”
하나마키는 팀장의 등을 철썩 쳤다.
“즉, ‘마츠카와 잇세이 요원은 무조건 살아있다.’고 한 팀장의 강력한 주장은 사실일 확률이 높을 것 같거든.”
등을 얻어맞으면서도 이와이즈미는 계속 화면만 보고 있었다. 콧잔등을 살살 긁적거리던 하나마키가 한숨을 푹 내쉬며 어깨를 꽉 잡았다.
“그러니까 울지 마.”
신뢰란 때때로, 무게가 되는 법이었다. 여기까지 오면서 누구에게도 추적기에 대해 말하지 못했던 것은 혹시라도 죽음에 대한 확실한 증명이 되지 않을까 싶었던 마음 때문이었다. 팀장도 같은 생각으로 외려 큰 소리를 탕탕 쳐댔을 것이 분명했다. 자신의 기대가 타인의 지지대가 되길 바라고, 기대에 대한 무게는 온전히 스스로가 지고자 하는 무식함을 하나마키는 그에게 배웠다. 한결같이 우직한 남자였다.
“팀장, 오늘 철철 울었다고 오이카와한테 이른다.”
“닥, 닥쳐라.”
포켓몬이 판을 치는 이 때, 아직도 고질라나 좋아하는 팀장의 약점을 공략하며 하나마키는 푸른 하늘을 올려 보았다. 그리고는. 만약 살아 있지 않으면, 죽여 버릴 거라는 허무맹랑한 협박을 마츠카와에게 날렸다.
-5-
“이제는 알아차렸겠지. 아츠무의 이야기에는 있어도 말이 되지만, 없어도 괜찮은 존재가 하나 있네.”
“…네. 알 것 같습니다.”
마츠카와는 고개를 천정으로 돌렸다. 물 얼룩이 져 있는 흰 벽이었다. 요원은 천천히 목을 가다듬었다.
“미야 아츠무가 죽였다고 하는 17살짜리 남자애는 허구입니다. 당신의 이야기를 덧씌운 것뿐입니다.”
그는 다시 한 번 꼼꼼하게 생각을 더듬었다. 이야기에서 17살에, 학교 옥상에서 죽은 아이의 존재를 배제하고 그 자리에 지금 들은 이야기를 끼워 넣으면 모든 것은 정배열 되었다. 그러니까 처음부터 그런 아이는 없었던 것이다.
“하지만 그는 아예 없는 이야기를 만들어 내지 않습니다. 그러니까 사진 한 장으로 남아 있는 17살의 ‘오이카와 토오루’는 분명 그들의 과거 속 등장인물이 맞을 겁니다.”
다만 그 등장시기가 달랐을 뿐이다. 미야 아츠무는 일부러 오이카와의 사진을 준비해 놓았다. 의심으로써 견고한 팀을 깨려는 의도를 가지고. 미야家의 남자는 천천히 고개를 끄덕였다.
“자네의 말이 맞아. 사진 속 그 아이는 나도 알고 있네. 미야家에서 후원하던 아이 중 하나였지.”
“후원이라구요?”
“카게야마의 경우와는 조금 달랐지만 말일세. 아, 이 이야기를 자네가 믿게 하려면 이것부터 보여야 하겠군.”
그는 와이셔츠에 달린 주머니에서 색이 바래고 부서진 아이디카드를 꺼내보였다. 마츠카와가 가진 것과 동일한 디자인이었지만, 색깔이 달랐으며 직급에는 ‘수석연구원’이라고 적혀 있었다.
“우리 가문은 대대로 자네가 몸을 담고 있는 에이전트사에서 ‘인재 양성’을 담당하고 있네. 드러나지 않게 하고 있는 많은 후원들은 사실. 미래의 연구원이나 요원들을 선발하기 위한 테스트 같은 것이었지.”
남자는 아이디카드를 잘 볼 수 있도록 마츠카와에게 넘기며 말을 이어 나갔다. 요원은 그나마 멀쩡한 손 안에서 그것을 돌리며 이리저리 살펴보았다. 아무리 봐도 진짜였다.
“나는 오이카와 토오루가 15살이었을 때, 이미 그를 요원의 재목으로 추천했었네. 하지만 나이가 어렸던지라 실제로 테스트를 받고 정식 훈련을 받은 것은 17살이었다고 알고 있네. 그러니 그 사진은 그 때 입수한 것이겠지. 아츠무는 그때, 이미 관여할 수 있었던 거야. 에이전트 업무에.”
“….”
“그런 눈으로 보지 말게나. 내 꼴을 보면 알겠지만, 나는 쭉 혼수상태였네. 기적적으로 깨어난 것은 아츠무와 카게야마는 22살, 오이카와 토오루는 20살이었지.”
아버지는 위스키가 동이 난 빈 잔을 바라보며 말을 이었다.
“물론 나는 내가 깨어났음을 아츠무에게 알리지 않았네. 다시 죽을 것이 뻔했으니까. 식물인간으로 기억되는 편이 좋았지. 재활이 필요하기도 했었고. 그렇게 3년간을 꼬박 투자해서 어느 정도 회복되자마자 나는 서버에 접속했어. 그동안 어떤 일이 일어났는지 파악하고 싶었거든.”
“가능했습니까?”
“카게야마 덕분이었지.”
그는 잠시 숨을 길게 쉬고 말을 이어나갔다.
“완전히 아츠무와 갈라서던 그 때에, 카게야마는 중앙지부의 서버를 모두 폭파시키고 자료를 날려 버린 후 잠적했다네. 그 난리 통과 교묘히 시기가 맞아 떨어지는 바람에 내가 숨어들어갔던 건은 카게야마의 짓으로 감출 수 있었지.”
“혹시 그게, 중앙지부의 메인 서버를 갈아 치우게 했던 그 사건이 되는 겁니까?”
“그랬을 걸세. 어떻게 한 건지 몰라도 복구가 아예 불가능하게 해두었더군. 그러니까 자네가 들었다던 그 ‘모든 것을 불태우고 자료를 날리고 사라진 이야기’는 사실 집이 아니라, 본부에 대한 이야기였던 거지.”
때에 맞지 않게 쾌활한 웃음을 터뜨리던 그는 잠시 미간을 찡그리며 팔의 절단부를 움켜쥐었다. 환상통이었다. 아직도 팔이 붙어 있고, 상처가 지속되는 것처럼 이어지는 환상이 그를 단기간에 깊은 고통 속으로 몰아세웠다. 시익시익. 숨소리가 새었다. 마츠카와는 끈질기게 사내가 고통을 이겨내길 기다렸다.
“하.”
얼마 지나지 않아 그는 짙은 한숨을 내뱉으며 식은땀으로 젖은 고개를 젖혀 올렸다.
“미안하네. 이야기를 계속하도록 하지.”
“조금 쉬었다 하셔도 됩니다.”
“아니야. 내 몸은 느긋하게 무엇을 기다릴 만큼 상태가 좋지 못해. 호전되었을 때, 마무리를 짓겠네.”
올리브색의 눈동자가 마츠카와를 부드럽게, 그러나 단호하게 바라보았다.
“미야家의 추천을 받은 ‘오이카와 토오루’는 카게야마가 하고 있던 연구에 실험체로 동원되었다네.”
그것은 어느 봄날로 기록되어 있었다. 20살의 오이카와 토오루, 22살의 카게야마 토비오. 서로에게 사랑 비슷한 것도 기대할 수 없는 관계로 둘은 삭막한 연구실에서 첫 만남을 가졌다.
-6-
“카게야마 연구원님.”
“?”
“여기, 일전에 실험하신 결과입니다.”
허벅지까지 오는 하얀 가운은 이지적인 생김새에 잘 어울렸다. 단정하게 잘린 까만 머리카락 사이로 날카로워 보이는 눈매가 강렬하게 자신을 쏘아보고 있었다. 최대한 정중하게 건넨 말인데, 그는 마치 시비라도 당한 것 같은 표정이었다. 그런 서늘함 속에서 상대의 손으로 결재 판이 넘어갔다. 거의 빼앗아 가는 것 같은 움직임이었다. 물론 그 과정에서 생긴 불만을 바깥으로 꺼낼 수는 없었다. 그의 목에 걸린 아이디카드에는 ‘특별 연구원’이라는 직책과 ‘카게야마 토비오’라는 이름이 정면 사진과 함께 박혀 있었다. 이제 막 들어와 통계나 결과 전달 등의 뒤처리만 전담하고 있는 새끼 연구원으로서는 하늘과 같은 직급이었다. 그는 감히 더 말을 붙이지 못하고 다만 초조하게 특별 연구원의 답을 기다렸다.
“틀렸네.”
한번 죽 훑어보았을 뿐인데, 그는 쉽사리 결과의 오류를 찾아낸 듯 했다. 안 그래도 상대를 편하게 해 주는 법이 없는 이목구비가 더욱 개성을 빛냈다. 자신의 잘못인 양, 움츠린 상대에게 카게야마는 차트를 휙 도로 내밀었다.
“폐기해.”
“네? 네네.”
“그리고 기본 설정 수정해서 다시 보낼 테니까 준비하고.”
“네! 아, 저기!”
가차 없이 돌아서려던 특별연구원이 뒤를 돌았다. 크게 반짝이는 법이 없는 푸른 눈동자에는 냉기가 가득했다. 기세에 눌려 쭈볏거리면서도 연구원은 결국 조심스럽게 입을 열었다.
“실험에 사용되었던 동물들은 어떻게 할까요? 몇 마리는 상태가 괜찮은 거 같던데.”
“…? 원칙적으로 전체 폐기잖아?”
불필요한 질문이라고 생각하는 듯 어리둥절한 표정을 하고, 카게야마는 고개를 갸웃했다. 괜한 질문을 던진 것 같아 더 수그러드는 상대에게 그는 다시 한 번 물었다.
“예외가 필요한 상황이라도 있어?”
“아, 아닙니다.”
“그럼 원칙대로 해. 쓸데없이 물어보지 말고.”
연구원에게 주어진 가운 주머니에 손을 넣은 채, 상관은 퉁명스럽게 죽음을 결재했다. 재고의 여지가 없다는 깔끔한 태도였다. 이제 막 보송보송한 털이 올라오고 있던 어린 동물들을 떠올리며, 연구원은 크게 숨을 내쉬었다. 그가 개발하고 있다던 무언가는 이제 생물을 단계로 하는 실험 단계에 들어가 있었다. 뭔지 까지는 알 수 없었지만, 하루에도 몇 십 마리씩 온갖 동물이 죽어 나갔다. 그렇게 뒤에서 산처럼 시체를 쌓아가면서도 상관의 곧은 허리는 굽어지는 법이 없었고, 차가운 푸른 색 눈동자는 따뜻해지는 법도 없었다. 사실.
피는 그의 눈동자처럼 푸를 것이다. 라는 설도 돌았다. 기계처럼 정확한 생활 패턴이나, 인간의 범위를 넘어선 것 같은 일처리 능력 등까지 더해져서 생긴 소문이었다. 연구원은 상관이 엉망진창인 글씨체로 결재한 문서를 품에 끌어안았다.
그러고 보니, 자신보다 한참 어린 상관이었다.
-7-
“이제 슬슬 인간한테 실험을 진행해보는 건 어때?”
“임상실험? 아직 안 돼.”
카게야마는 자판을 두드리며 짧게 대답했다. 미야는 가지고 온 커피 잔을 화면 정 가운데에 내려놓았다. 눈앞을 스쳐가는 인영에 집중력이 깨져버린 상대는 사나운 시선을 돌렸다.
“왜?”
그러나 생글생글 웃으며 살갑게 말을 걸어오는 낯에 침을 뱉기란 생각보다 쉬운 것은 아니었다. 그는 화면의 반을 가리며 책상 가장자리에 허벅지를 기대고 서 있었다. 연구원은 의자를 조금 밀어 책상에서 떨어지며 상대의 얼굴을 마주 보았다.
“…아직 완벽하지 않아.”
“제대로 된 실험을 하지 않으니까 그렇지 않을까?”
“무슨 소리야?”
“동물의 기억이 삭제되었다는 것을 알아내기란 쉽지 않잖아. 행동만으로 보이지 않는 기억의 존재 여부를 찾아내는 건 불확실성이 너무 많아.”
“….”
틀린 말은 아니었다. 카게야마는 손을 뻗어 따끈한 잔을 쥐었다. 커피 잔이긴 했지만, 안에 들어 있는 것은 우유일 것이다. 그가 커피를 잘 먹지 않는다는 것을 상대가 모를 리가 없었다. 꿀이 적당히 섞여 달콤하고 따뜻한 우유를 한 모금 마시며 카게야마는 미야를 고집스럽게 바라보았다.
“이 연구는 내가 알아서 할 거야.”
“토비오, 너 사실은 ‘생존’했다는 것 자체를 실험의 성공으로 삼고 있지?”
“….”
“기억을 지운다는 게 결국은 뇌세포를 죽이는 일이 될 텐데, 그것도 나쁜 지표는 아니지. 오, 생존확률 꽤 높아지고 있네.”
그는 화면에 띄워져 있던 자료를 손가락으로 주욱 따라가며 말을 이었다. 카게야마는 잠자코 우유를 비우고만 있었다. 뱃속이 뜨끈해져 왔다. 그 역시 모르는 결론은 아니었다.
“하지만 정확하게 하려면 역시 슬슬 임상실험을 들어가야 한다고 봐.”
“실패는 곧 ‘죽음’이야. 생존확률이 극단적으로 높아지면 그 때 할 거야.”
“불필요한 시간 낭비야.”
미야는 아이디카드의 목줄을 잡아 자신에게 당겼다. 훽 당겨졌지만 책상을 잡아 완전히 끌려가는 것은 막은 상대는 끝이 올라간 매서운 눈매로 차분하게 그를 바라봐왔다.
“시작 해. 사람은 내가 준비해 줄게.”
“뭐?”
“도심만 몇 바퀴 돌아도 한 박스는 만들어 올 수 있어. 노숙자들도 있고, 버려진 아이들도 있고. 겨울이기도 하니, 사실 언제 죽어도 이상하지 않는 사람들 좀 쓸어 담아오면 될 것 같은데.”
여유롭게 풀어진 눈매로 웃고 있었다. 끔찍한 소리를 하면서도 손이 다정하게 머리카락을 어루만지고 뺨으로 내려갔다. 목이 빳빳하게 긴장해 있었다. 아, 좀 위험한가. 미야는 부모보다 오랜 시간 상대를 길들여 왔던 미소를 능란하게 지어 보였다.
“토비오, 요새도 잠을 잘 못 자?”
“…아니.”
“너는 거짓말을 차라리 안 하는 게 좋겠어. 수면제를 처방받아 보는 건 어때? 담배에 의존하지 말고.”
“…별로 안 피워. 약을 먹을 정도도 아냐.”
“요 며칠, 하루에 3시간씩 자면서도 그럴 정도는 아니라는 거지.”
그대로 볼을 주욱 당기려는 손을 카게야마가 천천히 거두어냈다. 속이 들킨 것은 기분 좋은 일이 아니었다. 미간에 몇 개의 주름이 만들어졌다. 고양이의 콧수염 같은 느낌이었다.
“상관없어. 할 수 있어.”
“알아.”
미야는 그 고집에 상상의 입맞춤을 더하며 대답했다.
-8-
“여기냐?”
“일단, 맞는 거 같은데.”
하나마키와 이와이즈미는 벽 뒤에서 고개만 슬쩍 내밀어 표적이 된 주택을 확인했다. 문에는 안이 보이지 않게 흐릿한 유리창 하나가 작게 나 있었다. 인적은 없었다. 이름 모를 새들이 떼를 지어 전선줄에 앉아 있는 을씨년스러운 동네였다. 팀장은 침착하게 품 안으로 손을 넣었다. 총은 하네스 안에 잘 들어가 있었다. 그립감도 나쁘지 않았다.
“들어가는 건 나뿐이야.”
“뭐?”
“너는 여기서 대기하다가 신호가 오면 움직여.”
“안에 몇 명이 있는지도 모르는데, 혼자 가겠다고?”
“그러니까 혼자 가는거야. 너는 현장 뛰어본 경험도 없는데 어떻게 달고 가. 여기 있다가 만약 내가 5분 내로 안 나오거나.”
팀장은 인 이어를 착용하고 팔을 걷어붙였다.
“통신이 끊기면 경찰에 연락해. 어차피 저 쪽도 합법은 아닐 테니까 경찰 눈치는 보겠지.”
“그래도 팀장. 같이 가는 게 좋을 거 같은데.”
하나마키는 내키지 않는 듯 작게 반론을 펼쳤지만, 이미 팀장은 차비를 모두 끝낸 상태였다. 그는 서포터의 머리를 한번 누른 후, 자리에서 일어나 벽을 돌았다. 정면에 집이 보였다.
“하아.”
얼마만의 느끼는 현장의 긴장감인가. 싶은 생각을 하면서 그는 최대한 자연스러운 걸음으로 문 앞으로 다가섰다. 명패에는 아무것도 쓰여 있지 않았지만, 초인종은 있었다. 팀장은 천천히 손가락을 들어 벨을 울렸다.
삐이이이.
문 너머에서 날카로운 소리가 울렸다. 정적이 흐른 것은 잠시, 한껏 세운 청각 너머로 누군가의 움직임이 잡히기 시작했다.
[팀장. 뭐야, 무슨 일이야.]
[도와주러 갈까?]
[그냥 있어?]
인 이어에서 하나마키도 난리가 나 있었다. 아니, 이제 겨우 2분이 지났을까 말까인데 왜 이리 법석이냐. 오이카와 같은 녀석. 이라고 말을 해 주고 싶었지만 이를 악물어 참았다. 문을 부서 버려야 하나 싶은 생각이 들었을 때 즈음.
“누구십니까.”
안에서 침착한 목소리가 들렸다. 나이가 든 남자의 목소리였다. 팀장은 유리창 너머 흐릿한 회색 인영을 바라보았다.
-9-
“아, 윽. 으윽. 윽.”
천정이 빙글빙글 돌았다. 원래도 높았고, 무슨무슨 유명한 화가가 그렸다던 복잡한 그림이었다. 어렸을 적에는 거기에 그려진 사람의 명수나 동물을 세며 놀기도 했었다. 지금도 그랬다. 카게야마는 눈을 똑바로 뜨고, 그림 속 날아가고 있는 새의 마릿수를 세었다.
“아, 아.”
등이 아팠다. 아니, 따가웠다. 러그가 아니라 짐승의 털가죽으로 만든 것이라서 그럴 것이다. 보통 사용하는 여우의 부드러운 털가죽이 아니라, 늑대의 것이었다. 이 산에서 살던 것을 사냥하여 만들었다고 했었다. 회색, 검은색, 은색. 그런 색깔의 털이 곱지 못한 결을 가지고 벗은 등을 찔러 왔다. 피부는 발진이 돋은 듯 빨갛게 변해 있었다.
“토비오.”
“으, 으으….”
“내가 죽였어야 하는 사람이 두 명 있었거든.”
발이 번쩍 들려 어깨에 실렸다. 오래된 상처가 있는 쪽이었다. 잡힌 무릎이 시큰거렸다. 카게야마는 외로 기우는 몸을 멈추려 급하게 바닥을 짚었다. 핑, 머리가 다시 한 번 돌았다.
“근데 둘 다 죽이진 못했어.”
“아,”
상대는 끊임없이 몸을 괴롭혔다. 이런 게 기분이 좋아질 수 있었던 것은 딱 두 번뿐이었다. 그 애와 했던 두 번 뿐이었다. 정신으로 그 날을 헤매며 애써 균형을 다시 잡아 보려 했지만 상대는 봐주지 않았다. 한층 엉망으로 상체가 무너졌다.
“짜증이 많이 났었지만.”
아프고, 피곤했지만 상대가 놓아주지 않아 잠이 들 수가 없었다. 하나, 둘, 셋. 이제 셀 수 없는 천장의 무늬를 대신해서 카게야마는 러그의 털을 의미없이 헤어라 보기 시작했다. 다섯, 여섯.
“어쨌든 다 잘 풀렸네.”
비명이 나올 것 같아서 수의사는 입술을 잔뜩 말아 세게 물었다. 손은 짐승의 털을 한 움큼 모아 쥐고 있었다.
“으으….”
“그렇지만 토비오, 나는 실패를 3번 할 것 같진 않아.”
가까스로 돌릴 수 있는 시선 속 남자는 웃고 있었다. 즐거워하고 있었다.
“그게 네가 나한테 잘 해야 하는 이유야.”
-10-
오이카와는 침대에 누워 있었다. 잠이 오지 않았다. 수면 마취의 영향인지도 몰랐다. 어쨌든 몸은 피로하지 않았고, 정신 또한 그러했다. 탁상시계의 규칙적인 울림을 들으며 그는 자신의 손을 펴 보았다.
“….”
까만 털이 아주 조금 쥐어져 있었다. 옆집 남자가 데려왔던 고양이의 것이었다. 의탁할 만한 곳에 맡기면서, 요원은 그 털을 조금 보관해 이곳으로 왔었다. 그리고 그것을 쥔 채, 마취에 들어갔다. 이유는 간단했다. 확인하고 싶었기 때문이었다.
“정말, 토비오쨩이야?”
그는 혼잣말을 중얼거리며 손바닥 속 까만 털을 오랫동안 바라보았다. 일부는 사라지고, 일부만 남아 있었다. 자신을 진찰했던 의사는 그것의 일부만 가져가고 나머지는 남겨 두었다. 요원은 그것이 나름대로의 답변이라고 생각되었다. 그러니까 정말로 카게야마 토비오였다. 그렇다면 그 사실은.
“나한테 없어진 기억이 있는거야?”
로 수렴되었다. 오이카와는 눈을 감았다. 그리고 아주 어린 시절부터 천천히 떠올려 가기 시작했다.
-11-
“오이카와 토오루입니다~”
그 아이는 명랑하게 인사를 했었다. 앞으로 자신이 어떻게 될 지도 모르고 싱글싱글 웃으면서 말이다. 부드럽고 말랑말랑한 생김새에 눈이 반짝반짝 빛났다. 카게야마는 왠지 시선을 조금 미끄러뜨려 땅을 보았다.
"인사할 필요 없어. 얼굴을 대고 만나는 건 지금 뿐이니까.”
그리고 부러 훨씬 무뚝뚝하게 대답했다.
“우선은 네가 실험에 적합한지 볼 거야.”
“으응.”
고개를 끄덕이며 주의 깊게 듣는 모습은 제법 똑똑하고 눈치가 있어 보였다. 나이는 두살 어려도 체격은 자신보다 더 크고 건장한 남자애였다. 원래는 요원으로 선발될 예정이었다고 들었다. 그걸 원한다고 했다. 나는 이리저리 활달하게 움직이는 눈동자를 내게 고정시키기 위해 볼펜 뒤로 톡톡 손에 들고 있던 파일을 두드렸다.
“실험에 통과하게 되면, 소비재를 거치지 않고 바로 정식 요원이 되는 특혜를 가지게 된다는 말은 들었지?”
“네. 앗, 그런데.”
손을 번쩍 들며 그 애가 설명을 막았다. 솔직히 조금 짜증이 났었다. 그런데.
“아까부터 신경 쓰였는데, 이거 사진 바꾸면 안 돼요?”
그 애는 내 목에 걸려 있던 아이디카드를 잡아채어 당기고는 스스럼없이 웃으며 상황에 맞지 않은 말을 건네 왔다. 순식간에 다가온 홍차색 눈동자가 아이디카드 속 사진과 나를 번갈아 바라본다.
“이거 너무 못생기게 나왔잖아요. 와, 심하네. 이런 사진을 프로필로 어떻게 써요?”
우유냄새가 났다. 그러고 보니 프로필에 좋아하는 것이 우유빵이라고 적혀 있었더랬다. 다른 것도 최고점이었지만, 인성과 친화력 부분이 유별나게 높던 후보생이었다. 키, 몸무게, 성격, 성향. 프로파일은 당연히 몇 번이나 읽어 봤었다. 사진도 잔뜩 받아 골고루 분류하고 눈에 익혀 두었었다. 그런데.
“카게야마 토비오? 토비오?”
실제의 그에겐 문서의 어떤 것으로도 파악되지 않은 특별한 것이 있었다.
“그럼 나 이제부터 ‘토비오 쨩’이라고 불러도 되요?”
그리고 자꾸 관계를 요구해 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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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사실 피드백 댓글로는 몇 번 말씀드렸지만 저는 이 이야기 속, 미야 아츠무는 싸이코패스와 소시오패스의 중간 즈음으로 생각하며 쓰고 있습니다. :) 멋지고 좋은 캐릭터로 쓰지 못하게 되어 아쉬운 감은 있지만.ㅠ0ㅠ...인상적인 악역이 될 수 있게 잘..!!ㅠ0ㅠ!!
2. 마감을 ...할 수 있을...까요? 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 하고 싶습니다..!! 행사 참여는 처음이 되는건데, 정말 마감할 수 있으면 좋겠습니다.ㅠ0ㅠ...
3. 언제나 감사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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