Blind Game


-1-


“도대체 무슨 일이 있었던 거냐.”

할아버지는 엄한 목소리로 물었다. 미야는 잠자코 고개를 들었다. 뽀얗게 세탁된 와이셔츠 위에는 검은색 카디건이 단정하게 입고 있었다. 아버지가 사망했다고 발표된 날이었다. 조부는 집안의 명예를 택했다. 생명은 붙어 있었지만, 혹여 기적적으로 살아난다 해도, 반푼이가 되어 버린 아들을 집안의 대표로 세울 생각이 그에겐 없었다. 그래서 장례가 치러졌다. 가장 무난하게 봐줄 수 있는 교통사고로 의사와 입을 맞췄다. 아들의 졸업식에 참석했다 귀가 하는 중에 일어났던 심각한 교통사고로 인한 사망. 그것이 부친의 사망신고서에 기록된 내용이었다. 학교도 이에 동의했다. 원래 권력은 한통속이 되는 법이었다.

“정말 실수였어요. 그 날, 바람이 많이 불었어요. 옥상이라 더 심하다는 것을 제가 생각하지 못했어요. 제 트로피를 안아보고 싶다고 해서 드렸는데 생각보다 무거우셨나 봐요. 휘청하셨어요. 손을 내밀었는데, 제가 같이 떨어질 까봐, 잡지 못하셨어요. 그래서.”
“아아….”

며칠 전보다 훨씬 늙고 수레 해진 얼굴을 마주보며 미야는 군데군데 의도적으로 끊어가며 말했다. 아버지는 독자였고, 자신도 그러했다. 아무리 조부가 정정한다고 한들, 새로운 아들은 언감생심, 꿈도 못 꿀 일이었다. 콧대 높은 그가 미야家의 거대한 부를 친척들에게 줄 리도 만무했다. 사회에 환원한다는 것은 아예 옵션에서도 빠져 있었다. 선택권은 자신 밖에 없었다. 그러니 의심은 되겠지만, 착각을 선택해주길 바랐다. 그 결정을 돕기 위해 아츠무는 슬픈 표정을 지어냈다.

“아버지께서 하루 빨리 깨어나셨으면 좋겠어요.”

식물인간 상태로 누워 있는, 몸의 반 이상이 박살나고 흉하게 일그러진 아버지의 얼굴을 보는 건 생각보다 떨리지 않았다. 완전히 죽었으면 더 깔끔했겠지만, 손을 더 댈 순 없다는 것을 17살의 아이는 이미 알고 있었다. 적어도 지금은 댈 수 없었다. 미야는 영악하고 예쁜 표정을 지어 보였다.

“할아버지. 아버지의 공백이 크신 거 알아요.”
그리고 슬픔으로 약해진 마음을 살며시 손에 쥐었다.

“당장 중앙지부와의 일도 그렇고, 후원의 일도 그렇고. 요원을 양성하셨던 일에도 차질이 있으시겠죠.”
“…그런 건 어떻게 다 알고 있었느냐.”
“저, 그렇게 어리지 않아요. 아버지께서 종종 저에게 상담을 해오시기도 했었고. 학교도 졸업했구요.”

조부가 자신에 대해 가지고 있던 자부심을 부채질하고, 아들의 부재로 허물어진 빈 곳에 열심히 채워 넣었다. 당신은 무너지지 않아야 한다. 나를 미워해서도 안 된다.

“다행히 할아버지께서는 아직 정정하시니 복귀하셔도 괜찮잖아요.”
그 막강한 권력을 손에 잘 쥐고 있다가.

“앞으로는 아버지 몫까지 제가 더 열심히 할게요.”

나에게 넘겨 줘. 직접 준비한 찻잔을 권하며 아츠무는 마음속으로 그렇게 되뇌었다.

-2-



“토비오?”

비어 있던 자신의 방에 불을 켜자 동그랗게 웅크려 있던 까만 그림자가 화들짝 놀래며 고개를 돌려왔다. 카게야마였다.

“왜 여기 있었어?”

미야는 헝클어져 있는 까만 머리카락과 붉어져 있는 눈 주변을 보았다. 계속 웅크리고 있었는지 옷도 마구잡이로 구겨져 있었다. 그는 문가에 있던 작은 거울에 자신의 모습을 비쳐보았다. 말끔했다. 누가 보아도, 아버지가 다친 것은, 혹은 죽은 것은 자신이 아니라 카게야마 쪽이라고 생각할 것 같은 대비였다.

“난 괜찮아.”

상대가 얼토당토않은 위로를 꺼내기 전에, 그는 선수를 쳐서 말했다. 담담한 대답에 턱 밑이 바짝 당겨졌다. 부스스 일어나는 머리카락이 화가 난 것 같기도 하고, 슬퍼 보이기도 해서 오묘했다.

“….”

그렇다고 감정을 표현해내는 말재간은 없는 아이였다. 미야는 침대 위로 올라가 카게야마를 끌어안았다. 하루 종일 볕 하나 받지 못했는지 수더분한 향이 났다. 담뿍 들이마시고 있자니 팔 밑에서 손이 쭉 빠져 나오더니 등을 가만가만 만지고, 쓸어내렸다. 뭐하자는 거지. 설마.

“토비오, 혹시 날 걱정해 주는 거야?”

손이 멈칫하더니, 얌전히 허리를 끌어안았다. 먼저 안아주는 것은 처음이라 기분이 좋아졌다. 미야는 목덜미에 코를 파묻었다.

“고마워.”

병원에는 같이 들렸었다. 워낙에 참혹한 상태라 걱정했던 것이 무색하게 무표정한 얼굴이었는데, 병실에서 나오자마자 주저앉아서는 숨을 헉헉거렸다. 과호흡 증세였다. 쉬라고 집에 두었더니 하루 종일 나를 기다리며 울고, 슬퍼하고. 안아 주고. 깜찍한 검은 고양이. 아버지가 그렇게 된 게 너 때문인지도 모르고. 작은 주인은 물기가 쭉 빠져 있는 몸을 더 꽈악 끌어안으며 웃었다. 평소처럼 아프다는 소리도 하지 않았다.

“슬프긴 하지만, 나 정말 괜찮아.”
그는 기쁘게 웃으면서 말했다.

“진짜 괜찮아.”
진심이었다.

-3-


아츠무의 아버지는 내 세계에서 가장 강한 사람 중 하나였다. 그런데 교통사고가 그 사람을 깨어날 수 없는 깊은 곳에 잠들도록 만들어 버렸다. 팔이 잘리고, 얼굴이 짓이겨 졌다. 본인의 힘으로 할 수 있는 것은 아무것도 없는 상태로, 마냥 죽음이나 혹은 기적을 기다려야 하는 그런 존재가 되어버렸다. 내 부모님도 그렇게 돌아가셨었다. 거기까지 생각이 흐르자 잠이 오지 않았다. 피곤함에 억지로 잠을 청하면 어김없이 악몽이었다. 귀에서 차가 미끄러져 생기는 그 소리가 들리고, 커다란 게 부딪치는 소리가 들리고, 비명 소리가 들리고. 눈 앞에 팔이 나뒹구는 그런 꿈. 차라리 몰랐을 때는 아무렇지 않았는데, 알게 되니 무서워졌다. 슬퍼졌다. 저런 일을 부모님이 겪으셨다는 것이 '인지'된 것이다.

책을 뒤져보니 이것은 ‘트라우마’라고 했다. 이성으로는 알 수 없는 나의 저 안 쪽, 가장 깊은 곳에 부모님이 살아계시는 것이라고 했다. 죽고, 다시 죽고, 그리고 다시 살아나신다. 그렇게 갑자기 찾아온 ‘슬픔’이라든지, ‘두려움’은 너무 괴로워서 마음이 뭉개져 버렸으면 좋겠다고 생각했다. 아니면. 그럴 수 없다면. 차라리 나쁜 기억을 다 지울 수 있으면 좋겠다고 생각했다. 컴퓨터처럼 ‘Delete’시켜 버릴 수 있으면 얼마나 좋을까.

그럼 ‘트라우마’에 걸리는 사람은 없을 텐데.

-4-


“여기냐?”
“핸드폰의 기록으로는 그렇지.”

묘한 말을 하며 하나마키는 차에서 내렸다. 갓길에 세워진 차량은 그들의 것 하나였고, 지나다는 것 또한 드물었다. 이와이즈미는 잔해 하나 없이 깨끗한 도로에서 막막한 기분으로 팔짱을 끼었다.

“확실히.”

그의 눈은 가드레일을 살피고 있었다. 사내답지만 키에 비해선 작은 손이 잿빛 광택이 도는 표면을 한번 쓸어내린다. 손바닥을 뒤집자 미량의 먼지가 묻어 나왔다.

“여기만 새 거긴 하네.”

장시간의 운전에 뻐근한 어깨를 붕붕 돌리며 하나마키가 다가왔다. 힐끗 목을 빼내어 밑을 보자, 현기증이 날 정도로 깊은 절벽이 보였다. 수풀더미 같은 것으로 가려 놓았지만, 잘 보면 허리통만한 굵은 가지가 뚝뚝 끊어져 있는 나무들도 눈에 띄었다. 충돌의 흔적들이었다. 아래에서 올라오는 형형한 바람이 머리카락을 흩날렸다. 서포터는 묵묵히 자신의 탭북을 켰다.

“역시 내려가 봐야 하나.”

소매를 살짝 걷으며 길을 살펴보던 팀장은 발랄한 전원 음이 들리는 쪽으로 고개를 돌리고는, 한껏 인상을 찌푸렸다.

“…포켓몬 잡는 중이면 죽인다.”
“무슨 소리야. 팀장. 업무 시간 중에는 안 하거든.”
“지난 번 회의 때에, 오이카와 머리 위에 푸린이 앉아 있다며 요란법석을 떨어댄 건 어디의 누구였지?”
“세이죠 팀의 하나마키였습니다~.”

시원시원하게 대답한 그는 탭북을 연신 두들기더니 화면을 팀장에게 돌렸다.

“팀장. 사실 나도 불법적인 일은 좀 했는데.”

화면에는 이 지역의 지도가 떠올라 있었다. 그리고 20km 정도 떨어진 곳에서 빨간 점이 깜빡이고 있었다. 이와이즈미는 눈 사이를 좁혔다. 동그란 점 가장자리에는 작은 글씨로 ‘맛층’이라고 적혀 있었다.

“너 이거.”
“맛층의 손목시계에 위치 추적기를 넣어두었지.”

엄지손가락을 치켜들며, 하나마키가 씨익 웃었다. 팀장은 아무 대답도 하지 않고 두 손으로 탭북을 꽉 잡아 얼굴 앞으로 가져왔다.

“첫째로, 추적 반경 범위를 넘어서지 않아서 다행이야.”
서포터는 사근사근한 표정으로 웃었다.
“둘째로, 시체를 유기하려 20km나 이동했다는 것은 아무래도 무리지. 그렇게 많은 사람이 살 거 같아 보이진 않지만, 어쨌든 주택가이고 말이야.”
하나마키는 팀장의 등을 철썩 쳤다.
“즉, ‘마츠카와 잇세이 요원은 무조건 살아있다.’고 한 팀장의 강력한 주장은 사실일 확률이 높을 것 같거든.”

등을 얻어맞으면서도 이와이즈미는 계속 화면만 보고 있었다. 콧잔등을 살살 긁적거리던 하나마키가 한숨을 푹 내쉬며 어깨를 꽉 잡았다.

“그러니까 울지 마.”

신뢰란 때때로, 무게가 되는 법이었다. 여기까지 오면서 누구에게도 추적기에 대해 말하지 못했던 것은 혹시라도 죽음에 대한 확실한 증명이 되지 않을까 싶었던 마음 때문이었다. 팀장도 같은 생각으로 외려 큰 소리를 탕탕 쳐댔을 것이 분명했다. 자신의 기대가 타인의 지지대가 되길 바라고, 기대에 대한 무게는 온전히 스스로가 지고자 하는 무식함을 하나마키는 그에게 배웠다. 한결같이 우직한 남자였다.

“팀장, 오늘 철철 울었다고 오이카와한테 이른다.”
“닥, 닥쳐라.”

포켓몬이 판을 치는 이 때, 아직도 고질라나 좋아하는 팀장의 약점을 공략하며 하나마키는 푸른 하늘을 올려 보았다. 그리고는. 만약 살아 있지 않으면, 죽여 버릴 거라는 허무맹랑한 협박을 마츠카와에게 날렸다.

-5-


“이제는 알아차렸겠지. 아츠무의 이야기에는 있어도 말이 되지만, 없어도 괜찮은 존재가 하나 있네.”
“…네. 알 것 같습니다.”

마츠카와는 고개를 천정으로 돌렸다. 물 얼룩이 져 있는 흰 벽이었다. 요원은 천천히 목을 가다듬었다.

“미야 아츠무가 죽였다고 하는 17살짜리 남자애는 허구입니다. 당신의 이야기를 덧씌운 것뿐입니다.”

그는 다시 한 번 꼼꼼하게 생각을 더듬었다. 이야기에서 17살에, 학교 옥상에서 죽은 아이의 존재를 배제하고 그 자리에 지금 들은 이야기를 끼워 넣으면 모든 것은 정배열 되었다. 그러니까 처음부터 그런 아이는 없었던 것이다.

“하지만 그는 아예 없는 이야기를 만들어 내지 않습니다. 그러니까 사진 한 장으로 남아 있는 17살의 ‘오이카와 토오루’는 분명 그들의 과거 속 등장인물이 맞을 겁니다.”

다만 그 등장시기가 달랐을 뿐이다. 미야 아츠무는 일부러 오이카와의 사진을 준비해 놓았다. 의심으로써 견고한 팀을 깨려는 의도를 가지고. 미야家의 남자는 천천히 고개를 끄덕였다.

“자네의 말이 맞아. 사진 속 그 아이는 나도 알고 있네. 미야家에서 후원하던 아이 중 하나였지.”
“후원이라구요?”
“카게야마의 경우와는 조금 달랐지만 말일세. 아, 이 이야기를 자네가 믿게 하려면 이것부터 보여야 하겠군.”

그는 와이셔츠에 달린 주머니에서 색이 바래고 부서진 아이디카드를 꺼내보였다. 마츠카와가 가진 것과 동일한 디자인이었지만, 색깔이 달랐으며 직급에는 ‘수석연구원’이라고 적혀 있었다.

“우리 가문은 대대로 자네가 몸을 담고 있는 에이전트사에서 ‘인재 양성’을 담당하고 있네. 드러나지 않게 하고 있는 많은 후원들은 사실. 미래의 연구원이나 요원들을 선발하기 위한 테스트 같은 것이었지.”

남자는 아이디카드를 잘 볼 수 있도록 마츠카와에게 넘기며 말을 이어 나갔다. 요원은 그나마 멀쩡한 손 안에서 그것을 돌리며 이리저리 살펴보았다. 아무리 봐도 진짜였다.

“나는 오이카와 토오루가 15살이었을 때, 이미 그를 요원의 재목으로 추천했었네. 하지만 나이가 어렸던지라 실제로 테스트를 받고 정식 훈련을 받은 것은 17살이었다고 알고 있네. 그러니 그 사진은 그 때 입수한 것이겠지. 아츠무는 그때, 이미 관여할 수 있었던 거야. 에이전트 업무에.”
“….”
“그런 눈으로 보지 말게나. 내 꼴을 보면 알겠지만, 나는 쭉 혼수상태였네. 기적적으로 깨어난 것은 아츠무와 카게야마는 22살, 오이카와 토오루는 20살이었지.”

아버지는 위스키가 동이 난 빈 잔을 바라보며 말을 이었다.

“물론 나는 내가 깨어났음을 아츠무에게 알리지 않았네. 다시 죽을 것이 뻔했으니까. 식물인간으로 기억되는 편이 좋았지. 재활이 필요하기도 했었고. 그렇게 3년간을 꼬박 투자해서 어느 정도 회복되자마자 나는 서버에 접속했어. 그동안 어떤 일이 일어났는지 파악하고 싶었거든.”
“가능했습니까?”
“카게야마 덕분이었지.”

그는 잠시 숨을 길게 쉬고 말을 이어나갔다.

“완전히 아츠무와 갈라서던 그 때에, 카게야마는 중앙지부의 서버를 모두 폭파시키고 자료를 날려 버린 후 잠적했다네. 그 난리 통과 교묘히 시기가 맞아 떨어지는 바람에 내가 숨어들어갔던 건은 카게야마의 짓으로 감출 수 있었지.”
“혹시 그게, 중앙지부의 메인 서버를 갈아 치우게 했던 그 사건이 되는 겁니까?”
“그랬을 걸세. 어떻게 한 건지 몰라도 복구가 아예 불가능하게 해두었더군. 그러니까 자네가 들었다던 그 ‘모든 것을 불태우고 자료를 날리고 사라진 이야기’는 사실 집이 아니라, 본부에 대한 이야기였던 거지.”

때에 맞지 않게 쾌활한 웃음을 터뜨리던 그는 잠시 미간을 찡그리며 팔의 절단부를 움켜쥐었다. 환상통이었다. 아직도 팔이 붙어 있고, 상처가 지속되는 것처럼 이어지는 환상이 그를 단기간에 깊은 고통 속으로 몰아세웠다. 시익시익. 숨소리가 새었다. 마츠카와는 끈질기게 사내가 고통을 이겨내길 기다렸다.

“하.”

얼마 지나지 않아 그는 짙은 한숨을 내뱉으며 식은땀으로 젖은 고개를 젖혀 올렸다.

“미안하네. 이야기를 계속하도록 하지.”
“조금 쉬었다 하셔도 됩니다.”
“아니야. 내 몸은 느긋하게 무엇을 기다릴 만큼 상태가 좋지 못해. 호전되었을 때, 마무리를 짓겠네.”

올리브색의 눈동자가 마츠카와를 부드럽게, 그러나 단호하게 바라보았다.

“미야家의 추천을 받은 ‘오이카와 토오루’는 카게야마가 하고 있던 연구에 실험체로 동원되었다네.”

그것은 어느 봄날로 기록되어 있었다. 20살의 오이카와 토오루, 22살의 카게야마 토비오. 서로에게 사랑 비슷한 것도 기대할 수 없는 관계로 둘은 삭막한 연구실에서 첫 만남을 가졌다.


-6-


“카게야마 연구원님.”
“?”
“여기, 일전에 실험하신 결과입니다.”

허벅지까지 오는 하얀 가운은 이지적인 생김새에 잘 어울렸다. 단정하게 잘린 까만 머리카락 사이로 날카로워 보이는 눈매가 강렬하게 자신을 쏘아보고 있었다. 최대한 정중하게 건넨 말인데, 그는 마치 시비라도 당한 것 같은 표정이었다. 그런 서늘함 속에서 상대의 손으로 결재 판이 넘어갔다. 거의 빼앗아 가는 것 같은 움직임이었다. 물론 그 과정에서 생긴 불만을 바깥으로 꺼낼 수는 없었다. 그의 목에 걸린 아이디카드에는 ‘특별 연구원’이라는 직책과 ‘카게야마 토비오’라는 이름이 정면 사진과 함께 박혀 있었다. 이제 막 들어와 통계나 결과 전달 등의 뒤처리만 전담하고 있는 새끼 연구원으로서는 하늘과 같은 직급이었다. 그는 감히 더 말을 붙이지 못하고 다만 초조하게 특별 연구원의 답을 기다렸다.

“틀렸네.”

한번 죽 훑어보았을 뿐인데, 그는 쉽사리 결과의 오류를 찾아낸 듯 했다. 안 그래도 상대를 편하게 해 주는 법이 없는 이목구비가 더욱 개성을 빛냈다. 자신의 잘못인 양, 움츠린 상대에게 카게야마는 차트를 휙 도로 내밀었다.

“폐기해.”
“네? 네네.”
“그리고 기본 설정 수정해서 다시 보낼 테니까 준비하고.”
“네! 아, 저기!”

가차 없이 돌아서려던 특별연구원이 뒤를 돌았다. 크게 반짝이는 법이 없는 푸른 눈동자에는 냉기가 가득했다. 기세에 눌려 쭈볏거리면서도 연구원은 결국 조심스럽게 입을 열었다.

“실험에 사용되었던 동물들은 어떻게 할까요? 몇 마리는 상태가 괜찮은 거 같던데.”
“…? 원칙적으로 전체 폐기잖아?”

불필요한 질문이라고 생각하는 듯 어리둥절한 표정을 하고, 카게야마는 고개를 갸웃했다. 괜한 질문을 던진 것 같아 더 수그러드는 상대에게 그는 다시 한 번 물었다.

“예외가 필요한 상황이라도 있어?”
“아, 아닙니다.”
“그럼 원칙대로 해. 쓸데없이 물어보지 말고.”

연구원에게 주어진 가운 주머니에 손을 넣은 채, 상관은 퉁명스럽게 죽음을 결재했다. 재고의 여지가 없다는 깔끔한 태도였다. 이제 막 보송보송한 털이 올라오고 있던 어린 동물들을 떠올리며, 연구원은 크게 숨을 내쉬었다. 그가 개발하고 있다던 무언가는 이제 생물을 단계로 하는 실험 단계에 들어가 있었다. 뭔지 까지는 알 수 없었지만, 하루에도 몇 십 마리씩 온갖 동물이 죽어 나갔다. 그렇게 뒤에서 산처럼 시체를 쌓아가면서도 상관의 곧은 허리는 굽어지는 법이 없었고, 차가운 푸른 색 눈동자는 따뜻해지는 법도 없었다. 사실.

피는 그의 눈동자처럼 푸를 것이다. 라는 설도 돌았다. 기계처럼 정확한 생활 패턴이나, 인간의 범위를 넘어선 것 같은 일처리 능력 등까지 더해져서 생긴 소문이었다. 연구원은 상관이 엉망진창인 글씨체로 결재한 문서를 품에 끌어안았다.
그러고 보니, 자신보다 한참 어린 상관이었다.

-7-


“이제 슬슬 인간한테 실험을 진행해보는 건 어때?”
“임상실험? 아직 안 돼.”

카게야마는 자판을 두드리며 짧게 대답했다. 미야는 가지고 온 커피 잔을 화면 정 가운데에 내려놓았다. 눈앞을 스쳐가는 인영에 집중력이 깨져버린 상대는 사나운 시선을 돌렸다.

“왜?”
그러나 생글생글 웃으며 살갑게 말을 걸어오는 낯에 침을 뱉기란 생각보다 쉬운 것은 아니었다. 그는 화면의 반을 가리며 책상 가장자리에 허벅지를 기대고 서 있었다. 연구원은 의자를 조금 밀어 책상에서 떨어지며 상대의 얼굴을 마주 보았다.

“…아직 완벽하지 않아.”
“제대로 된 실험을 하지 않으니까 그렇지 않을까?”
“무슨 소리야?”
“동물의 기억이 삭제되었다는 것을 알아내기란 쉽지 않잖아. 행동만으로 보이지 않는 기억의 존재 여부를 찾아내는 건 불확실성이 너무 많아.”
“….”

틀린 말은 아니었다. 카게야마는 손을 뻗어 따끈한 잔을 쥐었다. 커피 잔이긴 했지만, 안에 들어 있는 것은 우유일 것이다. 그가 커피를 잘 먹지 않는다는 것을 상대가 모를 리가 없었다. 꿀이 적당히 섞여 달콤하고 따뜻한 우유를 한 모금 마시며 카게야마는 미야를 고집스럽게 바라보았다.

“이 연구는 내가 알아서 할 거야.”
“토비오, 너 사실은 ‘생존’했다는 것 자체를 실험의 성공으로 삼고 있지?”
“….”
“기억을 지운다는 게 결국은 뇌세포를 죽이는 일이 될 텐데, 그것도 나쁜 지표는 아니지. 오, 생존확률 꽤 높아지고 있네.”

그는 화면에 띄워져 있던 자료를 손가락으로 주욱 따라가며 말을 이었다. 카게야마는 잠자코 우유를 비우고만 있었다. 뱃속이 뜨끈해져 왔다. 그 역시 모르는 결론은 아니었다.

“하지만 정확하게 하려면 역시 슬슬 임상실험을 들어가야 한다고 봐.”
“실패는 곧 ‘죽음’이야. 생존확률이 극단적으로 높아지면 그 때 할 거야.”
“불필요한 시간 낭비야.”

미야는 아이디카드의 목줄을 잡아 자신에게 당겼다. 훽 당겨졌지만 책상을 잡아 완전히 끌려가는 것은 막은 상대는 끝이 올라간 매서운 눈매로 차분하게 그를 바라봐왔다.

“시작 해. 사람은 내가 준비해 줄게.”
“뭐?”
“도심만 몇 바퀴 돌아도 한 박스는 만들어 올 수 있어. 노숙자들도 있고, 버려진 아이들도 있고. 겨울이기도 하니, 사실 언제 죽어도 이상하지 않는 사람들 좀 쓸어 담아오면 될 것 같은데.”

여유롭게 풀어진 눈매로 웃고 있었다. 끔찍한 소리를 하면서도 손이 다정하게 머리카락을 어루만지고 뺨으로 내려갔다. 목이 빳빳하게 긴장해 있었다. 아, 좀 위험한가. 미야는 부모보다 오랜 시간 상대를 길들여 왔던 미소를 능란하게 지어 보였다.

“토비오, 요새도 잠을 잘 못 자?”
“…아니.”
“너는 거짓말을 차라리 안 하는 게 좋겠어. 수면제를 처방받아 보는 건 어때? 담배에 의존하지 말고.”
“…별로 안 피워. 약을 먹을 정도도 아냐.”
“요 며칠, 하루에 3시간씩 자면서도 그럴 정도는 아니라는 거지.”

그대로 볼을 주욱 당기려는 손을 카게야마가 천천히 거두어냈다. 속이 들킨 것은 기분 좋은 일이 아니었다. 미간에 몇 개의 주름이 만들어졌다. 고양이의 콧수염 같은 느낌이었다.

“상관없어. 할 수 있어.”
“알아.”

미야는 그 고집에 상상의 입맞춤을 더하며 대답했다.

-8-


“여기냐?”
“일단, 맞는 거 같은데.”

하나마키와 이와이즈미는 벽 뒤에서 고개만 슬쩍 내밀어 표적이 된 주택을 확인했다. 문에는 안이 보이지 않게 흐릿한 유리창 하나가 작게 나 있었다. 인적은 없었다. 이름 모를 새들이 떼를 지어 전선줄에 앉아 있는 을씨년스러운 동네였다. 팀장은 침착하게 품 안으로 손을 넣었다. 총은 하네스 안에 잘 들어가 있었다. 그립감도 나쁘지 않았다.

“들어가는 건 나뿐이야.”
“뭐?”
“너는 여기서 대기하다가 신호가 오면 움직여.”
“안에 몇 명이 있는지도 모르는데, 혼자 가겠다고?”
“그러니까 혼자 가는거야. 너는 현장 뛰어본 경험도 없는데 어떻게 달고 가. 여기 있다가 만약 내가 5분 내로 안 나오거나.”

팀장은 인 이어를 착용하고 팔을 걷어붙였다.

“통신이 끊기면 경찰에 연락해. 어차피 저 쪽도 합법은 아닐 테니까 경찰 눈치는 보겠지.”
“그래도 팀장. 같이 가는 게 좋을 거 같은데.”

하나마키는 내키지 않는 듯 작게 반론을 펼쳤지만, 이미 팀장은 차비를 모두 끝낸 상태였다. 그는 서포터의 머리를 한번 누른 후, 자리에서 일어나 벽을 돌았다. 정면에 집이 보였다.

“하아.”

얼마만의 느끼는 현장의 긴장감인가. 싶은 생각을 하면서 그는 최대한 자연스러운 걸음으로 문 앞으로 다가섰다. 명패에는 아무것도 쓰여 있지 않았지만, 초인종은 있었다. 팀장은 천천히 손가락을 들어 벨을 울렸다.

삐이이이.
문 너머에서 날카로운 소리가 울렸다. 정적이 흐른 것은 잠시, 한껏 세운 청각 너머로 누군가의 움직임이 잡히기 시작했다.

[팀장. 뭐야, 무슨 일이야.]
[도와주러 갈까?]
[그냥 있어?]

인 이어에서 하나마키도 난리가 나 있었다. 아니, 이제 겨우 2분이 지났을까 말까인데 왜 이리 법석이냐. 오이카와 같은 녀석. 이라고 말을 해 주고 싶었지만 이를 악물어 참았다. 문을 부서 버려야 하나 싶은 생각이 들었을 때 즈음.

“누구십니까.”
안에서 침착한 목소리가 들렸다. 나이가 든 남자의 목소리였다. 팀장은 유리창 너머 흐릿한 회색 인영을 바라보았다.

-9-



“아, 윽. 으윽. 윽.”

천정이 빙글빙글 돌았다. 원래도 높았고, 무슨무슨 유명한 화가가 그렸다던 복잡한 그림이었다. 어렸을 적에는 거기에 그려진 사람의 명수나 동물을 세며 놀기도 했었다. 지금도 그랬다. 카게야마는 눈을 똑바로 뜨고, 그림 속 날아가고 있는 새의 마릿수를 세었다.

“아, 아.”

등이 아팠다. 아니, 따가웠다. 러그가 아니라 짐승의 털가죽으로 만든 것이라서 그럴 것이다. 보통 사용하는 여우의 부드러운 털가죽이 아니라, 늑대의 것이었다. 이 산에서 살던 것을 사냥하여 만들었다고 했었다. 회색, 검은색, 은색. 그런 색깔의 털이 곱지 못한 결을 가지고 벗은 등을 찔러 왔다. 피부는 발진이 돋은 듯 빨갛게 변해 있었다.

“토비오.”
“으, 으으….”
“내가 죽였어야 하는 사람이 두 명 있었거든.”

발이 번쩍 들려 어깨에 실렸다. 오래된 상처가 있는 쪽이었다. 잡힌 무릎이 시큰거렸다. 카게야마는 외로 기우는 몸을 멈추려 급하게 바닥을 짚었다. 핑, 머리가 다시 한 번 돌았다.

“근데 둘 다 죽이진 못했어.”
“아,”

상대는 끊임없이 몸을 괴롭혔다. 이런 게 기분이 좋아질 수 있었던 것은 딱 두 번뿐이었다. 그 애와 했던 두 번 뿐이었다. 정신으로 그 날을 헤매며 애써 균형을 다시 잡아 보려 했지만 상대는 봐주지 않았다. 한층 엉망으로 상체가 무너졌다.

“짜증이 많이 났었지만.”

아프고, 피곤했지만 상대가 놓아주지 않아 잠이 들 수가 없었다. 하나, 둘, 셋. 이제 셀 수 없는 천장의 무늬를 대신해서 카게야마는 러그의 털을 의미없이 헤어라 보기 시작했다. 다섯, 여섯.

“어쨌든 다 잘 풀렸네.”

비명이 나올 것 같아서 수의사는 입술을 잔뜩 말아 세게 물었다. 손은 짐승의 털을 한 움큼 모아 쥐고 있었다.

“으으….”
“그렇지만 토비오, 나는 실패를 3번 할 것 같진 않아.”

가까스로 돌릴 수 있는 시선 속 남자는 웃고 있었다. 즐거워하고 있었다.

“그게 네가 나한테 잘 해야 하는 이유야.”

-10-


오이카와는 침대에 누워 있었다. 잠이 오지 않았다. 수면 마취의 영향인지도 몰랐다. 어쨌든 몸은 피로하지 않았고, 정신 또한 그러했다. 탁상시계의 규칙적인 울림을 들으며 그는 자신의 손을 펴 보았다.

“….”

까만 털이 아주 조금 쥐어져 있었다. 옆집 남자가 데려왔던 고양이의 것이었다. 의탁할 만한 곳에 맡기면서, 요원은 그 털을 조금 보관해 이곳으로 왔었다. 그리고 그것을 쥔 채, 마취에 들어갔다. 이유는 간단했다. 확인하고 싶었기 때문이었다.

“정말, 토비오쨩이야?”

그는 혼잣말을 중얼거리며 손바닥 속 까만 털을 오랫동안 바라보았다. 일부는 사라지고, 일부만 남아 있었다. 자신을 진찰했던 의사는 그것의 일부만 가져가고 나머지는 남겨 두었다. 요원은 그것이 나름대로의 답변이라고 생각되었다. 그러니까 정말로 카게야마 토비오였다. 그렇다면 그 사실은.

“나한테 없어진 기억이 있는거야?”

로 수렴되었다. 오이카와는 눈을 감았다. 그리고 아주 어린 시절부터 천천히 떠올려 가기 시작했다.

-11-


“오이카와 토오루입니다~”

그 아이는 명랑하게 인사를 했었다. 앞으로 자신이 어떻게 될 지도 모르고 싱글싱글 웃으면서 말이다. 부드럽고 말랑말랑한 생김새에 눈이 반짝반짝 빛났다. 카게야마는 왠지 시선을 조금 미끄러뜨려 땅을 보았다.

"인사할 필요 없어. 얼굴을 대고 만나는 건 지금 뿐이니까.”

그리고 부러 훨씬 무뚝뚝하게 대답했다.

“우선은 네가 실험에 적합한지 볼 거야.”
“으응.”

고개를 끄덕이며 주의 깊게 듣는 모습은 제법 똑똑하고 눈치가 있어 보였다. 나이는 두살 어려도 체격은 자신보다 더 크고 건장한 남자애였다. 원래는 요원으로 선발될 예정이었다고 들었다. 그걸 원한다고 했다. 나는 이리저리 활달하게 움직이는 눈동자를 내게 고정시키기 위해 볼펜 뒤로 톡톡 손에 들고 있던 파일을 두드렸다.

“실험에 통과하게 되면, 소비재를 거치지 않고 바로 정식 요원이 되는 특혜를 가지게 된다는 말은 들었지?”
“네. 앗, 그런데.”

손을 번쩍 들며 그 애가 설명을 막았다. 솔직히 조금 짜증이 났었다. 그런데.

“아까부터 신경 쓰였는데, 이거 사진 바꾸면 안 돼요?”

그 애는 내 목에 걸려 있던 아이디카드를 잡아채어 당기고는 스스럼없이 웃으며 상황에 맞지 않은 말을 건네 왔다. 순식간에 다가온 홍차색 눈동자가 아이디카드 속 사진과 나를 번갈아 바라본다.

“이거 너무 못생기게 나왔잖아요. 와, 심하네. 이런 사진을 프로필로 어떻게 써요?”

우유냄새가 났다. 그러고 보니 프로필에 좋아하는 것이 우유빵이라고 적혀 있었더랬다. 다른 것도 최고점이었지만, 인성과 친화력 부분이 유별나게 높던 후보생이었다. 키, 몸무게, 성격, 성향. 프로파일은 당연히 몇 번이나 읽어 봤었다. 사진도 잔뜩 받아 골고루 분류하고 눈에 익혀 두었었다. 그런데.

“카게야마 토비오? 토비오?”

실제의 그에겐 문서의 어떤 것으로도 파악되지 않은 특별한 것이 있었다.

“그럼 나 이제부터 ‘토비오 쨩’이라고 불러도 되요?”

그리고 자꾸 관계를 요구해 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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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사실 피드백 댓글로는 몇 번 말씀드렸지만 저는 이 이야기 속, 미야 아츠무는 싸이코패스와 소시오패스의 중간 즈음으로 생각하며 쓰고 있습니다. :) 멋지고 좋은 캐릭터로 쓰지 못하게 되어 아쉬운 감은 있지만.ㅠ0ㅠ...인상적인 악역이 될 수 있게 잘..!!ㅠ0ㅠ!!
2. 마감을 ...할 수 있을...까요? 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 하고 싶습니다..!! 행사 참여는 처음이 되는건데, 정말 마감할 수 있으면 좋겠습니다.ㅠ0ㅠ...
3. 언제나 감사합니다.

Blind Game


◆◆◆


“나.”
“….”
“…네가 좋아.”
실로 바보같은 고백은 놀라울 정도로 쉽게 마음을 훔쳤다.


◆◆◆


“깨어나셨습니까?”
“….”
“식사는 도련님께서 늘 좋아하시던 것들로 준비해 두었습니다.”

카게야마는 손을 들어 눈앞으로 가져왔다. 깨끗하게 손질되어 있었다. 작고 약한 동물들을 다루는 직업이라 바짝 깎는 것까지는 자신의 버릇이 맞았으나, 자잘한 스크래치 없이 매끈하게 정리하는 것은 다른 자의 솜씨였다. 이를테면 지금 자신에게 넥타이를 건네고 있는 이 남자. 수의사는 온화하다 할 수 있는 표정의 중년남자를 가만히 올려 보다, 그의 손 위에 놓인 넥타이를 거칠게 낚아챘다. 그는 입술 끄트머리로만 슬쩍 웃어 보였다.

“쓸데없는 일은 하지 마세요.”
“큰 주인님의 몸에 자국이 남게 할 수는 없습니다.”
“…싫으면 그 쪽이 안 하면 되잖아?”

그는 단추가 아직 하나 잠겨 있지 않은 와이셔츠 카라에 손가락을 걸고 당겨 내리면서 비꼬았다. 목에 남아 있는 지난 일의 흔적은 이빨자국이었다. 애정보다는 조금 더 진득하고, 까탈스러우면서 위험한 감정이 남겨 놓았다. 사용인은 한층 온유하게 눈썹 끝을 내렸다.

“여전하셔서 다행입니다. 변하시기라도 했으면 놀랐을 것 같습니다.”

대답하지 않고 카게야마는 공단으로 만들어진 고급 넥타이를 카라의 밑에 대어 반듯하게 각을 잡았다. 매끈한 손끝으로 익숙하게 매듭을 지어 조이는 과정을 그는 물끄러미 바라보았다. 거액의 후원을 받고 심지어 그 몸을 의탁했으면서도 위축되는 법이 없던 당돌한 아이였다. 큰 주인과 작은 주인이 워낙에 특별하게 보았던 탓도 있지만, 타고난 성정 또한 한 몫을 했을 터였다. 관심을 요구하지도 어려워하지도 않으며 자신의 관심분야에만 혹 빠져드는 몰입도 높은 성격. 그런 건 몇 년이나 걸려도 길들이기가 쉽지 않은 것이 당연했다.

“하지만 정말 수의사는 의외였습니다.”

그는 바닥에 잘 닦은 검정구두를 놓으며 입을 열었다. 발끝을 넣으려던 수의사가 몸을 멈췄다. 사용인은 고개를 들며 눈을 똑바로 맞추고 웃었다.

“누구보다 많이 죽이시지 않았습니까?”
“….”

길들이기 쉽지 않음에도 불구하고, 포기하지 못하게 하는 포인트는 이런 것이었다. 사납게 잘만 움직이던 혀가 꼼짝없이 멈춰버리고, 차갑던 푸른 눈동자에 균열이 일어나는 지금 같은 순간만이 줄 수 있는 희열이 있었다. 보이지 않게 한 번 웃은 그는 의지를 잃은 상대의 발을 잘 받쳐 들고 구두 안에 조심스럽게 넣어 주었다. 발목에도 역시 손자국이 흐릿하게 남아 있었다. 꽉 잡아서 다리를 활짝 여셨을까. 그 사이에서 수치보다 분노로, 쾌락보단 고통으로 일그러진 얼굴을 보며 그 표정을 즐기셨겠지.

“주인님께서 기다리고 계십니다.”

자신에게도 그러할진데 미야, 그가 모시는 주인에게는 그것이 마약같이 중독적인 쾌락이었을 것이라는데 동의할 수 밖에 없었다.

◆◆◆


오이카와는 선글라스를 벗어 셔츠 사이에 끼웠다. 평소처럼 몸에 딱 맞게 재단된 양복이 아닌, 검은 색 면바지에 흰색 티셔츠 차림이었다. 군데군데 칠이 조금 벗겨져 있는 나무 벤치에 앉아 있던 그는 가지고 왔던 책을 펴들었다. 한 낮의 오후였다. 계절을 먹고 겹겹이 쌓인 잎들은 노란 색에서부터 짙은 녹색까지의 모자이크를 만들고, 그 사이로는 무정형으로 쪼개진 햇빛이 나풀나풀 떨어져 내렸다. 종이 위에 아롱진 빛살을 어루만지던 오이카와는 문득 새까맣게 지는 그늘에 고개를 들었다.

“오이카와 토오루씨?”
“그런데요.”
“와, 사진보다 훨씬 미남이시네요.”

흑발의 미인은 안경을 밀어 올리며 생긋 웃어 보였다. 요원은 못지않게 생글거리는 미소로 화답하며 그녀를 살펴보았다. 이 시간 이 곳에서 쉽게 볼 수 있는 오피스 복장에 서류가방 하나를 들고 있었다. 그녀는 목에 걸린 사원증을 뒤집어 보였다. 에이전트 마크가 진한 적색으로 박혀 있었다. 오이카와는 읽던 책을 덮어 벤치에 놓았다.

“무서운 곳으로 안내해 줄 사람인가 보네?”
“무서워하실 필요는 없어요. 그저 의례적으로 끝나는 일도 많으니까요.”
“엣. 의례적이지 않으면 무서워해야 하는 걸까?”

자리를 털고 일어서 요원이 되물었다.

“어라, 찔리는 거라도 있으신 걸까요.”

눈웃음과 함께 붉게 칠해진 입술이 날렵하게 들어 올려졌다. 오이카와는 얇은 오피스 복장 아래로 탄탄하게 자리 잡은 그녀의 실전근육들을 어렵지 않게 알아챌 수 있었다. 가슴을 타이트하게 잡아 둔 하네스에 밀착된 총기 하나, 허벅지의 가터에 달린 나이프 하나. 등급을 매길 수 있다면 이것은 특등급에 해당될 것이다. 말하자면 이제와 마음을 고쳐먹어도 보내주지 않겠다는 거네.

“오이카와씨는 그런 거 전혀 없거든.”
그는 가슴을 반듯하게 펴고 화답했다. 손을 내밀어 안내하라는 제스쳐를 보이자, 힐의 끝이 바닥을 날렵한 곡선으로 회전해 뒤를 돌았다. 뒤를 따라 걸으며 요원은 마지막 브리핑에 대해서 떠올렸다.

◆◆◆


"그래. 가."

팀장은 의외로 시원스럽게 결론을 내려 주었다. 오히려 놀란 쪽은 하나마키였다. 눈을 둥그렇게 뜬 해커는 양 쪽을 번갈아 바라보고 있었다. 걱정스럽다는 시선이었다. 숨쉬듯 사고를 치는 오이카와와 가끔씩 거대한 사고를 치는 이와이즈미의 콜라보레이션을 그는 사실 그다지 보고 싶지 않았다.

"이 일을 끝내려면 그 방법밖에는 없는 것 같으니까 말이야."

그렇지만 당사자들의 결심은 확고했다. 이와이즈미는 인이어 네 개를 꺼내어 탁자 위에 놓았다.

"하나마키. 얘네들은 우리끼리만 통신할 수 있도록 주파수를 다시 설정해 줘."
"팀장은 어려운 일을 쉽게도 얘기해."
"할 수 있지?"
"물론이지."

서포터는 네 개 째의 인이어를 들고 잠시 그것을 뚫어져라 바라보았다. 세 개가 아닌 네 개였다.

"팀장, 이건."
"당연히 마츠카와 거야."

팔짱을 꽉 낀 상태로 팀장은 담담하게 대답했다. 그는 화이트 보드를 바라보았다. 카게야마 토비오, 미야家, 중앙조직, 마츠카와 잇세이. 그가 풀어내고, 찾아와야 하는 모든 것들이 그곳에 적혀 있었다. 오이카와 역시 시선을 같이 했다. 주머니 속에서는 쉼없이 라이터가 딸깍 거렸다.

"오이카와. 네 녀석이 중앙 지부에 침투해 있는 동안, 마츠카와를 찾아낼 생각이야."

팀장의 옆모습은 빛무리가 져 있었다. 참으로 수더분하지만, 언제나 믿음을 주는 모습이었다.

"현장 뛰는 건 오랜만이겠네. 너무 무리하는 거 아니야. 이와쨩?"
"네 걱정이나 해라."

가벼이 던진 말에 묵직하게 되돌리며 그는 자신있는 미소를 지어 보였다. 오이카와는 안심한 듯 마주 웃어보였다. 팀장으로서는 드물게 현직 요원 출신인 이와이즈미였다. 높은 미션 성공률과 충성도, 그리고 높은 인성 점수로 인해 이른 나이에 팀장의 자리로 돌려지게 된 케이스라고 알고 있었다. 그 후로도 운동을 게을리 하지 않아 여전히 단단한 체격의 팀장 앞에 요원은 챙겨왔던 총을 하나 내려 놓았다.

"총이라면 나도 있어."
"이와쨩 걸로 등록되어 있는 건 보안 상 추적이 너무 쉬워서 어려울 거고, 중앙 지부에는 어차피 못 가지고 가니까."
"오이카와."
"빌려주는 거에요. 그거 오이카와씨가 제일 아끼는 거니까 꼭 돌려 주기."

한없이 가벼운 웃음으로 브리핑이 마무리되었다. 사실 따지자면, 여태까지 중에서 가장 엉망이고 부실한 브리핑이었다.

◆◆◆

익숙한 계단을 천천히 내려가자, 낯익은 풍경이 눈에 들어왔다. 카게야마는 잠시 난간에 몸을 의지하며 발을 멈췄다. 두 어 계단만 더 내려가면 도착하는 공간은 테라스와 맞붙어 아낌없는 햇살을 받고 있는 곳이었다. 높은 천정과 커다란 창, 기다란 커튼. 어린아이의 침대보다도 커다랗고 길쭉한 테이블과 단 두 개만 놓여 있던 의자. 그리고.

따악,
경쾌한 타격음과 함께 초록공단이 깔린 판 위로 하얀 공이 미끄러졌다. 반시계방향으로 회전이 걸린 상아빛 큐볼은 모서리에서 정확한 각도로 반사되어 오브젝트 볼을 차례로 맞춰냈다. 오차라고는 찾아볼 수 없는 깔끔한 움직임이었다. 공의 속도가 줄어들다 마침내 멈추자, 수의사의 눈동자 역시 아래로 내리깔렸다. 규칙 상 다시 한 번 칠 수 있는 기회가 있음에도 불구하고 남자는 검은 색으로 끝이 마감되어 있는 큐대를 내려놓았다. 그리고 천천히 뒤를 돌았다.

“좋은 아침이야, 토비오.”

유들유들하지만 날카로운 구석이 있는 목소리가 고개를 다시 들어 올렸다. 짙은 잿빛의 와이셔츠에 검은 넥타이를 매고 있는 남자는 카게야마의 머리부터 시작해 발끝까지 차례로 훑었다. 목에 남아 있는 상흔에는 제법 오랜 시간 시선이 머물렀다.

“배고프겠네. 우선 식사부터 해.”

마치 관용을 베푸는 듯한 목소리였다. 그것 또한 익숙한 것이었다. 사람을 애완동물 취급하는 오만한 목소리.

“아, 나는 먼저 먹었어. 디저트만 먹으면 될 것 같으니 기다릴게.”

대답이 없는 상대의 것까지 넘겨짚으며 그는 다시 당구대 위의 배열을 살폈다. 시선과 달리 장갑을 끼고 있는 손끝으로 가리킨 식탁 위에는 조식용으로 어울리는 여러 가지 음식이 차려져 있었다. 꿀과 여러 가지 잼이 발린 토스트, 우유, 버섯과 야채 오믈렛. 뜨끈한 온기의 향과 달큰한 냄새에 속이 뒤집힌다. 그러나 카게야마는 내색하지 않고 계단을 내려와 의자에 앉았다.

“다리. 생각보다 잘 움직이네.”
“….”
유심히 걸음을 보던 미야는 큐대의 끝에 초크를 문지르며 천천히 말을 건넸다.

“뭐, 치료를 잘 받긴 했었지.”

애써 포크를 쥔 손이 달달달 떨렸다. 카게야마는 푹신한 질감의 토스트 대 여섯 개쯤을 한 번에 뚫을 기세로 접시에 내리찍었다. 삐끗한 포크 끝이 듣기 싫은 소리를 내며 접시를 긁었다. 미야는 눈썹을 밀어올리고 슬쩍 웃었다. 그는 식탁으로 다가가 꿀을 들어 있는 단지를 들어 우유 잔에 조금씩 흘려 넣기 시작했다.

“천재 어린이께서는 그 일로 아직 화가 나 있어?”
“….”
“말은 계속 안할 생각? 정말 어릴 때랑 똑같네."
“말은 내가 아니라 네가 해야지.”

먹지도 않을 토스트를 계속 조각내며 카게야마가 차갑게 말을 끊었다. 내내 짓눌려서 비명을 참던 어젯밤의 일 따위는 아무것도 아니라는 듯한 태도에 속이 울렁거렸다. 나른해 보이는 눈매 속, 살기가 어린 눈동자에 희미한 흥분이 번져 나갔다. 면면히 흐르던 황금빛 끈적한 액체가 아주 조금 흔들렸다.

“무슨 말?”

우유가 넘치기 직전, 꿀이 든 자기단지를 확 들어 올리며 미야가 대수롭지 않게 되물었다. 그리고 카게야마에게 몸을 기울였다. 눈과 눈이 마주했다. 누구 하나 피하지 않고 곧게 부딪쳐 차가운 냉기를 만들어 내는 시선이었다.

“네가 거기 사는 줄은 언제부터 알고 있었는지? ‘오이카와 토오루’가 어떻게 살아 있을 수 있었는지? 그런 이야기들?”
“아니.”

카게야마는 포크를 손 안에서 고쳐 쥐고, 날카로운 끝을 미야의 턱 밑으로 뻗으며 나직하게 대답했다.

“네가 날 찾을 수는 있다고 생각했어. 아니, 찾을 거라고 생각했어.”
아, 이 괴물은 귀여운 생김새와 달리 도무지 길들여지지 않는다.
“하지만 왜 그걸 다시 만들려고 하는지 모르겠어.”
그리고 자신의 가치에 대해 관심이 없고, 알지도 못한다.

“그래. 재현해줄 수는 있어. 하지만 난 그 이후로 아무런 연구를 하지 않았어. 그러니 여전히. 그 기계는 불안정해. 피실험자의 집중력이 없으면 100% 실패야. 그러니까 오이카와는.”

카게야마는 잠시 말을 멈췄다. 어젯밤 한 번도 흔들 수 없던 눈동자가 사정없이 떨리고 있었다. 그래. 그 단어 앞에서만 무릎을 꿇는 단단함도 좋아.

“…오이카와가 특별했던 거야.”

그러니까 그는 카게야마의 고삐이며, 재갈이고 채찍이었다. 미야는 알 듯 말 듯 한 묘한 표정을 지으며 수의사의 손목을 잡았다. 그대로 비틀어 꺾자, 손 안에서 포크가 툭 떨어졌다. 미간을 찡그리면서도 영롱하게 빛나는 눈동자를 꺾지 않는 상대를, 미야는 그대로 끌어다 자신의 아랫배에 처박았다.

“윽.”
“시시하지 않는 내 토비오.”
“이거, 놔-”
“네가 없는 동안 너무 심심했어.”
“수작, 부리지 말고―, 윽. 대답이나. 우윽. 미야!”

동그란 머리통을 단단히 팔뚝으로 감아 꾹 끌어당기자, 뱃속이 가득 채워진 것 같은 포만감이 들었다. 나는 사실. 어쩌면 내가 너를 꺾기 위해 태어난 게 아닐까. 하는 생각을 했었다.

◆◆◆

이와이즈미는 커다란 가방을 들고 한 낮의 도로에 서 있었다. 여름이었던 작전 수행지와 달리, 이곳은 꽤 서늘해서 자켓을 입었는데도 전혀 더운 기분을 느낄 수 없었다. 스포츠 백 하나를 어깨에 둘러매고, 모자까지 눌러쓴 그는 핸드폰에서 눈을 떼지 않았다. 그러길 몇 분이나 지났을까.

 빠앙, .

요란하게 치장된 스포츠카 한 대가 경적을 울렸다. 계속 핸드폰만 확인하던 이와이즈미가 고개를 들었다. 표정은 아주 빠르고 역동적으로 변해갔다. 질색이라는 감정을 가장 효과적으로 구현해낸 얼굴 앞에서 차창이 내려갔다. 그리고 익숙한 얼굴이 싱글싱글 웃는 표정으로 나타났다.

“여, 팀장.”
“지금 이건 뭐하는 짓이냐. 하나마키.”
“마이 드림카야. 끝내주지?”
“너―.”

도대체 어디부터 손 봐야 할지 알 수 없어서 팀장은 뻔뻔한 얼굴 앞에서 한숨만 깊이 쉬었다.

“우리가 가는 게, 공식적인 일정은 아닌데다가 최대한 숨겨야 하는 일인 건 알고 있냐?”
“그럼, 잘 알고 있지. 여기까지 행적을 지우면서 오는 게 얼마나 힘들었는데.”
“그걸 아는 사람이 이렇게 화려한 차를 가져 와?! 아예 여기 있다고 광고를 하지 그러냐. 이래서야 도대체 오이카와랑 다를 게 뭐야!”
“아무리 팀장이라도 그 말은 정말 너무하다.”

하나마키는 쓰고 있던 선글라스를 벗으며 정색했다.

“평소에 입는 옷을 봐. 내가 오이카와랑 센스를 비교당할 이유가 어디에 있는데?”
“하나마키.”
“응?”

팀장은 입고 있던 자켓 한쪽을 살짝 열어 보이며 싸늘하게 웃었다. 컨실드 캐리되어 있던 글록22 권총이 위압적인 모습을 잠시 드러냈다.

“히익.”
“탄흔으로 너의 그 오이카와보다 괜찮은 취향을 박살 내버리기 전에 당장 바꿔 와.”

하나마키는 서둘러 차창을 올렸다. 부아아앙. 요란한 소리와 함께 출발한 차는 얼마 지나지 않아 가장 무난한 차종과 색깔로 바뀌어 되돌아 왔다. 그제야 차에 탑승한 이와이즈미는 CCTV의 위치에 주의하며 차창을 내려 밖을 보았다. 계절에 맞게 라벤더가 절정으로 피어 있었다. 그런 와중에도 멀리 보이는 커다란 산꼭대기에는 아직 하얀 눈이 쌓여 있는 서늘한 지역. 여기는 훗카이도였다.

“위치는 알고 있지?”
“물론.”

도로 상황용 CCTV를 간간히 확인해 길을 돌아가며 하나마키가 짧게 대답했다. 마지막으로 마츠카와의 핸드폰 위치가 잡힌 곳은 학교에서 공항으로 가는 그 중간 즈음에 있었다. 상부에서는 실종된 요원의 소재를 파악하는 일을 다른 팀에게 일임하겠다고 지침을 내렸다. 당연하게도 지킬 생각이 없는 지침이었다. 점점 더 한적한 곳으로 바뀌어 가는 풍경을 보며 팀장을 눈을 감았다.

제발 살아만 있어라.

팀원들 앞에서는 당연히 생존해 있으니 찾기만 하면 된다고 큰소리를 친 그였지만, 아무리 상황을 곱씹어 보아도 객관적 가능성은 낮았다. 살아 있을 것이다. 살아 있을 지도 몰라. 살아 있을까. 이 세 문장을 번갈아 오고 가는 괴로운 고민 속에서 차는 끊임없이, 또 끊임없이 도로를 달렸다. 점점 한적해져 가는 길이었다.

◆◆◆


“와, 이거 어떻게 알았어?”
“아츠무, 너 진짜 똑똑하다.”
“대단히 영민한 학생입니다.”

칭찬 또한 질릴 수 있는 것이었다. 아주 어렸던 시절에는 그것 한 번을 듣기 위해서 노력해 보기도 했지만, 그다지 큰 힘을 들이지 않아도 되는 일이란 것을 알고 나서는 요령을 부리는 쪽으로 방향을 바꿨다. 하지만 그렇다고 칭찬의 총량은 그다지 달라지는 것이 없었다.

“들었어? 미야家의 독자래.”
“아츠무는 진짜 잘생기지 않았어?”

태생부터 타고난 것들이 그러했고.

“어머, 올해에 아츠무 맡으셨어요?”
“1등상은 선생님 반이시겠네요. 발표회 때도 볼만하겠어요. 너무 좋으시겠다.”

재능도 그러했다. 원하지 않아도 사람들은 부지런히도 칭찬과 칭송을 가져다 바치곤 했다. 주변 사람들이 비춰주는 스포트라이트는 눈이 멀 지경이라 때때로 머리가 아팠다. 귀찮았고, 시시했다. 시덥지 않은 이야기나 하는 어린애들을 더는 견딜 수 없어 싸우고 온 첫 날, 아버지는 아츠무를 엄하게 혼냈지만 마음에 와 닿은 것은 없었다. 오히려 마음에 닿은 이야기는.

“아츠무. 그들을 같은 급으로 생각하면 안 된단다.”

할아버지에게서 나온 말들이었다. 아직 정정했던 집안의 주인은 미야에게 혈통이 보증되어 있는 훌륭한 망아지 한 마리를 선물하며 그렇게 운을 떼었다.

“하물며 말에도 있는 등급이 사람에게 없겠느냐.”

주름이 서서히 잡히기 시작한 손으로 윤기가 자르르 흐르는 말의 갈기를 쓰다듬으며 그는 아비에게 엄히 혼나 시무룩해진 어린 손자에게 미야家의 이치를 말해주었다.

“사람이 좀 나은 것은 등급이 매겨지는 걸 알면 불쾌하게 여긴다는 것 외엔 없단다. 아주 약간의 이성 같은 거지.”
“할아버지. 그럼 제가 어떻게 해야 해죠?”

맑은 눈동자를 한 검은 말에게 시선을 둔 채, 손자는 어른스럽게 되물었다. 그 질문에 대답하는 대신, 할아버지는 손자에게 말을 예뻐하는 법을 가르쳤다. 잘 보살피고, 먹이를 주고, 원하는 방향으로 움직이게 하는 법들까지 모조리. 그리고.

“지금 배운 대로 하면 어떻겠니?”
“네?”
“그냥 어여삐 여겨 주란 뜻이란다.”

아. 어린 소년은 자신의 손이 당기는 대로 따라오는 말을 보며 깨달았다. 말처럼 사람도 길들일 수 있는 것이었다. 어떤 것은 쉬웠고, 어떤 것은 조금 까다로웠다. 부드럽게 대해야 할 때도 있었고, 억누르고 격차를 보여줘야 하는 때도 있었다. 그런 것들은 똑똑한 어린 아이의 유희가 되었고, 곧 대부분의 사람이-공교롭게도 할아버지까지 포함되어- 동물과 같은 급이 되었다. 그렇게 그것 자체가 아이의 가치관이 되었을 무렵.

“카게야마 토비오란다.”
미야는 ‘카게야마 토비오’를 만났다. 세간에는 아직 잘 알려지지 않은 어린 천재였다. 그리고.

“…어.”
처음으로 체스 게임에서 동년배에게 져 보았다. 기상천외한 전술을 구상하고, 실현한 어린 천재는 벙찐 표정을 짓고 있는 미야를 똑바로 바라보았다.

“너.”
그 아이가 그렇게 새파란 눈동자를 가지고 있다는 것을 지고 나서야 알았다.

“봐주지 마.”

초반에 자신을 봐주고 있다는 것조차도 눈치 챈 어린 아이는 조그만 손으로 따박따박 체스를 정리했다. 검은 것, 흰 것을 나누고 가지런히 열을 맞추었다. 미야는 계속 그 손의 어줍잖은 움직임만을 보고 있었다. 자신의 패배가 불러일으킨 광경을, 그리고 그것이 주는 희열을 만끽했다.

“또 하자.”
조그마한 입술이 조잘거리며 사람의 말을 내뱉었다.

“네가 안 봐줘도 이길 수 있거든.”

아니, 얜 그냥 사람이었다. 미야는 잠시 고개를 돌려, 화장대 위의 거울 속 자신을 바라보았다. 동공이 있는 대로 확장되어 있었다. 그는 스스로를 보며 웃었다. 그때부터 미야는 자신이 뭘 원하는지 알고 있었다.

◆◆◆

“보채지 마. 토비오. 다 말해 줄 테니까.”

미야는 두 손으로 고개를 꽉 잡아 자신에게 들어 올리며 말했다. 짓이겨진 탓에 발갛게 달아올라 있는 얼굴은 색깔부터 시작해 이목구비 전체로 화를 내고 있었다. 자신과 달리 얇게 빠진 눈썹 위를 덧그리며 저택의 주인은 상냥하게 눈을 접어 웃었다.

“아마 말해주지 않아도 너는 다 알게 될 거야. 똑똑하니까.”
“네가 거짓말만 하지 않으면 그렇겠지.”
“응. 그건 좀 조심해. 매번 당하잖아.”

목덜미 채로 들어 올린 몸을 식탁 위로 처박으며 그가 가벼이 대꾸했다. 배에 부딪쳤던 것과는 차이를 비교할 수 없는 타격이 얼굴을 강타했다. 그나마 마지막에 고개를 돌려 코를 부딪치는 것을 피한 머리를 한 손으로 내리 누르며, 미야는 식기구를 한 번에 쓸어 바닥으로 떨어뜨렸다.

 채앵, . 챙챙.

접시는 비싼 만큼 섬세하여 오히려 깨지기 쉬운 것들이었다. 하지만 박살이 나도 얼마든지 다시 구입할 수 있는 자들에게 그것은 특별한 것이 아니었다. 미야는 수의사의 손목을 잡아 머리 양 옆에 내리눌렀다. 배 밑에서 조금 작고 얇은 몸이 꿈틀거렸다. 이틀 간 먹은 것이 하나도 없을 텐데 꽤나 거친 반항이었다.

“얌전히 있어 봐. 토비오. 계속 이렇게 잡고 있으면 다음 일을 할 수는 없잖아.”
“하지, 마-! 그만, 윽. 하라고.”
“그 날엔 잘도 했잖아. 좋다고 울면서, 더 해달라고 조르면서, 내 이름을 계속 부르면서.”
“아, 아니야.”
“그 때처럼 누가 봐줬으면 좋겠어? 사용인들이 널 잡고 있게 해줄까?”

조근조근 건네는 말에, 숨을 들이키며 좁아졌던 날개뼈가 천천히 내려앉았다. 씨근덕 거리는 숨소리 또한 잦아 들어갔지만, 살갗을 뚫고 나올 듯 솟아난 손등 뼈는 좀처럼 가라앉질 못 했다. 미야는 천천히 손목을 잡고 있던 힘을 놓았다. 깜찍하게도 손은 그대로 얌전히 그 자리에 있었다. 그 후로는 아무런 방해도 없이, 그는 잘 입혀져 있던 바지의 벨트를 풀어내고, 버클을 풀었다. 부드러운 질감의 바지는 소리 없이 발치로 떨어졌다. 수의사는 눈을 감았다.

“미야.”
이미 쉬어 버린 목소리였다.
“…?”
헐거워진 와이셔츠 밑으로 손이 들어왔다.

“나는 평생 이 짓을 용서하지 않을 거야.”

고생을 해 보지 않은 도련님의 매끈한 손끝이 척추를 하나하나 훑고 천골에 닿았다. 어젯밤 자신을 최고의 지점으로 떠오르게 했던 입구로 이어지는 곳이었다. 앞으로 일어날 일을 알고 있는 몸은 의지와 관계없이 부르르 떨렸다. 힘이 풀린 다리가 테이블에 의지해 겨우겨우 몸을 지탱했다. 미야는 와이셔츠를 걷어 올리고, 옴폭 패인 허리 부근에 입을 맞췄다. 그렇게 해.

“사실 난 그런 것도 퍽 싫진 않아. 그것도 꽤 특별하잖아?”
“그렇지만. 토비오.”
“아마 불가능할거야.”

◆◆◆


“으, 으윽. 으…. 으으.”

어떤 심정이었냐고 묻는다면 잡아먹고 싶었다고 답할 것이다. 괴로움이 일관되게 흐르는 신음을 내뱉는 까만 뒤통수를 꽉 잡으며 미야는 생각했다.

“아. ㅇ응. 으으.”

너는 자신이 가진 천재天才성이 아무것도 아니라는 듯한 그 태연함이 가장 특별했다. 그런 네 앞에서 가장 크게 느낀 것은 허기였다. 상처 같은 거 하나 없이 매끈하게 통째로 뱃속에 넣은 후, 오래토록 소화시키고 싶었다. 재능. 그리고 그 재능을 둘러싸고 있는 거죽. 꾸민 데라고는 없는 새까만 머리카락, 화려하지 않은 벽안, 건강하게 그을려 있는 아이다운 피부. 동그랗고 작은 복사뼈까지. 네 모든 것이 나에게는 허기였다. 그러니까 꽤 오래 전부터 나는 굶고 있었어.

“토비오.”

그는 입을 벌려 벗겨진 어깨를 깨물었다. 깊고 깊은 식욕을 다스리기엔 뱃속에 넣어진 것이 터무니없이 적었다. 전부 다. 모두 내 놔. 네가 가진 것들 중, 내 것이 아닌 건 없어야 해. 그야말로 전부. 하나도 빠짐없이, 남김없이. 모두 다. 내가 너에게 그랬듯이.

“왜, 날 사랑하지 않았어?”
“아. 으…. 으, 으. 너무 깊,어…. 그만-.”
“내가 너에게 잘 해줄 때, 날 사랑했으면 됐잖아.”

내가 가장 뛰어난 너를 선택했듯이, 너 또한 그러했으면 될 일이었다. 하지만 카게야마는 그러지 않았다. 그는 조금 뛰어난 실험체에 불과했던 ‘오이카와 토오루’를 선택했다. 비운이었다. 나에게도, 너에게도. 그에게도.

◆◆◆


“요원이 되실 때, 안내받으셨겠지만. 징계위원회에서는 리스트 문답을 통해 미션 실패에 대한 요원분의 책임이 어느 정도인지를 먼저 측정할 겁니다.”
“으응? 그게 측정될 수 있는 거였나.”
“본부에서는 다양한 방식의 통계 자료 합산과 슈퍼컴퓨터의 능력을 활용한 예측 시스템을 갖추고 있습니다. 오차는 당연히 있을 수 있겠지만, 크진 않다고 보고 있지요.”
“아, 그 시스템. 몇 년 전에 대파 당했다고 하지 않았어?”

오이카와는 턱을 괴고 천진하게 웃으며 답했다. 생긋싱긋 웃으면서 대화를 나누고 있긴 했지만, 장소는 제법 살벌했다. 네모 반듯한 탁자 하나, 마주 본 의자 두 개, 삿갓 전등 하나, 네 방향에서 쏘아내고 있는 CCTV, 벽의 한 면은 거울. 한 쪽만 볼 수 있을 것이 분명한 특수 거울. 그 너머로 쏟아지고 있을 것이 분명한 타인의 시선에 위축됨이 없는 요원에게 그녀는 상냥하게 웃어 보였다.

“복귀는 거의 완료되었답니다. 아, 앞으로 필요 없는 질문은 삼가주세요. 오이카와 요원님.”
“불편했어? 미안미안.”
“하나 정도는 괜찮습니다.”

세련된 미소를 짓자 보조개가 살포시 패였다. 상황을 떠나 꽤 매력적인 여자였다. 물론 요원은 큰 관심은 없었다.

“그 1차 결과를 가지고 위원회에서 실제 징계 수위를 논의하게 됩니다. 기계가 가차 없이 정한 내용을 인간이 되짚어 보는 거죠.”
“합리적으로 들리긴 하네.”
“어머, 정말 합리적이랍니다.”

웃음기가 서려 있지만 단호한 목소리였다. 오이카와는 웃는 낯을 유지하며 그녀를 마주 보았다.

“받으실 수 있는 징계 수위는 다양하여 이 자리에서 모두 설명 드리기는 힘든 관계로 파일로 보내드릴 예정입니다. 최종 결정되는 데는 대략 2주 정도의 시간이 소요되곤 하니, 그 동안은 본부에서 제공한 멘션에 계시면 됩니다.”
“으응. 나가는 건?”
“예상하셨겠지만 안 됩니다.”
“오이카와씨 조금 무서워지려고 해.”

진심의 두려움은 없는 목소리로 떠는 너스레에 그녀는 다시 보조개를 지어 냈다.

“휴식이라고 생각해 주세요. 조사를 받는 것을 제외한 나머지 시간에 요원님에 대한 건강 검진과 치료, 상담들도 계획되어 있으니까요.”
“앗? 괜찮아. 나는 건강하니까.”
“의무사항입니다.”

똑 부러지는 목소리로 정리하며, 그녀는 스케쥴 표를 내밀었다. 오이카와는 눈으로 대충 훑어보았다. 그의 눈썹이 동시에 슬쩍 밀어 올려 졌다가 내려앉았다. 예상하긴 했지만 역시. 조사 시간보다 많은 시간이 건강검진으로 잡혀 있었다.

◆◆◆


미야는 카게야마의 목에 에이전트 본부의 출입증을 걸어주었다. 다른 사람들 것과는 비슷하지만 마크의 색깔은 잿빛이었다. 기능 또한 달랐다. 연구실로 직행되는 단 하나의 문만 들어갈 수 있도록 되어 있으며, 나오는 것에 대한 권한은 하나도 들어 있지 않은 카드였다. 길이는 넉넉하여 카드는 어렵지 않게 명치 부근에 닿아 있었다. 그러나 아직 식지 못한 고통이 거친 움직임으로 가슴을 들썩거리는 통에 툭툭, 조금씩 밀리던 카드는 얼마 버티지 못하고 옆구리 부근으로 떨어졌다. 기진맥진한 가운데 몰려오는 현기증을 견디지 못하고, 카게야마는 눈을 감았다. 곧 잠들 것 같았다.

"내일은 다시 '오이카와 토오루'를 만날 수 있을거야."

혼곤한 가운데, 목소리가 나직나직 정신을 조여들어왔다.

"실험실에서 말이야. 그가 완벽히 '정상'으로 판명나게 되면 그 기계를 재현할 생각이야. 클라이언트가 완벽한 안전을 요구했거든."
"..."
"토비오."

내리 대답이 없는 상대의 볼을 툭툭 치며 미야가 다그쳐 물었다.

"그에게 말해줬으면 좋겠어? 이제부터 당신의 건강검진을 할 의사가 '카게야마 토비오'라고."
"아니, 알리지 마."

거절의 말로도 모자라 카게야마는 고개를 세차게 저었다. 예상했던 반응이었다.

◆◆◆


꿈속인 것 같은데, 노래 소리가 들렸다.

음과 박자를 모두 놓치고 있는 노래였다. 거기에 걸걸하여 바람 소리가 많이 섞인 목소리는 듣기가 괴로운 것이었다. 그것은 진공관 앰프에 고음질의 스피커로 음악 감상을 하는 것이 취미인 남자에게 고통의 극치와 비슷했다. 마츠카와는 온 몸을 뒤틀면서 괴로워했다. 아. 그만해. 제발 그만해. 제발. 제발.

“그, 그으만. 해에.”

허공에 손을 허우적거리며 그는 눈을 떴다. 온 몸이 땀으로 젖어 있었다. 눈앞에 떠 있는 두 손은 온통 붕대로 감겨 있었고, 그마저도 곧 툭 떨어졌다. 어깨가 너무 아파서 더 들고 있을 수가 없었다. 다행인 것은.

“….”

귀를 고문하던 노래가 그쳤다는 것이었다. 그는 돌아가지 않으려는 뻣뻣한 고개를 이리저리 옮겨가며 주변을 살폈다. 낡은 집이었다. 깨끗하고 넓긴 했지만, 집세가 비쌀 것 같지는 않았다. 손때가 반질거리는 가구나 스며들어 있는 냄새도 그러했다. 도대체 여기가 어디지. 마츠카와는 머리를 울리는 진통 속에서도 기억의 마지막을 찾으려고 애를 썼다.

“깨어났나?”
갑자기 목소리가 들려왔다.

“….”
그는 시선을 한껏 돌려 보았다. 아직 머리는 아팠지만 문간에 한 남자가 서 있는 광경은 틀림없이 눈에 넣을 수 있었다.

“벌써 깨어나다니. 이건 기적이군. 자네는 운이 아주 좋아.”

쇳소리가 많이 섞인 목소리는 노래 소리의 주인공이 맞는 듯 했다. 그런데. 그 모습이 기괴해서 아직 꿈을 꾸고 있는 것 같았다.

“많이 놀랐군.”
상대는 그럴 줄 알았다는 듯 태연하게 말을 받았다. 마츠카와는 경계심 어린 눈빛으로 그를 훑어보았다.

“하긴 그럴만한 몸뚱이지.”

남자에겐 팔이 하나 없었다. 무릎 밑으로 70도 가량 뒤틀린 한쪽 다리에는 철로 된 보조기구가 묶여 있었다. 그렇게 기울어 있는 몸에 붙은 얼굴 또한, 반쪽이 완전히 짖이겨진 있는 상태였다. 호감을 줄 수 있는 첫인상은 확실히 아니었다. 서포터는 아직 손끝 하나 움직일 수 없는 자신의 몸을 떠올리며 침을 꿀꺽 삼켰다. 발성이 부정확할 수밖에 없는, 반이 쪼그라들어 있는 입술로 그는 웃음을 지어 보였다.

“괴물처럼 보이겠지만 안전에 대해서라면 걱정 마시게. 자네를 구한 것은 나였으니.”
“누, 누구십니까.”
“자네가 아는 사람이지.”

그는 힘들게 걸어와 한 손에 들려 있던 쟁반을 침대 옆 좁고 작은 협탁 위에 올렸다. 약봉지와 작은 죽 그릇이 놓여 있었다. 그러나 환자는 그것에 관심이 없었다.

“제가 아는 사람이라니 무슨 말씀이십니까?”
“경험한 적은 없지만 내 얘기는 들었을 걸세.”

그럴 리가 없었다. 그는 또 한 번 입술을 뒤집으며 웃은 뒤에, 마츠카와의 상태를 살폈다. 놀랍게도 매우 전문적이며 익숙한 손놀림이었다. 혈관을 정확하게 찾아냈으며, 의료 기계를 다루는 것 또한 능숙했다. 마츠카와는 그의 눈동자에서 지성만이 줄 수 있는 영민한 빛을 읽어 낼 수 있었다.

“미야가에서 듣지 않았나. 작은 주인이 옥상에서 밀어버린 사람이 있었다고.”

그는 침착한 표정으로 마츠카와를 들여다보고 있었다. 서포터는 가까이 다가온 그의 얼굴에서 나이의 흔적을 찾아보았다. 끔찍한 사고의 흔적을 제외하고도 말투나 안광, 목의 주름 등은 그가 절대로 미야 아츠무와 카게야마 토비오의 동년배일 수 없음을 보여주고 있었다.

“내가 바로 그 일의 진실이자 실체일세. 그 외에는 모두 거짓이지. 뭐라고 꾸며내었을 지는 이제부터 들어봐야겠지만. 명심하게. 그 아이의 말에는 항상 거짓과 진실이 섞여 있으니.”

지금 하고 있는 생각을 모두 안다는 듯이 남자는 차분하게 말을 이어나갔다. 마츠카와는 순간, 그의 목소리에서 절절한 애증과 비통함을 느낄 수 있었다.

“지금.. 그 아이라고 하셨습니까?”
“그래. 누가 뭐래도 나는 그렇게 부를 수 있지.”

그는 허공을 바라보며 그렇게 말했다. 마츠카와는 무엇인가를 직감했다. 믿을 수 없었지만 들어맞는 조각 하나가 있었다. 서포터는 남자의 얼굴을 좀 더 본격적으로 뜯어내기 시작했다. 찾으려고 하니 의외로 쉽게 찾을 수 있었다.

“나는.”

남자의 멀쩡한 왼쪽 눈. 눈썹의 모양. 웃을 때, 입가의 움직임. 그 모든 것이 그 집안 고유의 생김새를 가지고 있었다.

“미야 아츠무의 아버지 되는 사람일세.”

마츠카와는 눈을 커다랗게 뜨고 그를 다시 보았다. 죽음에서 자신을 건져 올린 그는 놀랍게도. 이야기 속에 한번도 등장하지 않았던, 할아버지인 큰 주인과 손자인 작은 주인 사이의 남자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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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랜만의 블라인드 게임입니다. :)
1. 이 편부터 2부가 시작됩니다. 일주일에 한 편은 꾸준하게 올리자는 생각으로 쓰고 있는데, 금, 토 모두 일이 있었던지라 광휘는 도저히 한 편 분량을 맞출 수가 없을 것 같아, 간만에 블라인드 게임을 잡아 보았네요! 광휘는 다음 주말을 목표로!!
2. 오이카게+미야 입니다. 개인적으로 + 표시는 일방적 감정이거나 쌍방무감정을 뜻합니다. 미정(이와카게+오이)에서는 쌍방무감정에 가까웠다면, 블겜에서는 일방적 감정에 조금 더 가까울 것 같습니다.
3. 다음편은 천천히 만나요~! 하지만 요새 미야카게가 너무 칙칙폭폭인데다가 오이카게 붐도 같이 와서 정말.. 손가락이 근질근질.ㅠ0ㅠ 조금 더 덕질할 시간이 넉넉했으면 좋겠네요.ㅠㅠㅠㅠ 흑흑.ㅠㅠㅠㅠ 가장 쓰고 싶었던 과거 오이카게는 정작 시작도 못 했는데! ㅠ0ㅠ 말입니다! ㅠ0ㅠ!

 

Blind Game

 

 

-1-

 

 오이카와는 안내된 방 안에서 미야 아츠무를 기다리고 있었다. 지금까지의 정보를 종합해 보았을 때, 그는 카게야마 토비오의 후원자이자, 모든 일의 배후였다. 수의사의 실종과 관련된 가장 유력한 용의자이기도 했다. 아주 잠깐씩 시선을 돌려 시계를 확인하며, 요원은 심심풀이용 책을 읽었다. 같이 준비되어 있던 차에는 손을 대지 않았다. 적을 상대하는 기본 자세였다. 체크리스트를 넘긴 지 30분 쯤 지났을 때, 끝맺음이 명확한 노크 소리가 들려왔다. 천천히 방문이 열렸다.

 

 “안녕하세요. 오이카와 토오루씨.

 

 싱긋 웃는 것이 호감을 끌 만하며, 세련되게 잘 생긴 얼굴이었다. 오이카와는 상상 속에서 다소 촌스럽고, 나이가 많으며, 배가 나온, 땅딸만한 사람을 지워내야 했다. 자신이 밀린다는 생각은 조금도 하지 않았지만, 생각보다 잘생겨서 솔직히 배알이 조금 꼴렸다.

 

 “미야 아츠무라고 합니다.”

 

 억양이 독특한 것 외에는 머리스타일에서부터 복장까지, 모든 것이 도회적인 남자이기도 했다. 상류층의 품격이 몸에 배인 태도로 적절한 각도로 자기 소개가 들어왔다. 정말로 그였다. 미야 아츠무.

 

 “오이카와 토오루입니다.”

 “오래 기다리게 해서 죄송합니다. 세미나 일정이 조금씩 늦어지는 바람에.”

 “, 끝내주는 시간만 맞춰주시면 관계없습니다.”

 

 인사도 매끄럽게 이어져 나갔다. 초면이라 말투를 조금 더 의식한 것 외에는 그다지 마음이 쓰이는 부분도 없었다. 그런데.

 

 “.”

 “왜 그러십니까?”

 

 그 웃는 얼굴이 이상하리만치 호감이 가질 않았다. 얼버무리듯 아무것도 아니라고 대답하며, 요원은 책을 정리하여 옆으로 치웠다. 뭘까. 이것은 지워진 기억과 상관없이 남아 있는 감정의 잔재들일까. 그러니까 나의 과거와 당신은 역시 상관이 있나. 오이카와는 불쾌하리만치 급격하게 밀려들어오는 부정적 감정을 서둘러 미소로 덮었다.

 

 “이 분야에서 유명인사라고 하던데요. 만날 일이 있을까 싶었을 정도로 말입니다.”

 “만날 일이 없는 건 맞을 수도 있겠지만. 당신이 유독 관심이 가는 케이스라 직접 오게 됐습니다.

 

 묘하게 반말을 듣는 기분이었다. 그러나 어쨌든 웃는 낯을 유지하며 두 사람은 손을 마주 잡았다. 덜할 것도 더할 것도 없는 손아귀 힘이 오고가고 비슷한 타이밍으로 자리에 앉았다. 미야 아츠무는 가방에서 서류를 꺼내어 가지런히 펼쳐 보였다.

 

 “전해 듣기론 본부에는 안 좋은 일로 오셨다던데.”

 “부풀리기 좋아하는 사람들은 어디나 있으니까. .”

 “.”

 

 독특한 부분에서 끊어진 말을 들으며 남자는 변함없이 웃는 얼굴이었다.

 

 “, 그럼 본론으로 들어갈까요?”

 

 오이카와는 가벼이 고개를 끄덕였다. 미야는 볼펜을 돌리며 물었다.

 

 “최근에 가장 크게 스트레스 받는 일이 뭐였죠?”

 “.”

 

 매우 평범한 질문이었다지금?’이라고 무심코 대답이 나갈 뻔 했다. 그 정도로 남자가 주는 불쾌함은 굉장했다. 속이 메슥거리는 것 같은 기분마저 들었다. 오이카와는 손가락 끝으로 입술을 쥐어뜯듯 만지작거렸다. 그리고 싱긋 웃어 보였다.

 

 “어마무시한 양의 체크리스트를 보았을 때?”

 “피상적인 답변이네요.”

 “으응. 내담자의 말을 믿지 않는 상담사라니 신기하네. .”

 “지극히 방어적인 태도를 상담하는 것이 쉽지 않은 법이라서.

 

 입으로 쏘아낸 탄환이 서로의 중심을 향했다가, 아슬아슬하게 빗나갔다. 촘촘하게 얽힌 궤적 속에서 조금씩 웃음이 깎여 나갔다. 미야는 돌리던 펜을 손가락 사이에 끼운 채, 턱을 괴었다.

 

 “저는 낭비하는 게 끔찍한데. 오이카와 요원님은 어떠신가요.”

 “엣, 엄청나게 동감인 말이네요.”

 “잘됐네. 그럼, 좀 자극적인 질문으로 가볼까?”

 

 그는 몸을 세웠다. 음표가 살짝 띄워진 것처럼 흥겨운 표정 속에서 눈동자 속 빛이 홀로 암전했다.

 

 “.”

 

 단지 그것만으로도 저절로 척추가 곤두섰다. 오이카와 역시 싸늘한 시선으로 그를 마주했다. 머리 속 이성은 그래선 안 된다고 외치고 있었지만, 가눌 수 없을 만큼 호승심이 치솟고 있었다. 마치 온 몸의 세포가 맞은편의 남자를 향해 공격하라고 외치는 것 같았다. 왜지.

 

 “간단한 질문이야.”

 

 미야는 자신의 손바닥을 펼쳐보였다. 아무것도 쥐어 있지 않은 빈손이었다. 요원은 시선을 살짝 내려 그것을 응시했다. 그리고 살벌하게 웃으며, 그와 마주했다.

 

 “오이카와씨랑 장난이라도 치려는 거야?”

 “방금까지. 이 손으로.”

 

 그는 자신의 왼손으로 오른손바닥을 살그머니 쓰다듬으며 말을 이었다. 거뭇한 어둠이 질척하게 내려앉은 동자 속에서 기묘한 안광이 맴돌았다. 기분 나쁜 빛이었다. 그리고.

 

 “누구를 만지다 왔을 것 같아?”

 

 속이 뒤집혔다. 머리가 뒤엉키기 시작했다.

 

-2-

 

 “우리 모두에겐 맹점(Blind spot)이 있네.”

 

 남자는 차분하게 자신의 의견을 피력해 나갔다.

 

 “그것은 보통 가장 가까이에 도사리고 있다가 발목을 잡아채지.”

 

 목소리에는 열기가 은근하게 퍼져있었다. 드디어 정말로 하고 싶은 말에 진입하고 있다는 뜻이었다. 이와이즈미는 팔짱을 더 깊이 끼었다. 그리고 자신에게도 있을 그 맹점을 혹시 간과하진 않았는지에 대해서 다시 한 번 따져 보았다.

 

 “아츠무에겐 카게야마가 맹점이 되었네. 그 아이는 생각처럼 꺾이지 않는 나뭇가지 다발을 양 손에 쥐고 온 힘을 기울여야만 했어. 그리고 그 과정에서 그가 신경을 써야 했던 미야의 남자를 놓치게 되네.”

 “당신을 말하는 겁니까?”

 “아니, 내가 아니네. 마츠카와.”

 

 남자는 골골 소리가 나는 목소리로 웃었다.

 

 “내 아버지였지.”

 

-3-

 

 “내가 얼마나 잔거지?”

 “14시간 가량입니다. 주인님.”

 “으으음.”

 

 미야의 가주는 늙고 기운이 빠진 몸을 일으켜 세웠다. 손에는 검버섯이 피어나 있었다. 주름이 자글자글하고 살갗은 건조했다. 죽은 자의 것이라고 해도 믿을 수 있을 정도로 메마른 것을 들어 그는 두 뺨과 코와 이마를 마구 비볐다.

 

 “차를 드릴까요.”

 

 사용인은 그의 앞에 좋은 향이 나는 다기를 내밀었다. 연녹빛이었다. 그는 두 손으로 받아들고 말없이 그 안을 들여다보았다.

 

 “아츠무가 준 건가?”

 “. 작은 주인님께서 직접 준비하신 겁니다.”

 “매번 고맙군.”

 

 조부는 찻잔의 가장자리에 입술을 대었다. 그리고 살짝 축이는 정도로만 입에 머금고는 다시 내려놓았다.

 

 “에이전트 지사 쪽은 어찌 되고 있지.”

 “작은 주인님께서 매끄럽게 일을 처리하고 계십니다.”

 “든든하군. 카게야마는?”

 “신변에 조금 문제가 있었지만 해결되었습니다.”

 “문제?”

 

 사용인은 높낮이의 고저가 거의 없는 목소리로 그동안의 일을 축약해서 설명했다. 조부는 차를 천천히 마시면서 모든 이야기를 들었다. 그리고는 고개를 끄덕였다.

 

 “아츠무가 잘 처리했군. 우리 가문은 오랜 시간 그 아이에게 투자했지. 이제 요원 후보생 따위에게 휘둘리면 쓰겠나. 그 애가 섣불리 행동하지 않게끔 내 이름으로 다시 주의를 주게. 필요하다면 압박을 주어도 좋아.”

 “그러겠습니다.”

 

 빈 잔을 받아들며, 사용인이 대답했다. 뱃속이 뜨끈해진 미야의 큰 주인은 불편한 듯 눈을 찡그렸다.

 

 “이거 몸이 영 예전같이 않아. 일어날 수 있게 부축해 주게나.

 “물론입니다.”

 

 사용인의 몸은 호리호리했고, 노인은 전적으로 그에게 의지해 몸을 일으켰다. 그러나 힘든 내색은 없었다. 그는 산전수전을 모두 겪고 나서, 미야쪽의 요청으로 은퇴한 요원이었다. 아직 건재한 근육의 힘을 사용해서 사용인은 늙은 주인을 그의 뜻대로 방에 딸린 화장실로 안내했다.

 

 “고맙네.”

 “볼 일이 끝나시면 부르십시오. 밖에서 기다리겠습니다.”

 “그러겠네.”

 

 노인은 문을 닫았다. 그리고 수도꼭지를 열었다. 콸콸콸. 물이 기세 좋게 흘러나왔다. 세면대를 소용돌이치는 그는 손가락을 입 안에 넣고, 뱃속에 넣었던 차를 모두 토해냈다.

 안개가 낀 거 같았던 머리속이 천천히 개여 가기 시작했다.

 

-4-

 

 뒤에서 누가 쫓아오기라도 하는 것처럼 특별 연구원은 쉼 없이 일했다. 다시 휴일이 없는 나날이었다. 블라인드(Blind) 프로젝트는 잠정적 중단을 내린 상태였지만, 그것을 제외하고도 할 일은 많았다. 카게야마는 꽤 다양한 업무에 관여해 있었다. 비상근무나 주말근무를 끊임없이 해대는 연구원의 오기를 미야는 대부분 허용했지만, 수가 틀리는 날에는 하루 종일 집에 붙잡아두었다. 그 날의 말대로 일정에 대한 결정권은 그에게 있었다. 그것이 불면증을 심화시켰다. 담배에 대한 생각을 간절하게 만들었다.

 

 그 날도 사실 그런 날에 불과했다

 미야가 허락한 주말 근무의 날이었다. 회의가 있다고 했다. 손목시계에 돌아와야 하는 시간으로 알람을 걸어주는 의도가 무엇인지 모를 수가 없었다. 잠시라도 그것을 잊어보려고 미친 듯이 문서를 작성하고 있던 때였다. 그런데.

 

 “실례합니다

 

 혼자 일하는 연구실에 누군가가 찾아왔다.

 

 “?”

 “이거 제 2 연구실로 전달하기로 되어 있었는데, 아무도 안 계셔서요. 어디로 가면 될까요?”

 “. 그거.”

 

 연구물품이 배송되었는지, 일회용 출입증을 목에 건 남자가 사무실을 두드렸다. 대답을 하려는데 짹짹, 밖에서 작은 새의 지저귐이 들려왔다. 무심코 그것을 쫓아 고개를 창밖으로 돌렸던 카게야마가 다시 앞을 보았을 때, 남자는 모자를 벗은 후였다. 그리고.

 

 “쨔잔!”

 전혀 기대할 수 없었던 순간이 갑자기 찾아왔다.

 

 “토비오쨩? 왜 그런 표정이에요?”

 

 오이카와 토오루였다. 못 알아볼 리가 없다고 생각했는데, 그럴 만 할 정도로 어렸던 체격이 한층 단단해져 있었다. 티셔츠에 청바지, 업체명이 찍혀 있는 촌스러운 디자인의 조끼를 입은 후보생은 달라진 것이 없는 웃음소리를 내며 손을 까닥거렸다. 손에서 볼펜이 툭 떨어졌다.

 

 “좀 더 반가워해야 하는 거 아니야? 섭섭하게. 정말.”

 

 가지고 있던 상자를 내려놓은 그는 책상 앞 의자를 끌어다가 그 날처럼 등받이를 돌려 앉았다.

 

 “, 여기. . 어떻게.”

 언어중추는 고장이 나 버렸다. 솔직히. 원래도 하이스펙은 아니었다.

 

 “그동안 많이 조사했지. 정기 납품은 뭘 하는지, 어느 업체를 통하는지, 하청은 누굴 주는지. 오이카와씨, 대단하지?”

 

 반대로 고성능의 언어 능력을 가진 상대는 뚝뚝 끊어지는 단어 조합을 용케 알아듣고는 조근조근 상황을 설명했다. 문자를 볼 때는 말소리가 들리는 기분이었는데, 말소리를 들으니 문자를 보는 것 같았다. 신나게 혼자 이야기하던 후보생은 대답이 없는 연구원을 보고 멈칫했다.

 

 “뭐에요? 토비오쨩, 얼굴이 왜 이래?”

 “.”

 

 얼굴에서 보일 지도 모를 무언가를 들키고 싶지 않아, 얼른 시선을 내렸다. 요원의 표정은 세상이 끝난 것처럼 심각했다. 들킨 건가. 생각하고 있었는데.

 

 “누가 이렇게 못생겨지래?”

 

 커다란 손이 볼을 잡고 주욱 눌렸다. 말도 얄밉고, 행동도 장난 일색이었지만, 그의 모르는 척함이 눈치없는 연구원에게도 조금은 보였다. 그래서 알 수 있었다. 그는 상냥한 사람이었다그래서 너는 항상 봄일 수 있었다.

 

-5-

 

 “잠깐만, 정말 이러면 안 돼.”

 “안 들키면 되잖아. 그치?”

 “그럴 수가 있겠어? 기다려. 오이카와!”

 “쉬잇.”

 

 긴 손가락이 입술 가운데에 닿았다. 본인의 생각보다 지쳐 있던 영혼에게 그것은 포기할 수 없는 안식처가 되었다. 어차피 말싸움으로 이겨본 전적이 없는 상대이기도 했다. 입을 꾹 다문 카게야마에게 한번 웃은 오이카와는 가지고 왔던 박스를 열어 자신과 똑같은 모자를 씌워주었다. 챙이 길어 얼굴에 그늘이 많이 지는 것이었다.

 

 “.”

 “이것도.”

 

 그는 하얀 마스크를 꺼내 상대의 귀에 걸었다. 얼굴 아랫부분이 전부 가려질 만큼 커다란 것이었다. 그 안에서 숨을 푹푹 내쉬며, 카게야마는 손가락으로 마스크를 어색하게 매만졌다.

 

 “토비오쨩, 이쁘네.”

 

 요원 후보생은 약간 비틀어져 있는 모자의 방향을 다시 맞춰주며 말했다.

 

 “다 가리니까 아주 예뻐.”

 

 눈을 마주치며 농담을 던지자, 유일하게 보이는 푸른 눈동자가 가늘게 휘어졌다. . 이건 정말 예뻐서 안 돼. 오이카와는 모자 챙을 잡고 확 내리 누르며 몸을 일으켰다.

 

 “우이카와.”

 

 마스크 안에서 뭉그러진 발음으로 이름이 들렸다. 멈칫거리며 좀처럼 흔쾌히 같이 가겠다는 말을 하지 않는 연구원에게 후보생은 박스를 활짝 열어 안을 보여주었다.

 

 “쨔안! 오이카와씨가 이렇게 철저하게 준비해 왔는데도 거절할거야?”

 

 박스에는 점퍼를 비롯한 다른 옷가지들도 들어 있었다. 그것을 모두 꺼내어 안겨주자, 한숨을 푹 쉰 카게야마가 출입증을 빼어 책상에 놓았다.

 

 “6시까지는 돌아와야 해.”

 

 손목시계에 걸려 있는 알람 시간을 말해주자, 후보생은 손가락을 동그랗게 말며 오케이 사인을 보내왔다. 그제야 연구원은 와이셔츠 위에 바로 후드티를 입고, 다시 조끼를 입었다. 오이카와는 박스 바닥에만 살짝 채우고 있던 실제의 연구물품들을 차곡차곡 정리함에 넣어두며 그를 기다렸다.

 

 “괜찮을까.”

 “믿어, 믿어.”

 

 옷차림 때문인지 제 나이처럼 어려 보이는 연구원의 손목을 잡아 끌며, 오이카와웃었다.

 

-6-

 

 “오이카와, 나는 아무리 생각해도.”

 “, 정면 보고.”

 

 요원 후보생은 상자를 들고 있던 팔꿈치로 옆구리를 살짝 치며 조언했다. 연구원은 허리를 바짝 세웠다. 경비원이었다. 옆구리에 차 있는 테이져건과 실제 총기가 존재감을 드러냈다. 긴장한 카게야마의 걸음걸이가 눈에 띄게 느려졌다. 그를 이상하게 보기 전, 후보생이 그 앞을 살짝 막아서며 목례를 했다.

 

 “휴일에 수고하십니다.”

 “오늘 배송되는 물건이 있었나?”

 

 무뚝뚝한 얼굴로 인사를 받은 경비원은 힐끔 의심스런 시선을 던졌다.

 

 “, 2연구실 쪽이었어요. , 꼭 오늘 가져다 달라고 하셨는데요.”

 

 오이카와는 목에 걸린 임시 출입증을 흔들며 천연덕스럽게 대답했다. 인상을 찡그린 경비원은 자신이 가진 파일을 훑어보았다. 상단에 분명히 적혀 있는 내용이었다. 그는 고개를 가벼이 끄덕이며 옆을 지나쳤다. . 전자 도어가 열리고 두 사람은 건물을 나섰다. 카게야마는 도로를 딛기 전, 자신이 나온 곳을 바라보았다. 어둡고 좁은 길이었다.

   

-7-

 

 “왜 이렇게 시끄러워.”

 “시끄럽다니, 활기찬 거지.”

 

 말은 나오자마자, 상대에게 정정당했다. 그대로 입을 다물어 버린 카게야마는 주변을 두리번거렸다. 축제가 열리고 있었다. ‘마츠리라고 불린다고 했다. 어렸을 적에는 분명 몇 번 들은 적은 있었지만, 가본 적은 없었다. 강을 끼고 조성되어 있는 수변 공원은 평소와 달리 온통 알록달록한 풍선과 꽃으로 장식되어 있었다. 눈동자가 커다랗게 된 카게야마를 보고 웃으면서, 오이카와는 모자와 마스크를 벗겨 주었다.

 

 “설마 처음이야?”

 “아니, 그런 건 아니지만.”

 

 괜히 한 번 거짓말도 쳐 보았는데.

 

 “, 유카타도 가져올 걸.”

 

 상대는 신경도 안 쓰고 넘겨 버렸다. 그는 두 손바닥을 딱 모아 치며, 아쉬워했다. 어느 곳을 보고 있는 시선을 따라 연구원의 눈동자도 천천히 옮겨갔다. 남색, 흰색, 조금 독특한 무늬를 가진 녹색의 유카타를 입은 학생들이 종종 걸음으로 지나가고 있었다. 요원은 어깨를 스스럼없이 감싸고는 손가락으로 그 쪽을 가리켰다.

 

 “있잖아. 토비오쨩은 무슨 일이 있어도, 남색이야.”

 “?”

 “남색 유카타를 입으란 말이야. 그거 외에는 하나도 안 어울리니까.”

 “??”

 “아니야. 그냥 내가 사오는 게 낫겠어. 평소의 패션센스를 감안했을 때, 절대 무리야.”

 

 혼잣말을 중얼거리는 얼굴은 진지했다. 카게야마는 그 얼굴을 보았다가 다시 풍경을 보길 반복했다. 단지 문 하나를 나왔을 뿐인데, 이토록 다른 세계가 있을 수도 있을까 하는 생각이 들었다. 다채로운 색상의 천막 안에서는 맛있는 냄새와 흰 연기가 풍겨 나왔다. 삼삼오오 짝지어 가는 사람들을 구경하는 것만으로도 정신이 없었다. 넋을 놓고 그것을 보고 있자니.

 

 “진짜. 처음 온 티가 팍팍 나네.”

 

 어느새 손이 잡혀 있었다. 연구원이 물끄러미 마주 잡은 손을 바라보았다.

 

 “2년이나 더 살면서 도대체 뭘 한 거야?”

 

 약간 땀이 나 있는 것 같았다.

 

-8-

 

 “표정 재밌네.”

 

 미야 아츠무는 폈던 손을 거두어 입을 살짝 가리며 웃었다. 오이카와는 섣불리 어떤 말도 내밀지 않았다. 다만 홍차색 눈동자 속에 약간의 경계를 더했을 뿐이었다. 입을 꽉 다문 요원을 보며, 그는 두 손을 마주 잡고 탁자에 팔꿈치를 괴었다.

 

 “설마 내가 숨길 거라고 생각한 건가.”

 고개가 슬쩍 기울었다.

 

 “? 네가 뭐가 무서워서?”

 

 그렇게 기울어지다가 뺨에 손등에 닿았다. 깊이 패인 입 꼬리가 상대를 경멸하는 웃음을 지어 보였다. 요원은 팔걸이에 올려뒀던 팔을 내리고 몸을 앞으로 숙였다. 한층 기세를 세운 눈동자가 상대를 남김없이 훑어 내렸다.

 

 “당신, 그럼 처음부터.”

 

 오이카와는 입술을 거의 움직이지 않으며 낮은 목소리로 입을 열었다.

 

 “당연히 알고 있었지. 그냥 가지고 놀았던 거야.”

 

 미야는 살짝 기운 고개로 그를 마주하며 응수했다.

 

 “, 토비오는 잘 지내고 있어. 어떻게 잘 지내고 있는지, 더 자세히 듣고 싶으면 얼마든지 해 줄 수 있고.”

 

 그는 품에서 천조각을 꺼내 탁자 위로 던졌다. 옷에서 잘라낸 일부였다. 오이카와는 어디서 나온 것인지를 한 눈에 알아보았다. 축제날 입고 왔던 남색 유카타에서 잘라낸 것이었다. 눈썹이 힐끗 올라갔다 제자리를 찾았다.

 

 “그나저나.”

 

 순식간에 가까워진 얼굴은 이제 호기심을 품고 있었다.

 

 “정말 아무것도 기억이 안 나?”

 “.”

 요원은 묵묵하게 그를 마주보았다.

 

 “와아.”

 

 그 반응에서 원하는 답을 얻은 상대는 천천히 멀어졌다. 그리고 등받이에 기대어 다리를 꼬아 앉았다. 처음의 반듯한 자세와는 거리가 먼 것이었다.

 

 “신기하네. 절대 잊지 못할 기억이었는데.”

 

 입술이 비틀렸다. 오이카와는 강렬한 충동을 느꼈다. 그것은 눈앞의 남자를 총으로 쏴 죽여 버리고 싶은 열망이었다. 심장이 세차게 뛰었다. 눈에 핏발이 선 것처럼 통증이 생겼다.

 

 “어떻게 그런 일을 잊을 수 있지.”

 

 비웃음이 자작하게 넘치는 탄식이 흘렀다. 바보 머저리 새끼. 라는 말이 당장이라도 들릴 것 같은 표정이었다.

 

 “그 다리를 눈으로 보았으면서도 말이야.”

 

 그리고 의외의 이야기를 꺼냈다.

 

-9-

 

 “엣, 금붕어 잡기가 없네.”

 “금붕어 잡?”

 “유명한 건데, 왜 없지. , 토비오쨩, 저기 사격!”

 

 손목이 잡혀 달달달 끌려갔다. 아프지 않았고, 강제적이라는 생각도 들지 않아 신기했다. 어린 아이처럼 좋아하는 모습이 어울리면서도, 건장한 체격과는 또 어울리지 않아 우습기도 했다. 그는 주머니에서 동전을 꺼내, 주인에게 주더니 장난감 총을 잡고 의기양양하게 뒤를 돌았다.

 

 “사격은 해 봤어?”

 “아니.

 “어쩔 수 없네. 사격 실력 1위에 빛나는 오이카와씨가 가르쳐 줘야지.”

 

 다리는 어느 정도로, 팔은 어떻게, 무게 중심은 이런 식으로. 말과 똑같은 속도로 직접 몸을 잡고 이리저리 움직여 주면서 후보생은 열을 올렸다. 조잡하고 가벼운 총이 진짜라도 되는 것처럼 진지하고 조심스러운 태도였다.

 

 “토비오쨩.”

 그렇게 완벽한 자세로 방아쇠를 당기기 전에, 오이카와가 물었다. 차분한 목소리였다.

 

 “혹시 진심으로 쏘고 싶은 누군가가 있을까?”

 “.”

 

 한 사람이 있었다. 그는 천천히 고개를 끄덕였다. 후보생은 뒤에서 끌어 안 듯 연구원을 품에 넣고, 팔꿈치를 잡아 주었다.

 

 “그 사람을 생각하면서 쏴.”

 “.”

 “사격은 그렇게 하는 거라고 그랬어.”

 

 뒤를 맡긴 채, 연구원은 걸쇠를 당겼다. , 하는 큰 소리와 함께 몸이 뒤로 밀려 나갔다. 오이카와는 그가 밀리지 않도록 꽉 잡았다. 목덜미, 머리카락으로 가려질 듯, 말 듯한 곳에 검붉은 자국이 있었다. 엄지 손가락 같기도 하고, 입술 같기도 했다. 그는 묻지 않았고, 아무 말도 하지 않았다. 그저 둘은 동시에 과녁을 보았다.

 가장 조그만 표적에 명중이었다.

 

-10-

 

 쏴아아아아아.

 갑작스러운 소나기였다. 요란 법석이던 축제의 장이 한층 아수라장으로 변했다. 피할 생각도 딱히 없이 하늘만 멀뚱하게 올려다보는 연구원에게 오이카와는 얼른 모자를 다시 씌워주었다. 그리고 달렸다. 수면에 물안개가 잔뜩 피어오르는 길을 지났다. 라일락 꽃이 무리지어 있는 좁은 오솔길을 지나가서, 다시 도심이 될 때까지. 바닥에 어느새 고인 물이 발걸음마다 튀어 올랐다. 도시의 색감도 수채화처럼 변해 있었다. 건물과 건물 사이, 2층으로 이어지는 계단 테라스 덕에 비가 많이 들이치지 않는 곳으로 오이카와는 카게야마를 밀어 넣었다.

 

 “?”

 “노인 공경.”

 

 과도한 언어 사용에 눈썹이 위치를 낮추었다. 아랑곳 없이 그는 자신을 따라 뛰느라 숨을 몰아쉬는 연구원을 계단에 주저 앉혔다.

 

 “오이카와씨, 우산 사올게.”

 “? 괜찮아.”

 

 잡으려고 했지만 뒷모습이었다. 홀로 남은 연구원은 손목시계를 바라보았다. 30분 밖에 남지 않았다. 카게야마는 몸을 웅크리고, 어릴 적 그때처럼 팔 안에 고개를 파묻었다.

 무서운 게 아니라, 아쉽다고 생각하는 자신이 그렇게 멍청하게 느껴질 수가 없었다.

 

-11-

 

 “토비오가, 안 왔다구요?”

 

 넥타이를 풀어내며 미야가 되물었다. 집안의 분위기는 일촉즉발이었다. 둘의 관계를 아는 사용인들은 전전긍긍하며 눈치를 살폈다. 물론 최고사용인은 여전히 무표정이었다.

 

 “.”

 

 작은 주인은 거실에 설치되어 있는 고풍스러운 괘종시계에 눈을 돌렸다. 정해준 시간에서 20분 정도 지나 있었다. 원래대로라면 막 씻어서 깨끗한 몸으로 앉아 있어야 할 자리는 비어있는 채였다. 고저가 드러나지 않는 표정으로 그는 사용인에게서 석간신문을 건네받았다.

 

 “일단 기다려 보죠. 걔가 어딜 가겠어요.”

 “오시면 바로 연락드리겠습니다.”

 “. 그리고.”

 

 돌아서서 나가려는 사용인을 그가 잡았다.

 

 “따로, 준비해 주실 게 있어요.”

 

 소파에 앉아, 신문을 펴들며 미야는 부드럽게 웃었다.

 

-12-

 

 카게야마는 자신에게 걸어오고 있는 오이카와 토오루를 보고 있었다. 민트색 우산이었다. 어디서 자기 같은 것을 구해 와서는 명랑한 표정으로 오고 있었다. 봄이어서 그런지, 거리에 있는 다른 우산이나 옷차림도 모두 밝은 색감이었다. 부드러운 음악이 흘렀다. 오늘 내내 계속 그랬다문득 그런 생각이 들었다. 저 아이는 계속 저런 풍경 속에 있었으면 좋겠다고. 그래서.

 

 “이제 오지 마.”

 우산을 씌워주는 오이카와에게 연구원이 말했다.

 

 “으응?”

 “오면 안 돼.”

 

 연녹색 그늘 아래서 담담하게 상대의 매력을 거절했다. 후보생은 카게야마 앞에 무릎을 구부려 앉았다.

 

 “? 토비오쨩은 내가 싫어?”

 “.”

 “그럴 리 없지. 오이카와 씨를 누가 싫어해. 그치.”

 

 대답할 수가 없었다. 그 자신만만한 단어들 사이, 두려움이 속속들이 배여 있는 게 느껴져서 대답이 어려웠다. 사실은 혹시라도 정말 싫어할까봐 무서워요. 라고 말하고 있는 눈동자가 입을 막았다. 후드득. 비가 내렸다. 계속계속 내렸다.

 

 “그런 거면 괜찮아. 다른 이유가 있는 거면. 연락 없을 때도 괜찮았어. 화 안 났다니까?”

 “안 돼. 오지 마.”

 “올게.”

 “안 돼.”

 “연락은?”

 “안 돼.”

 

 꺾인 마음만큼 손에 힘이 빠져, 별안간 우산이 기울었다. 조금 열린 하늘에서 소리로만 들려지던 비 몇 방울이 뒤쪽으로 떨어졌다. 고집스럽게 다물어 있던 입술이 뒷덜미에 닿는 차가움에 잠시 놀라 열렸다. 그 때였다.

 

 “안아 봐도 돼?”

 

 놀랍고도 어이없게, 바로 그 때였다. 쓸데없이 뾰족하기만 한 것들이 무방비하게 벌어졌을 때, 숨기고 있던 무엇을 보았다. 흔들리는 눈동자를 보았다. 떠도는 빛을 보았다. 어떤 확신 속에서 오이카와는 우산을 놓았다. 놓쳤다. 뒤로 넘어간 것이 바닥을 굴렀다. 물론 이번에도 연구원은 고개를 저어 보이고 있었다.

 

 “키스는?”

 또, 고개를 젓는 것을 두 손으로 꽉 잡았다.

 

 “키스는?”

 

 다시 물었다. 움직이지 못하게 꽉 쥐고 그랬다. 충동질 된 애정이 푸른색으로 눈매 안에 있었다. 긁힌 자국이 잔뜩 있지만, 어쨌든 거부가 없었다. 손날에 닿아 있는 귀가 발갛고 따뜻했다. 요 거짓말쟁이. 오이카와는 천천히 고개를 기울였다.

 

 “.”

 

 봄이었다.

 

-13-

 

 “.”

 “.”

 

 입김이 서로 섞여 하얗게 어우러졌다. 달콤한 맛이 혀에 길게 남았다. 아무런 상처도 없이 도달한 쾌락이었다. 부드러운 감촉이 여운으로 아로새겨져 있었다. 그런 황홀함 속에서.

 

 “네가 좋아.”

 

 고백이 왔다. 실로 바보 같은 고백은 놀라울 정도로 쉽게 마음을 훔쳤다.

 

-14-

 

행복의 끝에는, 보통 불행이 기다린다.

 

-15-

 

 

 “늦었네.”

 

 미야는 소파에 앉아 신문을 보고 있었다. 잘 닦인 구두가 허공에서 느리게 까닥였다. 연구원은 슬쩍 문 옆의 거울 속 자신을 보았다. 조금 젖은 거 외에는 평소와 다를 것이 없는 것처럼 보였다. 상대에게도 그러길 바라며, 그는 최대한 자연스럽게 앞으로 걸어갔다.

 

 “연구소에서 오는 것?”

 방으로 가려면, 소파 옆을 반드시 지나야 했다. 카게야마는 최대한 목을 가다듬으며 마음의 준비를 했다.

 

 “.”

 신문이 착 소리와 함께 접혔다. 미야는 고개를 꺾어 천정을 보았다.

 

 “늦은 이유는 뭐야.

 “일이 많았어. 보고서도 그렇고.”

 “…토비오.”

 

 시선이 꽂혔다.

 

 “지금 거짓말을 하는 거야? 다른 사람도 아니고 나한테?”

 

 그는 천천히 자리에서 일어섰다. 연구원은 짧게 눈을 감았다. 처음부터 들키지 않으리라고 생각하진 않았다.

 

 “토비오."

 "..."

 "걔랑 뭐 하고 놀았어?”

 

 카게야마는 숨과 침을 한꺼번에 꿀꺽 삼켰다. 커다란 공기덩어리가 단단한 형체라도 있는 듯 목을 타고 힘들게 넘어갔다. 사지 중 잡힌 것은 아무것도 없는데, 꼼짝달싹할 수가 없었다. 조금이라도 거리를 두려고 뒷걸음질을 한 결과로 벽에 짓이겨지다시피한 등이 배겨왔다. 이런 건 부당한 대우라고 생각했다. 그래서 있는 힘껏 노려보았지만, 상대는 그저 호의적으로 웃으며 손을 잡아 왔다.

 

 “걔랑 이렇게 손도 잡았어?”

 “그랬어.”

 

 상대의 시선은 무서웠지만, 스스로 나쁜 일이라고 생각하지 않았다. 어디에도 그런 걸 나쁘다고 하는 책은 없었다. 그래서 카게야마는 고개를 당당하게 쳐들고 대답했다.

 

 “.”

 그러나 목소리가 쑥 들어갈 만큼 손이 세게 잡혔다. 열기 같은 숨이 느껴질 정도로 얼굴이 다가왔다.

 

 “정말? 키스도 했어?”

 “, .”

 

 그것은 약간의 반항이기도 했다.

 대답에 야멸차지기 시작한 눈동자 속으로 스르륵 안광이 스며들었다. 그것은 외부가 아닌 내부의 빛이었다. 위험하고, 또 위태로운 비이성의 빛. 그토록 공격적인 눈빛을 한 상대는 그러나, 입술을 당겨 부드럽게 웃었다.

 

 “그럼.”

 꿀이라도 떨어질 것 같은 다정한 목소리였다.

 

 “잠도 잤어?”

 

 손목뼈가 바깥쪽으로 꺾였다. 의도적으로 기를 꺾으려는 상대였다. 그러나 카게야마는 외려 더 빳빳하게 고개를 들고 눈을 마주했다.

 

 “네가 알 필요가 없잖아.”

 “그 말 너무 섭섭하네. 할아버지께서 아시면 난리 나겠는데.”

 “할아버지한테는.”

 “아시면 가만있지 않으실걸. 나야 토비오에게 개인적으로 처벌을 내리겠지만. 할아버지는 다르실 거야. 그렇게 되면 걔가 무사할까?”

 

 사근사근하게 웃으면서 그는 칼을 꽂았다. 어디가 가장 약한지를 알고 있는 상대가 단번에 꽂아 넣은 것이었다. 막힌 말문은 트이지 못하고, 고개가 땅을 향한다. 재고의 여지가 없는 담백한 패배였다. 남자는 웃었다.

 

 “그래서 했어요, 아니면 안했어. 말해 봐. 어서.”

 

 승자는 패자의 손목을 그대로 우그러뜨릴 것처럼 잡으며 다그쳤다. 여전히 부드럽고 낭창낭창하게 그리고 조용한 말들로.

 

 “안 했어.”

 “정말?”

 

 그는 눈동자 안으로 들어가기라도 할 것처럼 깊이 얼굴을 들이밀었다. 마지못해 카게야마는 다시 한 번 고개를 끄덕였다. 사실이기도 했다. 우리는 아름답고 멋진 시간을 보냈지만 섹스를 하진 않았다. 그것을 후회해야 할까. 손이 놓아지자마자 카게야마는 벽에 등을 미끄러뜨리며 주저앉았다. 머리가 아팠다.

 

 “잘했어. 다행이네. 토비오가 착한 아이라서.”

 

 안심했다는 듯 상대가 웃었다. 그 역시 무릎을 수그려 앉았다. 그대로 옹기종기 숙여진 머리를 한동안 보고 있던 그는 갑작스레 머리카락을 한줌 쥐고 들어 올려 벽으로 밀쳤다. . 거친 소리가 났다. 그는 일그러진 얼굴 속 코끝에 입을 맞추고 볼을 비볐다. 귓바퀴에 입술이 닿았다.

 

 “그래도 처벌은 받아야지.”

 

 그가 속삭였다.

 

 “어떤 걸 줘야 무서워서 다신 시도도 못할까.”

 “처벌?

 

 어지러운 와중에도 연구원은 비웃었다. 너는 나에게 줄 수 있는 처벌이란 처벌은 모조리 준 상태였다. 더 줄 수 있을 만한 것이 없으니 딱히 더 무서워할 만한 것도 없었다. 그냥 몸을 대주면 되는 일이었다. 평소보다 조금 길고, 아프게. 그렇게 생각하고 있었는데.

 

 ”...?"

 

 허벅지에 차갑고 딱딱한 것이 닿았다. 생소한 감촉이었다. 끈질기게 살결을 물어오는 입술을 피해 고개를 돌리며, 카게야마는 아래를 내려 보았다.

 …총이었다.

 

-16-

 

 철컥. 작은 주인은 총의 안전장치를 해제했다.

 

 “이건 훈련생들이 쓰는 총이야.”

 

 카게야마는 사용인에게 양팔이 잡혀 있었다. 발버둥을 쳐 봐도, 조금도 움직일 수가 없었다. 미야는 희미하게 웃었다. 공포를 숨기지 못하면서도 고개를 꼿꼿이 들고 자신을 보고 있었다. 그래. 넌 그렇게 항상 의연하다. 내가 널 먹어치울 때조차도 그랬다. 기대와 달리 나만으론 널 꺾을 수가 없었다.

 

 “그러니까 지금 널 쏘는 건 오이카와 토오루인 거인거지.”

 “...무슨 소리야.”

 

 하지만 어쨌든 최종적으로 너를 꺾는 건 나야. 그는 그제야 떨리기 시작하는 허벅지에 총구를 가져다 대었다.

 

 “미야, 지금 무슨 생각을 하는 거야.”

 “다시 임상실험 대상자가 되기 싫었던 요원 후보생이 밤중에 연구실로 침입해 특별 연구원을 살해하려고 한 사건 같은 걸, 생각 중이야. 어떻게 하면 그렇게 보이게 설계할 수 있을지. 그런 거?

 “말도, 말도 안 되는 일을 꾸미지 마.”

 “그 애, 네가 도와달라고 하면 오겠지? 한밤중에 연구실로 꼬여내는 건 일도 아닐 거 같은데.”

 “미야, 제발.”

 “이야, 토비오. 네가 ‘제발이라는 말도 할 줄 알았네.”

 

 비난 섞인 조롱과 함께 총기의 끝은 허벅지 안으로 깊숙하게 파고들었다. 총기의 위력을 가장 잘 알고 있을 것이면서도, 팔을 꽉 잡고 있는 사용인의 표정은 전혀 변화가 없었다. 카게야마만이 처절했다. 그만이 연거푸 빌었다.

 

 “제발. 제발. 몇 번이라도 빌게. 미야.”

 "미야."

 "미야, 아츠무. 그러지 마."

 

 “늦었어.”

 

 탕,

 폭발하는 소리와 함께 허벅지에 날카로운 감각이 느껴졌다. 그리고 순식간에 다리 전체로, 하반신으로, 허리를 타고 전신으로 퍼져 나갔다. 화약 냄새가 났다. 달궈진 총신이 허벅지를 떠났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몸이 불에 타는 것처럼 뜨거 웠다.

 

 “아아아악!

 

 비명이 터져 나왔다. 절절 끓는 소리였다. 제대로 고통이 쏟아지기도 전에 무언가가 입을 막아왔다손수건이었다.

 

 “이상한 소리 하면 안 되니까. 잠깐만 자고 있어.”

 

 숨을 조심해야겠다는 생각을 할 수 없었다. 다급한 호흡이 따끔한 향이 코 안으로 단박에 끌어 들어왔다. 의식의 장막이 새까맣게 내려졌다.

 

-17-

 

 [도와 줘.]

 

 문자는 연구원의 번호로 정확히 도착했다. 오이카와는 벌떡 자리에서 일어났다. 달콤한 상상을 하던 머리가 단박에 깨어져 나가고, 온갖 이상하고 공포스러운 상상이 자리를 차지했다.

 

 [오이카와.]

 [누가.]

 [연구시.]

 

 더 생각할 여력이 없었다. 그는 대충 옷을 주워 입고, 모자를 눌러썼다. 급하게 움직이며, 차비나 나이프를 챙기던 손이 잘 손질되어 케이스에 담겨 있던 총에 닿았다.

 

 “.”

 심각한 규정의 위반이라는 망설임은 잠시였다. 그는 그것을 꽉 쥐어 품에 넣었다. 그리고 밤의 도시로 내달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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안녕하세요. 알리사입니다. :)

블라인드 게임의 웹공개분은 여기까지입니다. 많이들 응원해주신 덕에 어찌어찌... 낼 수 있을 것 같은 쪽으로 기울어 가는 듯 합니다. :)

남은 2주의 기간 동안도 쉼없이 달려서 완결을 내고, 퇴고를 하여.. 행사에서 뵐 수 있도록 하겠습니다.ㅠ0ㅠ 감사합니다.

 

선입금까지는 어려울 수 있을 듯 하여, 수량 조사는 오늘 중으로 폼을 올릴 예정입니다. :)

혹시 생각이 있으신 분께서는 트위터, 혹은 티스토리 블로그를 통해 내용을 확인 부탁드립니다. 감사합니다! >0<!

 

 

  

Blind Game

 

 

-1-

 

 “토비오, 뭐해?”

 

 중앙지부의 회의에 참여하고 돌아온 미야가 저택의 적요함을 깨뜨리며 물었다부러 인기척을 죽인 것도 아닌데도 자신의 할 일에만 빠져 있던 남푸른 색 눈동자가 방향을 바꿔 그를 향해 왔다. 손에는 온갖 잡동사니가 들려 있었다. 서랍을 파헤친 뒤에는 원래대로 되돌리려고 애를 쓴 흔적도 보였다. 그다지 좋은 결과물은 없었지만.  

 

 “핸드폰을 찾고 있는데. 어딨는 지 알아? 잡다한 것들은 다 여기 있지 않았나?”

 “핸드폰?”

 

 그는 살짝 고개를 기울였다. 기계를 만드는 연구원이지만, 만들어져 있던 기계에는 크게 관심이 없었던 카게야마였다. 물론, 핸드폰 자체가 다른 사람과의 소통에 목적을 둔 것이기 때문인 이유도 있었다. 신 모델이 나오자마자 사준 것을 어딘가에 처박아두는 동안, 사실 필요한 적이 없기도 했었다. 미야는 몇몇 시간을 제외하고는 카게야마의 일거수일투족을 확인할 수 있는 입장이었고, 이제 더 이상 그를 통하지 않고 연구원에게 연락할 사람은 없었다심기가 불편했다. 그는 커프스 단추를 케이스에 넣고 액세서리 서랍을 밀어 넣었다.

 

 “갑자기. 그게 왜 필요해?”

 “연락할 일이 있어서.”

 “네가?”

 “.”

 

 누구한테? 라고 물음을 구태여 던지지 않았다. 떠올릴 수 있는 인물은 하나였다. 미야는 호의적으로 웃어 보이면서 시계를 풀었다. 그리고는 한 단 밑의 서랍장을 열고, 새것과 다름없는 연구원의 핸드폰을 꺼내어 탁자 위에 올려두었다.

 

 “네 건 여기 뒀었어.”

 “.”

 

 카게야마는 핸드폰을 향해 손을 뻗었다. 그리고 그것을 쥐려는 순간, 상대의 손에 손목이 잡혔다.

 

 “토비오.”

 “?”

 “너무.”

 

 그는 잠깐 숨을 골랐다. 또다시 치명적인 허기가 느껴졌다.

 

 “많이 사용하진 마.”

 “걱정 마. 내가 중앙 지부를 해킹할 순 있어도, 내 핸드폰을 누가 해킹할 순 없을 테니까.”

 

 카게야마는 평소와 다를 바 없는 목소리로 대답한 뒤, 손목을 비틀었다. 미야는 순순히 상대를 놓아 주었다. 찾던 성의가 무색하게 연구원은 주머니에 되는대로 핸드폰을 쑤셔 넣고는 방을 나갔다.

 

 “그렇진 않을걸.”

 혼자 남은 그는 손목을 잡았었던 손바닥에 코를 대고, 숨을 깊이 들이마셨다. 여전히 희미한 미소를 아슬아슬 매단 채였다.

 

-2- 

 

 [안녕하.]

 

 카게야마는 두 손으로 핸드폰을 쥐고, 뚫어져라 바라보았다. 눈 사이가 새까매져서는 마음에 안 든다는 표정을 한껏 지어보인 그는 손가락으로 꾹꾹꾹 자판을 눌러, 화면에 떠 있던 세 글자를 지웠다.

 

 “나보다 어리잖아. 존댓말은 좀 그렇지.”

 변명을 중얼거리며 그는 다시 한 번 자판을 눌러 보았다.

 

 [안녕.]

 

 두 글자 속으로 눈이 한층 매섭게 모아졌다. 어째 이것도 아닌 것 같았다. 그는 턱을 가볍게 잡고, 크흠. 하는 소리를 내뱉었다. 따로 노는 눈썹이 눈 모양을 이랬다저랬다 계속 바꿔놓고 있었다. 도둑질도 해본 놈이 하는 거라고, 어떻게 보내야 적당한지조차 알 수 없었다. 그렇게 고민이나 하고 있는 사이에 갑자기 핸드폰이 불을 밝혔다.

 

 [얏호, 토비오쨩? 설마 바보같이 번호를 잘못 가르쳐준 건 아니겠지?]

 

 스스럼없는 첫 문자였다. 카게야마는 손가락 끝으로 문자를 훑어 가며 읽었다.

 아직 봄이었다.

 

-3-

 

 [뭐어? 토비오쨩, 지금 담배 피고 있다고?]

 

 핸드폰은 일상 속에서 종종 시끄럽게 울렸다. 훈련시간 중간중간이거나, 끝나고 난 뒤인 것 같았다. 자연스럽게 그 시간들이 연구원의 휴식시간이 되었다. 카게야마는 창틀에 핸드폰을 올려놓고 담배를 꺼냈다. 그 사이를 못 참고 두 번째가 도착해 있었다.

 

 [당장 금지, 금지!!]

 

 기실 문자는 눈으로 보는 건데도 목소리가 들리는 것 같았다. 종알종알, 조근조근. 그런 의성어로 표현할 수 있는 목소리였다. 카게야마는 그 뒤로 연이어 이어지는 타박을 보다가 손가락 사이에 끼워져 있던 하얀색 필터 쪽으로 시선을 옮겼다. 목을 따끔하게 만드는 연기가 평소보다 흐린 잿빛으로 흩어지고 있었다. 연기가 그리는 가는 선을 따라 시선이 흘렀다.

 

 [가뜩이나 작은데, 뼈가 쪼그라들어서 눈높이라도 안 맞게 되면 어쩔 셈이야.]

 “2cm밖에 차이 안 나잖아.”

 [게다가 나보다 2년이나 더 늙은 토비오 쨩인데, 건강마저 나빠질 생각?]

 “병에 걸릴 만큼 많이 피지도 않아.”

 [어쨌든 안 돼, 안 돼. 다 빼앗아 올걸 그랬어.]

 그래봤자 다시 사면 그만인데.

 

 토비오는 그의 한 마디, 한 마디에 할 수 있는 대답을 모두 하곤 했다. 하지만 그 와중에도 담배를 피는 횟수는 착실히 줄어들었다. 오늘도 그러했다. 연구원은 얼마 피지 않은 담배를 만지작거리다가 뚝 부러뜨려, 재떨이에 넣었다. 손톱 끝에 코를 대고 킁킁 두어 번 들이키자 남아 있던 담배의 잔향이 흘러 들어왔다. 더 줄여야겠다라는 생각이 들었다.

 

 여름이었다.

 

-4-

 

 [오이카와씨, 우울해.]

 “?”

 

 핸드폰을 잡고 카게야마는 침대에서 뒹굴 오른쪽으로 굴렀다. 아까까지만 해도 피곤했던 것 같은데 눈이 반짝 뜨였다. 심장이 쾅쾅 뛰기 시작했는데, 이거야말로 혹시 병이 아닐까. 하는 생각을 잠시 했다. 그리고 안심했다. 어린 요원후보생이 다치거나 죽지 않은 것에 대해서. 자신을 잊지 않은 것에 대해서.

 

 [사격 테스트에서 2등 해 버렸어. 다른 사람도 아니고 우시와카짱 한테 지다니. 수치야, 수치.]

 “우시와카?”

 

 몇 번 들은 적이 있는 별명이었다. 라이벌 같은 거라고 했는데, 규정 상 이름을 알려줄 수 없으니 대신 부르게 된 호칭이었다. 카게야마는 오이카와를 파르르 떨게 만드는 남자를 상상해보려고 했지만 잘 되진 않았다. 그렇게 잠깐 생각에 잠겨 있자니, 다시 메시지가 왔다.

 

 [토비오쨩, 지금 우시와카 얼굴이나 상상하고 있는 건 아니겠지?]

 

 어떻게 알았지. 연구원은 혹시 핸드폰에 CCTV가 달려 있나 싶어서 이리저리 만져 보았다. 그런 것은 없었다. 드르릉. 다시 핸드폰이 울렸다.

 

 [뭐해? 이럴 때는 위로해 줘야지.。゚゚`゚。]

 

 연구원은 벌떡 일어나 앉았다. 뒤에 붙은 표정 같은 게 오이카와와 똑같아서 신기했다. 하지만 위로라니. 그런 걸 할 수 있을 리가 없었다. 카게야마는 한껏 얼굴을 찡그리며 머리를 긁적였다.  

 

 [빨리, 빨리. 오이카와씨 더 우울해지기 전에.]

 “안아줄까?”

 

 재촉에 당황한 카게야마는 서둘러 그렇게 보냈다. 여태껏 살면서 자신이 했었던 위로 비슷한 것은 그것밖에 없었다. 미야의 아버지가 큰 사고를 당하셨을 때의 일이었다. 미야는 좋았다고 말했었다. 여러 모로 미야와 비슷하면서도 다른 오이카와도 좋아할 지 사실 자신은 없었다. 그런데.

 

 [토비오쨩, 제법이네. 나이를 아예 허투루 먹진 않았나 봐.]

 

 좋은 답변이 돌아왔다. 카게야마는 천정을 보도록 몸을 바로 눕혔다. 잠깐 몸을 쥐어짜던 긴장이 스르륵 자취를 감추었다. 그는 눈을 감았다. 풀벌레의 소리가 귀에 잡혔다.

 가을이었다.

 

-5-

 

 “못하겠다.”

 

 카게야마는 문득 그렇게 되뇌었다. 낑낑 거리는 강아지는 부드러운 갈색 털을 가지고 있었다. 손가락 사이사이를 쿡쿡 아프지 않게 찌르는 보드라움이 어린 나이를 증명했다. 저도 모르게 계속 쓸어내리고 있자니, 살랑거리는 꼬리가 손등을 스쳐 지나갔다. 그리고는 자신을 움직이지 못하게 잡는 손 위를 살살 쓸어내다. 촉촉하고 까만 코는 손가락 끄트머리를 비볐다. 죽음의 주사기를 든 손이었다. 감촉에 놀란 연구원은 두 손 모두를 떼어 내고, 한 걸음 뒤로 물러섰다.

 

 끼이잉. .

 몸을 일으키지 못하는 강아지가 누운 채, 작은 발바닥을 움찔거렸다. 그 지극히 무해한 생물체는 갑작스럽게도 무엇보다 날카로운 칼끝이 변모해 있었다. 연구원은 숨을 몰아쉬었다.

 

 [나쁜 일 하지 않았으면 좋겠어.]

 

 어제는 왜인지 반년 전과 똑같은 문자를 받았다. 마치 오늘 동물 폐기가 있는 것을 알아차린 것 같았지만 그럴 수는 없었다. 사실 그 우연 뿐이었다. 그러나 평소와 다를 것 없이 바늘을 찌르고, 약품만 주입하면 될 일이 가능하지가 않았다. 강아지의 다갈색이 연상시키는 누군가가 있었다. 마치 그 아이가 여기 누워서 폐기되는 것을 보는 것 같았다이제 그는 자신이 오이카와의 몸에 바늘을 찔러 넣을 수가 없다는 것을 알고 있었다. 연구원은 팽팽하게 긴장되어 있던 어깨를 내려뜨렸다. 주사기를 든 손에 힘이 빠졌다. 일단은 내일로 미루자고 생각했다. 그런데.

 

 “뭘 망설이고 있어?”

 “?!”

 

 누군가 뒤에서 몸을 감싸 안았다. 깜짝 놀라 뒤를 돌려는 것을 두 팔이 간단하게 막는다. 물론 보지 못해도 누군지는 알 수 있었다. 익숙한 향과 목소리였다.

 

 “미야?”

 

 이름을 부르자, 검은 양복을 입은 손이 허리 옆을 통과해 앞으로 뻗어졌다. 주춤거리며 다시 테이블 쪽으로 밀린 몸을 한 팔로 꽉 끌어안으면서, 그가 친근하게 웃었다.

 

 “도와줄까?

 “…너 여긴 어떻게 들어왔어?”

 “내 카드가 통과 못하는 곳이 어디 있겠어. 얘가 마지막?”

 

 그는 여전히 애처로운 소리를 내고 있는 강아지를 보았다. 허리를 감싸고 있던 팔이 어린 동물의 머리를 단단히 잡았다.

 

 “...임상 실험으로는 언제 돌아갈 생각이야?”

 “.”

 “여기서 포기하기엔 아깝잖아? 관심을 보이는 클라이언트들도 많고개인적으로 나 역시 빨리 끝냈으면 하는데.”

 

 다른 손이 주사기를 쥐고 있던 카게야마의 손을 다정하게 감싸 쥐었다. 그리고 힘을 주었다. 날카로운 바늘 끝이 조금씩 강아지에게 가까워져 갔다. 미야의 눈동자는 똑바로 짐승을 향해 있었다. 거침없고, 망설임 없는 움직임으로 그는 카게야마의 손을 이용해, 그것에게 바늘을 찔러 넣었다.

 

 켕.

 

 바늘 끝이 파고들자, 강아지의 몸이 펄떡 뛰어올랐다. 미야는 단단히 굳은 뒷목에 턱을 올린 채, 그 죽음이 카게야마에게 준 충격을 만끽했다. 그리고, 천천히 주사기의 피스톤을 눌렀다. 저도 모르게 연구원은 눈을 질끈 감았다.

 겨울이었다.

 

-6-

 

 [오이카와씨는 아직 살아 있어.]

 

 그 애한테 문자가 왔다. 살아 있다는 말에 기뻐해야 할지, ‘아직이란 말을 슬퍼해야 할지 알 수 없었다. 카게야마는 요원 후보생이 뚫어내야 하는 커리큘럼을 구해서 읽기 시작했다. 불법적인 루트였지만 들키지 않을 자신은 있었다. 평소와 달리 힘이 빠져 있는 문자 앞에서 내규라든지 처벌에 대한 생각은 쉽게도 모습을 감췄다. 오이카와는 21살이 되어 가고 있었다. 후보생으로서는 4년이 꽉 차간다는 뜻이었고, 그것은 커리큘럼 상 마지막 테스트의 시기가 도래하고 있다는 의미였다.

 

 [걱정 마. 오이카와씨는 약속을 잘 지키는 사람이니까.]

 …도울 방법을 찾고 싶었다. 카게야마 또한 약속을 지키고 싶었기 때문이었다. 그리고.

 다시 봄이었다.

 

-7-

 

 방문이 소리 없이 열렸다. 복도에서 스며든 빛은 명도가 낮아서 어둠을 밀어내는 위세가 좋지 못했다. 그렇게 아주 약간의 시야만 확보된 방 안으로 미야는 들어섰다.

 

 “.”

 

 숨소리도 없이 잘 자고 있었다. 최근 며칠간은 거의 못 잤기 때문에 체력의 한계가 온 모양이었다. 물론 오늘 저녁 우유에 약간의 수면 유도제를 섞은 이유도 있을 것이다. 그래서 미야는 어떤 긴장도 할 필요 없이, 침대 가에 서서 카게야마의 모습을 뚫어져라 바라보았다. 임상실험은 아직도 망설이고 있었다. 사실 동물을 대상으로 실험 또한 중단되어 있는 상태였다. 무언가 결론을 얻은 것이 분명했다. 하지만 그 다음 단계로 가는 것을 망설이고 있었다. 왜지. 수많은 부와 명예와 권력을 얻는 것을 둘째 치고, 네 뛰어난 천재天才성에 대한 증명을 망설이는 이유가 뭐야. 토비오.

 

 “.”

 

 연구원은 끙끙거리면서 몸을 뒤척였다. 입 안에 침이 돌았다. 요새는 시도 때도 없이 배가 고팠다. 가끔은 돌아버릴 것 같은 기분도 들기도 했다. 사실 미야 아츠무는.

 조부가 죽고 완전히 자신의 손으로 모든 것이 떨어질 때, 그와 함께 하여 카게야마의 연구가 완성되길 기다리고 있었다. 둘의 성취를 축하하는 그 자리에서 그 완전한 성찬을 먹어치우고자 내내 배고픔을 참고 있었다. 가능했던 것은 17살의 자신을 위로해주기 위해 스스로 품으로 뛰어 들어오던 때의 희열이 아직 식지 않았기 때문이었다. 이번에도 그래주길 바랐다. 그래서 기다리고 있는 것이다.

 

 “.”

 

 뒤척이며 펼쳐진 손바닥에 반듯하게 네모진 것이 눈에 띄었다. 핸드폰이었다. 미야는 그것을 주워 올렸다. 자기 전까지 쥐고 있었는지 체온으로 따뜻했다. 그는 어렵지 않게, 카게야마의 비밀번호를 풀었다. 그리고 문자 메시지의 내용을 하나하나 확인했다.

 

 “…이건 또, 뭐야.”

 

 입술이 찢어지며 불이 붙었다. 보랏빛의 연기가 나는 새까만 불길이었다.

 

-8-

 

 “아츠무는 아마 오이카와 토오루’ 따위 안중에도 없었을 걸세.”

 

 두 사람에서 네 사람이 된 모임이었다. 한 바탕 난리와 대 사죄가 있고 난 후의 일이었다. 이제는 완전히 해가 져서, 전등불 하나를 켠 채로 그들은 미야 아츠무와 오이카와 토오루, 그리고 카게야마 토비오의 이야기를 들었다. 마츠카와와 나누었던 대화의 마지막부분에 올 때까지 다시 한 번, 쉼 없이 이어진 것이었다. 몹시 피로해진 얼굴로 그는 한숨을 쉬었다.

 

 “설마 누가 자신의 것을 빼앗을 수 있다고는 생각하지 못했겠지. 그 아이는 그런 아이니까.”

 “.”

 “그렇지만, 그게 아닐 수도 있다는 것을 깨달은 순간. 아츠무의 애정은 매우 공격적인 모습으로 변모했지.”

 

-9-

 

 탕, , , 타앙, ..

 

 총은 정확한 간격으로 여섯 발이 쏘아졌다. 연습용 권총의 탄창이 말끔하게 비워지며 바닥으로 떨어진다. 오이카와는 조금 가벼워진 총을 내려놓았다. 그리고 왼쪽에만 색이 들어가 있는 사격 보안경도 벗었다. 마지막 사격이었기 때문이었다. 그의 시선은 자연히 전광판으로 향했다. 컨디션은 나쁘지 않았다. 유달리 집중이 좋았던 날이기도 했다. 아니나 다를까.

 

 “오이카와 토오루 후보생의 합계 점수는 39.8점입니다. 현재 1위입니다.”

 

 기계의 목소리여도 칭찬은 기분 나쁘지 않았다. 사격을 시작으로 하여 최종 테스트가 시작 된 날이었다. 테스트 성적이 좋으면, 생존확률이 높은 미션에 우선적으로 투여되는 어드밴티지가 있었다. 최우수 후보생으로 선발되는 경우에는 중앙지부에 파견되는 일도 심심치 않게 있다고 했다. 오이카와가 노리는 것도 그것이었다. 그는 입술을 뾰족하게 내밀고 휘파람을 흥얼거리며 자판을 눌렀다.

 

 [토비오쨩! 당연한 일이긴 하지만 오이카와 씨의 사격 점수 최고였어.]

 [축하해.]

 

 무뚝뚝하기 이를 데 없는 대답이었다.

 

 [다치지는 않았어?]

 

 한 발 늦게 걱정이 도착했다. 요원 후보생은 그가 그런 말을 하는 표정을 잠깐 떠올렸다가 웃어 버렸다. 바늘이 무시무시한 주사기를 들고 팔을 내놓으라고 말했던 얼굴과는 아무래도 매치가 힘들었다. 그렇지만 영 상상이 안 되는 것은 또 아니었다. 흔들리는 빛이 동그란 눈동자를 몇 바퀴씩 돌고, 눈썹 사이가 살짝 모아지고, 입술이 지긋하게 깨물리는 동글동글한 얼굴.

 

 “.”

 

 오이카와는 두 손으로 얼굴을 마구 비볐다. 동기들은 많았고, 사이도 좋았다. 그래서 주변에 정을 붙일 곳이 없었던 것도 아닌데, 유달리 생각하면 마음이 찰싹찰싹 잘도 붙었다. 저번에는 이모티콘을 쓴답시고, 이상한 도형을 뒤에 붙여 와서 한참을 웃어야 했다. 웃게 해 줄 생각이었는데, 어쩐지 생각보다 그쪽이 오이카와를 많이 웃게 만들었다. 그냥. 한 번 보고 싶다는 생각이 들었다.

 

 여름을 훌쩍 넘어가 다시 가을, 그리고 겨울의 입구였다.

 

-10-

 

 “토비오.”

 “?”

 “너와 나는 무슨 관계지?”

 “후원자? 그리고, 회사 동료.”

 

 자리에 앉자마자 던져진 질문에 가볍게 답하며 카게야마는 냅킨을 펴 무릎에 올렸다. 해가 일찍 저무는 계절 탓인지, 평소보다 이르게 시작된 저녁 식사였다. 기분이 좋은 날이었다. 프로젝트에 대한 어떤 아이디어도 하나 떠올랐고, 오이카와는 승승장구 중인 것 같았다. 자신이 읽어보았던 매뉴얼대로라면 정말 중앙지부에 발령이 날 수 있을지도 몰랐다. 막 씻어내어 말갛게 된 얼굴로 카게야마는 포크를 집어 들었다. 미야는 입 끝을 살짝 끌어당겼다.

 

 “그 외에는 또, 없어?”

 

 친구, 혹은 가족. 그런 단어는 선뜻 입 밖으로 나오지 않았다. 친구라고 생각은 하고 있지만 조금 어색했고, 가족의 자리를 차지하려는 욕심은 없었다. 연구원은 물을 한 모금 마셨다. 사용인은 그림처럼 옆을 지키고 있다가, 비운 만큼 잔을 다시 채웠다. 평소처럼 무표정한 얼굴이었다.

 

 “무슨 관계가 더 필요한데?”

 

 결국 연구원은 답을 찾을 수 없는 질문에, 다시 질문으로 되돌렸다.

 

 “글쎄. 좋다던가, 사랑한다던가. 같이 자고 싶다거나.”

 “?”

 

 반문이 절로 나오는 말이었다. 특히 마지막 말이 그러했다. 카게야마는 샐러드를 집어 입에 넣으려던 자세 그대로 눈을 치켜 올렸다. 음식에 손을 댈 생각도 없는 표정으로 미야가 자신을 똑바로 바라보고 있었다. 평소에 짓고 있던 여유로운 웃음이 사라진 얼굴이었다. 카게야마는 천천히 고개를 저었다.

 

 “나는 그런 생각을 한 적 없어.”

 

 그리고는 억지로 태연한 척, 입 안에 샐러드를 집어넣었다. 와삭와삭, 생기가 넘치는 소리와 함께 볼이 역동적으로 움직였다. 미야는 여전히 상대에게 시선을 고정한 채, 두 손을 마주잡고 테이블에 괴었다. 감정을 누그러뜨리며 웃는 얼굴이 무언가가 결핍되어 있는 자의 비밀스러운 뒷면을 보여 온다. 그리고.

 

 “오늘.”

 

 자연스럽게 대화의 방향을 뒤틀었다.

 

 “훈련생에 대한 보고가 올라왔어. ‘오이카와 토오루의 성적이 가장 우수하던데? 최종까지는 두고봐야겠지만.”

 

 미야는 나이프를 들어 스테이크를 잘랐다. 작게 잘린 채소 사이에서 올리브를 찍던 카게야마의 포크가 잠시 멈춰 섰다.

 

 “그렇긴 한데.”

 

 그는 또다시 말의 방향을 정정했다. 진갈색의 표면을 가르자, 날 것에 가까운 육질이 드러나며 핏물이 나이프를 타고 흘러내렸다. 살점만이 낼 수 있는 풍부한 향내가 왁자하게 퍼져나간다.

 

 “나는 역시 그 아이로 하는 게 좋을 거 같아네 임상실험 말이야. 토비오.”

 “?

 “보고서를 보니, 두뇌가 뛰어나고 집중력이 높은 개체일수록 성공 가능성이 높다고 코멘트를 달았던데. 딱 적합한 인재 아닌가?”

 “그렇지만.”

 

 포크가 올리브를 헛찔렀다가 떨궜다. 카게야마는 뱃속에 고체를 넣는 대신에 잔을 들어 물을 한 모금 마셨다. 차가운 냉기가 식도를 세척하며 지나갔다. 무서운 예감이 등골을 스쳐지나갔다. 다갈색 강아지. 실험대 위에서 죽음의 주사를 기다리는 그 아이. 그는 가까스로 입을 열었다.

 

 “나는 임상 실험은 아직 원하지 않고. 게다가 아직 기술이 완벽하지 않은데, 그렇게까지 우수한 인재를 쓸 필요도 없어.”

 “어차피 하게 될 거고. 사실 매년 나오는 후보생 1위가 그렇게까지 대단하진 않잖아?”

 

 상대는 기다렸다는 듯이 받아쳐왔다. 그리고는 도련님보다 주인님에 가까워진 자태로 특유의 눈웃음을 지어 보였다. 나이프를 내려놓은 손이 잔을 들어올렸다. 아직 초저녁이었는데 샴페인이 따라져 있는 플루트 잔이었다. 딱히 기념일을 챙기지도 않는 성격이었거니와, 무거운 이야기를 하던 중이었다. 자리에 어울리지 않는 축하의 술을 보며 연구원은 샐러드 접시를 다시 한 번, 초조하게 뒤적였다.

 

 “미야.”

 “입 다물어.

 

 뒷말은 들어보지도 않고, 작은 주인이 명령했다. 처음 듣는 거친 말이었다. 카게야마는 당황한 표정으로 고개를 들었다. 엄격한 시선으로 자신을 보고 있었다.

 

 “네 입에서 나올 말이 오이카와 토오루는 안 돼.’라는 말이면 안 하는 게 좋을 거야.”

 

 손 안에서 샴페인 잔이 돌았다. 그는 아주 조금만 마신 뒤, 잔을 내려놓았다. 언제나처럼 침착한 태도였다.

 

 “사실 난 이미 걔로 정했어. 이건 통보고.”

 “실험에 누굴 쓸 지는 내 결정 권한이야. 그리고 답을 말하자면 난 싫어. 왜 굳이 오이카와여야 해?”

 “마음에 안 들어서?

 “?”

 

 감정적인 대답에 말을 잃은 틈을 타, 드르륵 의자가 뒤로 밀려났다. 자리에서 일어난 미야는 반듯하게 서서 아직 앉아 있는 특별연구원을 내려 보았다.

 

 “너는 특별 연구원이지만, 내 직속 산하기관이야. 뭐, 거부할 수 있는 권리야 있지. 그렇지만 상부에서 모두 받아들여주진 않아. 이번이 그런 경우일 거고.

 “미야!”

 

 카게야마 역시 지지 않고, 자리에서 일어섰다.

 

 “-,”

 “주인님 앞에서 흥분하지 마십시오. 도련님.”

 

 차분한 말소리가 귓가에 울렸다. 곧이어 누군가의 두 손이 어깨를 내리 눌렀다. 의자에 억지로 주저앉혀진 카게야마가 분을 참지 못하고 세차게 고개를 돌렸다. 사용인이 예의 무표정한 얼굴로 두 어깨를 잡고 일어서지 못하게 몸을 누르고 있었다.

 

 “놔요. 무슨 짓이에요.”

 “그럴 수 없습니다. 직접 말씀하신대로, 카게야마 도련님의 후견인은 현재 아츠무 도련님이십니다.”

 “그런 건 이 일과 상관없잖아요.”

 

 돌아오는 대답은 없었다. 상대는 그저 지금 이것이 너무나 당연한 일이라는 듯한 표정을 짓고 있었다. 다른 사용인들 역시 종종걸음으로 자리를 피하거나, 시선을 내리깔았다. 묵인과 무시 속에서, 더 이상 무엇도 거부해서는 안 될 것 같은 이상한 압박이 연구원의 온 몸을 조여 왔다.

 

 “처음 이야기로 돌아가 보자.”

 

 주변을 두리번거리는 동안 그는 어느새 카게야마의 바로 앞으로 다가와 있었다. 여느 때처럼 웃고 낯이었지만, 무섭게 차가웠다. 특별 연구원은 그저 어리둥절했다. 미야는 갑자기 왜 이러는 거지. 지금 뭐라고 하는 거지.

 

 “나는 너의 후견인이고, 상관이야.”

 “.”

 “하지만 그걸로는 부족해.

 

 손가락이 귓가의 머리카락을 헤집다가 만지작거렸다. 그다지 의도한 것은 아니었는데, 살결이 잠시 귀를 스칠 때마다 상대는 본능적으로 고개를 조금씩 돌렸다.

 

 “토비오, 나한테 또 뭐가 되어 줄래?”

 

 뱃속이 들끓었다. 약간의 샴페인을 넣은 속이 아우성을 치고 있었다. 무언가를 달라고. 눈앞에 있는 것을 달라고.

 

 “뭘 원해?”

 

 잔뜩 겁에 질려, 바닥을 기어야 하는 상황에서도 고개를 돌려 날 노려보고 있었다. 지금이었다. 네가 내 뱃속으로 들어올 시간. 날 받아낼 시간. 그는 그대로 손아귀를 돌려 상대의 턱을 꽉 쥐었다.

 

 “이미 말해줬잖아.”

 좋아하거나, 사랑하거나. 혹은.

 “같이 자는 사이.”

 

 그리고 혀를 깨물기라도 할 것 같은 표정의 상대에게 입을 맞췄다.

 

-11-

 

 [얏호. 오늘도 1등한 오이카와씨야.]

 [. 져버렸어. 얄미운 우시와카쨩을 쥐도 새도 모르게 없앨 수는 없을까? 아냐, 오이카와씨는 정정당당하게 이길 거니까요.]

 [토비오쨩, 바빠?]

 

 …

 

 [혹시 오이카와씨 잊어버렸어?]

 [에이 설마. 칠칠맞게 핸드폰 잃어버린 거지?]

 [토비오?]

 

 그건 겨울의 일이었다.

 

-12-

 

 핸드폰은 그 날, 눈앞에서 박살났다. 출근도 할 수 없었다. 미야 아츠무의 내부에서 발현한 검은색 불꽃은 카게야마를 연료로 삼아 거세게 타올랐다. 돌변이었으나, 그저 본성으로의 회귀이기도 했다. 거대한 뱀이 턱이 빠지게 입을 벌리고 상대를 삼켰다. 독이 든 이가 어깨를 물고, 이어 허리를 동강냈다. 살점을 낱낱이 발라내고, 남은 뼈는 독으로 삭혀 나갔다.

 

 “, 으으.”

 “눈 떠. 토비오.”

 

 손등을 살짝 덮는 길이의 가죽장갑이 뺨을 두들겼다. 카게야마는 얕고 오랜 기침을 했다. 들썩이는 가슴을 구두가 짓밟았다.

 

 “. 허억.”

 “다시. 제대로 해.”

 

 그렇게 발로 밟히면서 혀를 쓰는 법을 배워야 했다.

 

 “우으. . .”

 

 부드럽게 나누는 입맞춤이 아니라, 일방적으로 밀어 부쳐오는 것을 견뎌내는 법을 배워야 했다. 잘하지 못했다. 잘할 수 없었다. 그래도 미야는 훈련을 멈추지 않았다. 표정은 상냥하고, 말은 달콤했지만, 몸은 봐주는 것 없이 냉정했다. 그냥 넘어가는 날은 없었고, 살에 멍이 빠지는 날이 거의 없었다. 벽난로 속, 불꽃이 활활 타오르는 것을 멍하니 보면서 카게야마는 그 계절을 보냈다.

 겨울의 일이었다.

 

-13-

 

 “, 도련님. 입을 벌려 주세요.”

 

 카게야마는 묵묵히 입술을 벌렸다. 새빨간 안쪽은 상처투성이였다. ‘훈련의 결과였다. 사용인은 가지고 온 약을 면봉에 묻혀 정성스럽게 발라주었다. 언제나 똑바르게 뜨여져 있던 눈이 반쯤 감겨 있었다. 그것은 나름대로의 분위기를 자아냈다. 그는 납작한 약품의 뚜껑을 닫고 옆으로 치웠다.

 

 “이런, 옷차림도 엉망이시군요.”

 

 와이셔츠의 단추가 제멋대로 잠겨 있었다. 두 번째 단추는 세 번째에, 세 번째 단추는 다섯 번째에. 소매의 단추는 어디로 갔는지 보이지 않았다. 목과 어깨를 고스란히 내보이는 헐거운 차림새였다. 사용인은 단추를 하나하나 풀어내고, 제 구멍에 맞추어 다시 끼워주었다. 도련님은 그저 약간 고개를 수그린 채, 자신의 옷을 상대에게 맡겼다.

 

 “내일부터는 도련님께서도 출근해도 좋다는 말씀이 있으셨습니다.”

 “.”

 

 눈앞에 아이디카드가 내밀어졌다. 받아들기 전, 카게야마는 잠시 상대를 바라봤다.

 

 “프로젝트를 완료하시라는 뜻입니다.”

 “.”

 

 그제야 멍울이 져 있는 손이 출입증 카드를 잡아챘다.

 

 “그러겠다고. 미야한테 전해.”

 반말이었다. 그 거침에 사용인이 희미하게 웃었다.

 

 “하지만 임상 실험 같은 것은 절대 안 한다고도 같이 전해.”

 

 아이디카드를 목에 걸며, 특별 연구원은 몸을 일으켰다. 비틀거리는 걸음은 얼마 가지 못해 넘어졌지만, 허리는 꺾이지 않는다. 그는 두 손을 살짝 비비며 웃었다. , 결국 작은 주인님은 도련님을 길들이지 못했다.

 조금 추운 봄이었다.

 

-14-

 

 나는 오이카와를 찾지 않았다. 찾으려고 했을 때, 무슨 일이 일어날지 두려웠기 때문이었다. 생존을 확인할 수 있는 방법은 있었다. 미야 아츠무의 방으로 가면 되었다. 관계의 말미가 되면 그는 증오와 애정, 소유욕 같은 게 얽히고설킨 얼굴로 귓가에 오이카와 토오루의 생존을 속삭여 주었다. 알고 있었다.

 

 오이카와 토오루는 나의 고삐이며 재갈이고, 채찍이었다.

 그래서 해법은 간단했다. 미야 아츠무가 날 제어할 수 있는 방법은 오이카와 토오루였다. 그러니까 내가 꺾이지 않으면 되는 일이었다. 그러는 한, 그 역시 오이카와 토오루를 어찌할 수 없는 딜레마에 우리는 당시 빠져 있었다.

 

 괴로운 기억인지 아닌지를 따져보면, 확실히 이것은 괴로운 기억 쪽에 가까웠다. 하지만 지우고 싶지는 않았다. 외려 지워질까 두려웠다. 또한, 연락이 닿지 않았던 그 기나긴 겨울 동안 오이카와가 자신을 잊었을 지에 대해서 생각하면 가장 먼저 찾아오는 감정 또한 '공포'였다. 기억을 선택해서 지울 수 있는 기계를 만들고자 했던 사람이면서, 누군가가 내 기억을 소거하는 쪽을 선택할까봐 두려워 하는 것이 나였다. 그 볼품없음이 내 결정을 이끌었다. 

 

 나는.

 기억에 막을 내리는 기계, Blind를 절대로 완성하지 않을 것이다. 그런 소름끼치는 것을 세상에 내어 놓지 않을 것이다.

 

-15-

 

 그리고.

 “쨔잔!”

 전혀 기대할 수 없었던 순간이 갑자기 찾아왔다.

 

 “토비오 쨩? 왜 그런 표정이에요?”

 네가 약속을 지킨 것이다.

 

 “좀 더 반가워해야 하는 거 아니야? 섭섭하게. 정말.”

 

 변함이 없이, 그건 봄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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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Blind Game

 

 

-1-

 

 “출근을 일주일 내내 한다고?”

 

 오이카와는 눈을 둥그렇게 뜨며 물었다. 카게야마는 볼펜으로 끄적끄적 뭔가를 적다가 눈을 올려 상대를 바라보았다. 손은 여전히 움직이면서, 그는 눈썹을 매서운 모양으로 모았다.

 

 “야, 너 나보다 어리잖아. 말 똑바로 해.”

 

 누군가를 위압주기 위해 일부러 짓는 표정이었다. 그러지 않아도 되었던 나날들이 대부분이었던지라 그것은 오히려 어색한 모양이 되었다. 의자 등받이를 거꾸로 하고 앉아 있던 상대는 푸훕- 하고 입을 쭉 내밀며 웃음을 터뜨렸다.

 

 “토비오쨩, 지금 그 얼굴 뭐에요? 설마 날 겁주려고 한 거야?”

 “.”

 “못생겼으니까 얼른 풀어, 풀어.”

 

 요원 후보생은 손가락 끝으로 카게야마의 미간을 스스럼없이 문지르며 성화를 해 댔다. 어어, 하는 순간 주름이 팍 들어가 있던 눈썹 사이가 풀려 나갔다. 아무리 주먹을 거세게 날려도, 푹신하게 들어가 버리는 말랑한 상대에게는 도리가 없었다. 연구원은 한숨을 짧게 쉬고 고개를 떨어뜨렸다.

 

 “나는 일주일에 3일은 여기 올 거고, 3일은 훈련소에 있을 거야. 오늘 왔으니까 내일은 못 보겠네.”

 

 또 묻지도 않은 자기 얘기를 종알종알.

 

 “그러면 하루가 남지? 그건 휴일이에요. 휴일.”

 “아깝지 않아? 하루 쉬는 거.”

 “휴식이지. 시간을 낭비하는 것과는 달라. 왠지 알아?”

 “?”

 “사람이 안 쉬면 못생겨지거든. 이건 누구 얘길까요?”

 “. 진짜.”

 

 뭐라고 말을 덧붙이려고 하는 순간, 노크 소리가 들렸다. 카게야마는 시선을 훈련생 어깨 너머로 올렸다. 문이 소리 없이 열리고, 실험보고를 담당하는 연구원이 방으로 들어왔다.

 

 “저기.”

 

 오이카와는 등받이에 턱을 괸 채, 그나마 자신이 기를 쓰고 살려놨던 얼굴이 급속하게 굳어가는 광경을 바라보았다. . 그는 뚱한 표정으로 입을 내밀었다.

 

 “?”

 “일전에 그, 실험동물 처리 말인데요.”

 “전체 폐기라고 했었잖아?”

 

 똑같은 질문을 싫어하는 특별연구원은 뒷말이 나오기도 전에 결정을 내뱉었다. 벌써 몇 번째 반복인지 세어 보기도 귀찮았다. 그러나 그것이 본론이 아닌 듯, 연구원이 쭈볏거리며 두 손을 마주 잡았다.

 

 “, 사실 다들 폐기하는 걸 꺼려해서...어떻게 대안이 있어야 할 것 같습니다.

 “대안?”

 

 연구원은 고개를 갸웃했다. 왜 싫대? 라고 되물으려던 그는 입을 다물었다. 그동안 폐기된 양이 많기는 했다. 오이카와는 그의 눈썹이 슬슬 더 치켜 올라가는 것을 보고 있었다.

 

 “그럼 내가 할 테니까 둬.”

 

 간단한 결론을 내려주고 카게야마는 다시 볼펜을 움직이기 시작했다. 어차피 이런 식으로 뒷처리를 도맡게 된 것이 처음은 아니었다.

 

 “아, 약은 준비해 놔.”

 

 퉁명스럽지만 상대를 혼내는 말투는 아니기도 했다. 목이 꽉 막힌 표정이었던 연구원은 서둘러 인사를 하더니 방을 떠났다. 달칵. 문이 닫힌다. 이제 다시 방에는 두 사람 뿐이었다. 상대가 조용해진 틈을 타서 카게야마는 필기를 계속했다.

 

 “토비오쨩.”

 물론 아주 잠시 뿐이었다.

 

 “폐기라는 거 그런 거야? 안락사?”

 “바깥에 풀어주었다가 문제가 생기면 곤란해. 교배로 생태계 교란이 될 수도 있고.”

 

 왠지 변명 같은 말이었다. 왜 내가 변명을 하고 있지. 펜 끝이 잠시 멈췄다.

 

 “그런 거 싫다.”

 

 요원후보생은 왠지 제 3자에게 말하듯 먼 목소리로 말했다. . 카게야마는 문득 깨달았다. 앞에 있는 오이카와 토오루는 피실험자였다. 등받이 위에 겹친 팔 위, 오늘 들어 제일 고요해진 얼굴에게 뭐라고 말을 해야 할지 몰라서 그는 한참을 생각해야 했다. 그리고.

 

 “넌 실패하지 않을 거야.”

 

 엉겁결에 그렇게 말해 버렸다. 오이카와는 혼자만의 생각에서 깨어난 듯 또렷한 눈으로 카게야마를 바라봐 왔다. 그것을 보고 있자니 한 문장이. 무작위적으로 더 떠올랐다.

 

 “내가 약속해.”

 

 요원 후보생은 매우 어른스러운 얼굴로 부드럽게 웃었다.

 

-2-

 

 “오이카와 토오루는 어때?”

 

 보라색 넥타이를 매만지며 미야가 물었다. 웅우우웅. 진동칫솔로 이를 닦고 있던 카게야마는 거울을 통해 눈으로 반문했다. 걔가 왜? 목을 좌우로 한 번씩 꺾은 남자는 소매에 검은색 칼세도니로 장식된 커프스단추를 달았다.

 

 “온지 이주일 쯤 됐잖아. 슬슬 실험에 들어가도 되지 않겠어?”

 “.”

 

 목 너머로 치약거품이 넘어 들어갔다. , 하며 입안에 있던 것을 뱉은 연구원은 연신 기침을 하며 몸을 들썩였다. 오늘 찰 손목시계를 고르던 미야는 요란한 소리에 힐끗 시선을 던졌다.

 

 “뭘 그렇게 당황해?”

 그리고 느긋하게 되물었다. 입 안을 반복해서 깨끗이 헹군 특별연구원은 발갛게 변한 눈동자로 상대를 바라보았다.

 

 “그냥 치약 때문에. 어쨌든 아직, 안 돼.”

 “.”

 

 미야는 성의껏 고른 시계를 왼 손목에 두르고 채웠다. 소매 밑으로 들어가게 정돈한 그는 몸을 돌려, 막 수건으로 입을 훔치며 나오던 카게야마 앞을 막아섰다.

 

 “?”

 “성공률이 너무 낮잖아.”

 “걔가 실패하면 다른 애로 다시 보내줄 수 있어.”

 “.”

 “이미 사망자는 꽤 나왔잖아. 그럴 거 알고 시작한 거고.”

 “아냐. 나는.”

 “토비오가 잘못했다는 말은 아니고.”

 

 어깨 위로 손이 올리며 그는 상냥하게 웃었다.

 

 “굳이 걔를 특별 대우해 줄 필요 없다는 거야.”

 

 남자다운 입술의 끝선은 날렵하고, 눈은 휘어져 있었다. 가만히 있으면 화가 나 있는 것 같은 카게야마와 달리 베이스가 웃는 상인 얼굴이었다. 잘생긴 것도 그렇지만, 유달리 웃는 낯에 약한 특별연구원에게는 말을 막는 효과적인 얼굴이기도 했다. 그런데 오늘은 뭔가 조금 달랐다. 파란 눈동자는 사근사근한 얼굴을 보다가 살짝 눈썹 사이를 모았다. 어딘가 의아한 표정이었다.

 

 “?”

 

 폭신한 수건으로 닦인 손가락 끝이 뺨을 더듬고 입가를 만졌다. 미야는 손이 자신을 마음껏 만지도록 내버려 둔 채, 그를 내려 보고 있었다. 어느 순간, 카게야마가 고개를 기우뚱했다.

 

 “네가 원래 이렇게 웃었나?”

 “무슨 뜻이야?”

 “뭐라고 말해야 할지는 잘 모르겠는데.”

 

 얼굴을 보고 있자니 급작스럽게 뱃속이 불편했다. 방금 먹은 아침이 다 어디로 갔는지, 진득한 허기가 밀려 왔다. 미야는 낮고 뜨거운 숨을 내뱉었다. 그러나 아무것도 모르는 연구원은 곧 흥미를 잃은 표정으로 손을 떼어냈다. 그리고.

 

 “어쩐지 좀 다르네.”

 

 역시 걔 쪽이 이상한 건가. 라고 중얼거리며 덧붙인 말은 잘 들리지 않았다. 미야는 살짝 고개를 돌려, 자신을 지나쳐 가는 카게야마의 뒷모습을 꽤 오랫동안 응시했다.

 

-3-

 

 “할아버지께서는 아직?"

 

 그는 티 포트에서 따뜻하게 데워진 차를 자기 잔에 따르며 물었다. 좋은 향이 나는 연녹색 액체가 넘치지도 부족하지도 않은 양으로 잔에 따라졌다.

 

 “아직 주무시고 계십니다. 복귀하신 뒤에 체력이 부치시는 지 많이 피로해 하십니다.”

 “그래요?”

 

 작은 주인은 거울처럼 반들거리는 금속 쟁반 위에 정갈하고 고급스러운 간식 몇 개와 함께 잔을 올리며 대수롭지 않게 말을 받았다. 아버지가 돌아가신 후에는 그가 항상 직접 챙기는 큰 주인의 아침 찻상 이었다.

 

 “나이가 있으시니 어쩔 수 없죠. 잘 부탁드려요.”

 그것들이 담긴 트레이를 사용인에게 넘기며, 작은 주인은 의미심장하게 웃어 보였다.

 

 “언제 돌아가실 지는 아무도 모르잖아요.”

 사용인은 허리를 깊이 숙였다. 미야는 뒤를 돌아 자신이 사용한 식기를 모두 깨끗이 닦아서 제자리에 넣었다.

 

-4-

 

 오이카와는 볼펜 뒤를 계속 딸각거리며, 생각이 날 때마다 종이에 적어 내려갔다. 연도와 월을 써 놓은 표 안에 차곡차곡 무언가가 적혀 갔다. 물론 기억이라는 것은 본디 완벽할 수 없었다. 말도 못 하고, 심지어 제대로 보지도 못한 어린 시절을 기억하고 있는 사람은 없을 것이다. 아니, 작년의 오늘을 24시간, 11초도 틀리지 않게 기억할 수 있는 사람은 또 어디 있겠어. 요원은 그렇게 시작하며 이 작업을 시작했다. 그런데.

 

 “.”

 

 비었다. 다 채울 수 있었는데 분명히 비었다. 요원은 손가락 끝으로 이마를 문지르며 자신이 적은 내용을 살펴보았다.

 기억이란 게 생기기 시작한 4살부터 23살까지는 이상한 점을 찾을 수가 없었다. 23살부터 현재까지도 그러했다. 하지만. 20살부터 23살까지는 뭔가 이상했다. 기억이 나긴 하는데 이상한 부분들이 있었다. 마치 얼버무린 듯이 대충이었다. 20살에 나는 훈련을 했었다. 그건 사실이었다. 하지만 매일 했나? 아닌 것 같은데 다른 일을 한 기억은 없었다. 훈련소에서 만난 친구들도 기억하고 있었다. 같이 여가 생활을 했던 기억도 났다. 그런데 내 생일날에 그들에게 축하를 받았나. 아니, 그건 모르겠어.

 

 “뭐야.”

 

 오이카와는 저도 모르게 주머니 속에 손을 넣어 라이터를 찾았다. 버릇대로 달칵달칵. 빈 소리를 반복해서 내며 그는 종이 속 빈 구석을 노려보았다. 촉을 세웠기에 그렇지, 사실 이건 정말 자연스러웠다. 이렇게 적어놓지 않았으면 모를 정도로 두루뭉술하게 마감된 기억들이 그를 총공격해왔다. 그는 문득 고개를 들어 맑게 닦인 창유리를 바라보았다.

 기분탓일까. 자신이 조금 낯설게 느껴졌다.

 

-5-

 

 『지금 내가 가지고 있는 기술로 뇌세포를 죽이는 것은 문제가 없다. 중요한 것은 필요한 것만을 지우는 것이다. 사람에게는 망각이라는 기능이 있고, 자기 합리화라는 방어기제가 있다. 그러니 필요한 만큼의 소량만 삭제한다면 그 공백은 스스로 메꾸어 질 수 있을 것이다. 그러니까 이 기술의 핵심은 그것이다. 필요한 세포만 지우는 일.

 

 카게야마는 거기까지 정리한 뒤, 두 손을 눈두덩이 위에 올렸다. 뜨겁게 달아올라 있었다. 손에 남아 있는 독한 약냄새에 빈속이 요동을 쳤다. 사실 최근 들어 거의 잠을 이루지 못했다.

 

 내가 약속해.’

 

 “왜 그랬지.”

 모를 일이었다. 연구원은 스스로에게 고개를 설레설레 저었다. 약속이라니. 해 본 기억이 없어서 어떻게 지켜야 하는 건지도 감이 오지 않았다.

 

-5-

 

 “.”

 

 벨소리를 듣고 자리를 피한 주인의 뒷모습을 보며 마츠카와는 몸을 편안하게 바로 돌려 앉았다. 온 몸의 긴장이 녹아, 혈관을 흐르는 기분이었다. 머리카락의 시작부터 발톱의 끝까지 뾰족하게 세워져 있는 감각은 도대체 가라앉을 줄을 몰랐다. 그는 눈을 감았다. 우습게도 이제야 팀원들의 생각이 났다. 오이카와, 하나마키, 그리고.

 

 “마츠카와!! 괜찮냐!!!”

 “. 그래. 이와이즈미 너도.”

 

 서포터는 자연스럽게 대답하다가 뭔가 이상하다는 생각에 눈을 떴다. 그리고 고개를 돌려 보았다. 환청이 아니었다. 분명히 머릿속에만 있어야 할 팀장은 근육이 훌륭한 팔에 누군가를 끼고 질질 끌고 방으로 들어와 있었다.

 

 “젠장, 누가 널 이 지경으로!!!!”

 “?!”

 “뭐냐, 지금 그 멍청한 표정은. 설마 머리를 다친 거냐. 왜 하필 머리야. 그나마 남보다 괜찮은 건 아이큐 정도였는데. 차라리 팔이 양쪽 다 부러지는 게 낫지. 제기랄!

 “.”

 

 요원은 감동을 깨는 막말 속에서 조금씩 현실감을 찾아갔다.

 

 “그런데 치료는 어떻게 받은 거지? 누가 널 돕기라도 했어? 그 사람. 아니, 그 분은 어디 계시지? 혹시 벌써 잡혀가신 건 아니겠지!”

 

 흥분한 이와이즈미는 속사포처럼 빠르게 말을 내뱉었다. 마츠카와는 부처님 같이 모든 것을 초탈한 미소를 지었다. 그리고 붕대로 칭칭 감긴 손가락을 애써 들어올려, 지금 팀장의 팔 안에서 목이 졸려 있는 남자를 가리켰다.

 

 “?”

 

 이와이즈미는 손가락을 따라 자신의 팔 안을 보았다. 흉측한 얼굴의 남자는 이미 기절해 축 늘어져 있었다. 이 사람이 뭐, ? 아주 당연하다는 듯이 물음표를 떠올리는 팀장에게 마츠카와는 입을 열었다.

 

 “거깄다. 나 치료해 준 사람.”

 “.”

 

 단 한마디의 토를 달지 않고 팀장은 남자를 바닥에 바로 눕힌 뒤, 물을 가지러 뛰어나갔다. 오이카와 같은 녀석. 마츠카와는 방금 팀장이 하나마키에게 했던 생각을 똑같이 그 듬직한 등 뒤에 던졌다.

 

-6-

 

 “오늘도 피 뽑아야해?”

 “팔 내놔.”

 “토비오쨩. 지금 눈앞에 있는 건 무서운 검사에 긴장하고 있을 2살 연하의 미남이잖아요. 꼭 지금부터 너의 팔을 잘라가겠다는 표정으로 말을 해야겠어?”

 “겠어?”

 “.”

 

 입을 삐죽이며 오이카와가 덧붙였다. 한달이 지났다. 이 나풀거리는 남자애는 어느덧 연구소 내 사람들과 친해져서 안부를 나누기 시작했다. 그러니까 카게야마는 아직 이름을 모르고, 비즈니스만 하는 사이들과 말이다. 포트폴리오에 적혀 있던 어마무시한 수치의 친화력이 무엇인지를 그는 확실히 알 수 있었다. 물론 카게야마도 고군분투는 했다. 지적하면 입을 비죽비죽, 못마땅해 하면서도 '요.'를 붙이게 하는 정도로.

 

 “주사 안 아프게 놔줄 거죠?”

 

 얌전히 내밀어진 팔은 이미 다 자란 성인의 것이었는데, 말에서는 아직 아이의 냄새가 났다. 연구원은 신중하게 핏줄을 찾았다.

 

 “살갗을 뚫고 들어가는데 안 아픈 주사가 어디 있어. 너 쓸데없는 말 좀 하지 마.”

 “토비오는 그거 고쳐야 해.”

 “?”

 “.”

 

 빠악. 카게야마는 주사기를 꽂아 넣었다. 혈관은 제대로 찾았고, 근육을 손상시키지 않을 정도로 솜씨를 부린 손놀림이었지만 힘은 평소보다 더 준 것이었다.

 

 “아얏!”

 

 솔직하게 아픔을 표현한 오이카와는 연구원을 억울하다는 눈으로 흘겨보았다. 카게야마는 모르는 척 주사에 집중했다.

 

 “토비오쨩.”

 “카게야마씨.”

 

 그리고 호칭을 정정해 주었다. 저 말도 안 되는 호칭을 일부나마 고치는 것이 그의 다음 목표였다. 좀처럼 쉽지 않은 일이었다. 부루퉁한 적막 속에서 적정량의 피가 차자 그는 주사기를 뽑아낸 뒤, 알코올 솜으로 피부를 누르고 문질렀다. 이번에는 한껏 누그러져 부드러운 손길이었다. 오이카와는 입술을 쭉 내밀고 눈을 가늘게 떴다. 그리고는 질색하는 표정을 지었다. 어쩌면 그리 시시각각 표정이 요동을 치는지 심심할 틈이 없었다.

 

 “토비오쨩을 카게야마씨라고 부르느니, 차라리 나한테 를 붙이는 게 낫겠어.”

 “, 실없는 소리.”

 “고쳐야 하는 건 내 쪽이 아니라, 토비오쨩 쪽이야. 맨날 라든지, ‘라든지, ‘이봐’. 이렇게 부르니까 사람들이 당신을 무서워하지.”

 “날 무서워해?”

 “설마 몰랐어? 세상에. 토비오쨩은 오이카와씨랑은 달라서 잔뜩 웃어주지 않으면, 인간관계에 문제가 생기는 게 당연하잖아.”

 

 ‘오이카와씨라니. 카게야마는 무심코 웃으려다가 입가에 힘을 주었다. 피를 뽑았기 때문에 오늘은 많이 먹어야 겠다느니, 오이카와씨는 아직 더 클 거라느니. 토비오 쨩은 많이 먹어도 이제 늦었다느니. 그런 허허실실한 말들은 아이는 끊임없이 쏟아냈다. 연구원은 그것을 구경했다. 사나운 말을 던져도 복실하게 흩어뜨리고, 침묵을 던져도 퐁당퐁당 거리는 것을 멈추지 않는 요원 후보생을 넋놓고 구경했다. 하도 말이 많고, 표정 변화도 많아서 그걸 따라가는 정신이 피로해지는지, 검사날에는 조금 더 쉽게 잠이 왔다. 그게 이 시간의 유일한 좋은 점이다. 그런데 자신과 문득 눈을 마주친 후보생은 갑자기 손을 내밀었다.

 

 “그런 눈으로 보다니 정말 어쩔 수 없네.”

 “?”

 “2년이나 밥을 더 먹었으면서 오이카와씨보다 작은 토비오쨩을 위해 비법의 우유빵을 줄게.”

 

 경어와 반말을 자유자재로 섞으면서 요원후보생은 조그마한 미니 우유 빵을 손바닥 위에 올려주었다. 매일 저택에서 먹는 것과 달리 조잡해 보이는 베이커리의 빵이었다. 오이카와는 엉거주춤하게 멈춘 연구원의 손가락을 하나하나 접어 쥐어 주었다.

 

 “.”

 

 그리고는 또다시 보는 것만으로도 기분 좋은 미소를 지어 보였다. 붉은 기가 살짝 감도는 다갈색 눈동자를 영롱하게 빛내며 웃는 그 아이는 정말로 봄 같았다. 연구원이 제일 좋아하는 계절이었다. 그래서 그는 무언가를 깨달을 수 있었다.

 

 “오이카와.”

 

 카게야마는 상대의 이름을 제대로 불러 보았다. 손 안에서 빵봉지가 바스락 거렸다.

 

 “으응? 감동했어? 하지만, 두 개는 못 주니까.”

 “너 이제 여기 오지 마.”

 

 나는 오이카와 토오루로 실험하고 싶지 않다. 얘가 눈을 까뒤집거나, 숨이 멈추거나, 맑고 깨끗한 눈동자를 흐리게 되는 것을 원하지 않는다.

 

 “?”

 

 그래서 그는 추방을 명령했다.

 

 “싫은데?”

 

 그리고 바로 거절당했다.

 

-7-

 

 여전히 웃는 얼굴이었다. 그것이 화가 났다. 카게야마는 말없이 자리에서 일어나, 오이카와의 손목을 잡았다. 손에서 떨어진 우유 빵이 책상을 뒹굴었다.

 

 “으응?”

 “따라 와.”

 “.”

 

 콰앙. 그 어느 때보다 세찬 기세로 문이 열렸다. 지극히 폐쇄적인 복도를 두 사람은 거친 발걸음으로 걸어갔다. 오이카와는 그의 뒷모습을 바라보았다. 자신보다 조금 작고, 틈이 없고, 외로운 모습. 구석에 웅크리고 뭐가 보일 때마다 하악질을 해대는 길고양이 같았다. 원래는 작고 마른 몸을 알아챌까봐 잔뜩 털을 부풀린 그런 거. 있는대로 세게 잡은 손목보다 그것이 어쩐지 조금 더 아픈 것이었다. 그는 눈을 찡그렸다.

 

 삐익,

 카게야마는 자신의 아이디카드로 문을 열었다. 위잉. 자동문이 묵직한 무게감을 가지고 양 옆으로 열렸다.

 

 “, 토비오쨩, 여기는.”

 “괜찮아.”

 

 ‘관계자 외 출입금지라는 빨간 글씨를 굳이 가리키는 손가락을 내리 누르며, 연구원은 오이카와를 안쪽으로 끌고 갔다. 요원 후보생은 그의 손에 이끌려 한층 좁은 길을 따라 걸었다. 포르말린 냄새가 진하게 났다. 그 가장 안쪽에는.

 

 “.”

 

 동물들이 들어있는 철창이 즐비하게 놓여 있었다. 카게야마는 오이카와의 손을 놓았다. 그리고 가장 가까이에 있는 철창을 열고, 침을 질질 흘리고 있던 조그만 강아지를 꺼내어 실험대 위에 올렸다. 가까스로 그에게서 눈을 떼고, 요원 후보생은 가장 가까이에 있는 철창부터 하나하나 살펴보았다. 하나, , . 그렇게 모두 스물세 마리.

 

 “폐기되는 동물들이야. 오늘 분이지.”

 

 목소리에는 감정이 하나도 없이, 속도만 조금 빨라져 있었다. 오이카와는 카게야마가 작은 강아지의 모가지를 꽉 잡아 쥐는 것을 보았다. 네모난 정리 수납함에 가지런히 정리되어 있던 주사기 하나를 들어 올리는 것을 보았다. 목의 혈관을 찾는 것을 보았다. 바늘을 넣는 것을 보았다.

 

 케엑, . .

 강아지는 애기처럼 울었다. 이미 눈이 반 까뒤집어 있었던 것이었는데도, 살려달라고 그랬다. 도톰한 주둥이가 이리저리 휘둘렸다. 발톱이 연구원의 손등을 박박 긁었다. 연구원은 미동도 없었다. 마치 고깃덩어리를 치우는 정육점 주인처럼, 카게야마는 강아지의 시체를 옆으로 밀쳐냈다. 목이 뒤로 꺾였다. 다갈색 홍채 속 동공이 풀린 것을 요원 후보생은 말없이 바라보았다.

 

 “지금은 동물만 있지만.”

 철컹. 다른 문이 다시 열렸다.

 

 “동물만 하진 않았어.”

 모든 것을 목도했던 다음 순번은 켕, 끼잉. 소리를 내며 손을 피하려 들었다. 그러나 대충 몇번 휘젓는 것 만으로도 연구원은 쉽사리 그를 잡아챘다. 능숙해 보였다.

 

 “그렇잖아? 그럴 순 없어.”

 비겁한 자기변명과,

 “기계는 실패하면 고치지만, 살아 있는 건 그럴 수가 없으니까.”

 

 깨달은 것이 굵직한 접점으로 교차했다. 아까보다 조금 작은 강아지는 똑같이 희끄무레한 눈동자를 하고 옆에 놓여졌다. 다음 철창을 열지 않고 연구원은 실험대의 가장자리를 두 손으로 꽈악 잡았다. 그의 손끝에서 신속하게 피어났던 죽음의 꽃들에겐 색깔도 냄새도 없었다. 다만 핏줄을 파고들어 영혼의 깊은 곳에 박히는 것으로 존재를 증명할 뿐이었다.

 

 “오이카와. 너는 살아 있는 쪽이잖아.”

 그렇게 정체도 없이 계속 뿌리 내려서.

 

 “내가 실패하면 죽는 거라고.” 

 바위를 부수듯 이 사람의 영혼을 부술 것이다. 그런 생각이 들었다.

 

 “그러니까 토 달지 말고.”

 카게야마는 여전히 등을 보인 채, 손가락 끝으로 시체들을 가리켰다. 오이카와의 시선이 묵묵히 그 방향을 따랐다.

 “도망치게 해 줬을 때, 도망가란 말이야.”

 

 장갑도 없는 맨 손이었다.

 

-8-

 

 “토비오가 왜 자꾸 고집을 피우지?”

 

 미야는 자신에게 올라온 결재 서류를 보면서 중얼거렸다. 책상의 명패에는 조부의 이름이 적혀 있었지만, 앉아 있는 것은 그였다. 최근 건강이 악화되어 출근이 어려워진 조부의 대행 역을 하고 있는 중이었다.

 

 “죽으면 다른 애로 준비해주겠다고 했는데 말이야.”

 

 대행자는 특별 연구원이 올린 서류를 보며 미간을 보일 듯 말 듯 찡그렸다. 성공률이 충분하지 않아, 인간이 아닌 동물을 대상으로 하는 실험으로 회귀하겠다는 요청서였다. 미야는 볼펜을 손 위에서 빙글빙글 돌렸다. 더디지만 인간으로 하는 실험에는 동물보다 확실히 진전이 있었다. 그러니 그의 생각에 이것은 실로 바보같은 결정이었다.

 

 “이건 또 뭐야.”

 

 게다가 말미에는 오이카와 토오루는 실험에 적합하지 않으니, 요원 쪽으로 돌려달라는 내용도 들어가 있었다. 의도가 빤하게 보여 웃을 수밖에 없었다. 기분 좋아 짓는 미소는 아니었다.

 

 “토비오는 걔가 돌아가면 무조건 좋을 줄 아나 봐.”

 

 요원선발 테스트는 혹독하기 그지없었다. 그것을 통과해도 기다리는 것은 소비재의 과정이다. 둘을 모두 통과하여 정식 용원이 되는 비율을 제대로 알았다면, 이렇게 보고서에 편하게 쓰지는 못했을 것이다. 천재적이며, 멍청하고 귀여운 것.

 

 “설마 그 흔해 빠진 애가 마음에 들기라도 했나.

 

 미야는 보고서 속 오이카와 토오루를 뚫어져라 보며 부드럽고 낮은 어조로 말했다. 한참 그 얼굴을 웃돌던 시선이 명패에 있는 성에 닿았다. 그는 피식 웃었다본인은 아직 의식도 못하고 있을 이 특별한 취급이 심화되는 것을 원치 않았다. 혹시라도 상대가 눈치채고 딱딱한 껍질을 다 벗겨내기 전에 쳐내는 것이 당연하다. 그는 오이카와 토오루를 돌려보내는 내용에 망설임 없이 사인을 했다.

 

-9-

 

 숙소로 돌아온 요원 후보생은 자신에게 도착한 문서를 열어 보았다. 저녁 대신 입에 우유 빵 하나를 담뿍 베어 문 채였다. 등록번호와 비밀번호를 차례대로 쳐 넣자, 화면이 열렸다.

 

 “.”

 

 복귀를 명하고 있는 내용이었다. 그는 입에서 떼어낸 우유 빵을 봉지에 가지런히 집어넣었다. 그리고 오늘 있었던 일에 대해서 회상을 시작했다. 아주 꼼꼼하게, 어떤 장면도 빼놓지 않고.

 

-10-

 

 “토비오쨩, 담배도 폈어?”

 “?!”

 

 상대가 누군지 알아채자마자 카게야마는 서둘러 담배를 창틀의 재떨이에 비벼 껐다. 무심결에 오이카와를 어린 애로 생각하고 있던 지라 연기를 흩어내는 손길이 분주했다. 창문 너머로 매캐하고 몸에 좋지 않은 회색 연기가 슬슬 사라져 갔다. 돌아보니 요원후보생이 맵디매운 시선을 뚫어지게 던지고 있었다.

 

 “그동안 담배 냄새 같은 건 안 났었는데.”

 “가끔 피는 거야.”

 

 카게야마는 변명하듯이 덧붙였다.

 

 “흐응.”

 

 오이카와는 만족한 대답이 아닌 듯 표정을 흐렸다. 변명을 한 건 자신이지만 한편으로는 왜 전전긍긍해야 하는지 모르겠어서, 카게야마는 잠깐 얼굴을 찡그렸다. 그는 허리를 반듯하게 세우고 다시 입을 열었다.

 

 “너 이제 여기 안 오는 걸로 알고 있는데.”

 “맞아요. 나 복귀해요. 오늘이 마지막이에요.”

 “.”

 “지금은 그냥 하고 싶은 말이 있어서 왔어요. 어제 좋지 않게 헤어졌잖아.

 

 요원후보생은 카게야마 옆에 서서 창틀에 팔을 올려 기댔다. 평소와는 달리 붕 떠 있지도, 살랑거리는 말을 걸지도 않는 차분한 표정이었다. 다른 지적 없이도 말꼬리를 하나하나 올리는 게 정말 '끝'같아서 연구원은 잠자코 창 너머를 바라보았다. 노을이 발갛게 물들이고 있는 초여름의 저녁이었다. 

 

 “나는 그다지 좋은 집안에서 태어나진 못했어요.”

 

 평범하다면, 평범할 수 있는 이야기였다. 폭력적인 아버지, 견디지 못하고 도망간 어머니. 불우한 어린 시절. 먹고 사는 게 힘들어서 그 외에 좋은 일은 별로 없던좋은 일은 손가락 안에 꼽을 수 있었던 그런 인생. 오이카와는 카게야마가 버린 담배꽁초 끄트머리를 잡아 재떨이에 그림을 그리듯 뒤적였다.

 

 “요원이 된 것도 뭔가 근사한 이유가 있는 건 아니었어요. 그냥 영화에 나오는 거 보면 멋지잖아요. 좋은 자동차 타고, 총도 있고. 동경했거든요. 나랑은 상관없는 삶이라고 생각했는데, 기회를 준다니 옳다쿠나 하고 잡았었죠.”

 “.”

 “나쁜 놈들 빵빵하고 싶기도 했고. 으응, 알아. 조금 유치한 부분도 있었던 거.”

 

 손가락으로 총 모양을 만들어 허공에 쏘며, 요원 후보생이 웃었다. 카게야마는 가만히 그의 말을 듣고 있었다.

 

 "그렇지만 내가 요원이 되어서 나쁜 놈을 빵빵 하려면, 나쁘지 않은 사람부터 빵빵 해야 해."

 

 어느 순간 말을 바꾸며, 그는 표정 또한 바꾸었다. 연구원은 한번도 보지 못했던 것이었다. 몹시 어른스럽고, 몹시 진지했다. 가벼운 말들로 치장되어 있었지만 본질은 납과 같다. 그게 추가 되어 눈동자 속으로 떨어졌다. 그렇게 고정된 시선은 옆모습을 떠나지 못했다.

 

 "요원 후보생들이 배우는 건 사격, 체술, 도피법. 이런 것들만은 아니야. 우리는 사람을 죽이는 기술도 배워."

 

 실전에서 망설이게 하지 않기 위해서 살인과 폭력에 대한 감수성을 줄일 필요가 있었다. 대부분의 경우, 어떤 행동이 무뎌지는 것은 많이 노출되거나 해보았을 때였다. 하지만 오이카와는 자격을 얻기 위해 반드시 해야만 하는 폭력을 좋아할 수가 없었다. 그래서였다. 죽을 가능성이 높은 실험에 자원한 것은. 그는 자신의 옆얼굴을 뚫어져라 보고 있는 시선을 느끼면서도 계속 창 밖을 응시했다. 노란 해의 끄트머리가 지평선 너머로 붉게 삼켜지고 있었다.

 

 "나도 나쁜 짓을 했어."

 "..."

 "앞으로도 하게 될 거야. 하지만 나는 자신 있어. 오이카와씨는 절대 그거에 무뎌지지 않을 거야. 똑똑하거든."

 

 그는 항상 그럴 수 있는 방법을 찾아왔고, 찾아나갈 생각이었다.

 

 "하지만 토비오쨩은 너무 멍청해서."

 "뭐?"

 “이제야 말하는 거지만 심각하게 멍청해. 헛똑똑이야. 세상에 내어 놓으면 삼초도 안 되어서 코를 베일거야. 근데 그거 알아? 멍청한 사람은 나쁜 일 하면 안 돼.”

 

 오이카와는 생글생글 웃으면서 카게야마를 마주 보았다. 무슨 말인지 모르겠지만 기분은 별로다. 라는 표정을 짓고 있었다. 자신과는 달리 어렸을 때부터 좋은 환경에서 자랄 수 있었던, 운이 좋은 철부지 제왕이라고 생각했는데, 그렇진 않았다. 천재지만 바보였다. 관계를 만들지도 못하고, 상처를 인지하기도 못했다온 몸이 상처투성이면서 내 손에 묻은 이 피는 누구거지? 하면서 주변을 두리번 거렸다. 오이카와는 그 손을 꽉 쥐고 눈 앞에 들이밀어 주고 싶었다. 이거, 당신 거야. 당신 안에서 나왔어.

 

 “있지. 당신이 동물 실험 같은 거 안 했으면 좋겠다고 생각해.”

 "..."

 “나쁜 일 안 했으면 좋겠어. 안 어울려.

 

 도대체 어떤 세계를 살아왔길래, 스스로에 대해 그렇게 둔감해졌는지 오이카와는 궁금했다. 무엇에 노출되었길래 맞지 않는 옷을 자기 것인양 입고 있는지 궁금했다. 무엇을 제거당했길래 관계를 맺지 못하는지 궁금했다. 다 못생겼는데, 웃는 얼굴은 그나마 괜찮았다. 그래서 많이 웃었으면 했다. 어제, 그 뒷모습을 보고 깨달았다. 나는 당신을 놀리고 싶었던 게 아니었다. 사실은.

 

 "토비오쨩은 매정하게 날 쫓아냈지만 오이카와씨, 돌아올 거거든."

 

 그는 손가락을 내밀며 웃었다. 낯설게 새끼손가락을 바라보는 상대의 손가락에 억지로 마주 끼우고 꾹 눌렀다.

 

 "약속해." 

 

 웃게 해 주고 싶었다.

 

-11-

 

 해걸이를 하고 있는 복도의 가장자리는 어두웠다. 두 사람은 서로에게 심취되어 있었고, 그 관계가 주는 몰입에 도취되어 있었다. 그렇게 아무도 주의를 기울이지 못했던 구석에는 사실 구두 하나가 나와 있었다. 새까맣지만 광이 하나도 없이 칠해져 있는 고급 구두의 코는 두 사람 쪽을 향해 있다가, 천천히 뒤를 돌았다. 소리 하나 없는 숨죽인 걸음이 두 번. 비상구를 비추는 형광등이 구두의 주인을 밝혀낸다. 

 

 "..."

 미야 아츠무였다. 그는 팔짱을 끼고 머리 뒷부분을 벽에 대었다.

 

 "시끄럽네. 정말."

 그리고 들릴 락 말락한 혼잣말을 하며, 싸늘하게 웃었다. 

 

-12-

 

 으응? 이건 뭐야? 오이카와씨 괴롭히기?”

 “통계 시스템에 넣을 자료에 대한 체크리스트 자료에요. 설명은 들으셨지요?”

 “엣, 이렇게 엄청난 양이라는 말은 못 들었는데.”

 

 오이카와는 손바닥에 괴고 있던 머리를 서류 더미 위에 쿵 떨어뜨리며 투덜거렸다. 그래도 아프지 않을 정도의 넉넉한 두께였다. 모서리를 엄지손가락으로 잡고 두루륵 훑자, 빼곡하게 적힌 작은 글씨가 오소소 눈 안에 돋아 왔다. 그는 눈을 반쯤 감고, 하- 하는 소리와 함께 숨을 내뱉었다. 조금도 개의치 않고, 오피스룩의 여성은 싱긋 웃어 보였다.

 

 "귀찮아도 끝까지 성실하게 답변해 주세요. 징계 위원회에서 매우 중요한 자료니까요."

 "물론 그럴 생각이긴 하지만."

 “설문이 끝난 후에는, 상담이 진행될 거예요.”

 "상담?"

 

 볼펜 뚜껑을 입으로 연 요원에게 그녀는 다시 한번 사무적이고 상냥한 어조로 말을 이었다. 

 

 "외상 후 스트레스나, 트라우마 같은 것들에 대한 심층 진단을 할 예정이거든요."

 "난 정말 괜찮은데."

 "어머, 하지만 무척 실력이 좋으신 분이니 맡겨 보세요."

 "그래에? 누군데?"

 

 오이카와는 체크리스트 첫장을 눈으로 읽어내리며 되물었다. 불만을 내뱉던 것과 달리 막힘이 없는 속도였다. 여자는 마침 흘러내린 옆머리카락을 쓸어 귀 뒤로 넘기며 명함 하나를 앞으로 내밀었다. 빨리 끝내려는 요량으로 온 주의를 문서에 쑤셔넣고 있던 요원이 그 작은 종이를 다소 건성으로 받아 들었다. 그런데.

 

 "'미야 아츠무' 선생님이세요."

 

 최종장에서야 만날 거라고 생각했던 이름이 튀어나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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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바쁘게 달리고 있습니다. :) 저번 편에서 주셨던 응원의 말씀들 하나하나 너무 감사합니다. 이쯤 되면 정말 내야 하는 게 아닌가 싶은 마음이 더 커다랗게 변하고 있습니다. 힘내겠습니다! 무사히 공지를 올리게 되는 그 날까지.ㅠ0ㅠ 잘 부탁드립니다.

 날씨가 갑자기 더워지고 있습니다. 작년, 그 무섭게 더웠던 여름을 생각하니 벌써부터 몸보신을 준비(?)해야 하지 않을까 싶어요! 읽으시는 분들께서도 미리미리 맛있는 거, 영양가 넘치는 것을 잔뜩 드시면서 건강 주의하시길 바랍니다. 감사합니다! >0<

 

 +앗, 그리고 오이카와 토오루와 카게야마의 관계는 여인의 향기 ost 중 [Por una Cabeza]에서 이미지를 가져오고 있습니다. 탱고랍니다. 미야 아츠무와 카게야마의 관계의 경우에는 물랑루즈 ost 중 [록산느의 탱고], 그리고 [리베르 탱고]를 떠올립니다. 세 곡 모두 탱고인데, 분위기의 차이를 생각하며 들어주시면 감사하겠습니다. >0<)9

 

 

  Blind Game

 

 

-1-

 

 “거짓이 없는 이야기를 해 주겠네. 물론 나의 이야기에는 공백이 있겠지만, 자네가 가지고 있는 거짓을 걸러내는 체의 역할 정도는 할 수 있겠지.”

 

 위스키 한 잔을 들고 온 남자는 삐걱 거리는 의자에 앉아 평범한 말로 이야기를 시작했다. 마츠카와는 진통제가 눌러놓은 고통이 서서히 고개를 들어 올리는 것을 참으며 상대를 바라보았다. 정신을 잃고 있었던 것은 꼬박 삼일. 통신기는 모두 박살이 났으며 몸은 엉망진창이라 당장은 바깥의 일은 어떻게 돌아가고 있는지 알 도리가 없었다. 그러니.

 

 “부탁드립니다.”

 

 지금은 이 남자의 말을 듣는 것만이 그가 할 수 있는 전부였다. 몸의 반, 혹은 그 이상이 부서진 남자는 길고 긴 한숨을 내뱉었다. 반쯤 이지러진 눈두덩이 밑으로 시력을 잃은 것처럼 보이는 탁한 눈동자가 과거를 향하기 시작했다. 팔걸이에 올려 진 손가락이 방향 없이 떨렸다. 그렇게 그는 몹시 낡아 보이는 표정을 하고 첫 마디를 떼었다.

 

 “모든 건 내 잘못된 애정과 방임의 결과였네.”

 

-2-

 

 “여기 있었어?”

 

 카게야마는 고개를 들어올렸다. 부러 찾아야 하는, 도서관에서 가장 구석진 자리였다. 12살짜리 작은 몸을 가리고도 충분히 남을 만큼의 많은 책들이 주변을 장식하고 있었다. 얌전히 다물린 책, 활짝 열려 있는 책, 세로로 세워져 있는 책까지. 모습도 그러했지만 내용 역시 각양각색이라 일관된 주제를 찾을 수 없는 것들의 향연이었다. 그들의 합주곡 사이에서 감정을 거의 보이지 않는 청안이 공격적인 빛으로 상대를 바라보았다.

 

 “토비오.”

 

 미야는 발끝으로 가장 가까운 책을 스윽 밀어냈다. 첫 만남에서부터 자신을 매혹시킨 어린 천재는 둥지 속에서 평온한 표정이었다. 그는 조금 웃을 수밖에 없었다.

 

 “또 그랬다며?”

 “?”

 

 정말 모르겠다는 순진한 표정이었다. 조금 나쁘게 말해 멍청해 보일 정도였지만 사실 그런 것이 좋았다. 자꾸 나오려는 웃음을 틀어막으며, 미야는 카게야마 앞에 주저앉았다.

 

 “선생님께 따박따박 말대꾸하기, 조원들 지적하기, 협조하지 않고 혼자 끝내버리기.”

 “그런 적 없는데.”

 

 대수롭지 않게 넘기며 다시 책으로 시선을 돌리려는 얼굴을 미야는 두 손으로 잡아 자신에게 돌렸다. 순식간에 눈썹 사이가 좁혀들며, 동그란 볼이 불만을 먹고 부풀어 올랐다. 앙다물어진 입이 퍽 야무졌다.

 

 “조금 그러긴 했는데.”

 “했는데?”

 “틀린 말은 하나도 안 했거든. 열심히 하지도 않았어. 걔네들.”

 

 앞니 두 개에 살짝 물린 입술이 귀여웠다. 새빨갛게 피가 몰려서는 곧 삐죽삐죽 새의 부리마냥 튀어 나왔다.

 

 “너도 나한테 사과하라고 할거야?”

 “아니.”

 

 그렇게 설득해달라는 교사와 친구의 부탁을 받고 이곳으로 온 소공자는 의미심장하게 웃어 보였다. 그는 상대와 이마를 맞대며 부드럽게 부볐다. 부드러운 검은색 직모와 노란색 머리카락이 뒤섞이며 사각사각 소리를 내었다.

 

 “잘했어.”

 

 비밀을 속삭이는 듯한 은밀한 목소리로 미야는 카게야마를 칭찬했다. 나긋한 목소리와 스킨십이 상대의 경계를 쉽게도 허물었다. 조금 끝을 내리며 우물쭈물 물결을 치려는 입가를 사랑스럽게 보며, 소년은 상대를 꽉 끌어안았다.

 

 “걔네한테 맞춰줄 필요 없어.”

 “.”

 

 색색, 어린 숨은 온도가 높았다. 조금 열이 올라 있었는지 평소보다 뜨끈한 것이었다. 사실은 말랑한 애였다. 까기가 좀 힘들어서 그렇지 속은 그랬다. 그렇다는 것을 먼저 알아차렸으니 독점하고 싶은 것도 당연했다. 단단한 껍질만 보도록 얼마나 공을 들였던가. 그것은 그가 학교생활 중에서 가장 신경을 쓴 부분이었다. 카게야마와 타인의 연결고리가 자신 혼자이기를 바랐으며, 그 시도는 꽤 성공적이었다. 미야는 얌전히 몸을 의탁해 오는 상대의 머리카락을 살살 쓸어내리며 웃었다.

 

 “여기만 졸업하면 의무적으로 받아야 하는 교육은 끝이야.”

 “.”

 “그것 때문이야. 사실 몇 가지 알량한 지식, 도서관, 졸업장. 그거 외에는 별 의미 없는 곳이지. 신경 쓰지 마. 그런 건 너한테 어울리지도 않아.”

 “?”

 

 켜켜이 감춰놓은 숨은 의도를 파악하기엔 어려웠는지 품 안에서 머리가 기우뚱 기울었다. 알고 있었다. 카게야마는 자신처럼 특별했지만, 마음의 결정이 같진 않았다. 그렇다고 해서 큰 문제가 있는 건 아니다. 어차피 다 자신의 것이 될 터였다. 재능의 소유자를 소유하는 건 나였다. 이따위 곳에서, 이상한 떠중이 들에게 소진되게 두고 싶지 않았다. 골똘하게 뭘 생각하는 것 같던 동그란 머리가 느껴질 듯 말 듯, 아래위로 끄덕여졌다.

 까만 머리를 품에 안고, 미야는 창밖을 바라보았다. 겨울이 한창이었다. 성에가 낀 유리 너머 고풍스러운 설경이 비쳐보였다. 17살. 이르게 맞이하는 졸업이 다가오고 있었다. 긴 기다림이었다. 시간에 따라 팔 안의 몸도 쭉쭉 잘 자라 있었다. 이대로 졸업하고, 어른이 되면. 아니, 어른이 좀 덜 되어도 좋아. 어쨌든 그 언젠가 반드시.

 

 “아파?”

 “미안. 너무 힘이 들어갔네.”

 

 나 밖에 모르게 된 이 작은 것이 내 몸을 받아낼 것이다.

 

-4-

 

 “지금 하신 말씀에 따르면.”

 “둘은 졸업할 때까지는 사이가 좋았네.”

 “무슨 일로 틀어진 겁니까?”

 

 반문하는 박자는 점점 빨라졌다. 그들은 천성적인 이야기꾼이었다. 큰 주인이 그러했고, 단지 타인을 통해 전달받은 미야 아츠무의 이야기마저도 그러했듯이. 아버지 역시 순식간에 마츠카와의 집중력을 끌어내고 꽉 붙잡았다.

 

 “정확한 것은 아니네만, 어쨋든 시초는 나 때문이었지.”

 

 그는 허벅지를 연신 주무르며 말을 시작했다.

 

 “사실 나는 졸업 후에 둘을 떼어 놓으려고 했었다네.”

 

 점차 느려지던 움직임은 뒤틀려 있는 무릎에서 완전히 멈췄다. 원래 있어야 하는 곳이 아니라 바깥쪽을 향해 있는 울퉁불퉁한 뼈를 어루만지며 그는 자조적으로 웃어 보였다.

 

 “아츠무가 어렸을 때. 그 애는 누구도 사람을 대하듯 부른 적이 없었어.”

 그리고 별안간 이야기의 시작점을 비틀었다.

 “?”

 “그거. 혹은 시시한 것들.”

 

 반쪽의 얼굴이 불완전하게 짓는 표정은 담담했다.

 

 “그랬던 애가 처음으로 이름을 부른 사람이 카게야마였네. 그것도 토비오라고 말이야. 그래. ‘토비오라고 나에게 소개했지. 뛸 듯이 기뻤다네. 어리석게도 나는 그것을 변화라고 생각했어. 예외였을 뿐이었는데.”

 

 그러나 안에는 고통과 진득한 자기혐오가 스며들어 있었다. 마츠카와는 그의 얼굴이 물리적으로 뒤틀리지 않았다고 할지라도 몹시 흉한 표정이었을 것임을 직감했다. 그리고 그것이 가리키고 있는 진실 또한, 거의 동시에 깨달았다.

 

 “미야 씨. 당신 설마.”

 

 카게야마 토비오가 고아가 되는 일에 손을 대었습니까. 마츠카와는 차마 말로 내뱉지 못한 질문을 시선으로 던졌다. 날카로운 끄트머리가 흉진 볼과 광대, 그리고 턱에 흔적 없이 꽂혔다. 그는 시선을 피하진 않았다. 참담하다시피 썩어버린 눈동자가 지하실 구석처럼 새까만 그늘을 보여 왔다. 시선에 대한, 시선의 대답이었다.

 

 “나는 내 아들이 평범한 인간이 될 수 있을 지도 모른다는 기대를 버리지 못했었지.”

 

 부모라면 당연히 바라는 그 기대가 부메랑처럼 돌아와 심장을 찢었다. 그는 하나 밖에 남지 않은 손으로 이마를 짚고 고개를 숙였다.

 

 “나는 좋았다네. 누군가를 특별하게 생각하는 아츠무가.”

 “.”

 “좋았지. 학교에서 들려오는 변화의 소식들이. 다른 아이들과 어울리기 시작했고, 오히려 카게야마가 겉돌지 않도록 챙기기 시작했다는 말들이 말일세.”

 

 본디 몸에 좋지 않은 것은 달콤하고, 또 달콤한 법이었다. 마음 속에 조금 남아 있던 의심은 그렇게 쉽사리 자신을 감췄다. 거대한 몸통 끄트머리에 조그맣게 나와 있는 꼬리를 빤히 보면서도 그는 밟지를 못했다. 잡아 뜯어 양지로 끌어내지 못했다.

 

 “하지만 내가 틀렸어. 모두 가면이었네. 연기였어. 그 영악한 것은 알았던 거야. 어떻게 굴어야 카게야마를 고립시키고, 또 독차지 할 수 있을지. 그 이상한 독점을 타인의 시선에서 정당화시킬 수 있을지에 대해서까지 모두.”

 

 그의 열변은 결론에서 차갑게 멈추어 섰다. 마츠카와는 불현 듯 자신이 더 이상 고통을 느끼지 않고 있음을 깨달았다. 몰입이었다. 이제 그는 긴 세월 동안 상대의 영혼을 반복하고 쑤셨을 죄책의 칼날이 만질 수 있었다.

 

 “그 편협했던 시야, 그리고 자만 덕에 나는 이 지경이 되었지.”

 “.”

 “다른 누구도 아닌 아들의 손에 의해서 말일세.”

 

 마츠카와의 아버지와 비교하여 나이 차이가 얼마 되지 않을 상대였다. 그 나이만큼 너덜너덜해 졌을 마음이 눈동자 너머로 흘끗하게 모습을 보여 왔다.

 

-5-

 

 “엉망이네.”

 

 그런 말과 함께 미야는 넥타이의 매듭을 잡고 주욱 당겼다. 자신이 아니라 카게야마의 것이었다. 푸른 눈동자는 즉각 불편함을 드러내며 곧추세워졌지만, 주먹을 꽉 쥐었을 뿐 다른 행동을 하지는 않았다. 분노가 섞인 묵인 속에서 미야의 가주는 가장 무난한 윈저 노트 식으로 매여 있던 매듭을 천천히 플레인 노트 형식으로 바꿔 매기 시작했다.

 

 “얇은 넥타이는 이렇게 하라고 했잖아?”

 

 친절하게 웃는 눈동자가 반쯤 접혀졌다. 트렌드에 편승해 있는 짙은 남색 넥타이를 놓고, 미야는 살그머니 웃음을 피웠다. 빈 손끝은 어깨를 타고 내려가며 와이셔츠의 선을 다시 잡았다. 수의사는 눈을 고고히도 내리깔았다.

 

 “조금 낫네.”

 “오이카와는?”

 “준비되어 있어. 너한테 익숙한 장소에 말이야.”

 

 평소와 같은 어조로 대답하며 미야는 카게야마의 앞머리까지 단정하게 정돈해 주었다.

 

 “나는 사실 네가 그를 도망치게 할 거라고 생각했는데 말이야.”

 “.”

 “하긴, 네 말을 어떻게 믿겠어. 기억이 모조리 지워져 있을 텐데. 감히 말할 수도 없었을 거고.

 “미야.”

 “넌 기억 못하겠지만 나는 너와 열렬히 사랑했던 사이였어. 그리고 그 기억을 지운 건 사실 나야. 어떻게 해도 미친 소리로 들리긴 했을거야. 아마 소름끼치지 않을까?”

 “그만 해.”

 

 바득바득 끝이 갈린 소리를 즐기면서 주인은 수의사의 코끝과 뺨에 짧게 입을 맞췄다.

 

 “토비오, 나 아직 할 말이 많아. 이 순간을 오래 기다려왔거든.”

 "..."

 

 커다란 손이 허리를 감싸 자신에게 당겼다. 섬세한 모양새의 손가락이 움푹 패인 허리의 중앙을 누르며 희롱한다. 자극에 다리가 비틀거렸다. 얼굴도 새파랗게 질려 있긴 했지만, 이 정도로 무너뜨릴 수 있는 멘탈이 애초에 아니다. 그래서 좋았다. 아무리 괴롭혀도 고분고분해지지도, 체념하지도 않아서 좋아. 미야는 목덜미 가장 깊숙한 곳에 입술을 대고, 조용히 웃었다.

 

 “나머지는 침대에서 해 줄게.”

 

 어린 날, 그 언젠가의 상상처럼 자신을 잘 받게 된 몸이 팔 안에서 부들부들 분노로 떨었다.

 

-6-

 

 “으음. 꼭 마취를 해야 해?”

 “. 오이카와 요원님.”

 “?”

 “뇌파 검진이 포함되어 있기 때문에 어쩔 수 없답니다.”

 “어라, 간단한 피검사라고 되어 있던데.”

 “글쎄요. 담당하시는 연구원께서 마취되어 있는 동안 모두 끝내둘 생각 아닐까요?”

 

 나는 별로 안 믿어지는데, 라는 눈빛을 고수하며 오이카와는 팔뚝까지 소매를 걷어 올렸다. 그리고 주먹을 쥔 채, 상대에게 건장하고 단단한 팔을 내밀었다.

 

 “그럼 안 아프게 놔줘야 해?”

 

 애교스럽게 휘어지는 눈매는 상대를 무장해제 시키는 효과가 굉장했다. 무심코 웃어준 간호사는 서둘러 입가를 정리하고, 제법 커다란 주사기에 정량을 주입했다. 오이카와는 편안한 자세로 누워 바늘이 살갗을 뚫고 들어오는 것을 지켜보았다. 오래 누워 있으면 등이 배길 것이 분명한 납작하고 멋없는 의료용 침대 위였다. 그래도 베개는 꽤 푹신했고, 소독된 것의 상쾌한 향이 나쁘진 않았다. 그는 주변을 돌아보았다.

 

 “여기 종합병원 같은 걸.

 “종합병원이랑은 비교할 수 없지요. 국내에서 한두 대 있을까 말까한 기계도 다 모여 있는걸요.”

 “흐응.”

 

 그녀가 자랑스럽게 더한 설명처럼, 복잡한 의료기구들이 잔뜩 방을 채우고 있었다. 꽤 넓은 방이었는데도 비었다는 느낌은 전혀 들지 않았다. 오이카와는 방 한구석에 놓여 있는 단조로운 디자인의 책상과 컴퓨터에 한번 시선을 두었다. 그 채로 웅웅. 기계가 돌아가는 소리를 듣고 있자니, 뭔가 핏줄로 흘러들어오던 느낌이 어느 순간 끊겼다.

 

 “이제 셋을 셀게요.”

 

 바늘이 뽑아내진 곳에 알콜 솜을 문지르고, 작은 반창고를 붙이며 간호사가 웃었다. 오이카와는 아무 말 없이 눈으로만 웃어 보였다. 좋을 대로 해. 라는 뜻이었다.

 

 “하나, .”

 

 셋이 채 나오기도 전에, 짙고 무거운 수마가 정신을 덮어 내렸다. 요원은 담담하게 그것을 마주하고 휩쓸려갔다. 사방이 미지의 적이고, 알고 있는 사실은 극도로 희박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그에게는 확신이 있었다. 카게야마 토비오가 여기 올 것이다. 이 지경이 되어서도 하는 말인데.

 당신이 나를 해칠 거 같진 않다.

 

-7-

 

 “.”

 

 카게야마는 두 손에 얼굴을 묻었다. 새하얗게 질려 버린 손가락 사이로 숨소리 하나가 제대로 흘러나오지 못했다. 아무런 장식이 없는 침대는 정면에서, 무수한 의료기구들은 주변을 둘러싼 채로 돌아온 탕아를 굽어보고 있었다. 환대가 아니라 호통을 퍼부으며. 그리고 질책의 정점은 그 애였다.

 

 “.”

 

 주먹이 쥐어져 있는 손과 달리 툭 떨궈져 있는 손목에서 인식표가 매여져 있었다. 길쭉하게 빠진 팔 다리를 부각하는 멋진 옷차림은 어디에 두었는지, 환자복과 다를 바 없는 수수한 옷을 입고 마취되어 있었다. 지극히 편안한 표정이었다. 많은 다짐을 하고 왔으면서도 수의사는 조금도 침대에 다가서지 못하고, 자리에 서서 요원을 바라보았다. 무서운 것을 보는 것 같은 시선이었다.

 

 “토비오.”

 

 귀에 꽂힌 인이어에서 재촉하는 목소리가 들려왔다. 미야였다. 카게야마는 체념이 서린 숨을 깊이 내쉬고 허리를 세웠다.

 

 “설마 다루는 법을 잊어버린 건 아니지?”

 

 끝이 살아있는 말이 발목을 휘감았다. 연구원는 무뚝뚝한 얼굴로 방을 훑었다. 손을 뗀지 오래되어 모르는 기계도 있었지만, 다룰 수 없을 것 같이 생소한 것은 없었다. 없어. 퉁명스럽게 대답한 그는 가운의 소매를 하나하나 접어 올렸다.

 

 “좋아.”

 

 미야는 방 밖에서 감시 카메라를 통해 그 모습을 보고 있었다. 그의 목에는 수석 연구원를 상징하는 아이디카드가 걸려 있었다. 5년전을 그대로 복원하여 신의료기구만 채워놓은 공간이었다. 주인이었던 자까지 돌려 놓으니, 시간조차 그 시절로 회귀한 것 같은 느낌이 들었다. 그는 죽은 듯 고요하게 잠든 오이카와와 막 그에게 손을 대기 시작한 카게야마를 한 눈에 담았다. 만족스러운 광경이었다.

 

-8-

 

 “이상, 졸업생 대표 미야 아츠무였습니다.”

 

 박수갈채가 쏟아졌다. 지천에 만개한 벚꽃처럼 몇몇 여자 아이의 얼굴에도 홍조가 들었다. 세련되게 손질된 헤어스타일과 단정하고 새까만 졸업 복을 입은 대표학생이란 로망일 수밖에 없었다. 두 번째 교복 단추를 달라는 말은 감히 하지도 못하겠지만 혹시나 하는 꿈을 꾸며, 손이 뜨거워지도록 박수를 치는 학생들은 많았다. 그런 선분홍빛 축하, 그리고 경외 속에서 미야는 졸업장을 옆구리에 끼고, 교장에게 한 번, 그리고 학생들에게 한 번 정중한 인사를 했다. 마치 여러 번 이 자리에 서 본 것처럼 여유로운 행동이었다.

 

 “졸업을 축하하네. 미야 학생. 본교에서 보여준 역량과 리더십으로 부친과 조부의 바람대로 큰일을 하는 사람이 되길 바라고 있겠네.”

 “명심하겠습니다.”

 

 교장의 당부에 집중한 듯, 마주보고 있던 그의 눈은, 손을 놓자마자 어깨 너머 다른 곳을 향했다. 서로 인사를 건네는 것이 웅성거림으로 바뀌어 소란스러운 곳이었다. 학생회장이었으며, 걸출한 인재였던 터라 찾는 사람이 많은 미야로서는 한 걸음 걸어가기도 힘든 곳이기도 했다.

 

 “축하하네. 카게야마군.”

 “감사합니다.”

 

 말소리는 들을 수 있었지만, 아버지와 카게야마가 인사를 나누고 있는 곳까지 가는 것은 그렇게 쉽지만은 않은 일이 되어 있었다. 짜증나네. 잠시 속으로 어릴 때 버릇처럼 욕지거리를 내뱉은 그는 곧 차분하게 표정을 가라앉혔다. 어차피 오늘로 끝인 곳이었다. 구태여 쌓아 놓은 탑에 흠을 낼 필요는 없었다.

 

 “뛰어난 졸업 성적이었더구나. 네가 자랑스럽다.”

 “.”

 

 꾸중을 듣기라도 한 것처럼 표정이 굳었지만, 미야는 알고 있었다. 그건 카게야마가 기쁠 때 짓는 표정이었다.

 

 “미야 선배!”

 “선배, 졸업 축하드려요!”

 “고마워.”

 

 상대가 착각할 만치 다정하게 웃어주면서도, 그의 귀는 두 사람의 대화에만 집중되어 있었다. 품에 다 넣을 수가 없을 만큼 안겨지는 꽃다발 속 향기가 역했다. 너무 진해서였다.

 

 “졸업 후에는 어떻게 할 생각이냐? 하고 싶은 일이 있다면 모두 지원해 줄 테니 걱정 말고 말해보거라.”

 “.”

 

 아버지가 준 꽃다발 하나를 품에 두고 만지작거리며 카게야마는 말을 아꼈다. 입가가 어쩐지 우물쭈물거리고 있었다.

 

 "아직은 모르겠습니다. 공부를 더 하고 싶긴 한데."

 “아츠무는 유학을 보낼 생각이다. 국내의 대학교라면 이 학교의 교육과정과 크게 다를 것이 없을 테고. 교육 방식이나 인맥 문제도 있고 말일세.”

 “그렇습니까.”

 

 미야의 눈초리가 서늘해졌다. 유학 자체는 가든지 말든지 상관없었다. 하지만 대화의 형세가 마음에 들지 않았다. 얼른 따라가겠다고 하지 않는 카게야마도, 제안을 꺼내놓지 않는 아버지도.그는 꽃 더미를 한 팔로 옮겨들고 머리에 쓰여 있던 학사모를 벗었다.

 

 “카게야마. 만일 네게 달리 계획이 달리 없다면.”

 

 그는 전혀 두 사람의 대화에 관심이 없는 것처럼 아예 등을 돌렸다. 타인의 관심이 광원이 되어 눈을 밝혔다. 그러나 온 신경은 집중되어 뒤를 향했다.

 

 “내가 너에게 추천이 들어온 대학에 입학할 수 있도록 지원하고자 하는데 괜찮겠니?”

 “? 추천이요?”

 “사실 추천은 여기저기 많이 들어오긴 했지만. 일단 나를 지도했던 교수님이시기도 하고, 국내에서 입지도 단단한 분이시지. 필시 진로에도 도움이 될 거야. 물론 우리 집안에서도 계속 지원을 할 것이고 말이야.”

 “, 일단 저는.”

 “토비오군.”

 

 미야는 타인의 입에서 나오는 그 이름이 그렇게 기분 나쁠 수 있다는 것을 처음 인식했다. 손에 잡힐 듯이 다가왔던 자유와, 그가 생각해왔던 계획, 한 발만 걷는다면 넘을 수 있었던 선 같은 것들이 순식간에 밀려나가고 있었다. 짜증나네. 모든 감정을 그 말 한 마디로 정리하며 미야는 마침 다가온 사용인에게 꽃다발의 일부를 넘겼다.

 

 “이 기회에 아츠무와도 잠시 떨어져 보는 게 어떻겠니.”

 

 마침내, 본심이 입 안에서 나와 바닥에 떨어졌을 때, 미야는 손 안에 있던 학사모를 와그작 구겨 버렸다.

 

 -9-

 

 전통적으로 졸업식 날에는 홀에서 성대한 축하파티가 열렸다. 내키는 대로 놀 수 있도록 모든 비용이 학생회와 학부모로부터 지원되는 행사였다. 그 자리의 주인공인 졸업생들은 파티가 끝나면, 각자의 기숙사 방에서 학교의 마지막 밤을 보내게 되어 있었다. 이제 성년이 될 나이였다. 때에 따라서 이미 성년이 된 아이도 있었다. 내규대로 가벼운 술이 허락되고, 내규에는 없지만. 남녀가 서로의 방을 오고가는 일도 빈번히 일어났다. 실은 조금 더 나아가 은밀한 장소의 문이 열리기도 했다. 그것은 반드시 흠이 없는 사회의 일원이 되어야 하는 상류 아이들이 일탈을 허락받는 유일한 기회이기도 했다. 그렇지만.

 

 “어떻게 하기로 했어?”

 

 수석 졸업생인 카게야마는 예상대로 방에 있었다. 방에 막 들어선 미야의 눈이 입구 쪽, 책상 한 구석에 놓여 진 졸업장과 꽃다발을 향했다. 마침 잘 생각으로 책을 덮던 카게야마는 자신의 방처럼 자연스럽게 들어온 침입자를 바라보았다.

 

 “?”

 “아버지와의 이야기.”

 “? 너 그거 들었어?”

 “어쩌다가.”

 

 말을 건네면서도 그의 손가락 끝은 꽃다발 속 장미를 만지작거리고 있었다. 짓이겨져 붉은 빛 단물이 흘러나오기 시작한 꽃을 보며, 카게야마는 미야가 조금 취했을지도 모른다는 생각을 했다. 17살이었다. 마셔서는 안되지만 누가 막을 수 있을까. 미야家의 차기 후계자를, 학생회장을, 차석 졸업생을. 본인 역시 나무라고 싶은 생각이 없는 일이었다. 카게야마는 느릿하게 고개를 끄덕였다. 

 

 “추천해주신 대학교 가는 것도 괜찮을 거 같은데.”

 “유학 쪽은?”

 “안 가도 상관없어.

 

 팔을 쭉 뻗어 하품을 크게 한 카게야마는 자리에서 일어섰다. 짙푸른 색의 도톰한 이불을 걷고 안으로 들어간 그는 베개의 위치를 편하게 다잡았다. 파티 같은 것에는 관심이 처음부터 없었고, 이제는 졸리던 참이었다.

 

 “토비오.

 

 그런데 침대 한쪽이 움푹 패였다. 기우는 몸대로 시선을 돌리니 미야가 매트리스 귀퉁이에 앉아 있었다. 전등을 모두 가리는 위치라 표정이 보이지 않았다. 그리고.

 

 “미야?”

 

 검은색 일변도의 상대는 점점 더 가까워져 왔다. 불편하여 밀어내려던 손목이 잡혔다. 이제 숨소리가 들렸다. 역시나 약간의 알코올 향이 나고 있었다. 코끝이 간지럽다는 생각이 들 때 즈음.

 

 “내가 같이 가자고 하면?”

 “?”

 

 싱글싱글한 목소리는 평소와 크게 다른 게 없는데, 어조가 미묘하게 달랐다. 내용도 그러했다. 카게야마는 잠시 질문에 대한 답을 생각하다 곧 고개를 저었다. 이런 일로 후원해 주는 집안에 분란을 일으킬 생각은 없었다. 그렇게 할 만큼 끌리는 제안도 아니었다. 그는 딱 잘라 말했다.

 

 “안 갈래.”

 

 어차피 자신이 없어도 잘 지내던 아이였다. 오히려 자신이 없는 편이 낫지 않을까 싶은 때도 많았다. 그래서 부채감 같은 것은 없었다.

 

 “.”

 “내 후원자는 네가 아니잖아.”

 

 손아귀의 힘이 풀린 틈을 타서, 손목을 빼낸 카게야마는 재빨리 이불로 몸을 둘둘 말고는 등을 돌렸다. 등 뒤에서 아무런 소리가 들리지 않았다. 음식에 누가 마법이라도 부렸는지 잠이 쏟아졌다. 하루종일 입고 있어야 했던 치렁치렁하고 불편한 옷 때문이었을 수도 있었다. 어쨌든 쏟아지는 잠을 마다하지 않고, 카게야마는 눈을 감았다.

 

-11-

 

등 뒤의 남자는 새빨간 시선으로 잠든 소년을 바라보았다.

 

-12-

 

 “그 날 새벽, 아츠무에게서 연락이 왔었네.”

 

 아츠무의 아버지는 남은 위스키를 모두 마셨다. 목울대가 격렬하게 오르내렸다. 목구멍이 뜨거워질 정도로 높은 도수의 술에 얼굴에 붉은 기가 서서히 퍼져 나가기 시작했다.

 

 “학교 옥상에서 미래에 대해 이야기를 하고 싶다는 내용이었지.”

 

 그와 함께 소름끼치는 이야기 역시 클라이맥스로 향하고 있었다. 마츠카와는 눈이 뻑뻑함을 느끼고 고개를 가벼이 흔들었다. 눈을 깜박이는 것 마저 잊고 있었다는 것을 그제야 알 수 있었다. 그는 더 이상 참지 못하고 몸을 일으켜 앉았다. 그리고 도전적으로 상대를 바라보았다.

 

 “옥상은 365일 잠겨 있습니다.”

 “졸업식 날이었네. 그 날은 일탈이 허락되는 날이지. 공식적으로는 모든 사실이 부인되고 말이야.”

 

 그러니 반드시 그 날이어야만 했다. 만일 그 날의 일들이 세상에 공개된다면 꽤 많은 셀러브리티들이 명예를 잃게 될 것이 분명했다. 그러니까 두터운 커튼 뒤에 숨기고 있는 것들은 절대로 밝혀져서는 안 되는 일들이었다. 그렇기에 그 안에서 어떤 일이 일어나도, 적당한 변명거리만 더해진다면. 절대로 들어 올려지는 일이 없을 것이라고, 아들은 생각했을 것이다.

 그리고 그것이 맞았다.

 

-13-

 

 “아버지.”

 

 봄바람 치고는 꽤나 강했다. 밤이기에 더욱 그러했을 것이다. 아츠무의 아버지는 옥상 난간 근처에 서 있다가 뒤를 돌았다. 그의 자랑스러운 아들은, 대표 졸업생만이 가질 수 있는 묵직한 트로피를 두 손으로 받쳐 들고 서 있었다. 바로 뒤까지. 기척도 없이 다가와서는 말이다.

 

 “아츠무.”

 

 그는 웃으면서 기꺼이 팔을 벌렸다. 아들은 품 안에 트로피를 넘겼다. 이 뛰어난 아이들 사이에서도 가장 뛰어났음을 증명하는 것이었다. 아버지는 그 상징을 기쁜 손길로 어루만지고 바닥에 조심스럽게 내려놓았다. 트로피보다는 아들을 안고 싶었기 때문이었다. 그러나 아들은 안기지 않았다.

 

 “그러고 보니 졸업을 축하한다는 말도 제대로 못했구나.”

 “괜찮아요. 그런 소리 이미 많이 들었어요.”

 

 아들은 대수롭지 않은 일이라는 듯 가볍게 대답했다. 그러고보니 아직 졸업복장이었다. 나풀거리는 가운 사이로 조금 흐트러진 복장이 눈에 들어왔다. 아버지는 부드럽게 웃었다.

 

 “오늘이 어떤 날인지는 나도 알고 있단다.”

 “.”

 

 아츠무는 멋쩍은 듯 살짝 시선을 돌리며 옷을 여몄다. 생각해보면 그것은 고의적인 행동이었다. 그러나 당시의 아버지에겐 그것이 어떤 로맨스에 대한 힌트라고 생각했다. 어리석게도.

 

 “여자애들이 너를 꽤 좋아하는 것 같더구나.”

 “, 그런가 봐요.”

 

 이렇다 할 부정을 하지 않는 것은 더 확실한 지표로 여겼다. 어리석게도.

 

 “개중 마음에 드는 아이라도 있는 거냐?”

 상황의 흐름에 맞게 던진 가벼운 말이었다. 어떤 확실한 대답을 기대한 것은 아니었다. 그런데.

 

 “.”

 의외의 대답이 돌아왔다. 아버지는 놀라움을 감추지 않고 아들을 바라보았다. 어렸을 때부터 가르친 보람이 있도록 반듯한 어깨에 힘이 잔뜩 들어가 있었다. 눈높이도 자신 보다 높아졌다. 17살. 언제 이렇게 컸지. 성장에 새삼 놀라며 아버지는 제법 남자의 태가 나는 아들을 차근차근 훑어 보았다.

 

 “마음에 든다기 보단. 조금 뭐랄까.”

 

 목덜미를 커다란 손으로 훑으며 아츠무가 웃었다.

 

 “사이를 방해받고 싶지 않달까. 그런 거죠.”

 “그래? 허허. 이거, 내가 외려 방해를 하고 있는 거 같구나. 그 애랑 같이 있지 그랬니.

 

 아버지도 마주 미소를 지어 주었다. 정말로 기분 좋은 날이었다.

 

 “역시 그렇죠?”

 

 짤막한 대답과 함께, 집안 특유의 굵고 짧은 눈썹이 고요하게 멈추었다. 눈동자 속 검게 박힌 심이 똑바로 아버지를 향해 있었다. 검은 졸업복장 안에서 희끄무레한 손이 올라와 자신을 낳고, 키운 자의 몸에 닿았다. 아버지는 무심코 아들을 안으려 품을 열었다. 그리고.

 

 “저도 그럴 생각이에요.”

 “아츠무?”

 “나 말고 다른 사람이 걔 옆에 있는 거 못 참겠거든.”

 

 품 안에서 도사리고 있는 호랑이 새끼를 마주했다. 이미 다 자라서 손바닥만 한 송곳니를 가진 맹호였다. 그런 것이 입을 벌려 왔다. 어느새 컸는지 알 수 없는 커다란 손바닥이 온 힘을 다해 몸을 밀었다.

 

 “그러니 협조 좀 부탁드려요.”

 

 등이 난간에 닿았다. 이곳은 365일 잠겨 있어야 하는 곳이었다. 그래서 사람의 허리 위로 난간을 만들지 않았다. 훌렁 뒤집힌 시야로 하늘이 보였다. 달이 보였다. 아스라이 먼 곳의 풍경이 보였다. 만개한 벚꽃이 보였다.

 다 거꾸로 보였다.

 

-14-

 

 “.”

 

 마츠카와는 침을 꿀꺽 삼켰다. 아들에게 등이 물렸던 아버지는 공허한 표정으로 허공을 잠시 바라보더니 두어 번 느리게 눈을 끔벅거렸다.

 

 “옥상에서 떨어뜨린 게 당신이었습니까.”

 “나였네. 그러니까 17살에 있었던 일, 사건이 있었던 장소, 죽이려고 했던 의도. 그건 모두 사실이지.”

 “하지만 옥상에서 떨어진 것으로 몸이 그렇게.”

 

 이번에도 뒷말을 끝까지 할 수는 없었다. 아츠무의 아버지는 의자에 등을 기대며 웃었다.

 

 “우리 집안의 특성이긴 하지만. 그 중에서도 특히 아츠무는 가차가 없지.”

 

 묵직한 트로피는 정확한 좌표를 가지고 아버지의 오른 편으로 떨어졌다. 운 나쁘게 모서리에 어깨가 절단 나던 순간, 처음에는 이것이 아들을 지나치게 믿었던 것에 대한 철퇴라고 생각했다. 자식의 잘못에 대해 아버지로서 당연히 할 수 있는 생각이었다. 하지만 다시 생각해 보면 그것은. 오래 전. 누군가의 자식을 온통 찢어 놓으며 자신의 자식만을 위했던 것에 대한 비난의 응집체일 수도 있었다. 그랬다. 이것은 나의 죄에 대한 정당한 대가이기도 했다.

 

 “자 어떤가. 지금까지 이야기만으로도 충분했겠지.”

 

 그러니 정당함은 이제 아들을 향할 것이란 것을 아버지는 알았다. 세상의 이치였다. 너무 똑똑한 아들이 간과하고 있는 섭리. 그것을 위해, 그는 눈 앞의 요원을 구했다.

 

 “내 아들을 제정신으로 상대할 생각은 하지 말게.”

 

 아들을 파멸시키는 구원자로 삼기 위해.

 

-15-

 

 “후우.”

 

 한숨을 쉬며, 카게야마는 이마의 땀을 연구복의 소매로 닦아 내었다. 긴 검사가 끝나가고 있었다. 손목에 맞춰놓은 알람도 울리기 직전이었다. 그것은 곧 마취가 깨어난다는 뜻이었다. 수의사는 어떤 흔적도 남지 않도록 정성스럽게 오이카와에게 붙여져 있던 기계들을 떼어냈다.

 

 “결과는?”

 

 카게야마는 집중력을 깨는 목소리에 신경질적인 손놀림으로 인 이어를 눌렀다.

 

 “피검사는 좀 두고 봐야 알겠지만, 뇌에 대해서만 보자면 완벽하게 정상이야.”

 “네 입에서 완벽하다는 말이 나올 정도라니 든든하네. 피검사와 심층 검사 정도만 하고 나면, 바로 기계복원에 들어가도 되겠어.”

 “.”

 “그럼 오늘은 이만 할까? 시간도 된 것 같고.”

 "나 그거 다시 만들고 싶지 않아."

 "그럼 부수지 말지 그랬어. 싫어도, 꼭 필요하니까 해."

 

 미야는 상대의 요구를 수용하기라고 할 것처럼 부드러운 목소리로, 거절의 말을 내뱉었다.

 

 "네가 얼마나 잘 하느냐에 따라 오이카와 토오루의 징계 수위가 결정되는 거 잊지 말고."

 "...너. 도대체 언제까지 이럴거야."

 "평생."

 

 영원히. 네가 살아있을 모든 순간까지. 그는 진심으로 그렇게 생각하며 화면 속 카게야마를 바라보았다. 너는 나의 유일한 인간이었다. 애정을 담아 이름을 부르고, 진심으로 상냥하게 대해 주는 건 너 뿐이었는데, 몰라줘서 안타까울 뿐이었다. 내가 너를 얼마나 아끼는데. 미야는 화면 속 머리 위에 자신의 손을 얹고, 꾸욱 눌렀다.

 

 "토비.."

 

 삑. 귀에서는 인 이어의 통신이 끊기는 소리가 났다. 신경질적인 손길로 귀에 박힌 것을 집어 던지는 모습이 화면에 잡혔다. 미야는 피식 웃었다. 오늘 밤 할 얘기가 아주 많을 것 같은 생각이 들었다.

 

-16-

 

 카게야마는 바닥에 던져진 인이어를 노려보다 힘껏 밟았다. 와그작. 반으로 쪼개진 기계 안에서는 전선이라는 깔끔한 내장이 모습을 드러냈다. 한 때 이것만인 진리라고 생각하던 때가 있었다. 확실하게 o와 x가 갈리는 세계만이 완벽하다고 생각했다. 사람의 감정이나 기억 같은 것도 손 안에 쥐락 펴락할 수 있다고 생각하던 그런 때가 자신에게는 분명히 있었다. 그렇지만.

 

 "..."

 

 그런 것이 아니었다. 수의사는 오이카와의 손목을 가만히 만져보았다. 따뜻하고 단단했다. 당신이 나를 해칠 것 같지 않다고 말하던 입술은 지금 고이 닫혀 있었다. 당장이라도 깨어나 생기와 다정함으로 반짝이는 것을 보고 싶었지만. 불신의 시선이 되어 차가워진 것을 보고 싶진 않았다. 그런 걸 보느니, 차라리 진실에 대해서 영영 몰랐으면 했다. 좁은 세계를 깨어내 주었던 사람에게 밉보이고 싶지 않은 간절한 애원을 전하며. 카게야마는 커다란 손을 한번 꽉 잡았다 놓았다. 너만큼은 삶을 모두 갈아넣어서라도 반드시. 자유롭게 해 줄 생각이었다. 결의를 다지며 수의사는 천천히 손을 놓고 몸을 돌렸다. 그런데.

 

 "...?"  

 

 떠나려던 그 순간. 희미한 것이 손가락 끝을 건드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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안녕하세요! 알리사입니다. ㅠ0ㅠ!! 왜 또다시 블라인드 게임이냐면...ㅠ0ㅠ 사실..!

이런 저런 사정으로 인해, 오이카게 온리전2에 블라인드 게임을 내보려 재결심을 하였기 때문입니다.ㅠㅠㅠㅠㅠㅠ!!

사실 완결까지 아직 갈 길이 먼 상태고, 당장 주말에 몇만자씩 써야 할 것 같지만..! 내지 못하면 너무 아쉬울 것 같아서 무리를 해 보려고 합니다. ㅠ0ㅠ!

 

광휘를 기다려주시는 분들께는 조금 기다려 달라는 말씀을 전하고 싶습니다.ㅠ0ㅠ.. 흑흑 ㅠㅠㅠ 마감 후 열심히 달리겠습니다!!

블겜은 다소 빠른 타이밍으로 업로드 될 예정이고, 만일 정말 옹칵온2에 내게 된다면, 아마도 결말까지 모두 업로드 되진 못할 것 같습니다.ㅠ0ㅠ!!

이 점 유념해주시며 읽어주세요! 감사합니다!

 

좋은 주말 되시길 바랍니다!

 

정발되지 않은 캐릭터가 포함되어 있습니다. 네타에 주의해 주세요.

 Blind Game



비가 내렸다. 소리는 없는데 양은 많은 비였다. 낮게 깔린 구름은 잿빛이었고, 빗방울은 투명했다. 공기는 원래 보이지 않는 것이고, 빗방울 또한 투명한데. 눈앞이 왜 부옇게 되어 있는지에 대해 카게야마는 생각해 보고 있었다. 어려운 문제는 아니었지만, 왠지 풀 수가 없었다. 도돌이표처럼 똑같은 질문을 하며 어린 소년은 무릎을 세우고 팔로 양껏 끌어안았다.
날씨 탓인지, 이곳까지 달려오느라 그랬는지 까만 구두는 흙투성이로 엉망이 되어 있었다. 작은 잎사귀나 부스러진 나뭇가지 끄트머리 같은 것들도 같이 붙어 있어서 반들거리게 닦았던 것이 아무런 소용이 없어져 버렸다. 그렇지만 혼이 날 일은 없을 것이다. 사람들은 오늘 그에게 모두 친절했다. 필요 이상으로 과하게 친절했다. 좋진 않았다. 가장 밑바닥에 깔린 것은 ‘동정’이었기 때문이었다. 그런 건 받고 싶지가 않아서 모조리 바닥에 흘려둔 채, 카게야마는 이곳에 숨어 있었다.

“여기서 뭐해?”
솔직히 성가시다고 생각했다.
“….”

그 때는 5월이었다. 덩굴장미가 어찌나 소담하게 만개했는지 빗속에서도 색감은 조금도 기가 죽지 않아 화려했다. 앞에 서 있는 소년 또한 그러했다. 옅은 회색의 조끼와 흰 와이셔츠, 검은 반바지는 동화 속에 나오는 소공자처럼 완벽해 보였다. 몸집에 맞는 우산은 잡지 모델처럼 어깨에 사뿐하게 얹고. 이런 흙길을 어떻게 걸어온 건지, 구두에서도 광택이 흘렀다. 그는 친절하게 웃으면서 손을 내밀었다.

“어른들이 찾고 있어.”

카게야마는 시선을 내리깔았다. 반갑지 않은 소리였다. 유일하게 마음에 드는 건, 상대의 목소리에는 슬픔이나 동정 같은 것이 눈에 보이게 묻어 있진 않았다는 점이었다. 행동거지와 달리 실제의 나이는 어려서 일지도 몰랐다. 카게야마가 알기에 그 아이는 자신과 동갑이었다.

“이따 갈 거야.”
딱딱한 대답에, 상대는 온유하게 웃었다.
“카게야마 군은 보기보다 어설프네.”
“뭐?”
“싫은 일은 피해 있는 다고 해서 끝나지 않잖아. 네가 와야 부모님 장례식도 끝나지.”

허공에 떠 있던 손이 까만 머리 위에 안착했다. 5월의 비를 잔뜩 맞아 있는 머리카락은 손가락을 거부하듯 착 가라앉아 있었다. 카게야마는 있는 힘껏 상대를 노려보았다. 어린 볼은 단단하게 굳어 있었다. 누가 봐도 공격적인 태도였다. 그러나 상대는 주눅 들지도 겁을 먹고 물러서지도 않았다. 다만. 빙그르르. 어깨 위에서 우산이 한 바퀴 돌았다.

“빨리 끝내달라고 말씀드려 볼게. 내 말은 들어주실 걸.”

소공자는 머리 색깔조차 금색이었다. 아주 옅은 갈색이 도는 금발. 그렇게 온통 반짝반짝 빛이 나는 모습을 하고 그는 또 한 번, 아주 달콤하게 웃었다.

“저기.”
“….”
“토비오라고 불러도 돼?”

어쩐지 기뻐 보이는 얼굴이었다.

-2-

몸이 따끈따끈했다. 머리가 아플 만큼 오랜 목욕 후였다. 노곤하게 풀어진 살에서는 어린아이의 부드러운 향내가 났다. 피부에 닿는 순간 녹아내릴 것 같이 섬세한 올의 희고 커다란 목욕수건이 머리부터 등허리, 허벅지까지를 모두 덮었다. 어른 셋이 뒹굴어도 넉넉할 만한 침대였다. 그러나 10살 박이 소년 둘은 이불을 둥지처럼 만들어 놓고 다닥다닥 몸을 붙이고 누웠다.

“토비오.”

눈매를 가득 채우는 푸른 눈동자가 천천히 움직였다. 두껍고 커다란 책에만 향해 있던 것을 자신에게 돌리는 데에 성공한 상대는 그것에 만족하지 않고, 품 안으로 동그란 머리를 끌어들였다. 답답해서 카게야마는 머리를 뒤흔들었다.

“하지 마.”
“책 재밌어?”
“응.”

불편할 자세일 텐데도 시선은 책에서 떨어지지 않는다. 작은 글씨들이 빽빽하게 들어차 있는 책이었다. 군데군데 복잡한 도식과 그래프도 그려져 있었다. 하지만 일견 차가워 보이기까지 하는 동그란 얼굴에 난해함은 떠올라 있지 않았다. 잠깐씩 눈 사이를 좁히는 경우도 있었지만, 얼마 지나지 않아 곧 풀리기 마련이었다. 그렇게 고른 속도로 책장이 넘어가는 것과 그것을 읽고 있는 카게야마를 지그시 보던 소년은 웃으며 코를 머리카락 안에 박아 넣었다.

“토비오는 시시하지 않아서 좋아.”
“?”
“우리 학교 녀석들은 다 엉터리거든.”

내일은 신학기가 시작되는 날이자, 카게야마의 입학날이었다. 방 한구석에는 두 아이의 짐이 산더미 같이 쌓여 있었다. 아무리 가문의 보증이 있어도 수준 이하의 학생을 받기는 어렵다며 학교는 난색을 표했지만, 무지막지한 입학성적 앞에서는 할 말이 없었다. 멍청이들. 그는 아직 물기를 모두 잃지 않아 더 보드라운 까만 머리카락의 향을 맘껏 들이마시며 중얼거렸다.

-3-


“도대체 뭐였어?”

말 그대로 골이 울렸다. 사고의 후유라는 것은 시간이 지날수록 확실해지는 법이라 근육의 욱신거림 역시 점점 크기를 키워간다. 당장 병원으로 가는 것이 올바른 일이라는 것을 알면서도 오이카와는 본부를 선택했다. 정보가 새어나가 탈취당한 것. 충분히 그럴 수 있는 일이었다. 하지만 새어나간 것이 ‘정보’가 아닌 ‘요원’이라면. 그것은 그냥 넘길 수 없었다.

“나도 몰라.”

의자에 앉아 있던 이와이즈미는 팔짱을 굳건하게 끼고 낮은 목소리로 대답했다. 오이카와는 머리카락을 쓸어 넘겼다. 물러서지 않는 두 시선이 부딪쳐 차가운 광채를 만들어 냈다.

“이와쨩이 모르면 누가 알지?”
“나도 알고 싶어. 빌어먹을.”

팀장은 의자를 박찰 듯이 상체를 앞으로 기울였다. 그는 모든 것이 거짓말이라고 했다. ‘모든 것’의 범위는 어디까지를 뜻하는 거지. 이와이즈미는 미간에 손을 짚으며 고개를 숙였다. 오이카와는 팔짱을 단단히 끼고 선 채, 그의 정수리를 내려 보았다.

“노출된 건 확실하다고 볼 수 있는 거지?”
“아마도.”
“도대체 어디서?”
“되려면 어디서든지 될 수 있지.”
“그건 그러네. …그럼 이대로 끝낼 거야?”
“….”

가뜩이나 어려운 문제를 푸는 중인데, 상대는 난이도 최상급의 질문만 골라서 던져댄다. 입 안이 썼다. 건조한 입술을 사정없이 비벼대고 팀장은 고개를 들었다.

“우리가 ‘Main team’이긴 하지만, 이 프로젝트에 들어 있는 팀의 전부는 아니니까. 아마도 교체되게 되겠지.”
“오이카와씨, 많이 억울한데.”
“죽고 나서는 억울해 할 수도 없어. 그리고 우리 팀은 처음이지만. 대부분은 일 년에 한두 번씩 겪는 일이니까 색다를 것도 없고. 따지자면 특이할 정도로 우리가 잘 한 편이지.”
“그건 그렇지.”
“그것보다. 오이카와, 너.”

이와이즈미는 카게야마에 대해 이야기를 꺼낼 요량으로 고개를 들었다가 그대로 말을 멈췄다. 입이 살짝 벌어져서 굳어졌다. 구겨진 것은 둘째 치고, 와이셔츠 소매와 앞쪽이 피투성이였다. 팀장은 과격하기 그지없었던 운전을 다시 한 번 상기하고는 이마를 쳤다.

“…치료부터 받아.”

양복 안주머니에서 지부에서 제공한 카드를 꺼내 주며, 그는 침착하게 제안했다.

“본부에 보고가 올라가면 결정이 내려올 거야. 어차피 지난 번 카게야마 건도 있고.”
“매번 결정이 늦어.”

카드를 받아들며 오이카와가 중얼거렸다. 끝이 흐린 말인데도 용케 알아듣고 팀장이 피식, 짧은 웃음을 지었다.

“위험하지 않다는 조건하에, 다섯 번째 임무까지 끝낼 수 있도록 말은 해 볼게.”
“으응. 오이카와씨. 실패를 모르는 요원이라는 명성은 꼭 지키고 싶으니까.”
“다른 이유가 있는 건 아니고?”
“그건 또 무슨 소리?”
“임무가 끝나면 여기를 떠나야 하니까 말이야.”

그때까지 하고 있었던 인 이어를 떼어 서랍에 넣으며, 팀장은 뼈를 담아 말을 떠나보냈다. 나가려 몸을 돌리던 것을 멈추고, 오이카와는 그를 다시 한 번 보았다. 아무것도 모르겠다는 천진난만한 표정이었다.

“그게 뭐?”
“수상한 이웃남자와도 끝인 거니까 말이야.”
“….”

아무 말도 하지 않고, 그들은 서로를 바라보았다. 오이카와는 어젯밤, 자신이 누구와 있었는지에 대해 말해야 한다고 생각했다. 이와이즈미는 카게야마 토비오로 추정되는 사람이 던진 메시지에 대해 설명해야 한다고 생각하고 있었다. 그러나 첫 말을 어떻게 꺼내야 할지 알 수가 없어서 둘은 꽤나 오랫동안 침묵에게 그 시간을 맡기고 있었다.

“사실….”

삑삑, 삐삐삑.
마침내 결심한 이와이즈미가 먼저 입을 열려는 순간, 직통 라인에 붉은 빛이 들어왔다. 지부장이었다. 이 통화는 누군가와 함께 있을 때 받을 수 없었다. 그는 한숨을 쉬며 오이카와에게 손짓했다. 나가달라는 제스쳐였다.

“몸 상태가 어떤지 체크하고 보고하는 거 잊지 말고.”
“오늘 일에 대한 브리핑은?”
“내일 오전에 할게. 마츠카와가 돌아오면 그 내용도 합해야 할 것 같고. 어쨌든 말할 게 많으니까 지각하지 마라.”

오이카와는 천천히 고개를 끄덕였다. 팽팽한 긴장이 끊어져서인지 머리가 유달리 아파왔다.

-4-


“늦었습니다.”
“엣?”

설마 아직까지 집에 있을 거라고 생각하지 못했던 요원은 침대 옆 바닥에 주저앉아 있는 카게야마를 멀뚱멀뚱 바라보았다. 초대했을 때는 정작 소파의 끄트머리에 앉아 있더니, 지금은 흡사 집 주인처럼 편안한 자세다. 여지없이 고양이였다. 그런 생각을 하든 말든 수의사는 눈초리가 잠시 가늘어져서는 오이카와의 위 아래를 대놓고 훑어보았다.

“임무였습니까?”
“으응?”

말을 흐리면서. 요원은 내심 귀가하기 전에 옷을 갈아입어 다행이라고 생각했다. 내상에 가까웠던지라 반창고 같은 것도 없었는데, 직업적 특색인지 수의사는 생각보다 빠르게 상대의 상태를 눈치 챘다. 부스스. 머리카락이 잠시 솟는 듯하더니 가라앉았다.

“혹시 다쳤습니까?”

어쩐지 말 속에는 책망과 걱정이 동시에 들어 있어 죄책감이 들었다. 그러나 한편으로는 원-나잇이라고 벽을 칠까봐 내심 걱정하던 요원의 마음을 단박에 풀리게 하는 종류의 것이었다. 후자 쪽에 좀 더 무게를 실으며 오이카와는 싱글싱글 웃어 보였다.

“그렇게 많이는 아니고.”
“제 눈으로 확인해도 됩니까.”
“어쩌지. 오이카와씨, 동물 아닌데요.”
“비슷해요.”
“어디가?!”
“?? 사람도 동물의 한 종류지 않습니까.”
“그거 틀린 말은 아니지만.”

그런 공통점이라면 세상 생물체의 1/3 정도는 공유하고 있지 않을까. 요원은 약봉지를 신발장 위에 놓아두고 신발을 벗었다. 고개까지 기울여가며 일거수일투족을 쫓는 시선을 뒤에 달고 그는 구급약품 통과 함께 고분고분히 카게야마의 앞에 앉았다. 오이카와보다는 작지만 평균적으로는 큰 편에 속하는 손이 이마와 목 뒤를 차근차근 짚었다. 살짝 찡그린 채, 진지한 표정으로 수의사는 열을 체크했다.

“체온… 조금 높습니다.”
오이카와는 대답하지 않았다. 다만 즐거워 보이는 눈으로 지척에 앉은 남자를 물끄러미 보았다.
“으응. 이제 더 높아질 거 같은데.”
“?”

정말 그러했다. 손이 닿은 부분에서부터 기분 좋은 열기가 흩어지고 있었다. 자각하는 거 같지는 않았지만, 어디선가 찾아 주워 입은 오이카와의 티셔츠는 조금 커서 보는 눈이 즐거웠다. 보란 듯이 약봉지를 올려두며 병원을 다녀온 티를 냈는데도 샅샅이 살펴보는 게 얼토당토않기도 했다. 오이카와는 그가 자신을 보는 만큼, 고스란히 상대에게 돌려주었다. 놀이 같은 진료에 열중할 때는 별 변화가 없던 표정은 시선을 알아채자마자. 퍼엉. 하며 꼬리를 폭발시켰다. 놀리고 싶어 죽을 것 같아.

“근데 왜 말이 다시 올라갔어요?”
“…. 어. 그게.”
“어색해서 그래요?”
“….”

대답은 없었지만, 정답인 것 같았다. 요원은 그에게 몸을 기울였다. 그리고 눈동자가 채 모두 커지기도 전에, 날렵하게 힘을 써서 카게야마를 바닥에 눕혔다.

“응?”
“어쩔 수 없네. 오이카와 씨가 더 노력해야지.”
“오, 오이카와?”
“반복하면 익숙해지기 마련이라니까.”
“지금 너, 다쳤, 는데.”
“응응. 잘하네. 토비오쨩.”
“그렇게 부르. 으….”

병원에서 준 안정제 때문인지 정신이 조금 나른했다. 걱정거리와 고민거리는 저 멀리 흩어지고, 눈앞의 사람만이 선명하다. 나 분명히 물어 볼 게 많았는데. 라고 생각했지만. 그것보다 빠르게 손이 먼저 움직였다. 오이카와는 평소보다 훨씬 더 급하게 움직였다. 인정하고 싶지 않지만.

‘임무가 끝나면 여기를 떠나야 하니까 말이야.’
그 말이 마음 깊은 곳에 똬리를 틀고 있었다.

-5-


나는 오이카와를 적극적으로 끌어안았다. 허벅지에 닿은 옆구리를 힘주어 조였다. 몸 안의 수분을 모두 날려버릴 만큼 뜨거웠다. 좋아. 너무 좋아서 견디기가 힘들어.

“하.”
짧게 끊어지는 숨을 다른 것으로 판단했는지, 움직임이 멈췄다. 얼굴이, 이미 가까웠던 얼굴이 더 가까이 다가와 눈을 마주친다.
“혹시 지금 아팠어?”

명랑하고 촉촉하던 목소리는 어느덧 허스키해져 있었다. 눈동자 속에는 불씨가 들어 있어 평소보다 더 붉게 빛났다. 속눈썹을 떨고 있었다. 허리가 간헐적으로 움칠거린다. 몰아붙이고 싶어 하는 남자의 본능은 그런 것들을 통해 생생하게 전달되고 있었다. 그렇지만. 몸을 버티는 팔뚝에 온통 핏줄을 세우면서도 오이카와는. 토오루는.

“조금 더 천천…히 할까?”

나를 보고 있었다. 다친 곳은 괜찮을까. 생각하면서도 스스로의 마음에 져버려 몸을 맡겨버린 나와 너는 이토록 다르다. 가끔 타인의 상냥함은 스스로에 대한 질책이 되기도 하고, 죄책이 되기도 했다. 지금이 그러했다. 그렇지만 좋아. 좋아. 카게야마는 고개를 저었다.

“나.”
그리고 팔을 뻗어 목을 감쌌다. 마음은 풍선과 비슷해서 가득 차면 터질 수밖에 없는 것이다. 변명하자면. 이래서는 안 된다고 나는 계속 생각했었다. 그럴 자격이 없다고 생각했다. 넘어가면 안 되는데. 도망가 버려야 하는데. 그러기 위해 최선을 다했다는 비겁한 변명을 반복하면서 나는 너를 더 강하게 안았다.

“응?”
정말 안 되는데.
“…네가 좋아.”
미처 끝까지 표현하지도 못한 말이었다. 마음이 견디지 못해 조금 흘러나온 끝만 보고도, 토오루는 기쁘게 웃었다.

“아직도 사랑한다던 그 사람보다 더?”
그것이 얼마나 허망한 질문이지를 안 다면.
“아. 이건 너무 매너 없는 질문이었나.”
서둘러 끝을 감추는 네게 말해 줄 수 있다면.

“토비오쨩.”
말하자면 이건 장미를 씹는 것과 같았다. 더할 나위 없이 향긋한 비밀이 입 속에서 박살이 났다. 현기증 나는 단 향과 날카로운 비밀의 가시가 입 안을 부수어 냈다. 그것이 꽃을 더 빨갛게 피워 냈다. 원래 그런 것이다.
말하지 못한 사랑이란 원래 그런 것이다.

-6-


“징계 위원회?”

이와이즈미의 목에 핏대가 불거졌다. 시퍼렇게 보이는 핏줄들이 울룩불룩 솟아나 있었다. 그는 주먹 안의 볼펜을 으스러뜨릴 것처럼 쥐고 침착하게 다시 자리에 앉았다.

“이유가 뭡니까. 지부장님.”

임무의 실패, 정보의 유출, 민간의 피해. 굉장히 사업적이고 객관적인 이야기들이 흘러갔다. 팀장은 그 말을 하나하나 귀담아 들으며 숨을 들이켰다. 폐가 곧 터질 것처럼 부풀어 올랐다.

“말씀이 뭔지는 알겠습니다. 부족했다는 것에 대해서는 승복합니다.”
그는 한 번도 쉬지 않고 그렇게 말했다. 그리고 모아두었던 숨을 모조리 내뱉었다.
“하지만 같은 상황에서 지부장님은 어떻게 하셨을 것 같습니까.”
상대는 말이 없었다.
“우리 팀보다 잘 할 수 있을 거라고 생각하십니까? 제기랄. 아니, 어떤 팀을 데려다 놓아도 이렇게는 못할걸.”
흥분을 가라앉히라는 말은 귓바퀴에 닿지도 못하고 분노에 태워졌다. 이와이즈미는 수화기를 우그러뜨릴 기세로 잡았다.
“이의제기를 할 겁니다.”
[소용없을 걸세. 이건 중앙지부의….]
“그게 중앙지부의 말이라고 한다 해도 말입니다. 현장에서 일어나는 모든 일에 대한 1차 책임은 어차피 팀장인 제게 있으니까요.”

그는 화이트보드에 띄워져 있는 팀원들의 사진을 보며 못을 박았다.

“그러니 ‘오이카와 토오루’ 요원에 대한 중앙지부 소환 명령은 불응합니다. 중앙지부가 이해 못한다면.”
숨이 한번 끊어졌다 다시 이어졌다.

“그쪽에서 나한테 연락하라고 해!!!!”

상대의 대답을 들을 것도 없이 그는 전화기를 거칠게 내려놓았다. 뚜뚜뚜. 잘못 내려진 수화기에서는 그런 소리가 났다.

-7-


“팀장이 소리 지르는 거 오랜만에 보네.”
“하나마키였냐. 미안. 못 볼꼴을 보였다.”
“그런 건 어차피 많이 봤어. 이거나 먹어.”

어느새 방에 들어와 있던 하나마키는 느물느물 웃으면서 도시락을 내밀었다. 맛이 좋기로 소문난 근처 가게의 것이었다. 입맛은 없었지만, 거절하는 것도 내키지가 않아서 이와이즈미는 도시락을 받아 열었다. ‘이거나 먹어.’라는 싱거운 말과 달리 팀장이 가장 좋아하는 메뉴인 아게다시도후까지 알뜰하게 챙겨져 있었다.

“퇴근은?”
“마츠카와 보고 들어가려고 했지. 나야 오이카와처럼 다친 게 아니니까.”
“아. 그러고 보니 돌아올 때가 됐나?”
“연락이 없긴 한데, 비행기를 잘 탔으면 그렇겠지.”
“….”
“지금 팀장 눈빛이 어딘가 이상한데.”
“뭔가. 둘이 같이만 있지 않으면 대화가 상당히 정상적이구나 하는 생각이 들어서.”
“뭐야. 세트 취급 그만 두라고.”
“미안하다.”

웃음기가 살짝 마른 대화를 끝으로 둘은 말없이 식사를 계속했다. 하나마키는 통화의 내용을 묻지 않았다. 엄격히 지켜져야 하는 규칙이었기 때문이었다. 궁금하다고 해서 묻는 것은 오이카와 정도일까. 물론 생각이 없다 기보단 공동의 규칙 위에 자신의 룰이 있기 때문일 것이다. 이런 방면에서 고지식한 면이 있는 이와이즈미와 놓고 본다면, 결국 둘은 전혀 다른 성격인데 상성이 훌륭했다. 좋은 팀이지. 우수하고. 이런 상황 속에도 안정감을 주는 구성원에 말없는 찬사를 보내며 하나마키는 새우튀김을 베어 물었다.

“본부에서.”
그런데 의외로 이야기는 팀장에게서 먼저 꺼내졌다. 하나마키는 말없이 물을 들이켰다.
“오이카와를 징계 위원회에 보내겠다고 했어.”
“화 낼만 했네.”
“‘카게야마 토비오’에 대해서는 별다른 혐의를 찾을 수가 없다고 했고.”
“….”
“정보의 유출은 파악해 보겠지만, 내부자의 소행이라기 보단 우리 팀의 실수 쪽에 무게를 두고 있는 것 같아.”
“미치겠군.”

하나마키는 밥을 뒤적거리며 가볍게 말을 던졌다.

“임무는?”
“새로운 팀이 와서 마무리 지을 계획.”
“뭐가 그렇게 다 쉽대. 그 사람들은.”

여기서는 하나하나가 어려운 것들뿐이었다. 이래서 입으로 일하는 사람과는 상종을 말아야 하는 것이다. 코웃음을 칠 말이 너무 많아서 아플 지경이었다. 코끝을 훌쩍거리며 하나마키는 시계를 한 번 살폈다.

“그래서 내가 생각을 해 봤는데 말이야.”

이와이즈미는 젓가락을 가지런히 모아 내려놓으며 말했다. 음식은 아직 많이 남아 있었다. 그저 기계적으로 넘긴 것에 불과한 모양이었다. 하나마키 쪽도 식욕이 뚝 떨어져 먹던 것을 멈추고 팀장을 보았다. 착 가라앉아 있는 평온한 표정이었다.

“해킹 좀 해 보자.”
그런 얼굴로 정면에 폭탄을 던졌다. 서포터는 마음의 준비를 하며 반찬을 뒤적였다.
“어딜?”
“중앙 지부.”

손에서 젓가락이 툭 떨어졌다. 하나마키는 천정을 보고 하- 길게 한숨을 쉬었다. 사실 오이카와와 이와이즈미의 가장 큰 차이점은 이런 것이었다. 오이카와는 숨 쉬듯 돌발적인 사고를 치는 편이지만 큰 문제가 되는 법이 없는 반면. 이와이즈미 같은 경우에 사고는 별로 안쳐도.

“보안 최고등급 메인 서버로.”
한 번 치면 제대로 치곤했다.

-8-


“책임은 내가 질 거야. 여차하면 나한테 협박당했다고 해.”
“팀장. 오이카와랑 사이좋게 징계위원회에 가고 싶어?”
“필요하다면.”

하나마키는 입 꼬리를 쭈욱 끌어올렸다.

“아이고. 중앙은 왜 위험한 사람을 건드리고 그래.”

그는 식사를 걷어치우고 바퀴 달린 의자를 밀어 컴퓨터 앞으로 이동했다. 항상 본체 옆에 걸려 있는 헤드셋을 끼고 전원을 켠 하나마키는 자신의 옆으로 의자를 끌고 온 이와이즈미에게 씨익 웃어보였다.

“원하는 대로 해드릴 테니까, 한 가지만 약속해. 팀장.”
“뭐든지.”
“혹시라도 네가 나를 협박했다고 하면 가만 안 둔다.”

스크린의 빛이 시시각각 바뀌고 있었다. 개성적인 분홍머리카락에 그 다채로움이 아롱졌다. 그는 손가락을 좌우로 흔들고 의기양양한 표정을 지어 보였다.

“나도 건드리면 위험한 사람 역할이 좋으니까.”
“그건…. 나중에 생각해. 일단 뚫을 수 있는지가 관건이니까.”
“아, 사실은.”

하나마키는 세 개의 모니터에 각각 다른 화면을 띄워 놓고 가볍게 말을 받았다. 현란하게 손가락이 움직였다.

“백화점 씨가 선물을 주고 갔거든.”
“선물?”
“이미 뚫어놓은 길을 삭제하지 않았어. 말하자면 메인서버를 향하는 뒷길을 만들어 놓은 거지. 그리고 그 뒷길에 대한 경로지도도 같이 주었고.”
“도대체 왜?”
“나야 모르지.”

팀장은 잠시 카게야마 토비오의 얼굴을 떠올려 보았다. 이럴 줄 알았으면 육감이고 자시고, 그냥 무시했어야 했을까. 하는 생각도 들었다. 그러나 그렇지 않았다고 해도 이런 일이 안 일어났을 거라는 보장은 어디에도 없었다. 왠지 그런.
예감이었다. 그는 하나마키의 의자를 꾹 더 세게 쥐었다. 서포터는 이미 완전히 몰두해 있었다. ‘해킹’이란 것은 흔적을 지우는 일이 중요한 법이라 누군가 길을 뚫어 놓았다고 해서 주의할 일이 없는 것은 아니었다. 신중하고 빠르게 경로를 따라가며, 하나마키는 입을 열었다.

“나는 백화점 씨가 의심스럽다는 팀장의 의견에도 동의하지만.”
“….”
“우리에게 해를 끼치지 않을 것이라는 오이카와의 의견에도 동의하는 바야.”
“그건 두고 봐야지.”
“어련하시겠어. 쨘, 들어갑니다. 이제 돌이킬 수 없어요.”

화면에는 도트로 표시된 하나마키가 열쇠를 번쩍번쩍 들어 올리고 있었다. 마지막으로 의견을 묻는 하나마키에게 이와이즈미는 망설이지 않고 고개를 끄덕였다. 철컥. 열쇠가 자물쇠에 끼워지고. 비밀의 문이 열렸다.

-9-


아, 솔직히 너무 아프다.

오이카와는 침대에 누운 채로 그런 생각을 했다. 어제는 진통제로 버텼던 것일 뿐인지 몸 상태는 엉망이었다. 반쯤 감긴 눈으로 바라본 천정은 평소보다 높았다가 낮았다가를 반복한다. 그대로 계속 보다가는 어지럼증이 날 것 같아서 돌아눕자. 정면에 곤히 잠든 카게야마의 얼굴이 보였다.

“….”
결국 궁금했던 것은 하나도 묻지 못했다. 이쪽은 그렇게 만들어놓고 잘도 자는 얼굴에 심술을 부려볼까 싶었지만. 그는 곧 그런 생각을 그만 두었다.

“네가 좋아.”
라니. ‘네가 좋아.’라니. 예의 ‘사랑하고 있어.’보다 한 끗발 떨어지는 게 좀 아쉽긴 하지만, 이 남자에게서 그 정도의 애정표현이 나왔다는 것은 괄목할 만한 성과였다. 히죽거려지려는 입술을 근엄하게 내리 누르며 그는 마음껏 카게야마의 얼굴을 바라보았다. 모래시계는 생각보다 조그만 것이었고, 그래서 흘러가는 시간이 좀 아까웠다.

“토비오쨩.”
“….”

제 딴에는 조용한 목소리였는데 남자가 눈을 떴다. 거기에 그치지 않고 푸른 눈은 금세 잠을 털어내고 선명해 졌다. 오이카와와는 달리 날카로운 눈매가 왠지 한풀 꺾여 있었다.

“내가 깨웠어?”
“…아니.”

완전히 놓아 버린 말에도 짧은 대답 외에는 다른 반응이 없었다. 카게야마는 그저 빤히 요원을 보고 있었다. 그러다가 별안간.

“오이카와.” 성을 부르고,
“네, 네.”
“토오루.” 이름을 불렀다.
“응, 응.”
“임무가 끝나면 떠날 거지?”
“….”

이불 밑으로 손이 손을 찾아 들었다. 누구도 듣고 있지 않는데도 작고 낮은 목소리는 왠지 비밀스럽고, 좀 더 깊은 이야기를 나누는 것처럼 느껴졌다. 그야말로 손끝에 걸려 있는, 상대의 손을 놓지 않고 오이카와는 고개를 저었다.

“찾아올 수 있는 걸.”
“아냐. 오지 않아도 괜찮아.”

진심으로? 지금 이 순간에? 요원은 그 날. 약에 취해 과거의 사랑을 고백했던 눈동자를 직시하며 속으로 물었다.

“설마 오이카와씨와 인조이 였을 뿐이에요?”

그리고 밖으로는 한없이 가벼운 질문을 던지며. 얼굴이 웃고 있길 바랐다. 성공했는지 실패했는지 알 수 없게끔, 상대는 표정의 변화가 없었다. 다만 이불 속의 손이 조금 더 가깝게 닿고.

“네가 다치지 않으면 좋겠어.”
“….”
“마음이든, 몸이든.”

푸른 눈이 깊은 곳을 꿰뚫었다. 쿵쾅쿵쾅. 엉망으로 심장이 뛰었다. 정말 그거면 되냐고 들쑤시고 싶었는데, 그래서는 안 될 것 같다는 생각도 들었다. 이것은 나에게 하는 이야기가 아니라 카게야마, 스스로에 대한 이야기인지도 몰랐다. 다리도 마음도 그 때 다쳐버린 걸까. 그 사람과의 일에서.
오이카와는 자신의 이마부터 시작해서 어깨와 팔뚝, 팔꿈치를 천천히 만져보는 손길에 몸을 맡겼다. 다시 약을 먹은 것처럼 나른해지는 기분이었다. 다치지 않겠다고 자신 있게 말해주고 싶었으나, 그럴 수는 없었다. 사실은 머지않은 언젠가 오늘처럼 눈을 떴을 때, 옆에 없을 수도 있는 직업이었다.
그 마음에 밀려. 끝끝내 오이카와는 카게야마에게 아무것도 묻지 못했다.

-10-


“이와쨩! 중요한 브리핑이라 늦지 말라고 했으면서! 으응?”

오이카와는 아직 따끈한 우유빵을 우물거리며 항의의 말을 던지다 멈췄다. 여전히 형광등이 켜 있는 사무실의 안은 열기로 가득했다. 브리핑 룸에서 한참을 기다려도 아무도 없어 들어와 본 건데, 찾던 두 사람은 상기된 얼굴로 이곳에 앉아 있었다. 심지어 일어날 생각도 없어 보였다.

“뭐에요? 무슨 일이 또 생겼어?”
“많지.”

이와이즈미는 깊게 끼고 있던 팔짱을 풀어내며 나지막이 대답했다. 오이카와는 주변을 버릇대로 훑어보았다. 어제 저녁이었을 것이 분명한 도시락은 그대로 열려 있었고, 두 사람은 전혀 잠이 들었던 기색이 없었다. 그리고 있어야 하는데도 이 자리에 없는 사람 또한 찾아냈다.

“마츠카와는?”
“돌아오지 않았어.”
“왜?”
“…짐작은 되지만 말로 하고 싶지 않아.”
“도대체 무슨 일인데 오이카와 씨만 쏙 빼놓는 거야.”
“이제부터 말할 거니까 잘 들어.”

팀장은 굳은 얼굴을 한 채 일어서며 말했다. 그리고 손에 들고 있던 문서를 내밀었다.

“이건 뭐에요?”
“이번 임무에서 회수해야 하는 자료가 총 5개라고 했었던 거 기억하냐.”
“알아. 두 개는 회수했고, 하나는 빼앗겼고, 하나는 망가졌지.”
“응. 그런데 아니었어.”
“무슨 소리야.”

의미를 알 수 없는 대답에 반문하여 오이카와는 그것을 받아 들였다. 그렇게 두껍지 않은 문서철이었다. 요원은 천천히 첫 장을 넘겨보았다.

“….”
집중할 때, 유독 붉어지곤 하는 눈동자였다. 이와이즈미는 차분하게 그 모습을 보고 있었다.
“이거.”
“처음부터 그딴 파일 같은 건 없었어. 다섯 번째를 숨기기 위해 그럴듯하게 만들어 낸 것에 불과해.”

하나마키는 밍밍해진 스포츠 음료를 쭉 빨며 의자에 몸을 기댔다. 오이카와는 머리카락을 한 번 쓸어 넘기고 다시 파일을 읽어 내렸다.

“그 기억조작기계에 대한 자료는 실제를 비롯해서 어떤 것도 남아있지 않아. 유일한 성공 사례를 끝으로 개발자가 전부 파괴시키고 사라졌거든.”

서포터는 벽의 어느 한 점을 뚫어지게 바라보며 조금 빠르고 격양된 어조로 말을 이었다.

“몇년 간 복구를 위해 지지고 볶았던 것은 사실이지만 결국 실패했어. 만든 사람이 단독으로 하던 연구였고, 원래도 기록을 하지 않는 성격이었다고 해. 결국 뭔가 있는 것 마냥 다른 국가의 시선을 돌리려는 것뿐이었지. 빌어먹을. 작전마다 정보가 유출될 때부터 알아봤어야 하는데.”

그랬다. 첫 번째 작전부터 시작해서 모든 작전은 어느 정도의 정보 유출이 있는 상태에서 시작되었다. 그리고 그에 대한 중앙 지부는 무딘 반응을 보이곤 했다. 생각해 보면 그랬다. 그들은 굉장히 중요한 자료라고 이야기하면서도 한편으로는 자료가 노출되는 것에 대해 관대하게 굴었다. 그 과정에서 많은 소비재와 요원이 죽었으리라. 하나마키는 나직하게 욕설을 내뱉었다.

“다른 쪽에서도 정보가 거짓이었음을 이제는 눈치 챘을 거야. 하지만 진짜 목적까지는 찾지 못했겠지. 찾았을 때는 이미 늦었을 거고.”

오이카와는 귀로는 설명을 듣고, 눈으로는 정신없이 파일을 읽어 내렸다. 자신이 이야기를 덧붙이는 것이 방해가 된다고 생각했는지 이와이즈미는 말이 없었다. 얼마 지나지 않아 붉은 핏줄이 돋은 눈동자가 문서의 마지막에 다 달았다. 그대로 굳어진 것이 종이 위로 천천히 들어 올려져 하나마키의 옆얼굴에 닿았다.

“사실이야?”
“응.”

하나마키는 침착하게 대답했다. 여전히 시선을 벽에 둔 채로. 그는 손 안의 음료수를 구겼다.

“그토록 많은 인재를 쏟아 부어서라도 손에 넣고 싶었던 존재.”
“….”
“자료가 사라진 지금 유일하게 그 기계를 재현할 수 있는 사람.”

빈 캔이 속절없이 어그러뜨려졌다. 서포서는 고개를 돌려 오이카와를 마주했다.

“그러니까 이번 임무의 진정한 목표는.”
그리고 힐끗 입 꼬리 한쪽을 불편하게 들어올렸다.

“‘카게야마 토비오’였어.”

손에서 떨어진 종이가 제멋대로 흩어져 낙하했다. 오이카와는 다시 주워 들기 위해 허리를 숙였다. 가장 먼저 집어든 종이 위에는 새벽까지 같이 있었던 옆집 남자, 그 30세의 평범한 수의사라고 소개하던 카게야마 토비오의 사진이 있었다.
그는 그것을 주워들었다. 서류 속 ‘카게야마 토비오’는 타인처럼 낯선, 차가운 표정으로 오이카와를 바라보았다.

-11-


카게야마는 벨소리를 시끄럽게 울려대는 핸드폰을 바라보았다. 모르는 번호였다. 그러나 누구일거라는 예감은 있었다. 아니길 바라면서 그는 천천히 통화 버튼을 눌렀다.

[오랜만이야.]

그러나 본디 예감은 좋지 않은 것일수록 잘 맞는 법이었다. 그토록 오랜 시간이 지났음에도 전혀 낯설어지지 않은 남자의 목소리가, 독특한 억양이 귀에 꽂혔다. 카게야마는 가방을 쥔 손에 힘을 주었다. 어쨌든 지금은 한 낮의 거리였다.

“….”
[어땠어? ‘오이카와 토오루’를 다시 보게 된 건.]
“….”
[네 유일한 성공작이잖아.]

좋았어? 슬펐어? 절망했나. 희열을 느꼈나. 자극을 받았나, 혹은 주었나. 그 어느 쪽이라도 즐거울 것 같았다. 남자는 탁상을 반복적으로 두들기며 대답을 기다렸다.

“너.”
그리고 마침내 오랜만에 듣게 된 목소리에 입가가 참을 수 없이 치솟았다.
“나한테 어떻게 그를. 다른 사람도 아닌 그를. 그리고 그 때, 그런 거짓말을.”
[모두를 재능으로 찍어 누르는 오만한 말투. 정말 그리웠어.]

숨을 죽인 웃음소리가 핸드폰을 타고 넘었다. 카게야마는 온 몸을 부르르 떨었다. 공포이기도 했고, 분노이기도 했다.

[그 날. 더없이 ‘착한 아이’같았던 모습도 다시 보고 싶고.]
“….”
[그러니 이제 돌아 와 줄래?]

푸른 눈이 가늘게 일그러졌다. 그대로 핸드폰을 던져 버리고 싶은 마음을 누르며 카게야마는 천천히 고개를 저었다. 발치에 져 있는 그림자가 보였다. 새까맸다. 의아하여 시선을 올려보자.

[아. ‘돌아 와 줄래’는 적절한 표현이 아니겠네.]

두 남자가 자신의 앞에 서 있었다. 선글라스를 쓰고 있는 검은 양복 차림의 남자였다. 반사적으로 수의사는 뒤를 돌아보았다. 어느새 거리는 한산해져 있었고, 뒤는 인적이 드문 골목길이었다. 여기는 분명 한낮의 길거리였는데, 전화가 온 타이밍은 너무 절묘해서 사각지대에 도달해 있었다. 그것을 모두 아는 남자가 또 다시 낮고 얕게 웃었다.
토비오.

[돌아 와.]
“가지 않을 거야.”
[돌아오게 될 거야.]
“돌아갈 거면 나오지도 않았어.”
[그런 말을 할 거면 진작 도망쳤어야지. ‘오이카와 토오루’와 연애를 하는 게 아니라.]
“….”
[5년이 지났어. 네 연구에 따르면 뇌세포가 재생되고 안정되는 기간이지. 실험이 정말로 완벽하게 성공을 했는지가 판가름되는 순간에 도달했다는 뜻이잖아.]
“…넌 분명히 그가 죽었다고 말했어.”
[내가? 그랬었나.]
“그 것 때문에 나는. 지금까지 계속.”
[토비오.]

목소리가 한결 짙어졌다. 아마도 통화는 공유되는지 남자 중 좀 더 키가 큰 쪽이 다가와 손을 내밀었다. 손수건이 놓여 있었다. 그러나 그 이상의 행동은 없었다. 핸드폰을 더 힘주어 잡으며 카게야마는 그것과 남자를 번갈아 노려보았다.

[어쨌든 살아있잖아. 그럼 앞으로도 그가 정말 살아있을 수 있는지 판단해줘야지.]
“오이카와는 누가 봐도 정상이야.”
[100% 확신할 수 있어? 사전 실험에서 얼마나 죽었지. 얼마나 많은 사람이 제정신을 놓아 버렸더라. 네가 제일 잘 알잖아. 그런데도 정말 상관없어?]

수화기 너머 마른 침이 꿀꺽 넘어가는 소리가 들렸다. 남자는 승리를 확신하며 웃었다.

[정말 상관없다면 무시하고 가도 좋아. 하지만 그럴 수 있을까.]
“개자식.”
[멍청이 소리 밖에 모르더니 많이 늘었네. 또 어디가 얼마나 바뀌었는지 궁금해. 빨리 와. 토비오.]

시종일관 상대는 여유로웠다. 빠드득 소리가 나도록 이를 갈며, 카게야마는 상대의 손에 있는 손수건을 낚아챘다. 잘 훈련된 두 명의 남자는 묵묵히 곁을 지키며 다만 기다리고 있었다. 눈을 한번 감았다 뜨고, 그는 손수건에 코를 박아 넣고 숨을 들이켰다.
비강 안쪽을 찔러오는 강렬한 향이 느껴졌다. 3초도 필요하지 않았다. 온 몸의 힘을 놓치며 정신을 잃은 카게야마를 남자들은 익숙하게 안아 들었다.

-14-


“중앙 지부에서는 이미 카게야마 토비오의 소재를 파악하고 있었어. 하지만, 다시 도망쳐 버릴까봐 선뜻 나서질 못했던 것 같아. 그가 지부를 떠나면서 자료 뿐 아니라 서버를 모조리 파괴시켰던 것에 대한 대비도 필요했고.”
“말하자면 이쪽에도 미끼나 방패 같은 게 필요했던 거지. 내세울 만한 걸로-.”
“그게 나였단 말이지.”

오이카와는 달달 떨리는 입술로 웃었다. 두 사람은 즉시 입을 다물었다. 그런 침묵 속에서 그는 다시 손에 든 문서를 뚫어져라 바라보았다. 카게야마 토비오와 연관된 제 1의 인물로 자신이 지정되어 있었다. 유일한 실험 생존자. 설명은 간단하고 명료했다. 그러나 아무런 기억도 나지 않았다. 나는 분명히 그를 여기서 처음 보았다. 확신 속에서 오이카와는 천천히 고개를 들어서 팀원들을 바라보았다.

“내가 그 실험의 유일한 성공체라 이거야?”

개발자가 흥미를 둘 만한 존재. 선뜻 떠나지 못하고 주변을 맴돌만한 미끼. 눈 속에서 불이 번뜩였다. 누구를 향한 분노인지, 혹은 몰이해에서 오는 충격 때문인지 알 수 없었다.

“한 가지만 묻자.”
혼란스러운 와중에 이와이즈미는 오이카와의 양 팔을 잡고 눈을 똑바로 응시했다.
“너. 정말로 기억이 없는 거냐.”
“장난해? 그럴 리 없잖아. 나는 내가 어디서 태어났고, 어떻게 자랐는지 모조리 기억하고 있어. 그렇지만.”

자신 있게 외치던 눈이 한풀 수그러들었다. 이마를 손으로 누른 채, 오이카와는 고개를 좌우로 저었다.

“토비오쨩이나 그 실험은 기억에 없어. 그래. 그런 실험이라면 정말 성공적이었네. 빌어먹을.”
“하나도?”
“이와쨩. 내가 거짓말을 하는 것 같아? 이렇게 오랜 기간 동안에?”
“….”

두 눈동자는 살벌하리만치 강한 강도로 부딪쳤다. 어깨를 잡은 팀장의 손등에 드드득 푸른 핏줄이 돋았다. 오이카와는 아픈 내색도, 시선을 흐트러뜨리지도 않고 그를 마주했다. 하나마키는 입을 굳게 다물고 둘을 보고 있었다. 마침내 천천히 손아귀의 힘이 풀렸다. 팀장은 자신의 자리를 찾아 앉았다. 둘의 시선이 그를 따라갔다. 단단한 어깨가 한껏 솟았다가 제자리를 찾았다.

"좋아."
그는 두 손을 마주 잡았다. 표정은 편안했고, 눈동자는 고요했다.

“그럼 이제. 어떻게 할 지 생각하자.”
  

-16-

“와.”

남자는 탄성에 가까운 느낌으로 웃었다. 기억보다는 어쩐지 침대가 작았다. 하지만 시간에 따라 사물은 낡아갈 뿐이고, 어린 아이는 자라나기 마련이었다. 결국 좁아짐에 대한 이유는 침대가 아니라 그곳에 눕혀진 사람에서 기인된 것이다.

“토비오.”
그는 손을 뻗어 힘없이 꺾여 있던 고개를 들어올렸다. 그리고 자신의 무릎에 정성스레 받히고 천천히 허리를 숙였다.
“….”

입술이 맞닿았다. 그는 희미하게 열려 있던 입 속으로 물고 있던 조그만 캡슐형 알약을 넘기고, 살짝 깨물어 터뜨렸다. 진득한 각성제가 이를 축이고, 혀를 넘어가 목구멍 뒤로 흘러들어간다.

“으….”
몇 번 뒤척이던 고개가 결국 사납게 뒤흔들렸다. 약효의 쓰디씀을 고스란히 보여주며 미간이 뒤틀렸다. 토해내려는 듯 가슴이 덜컹거리기를 몇 번. 마침내 천천히 눈이 뜨여지고.

“안녕?”

자신을 이곳으로 다시 부른, 마치 어제 헤어진 듯 인사를 해오는 상대를 바라보았다. 오른쪽 눈썹 위부터 비스듬히 잘려 있는, 다갈색이 도는 금색 머리카락. 짙은 검은 색 눈썹. 여유 있게 보이도록 하는 유순한 눈의 모양새. 익숙한 모든 모습. 카게야마는 입술을 꾹 다물고 과거를 노려보았다.

“무서운 표정이네.”
“…후회하게 될 거야.”
“후회라면 지난 시간동안 이미 많이 했어. 그러니까.”

그는 손가락으로 얄밉게 튀어나온 입술을 꾹 눌렀다. 그대로 볼로 미끄러진 손은 목 뒤로 향해 머리를 받쳐 올렸다. 아직 제대로 힘이 돌아오지 않은 고개는 상대의 뜻대로 끌어올려지고, 돌려볼 새도 없이 다시 입술이 마주쳤다. 그 다음에는 볼, 그리고는 이마. 그는 애교 넘치는. 그리고 한 편으로는 부드럽기 그지 없는 모습으로 카게야마에게 자신을 인식시켰다.

“우으….”
“이번엔 네 차례야. 토비오.”

아니, 그는 후회조차 할 수 없게  해 줄 생각이었다.

-17-

  
  “그러니까 ‘카게야마 토비오’는 날 알고 있었던 거네.”
“오이카와, 진정해.”
“여기서 뭘 어떻게 진정해?”

요원은 의자에 소리가 나도록 주저앉았다고, 곧바로 다시 일어섰다. 불현 듯 스치는 생각이 있었다.

“오이카와 토오루씨.”
분명히 나를 그렇게 불렀다. CCTV의 일로 집에 왔을 때. 그는 그렇게 나를 불렀다. 한 번도 통성명을 하지 않았고, 문패에는 성 밖에 없는데도 그는 나의 풀 네임을 정확하게 알고 불렀었다. 왜 몰랐지.

“멍청하게.”
“오이카와.”
“알아. 이와쨩. 나는. 지금 이성만 남기려고 노력 중인거야.”

오이카와는 두 손을 마주 잡았다.

“이 일은 중앙 지부에서 시작된 거야. 그 말은 즉.”
“카게야마 토비오의 후원자 집안과 중앙 지부 사이에 유착이 있다는 거지.”
“그거 어디까질까?”
“알 수 없지.”
“좋아. 그럼 최악으로 가정하고 시작하자.”

이와이즈미는 화이트보드 앞에 섰다. 평소처럼 화면을 켜진 않았다. 전산을 사용하는 것은 위험한 일이었다. 그는 검은 색 마카로 ‘카게야마 토비오’를 가운데 쓰고 돌아섰다.

"중앙 지부에서는 말도 안 되는 구실로 오이카와를 불러들이려고 하고 있어. 그 말은 카게야마 토비오 역시 확보할 단계가 되었다고 생각하는 거지.”
“보호해야 할까?”
“아냐. 그걸로 될 일이었다면 카게야마가 우리에게 이런 사실을 밝히지도 않았겠지. 어쩌면 이미 확보되었을 수도 있고.”
“그럼?”
“네게 달렸어.”

팀장은 진지한 표정으로 오이카와를 바라보았다.

“나는 마츠카와가 이를 조사하다 행방불명이 되었다고 생각해. 그리고 그를 찾아내서 보호하는 것을 최우선으로 삼을 거야.”

설득력 있는 이야기를 들으며 요원은 이를 악물었다. 나쁜 생각은 하고 싶지 않았다. 자신의 탓이라고 생각하고 싶지도 않았다. 하지만 그것은 쉽사리 하기 힘든 일에 속했다. 그는 바지 주머니 속 라이터를 쉴 새 없이 만지작거렸다.

“오이카와. 카게야마 토비오는 자신이 어떻게 될지 알고 있으면서도 자신이 도망치는 대신 미끼 역할인 우리에게 이 사실을 알려 왔어. 나는 그것을 역으로 자신을 미끼삼아 도망치라는 신호로 받아 들였어.”

 나는 네가 다치지 않았으면 좋겠어.

“원한다면 그렇게 할 수도 있어.”

 마음이든, 몸이든.


팀장은 보드에 기댄 채 천천히 말을 이어 나갔다.

“어떻게 하고 싶어?”
“나는.”

오이카와는 큰 고민 없이 서두를 떼었다.

“지금 우리의 가정에 약간의 문제가 있다고 생각해.”
“어떤?”
“가령 내가 성공 실험체라고 쳐도. 나 때문에 카게야마 토비오가 도망가지 않았다는 것은 설득력이 떨어지는 일이야.”
“아, 그거 나도 동의.”

하나마키가 가볍게 손을 들어 올렸다. 오이카와는 잠시 그를 보았다가 다시 팀장에게 고개를 돌렸다.

“더 있어. 무언가. 반드시 나여야 했던 이유가.”
“…그럼.”
“그러니까 그 이유를 알지 못하면, 영원히 벗어날 수 없다는 거야. 카게야마 토비오를 확보했다고 해서, 우리를 놓아준다는 보장은 없는 거지.”
“그래서?”
“별 수 있어? 어울려 줘야지.”

웃음 치고는 차갑고 경멸스러운 것이 입가에 어렸다. 오이카와는 자신만만한, 한편으로 오만하기까지 한 표정을 지어 보였다.

“징계 위원회 보내줘.”
“오이카와.”
“너희가 마츠카와를 찾는 동안, 나는 토비오 쨩을 찾아 봐야겠어. 사실 정말 궁금해. 내가 그에게 뭐였는지. 왜 그렇게 굴었는지. 왜 나를 보호하려고 했는지까지 전부.”

그는 부글부글 끓는 숨을 애써 삼켜냈다.

“나는 전부 알아야겠어. 이와쨩.”

 

-18-

  

“정말? 안 보낸다고 하지 않았어요?”
“지부장의 설득이 먹힌 것 같습니다. 작은 주인님.”
“뭐, 번거로울 뻔 했는데 잘 됐네요.”

남자는 상체에 와이셔츠를 걸치고 하나하나 단추를 잠그며 웃었다. 우르릉. 창 밖에는 짙은 구름 안쪽으로 번개가 번뜩이고 있었다. 등불을 하나도 켜지 않아 어두운 방에는 오로지 그 간헐적인 빛만이 전부였다. 그렇게 가끔 노랗게 변할 때에야 비로소.

“….”

또 다른 남자가 보였다. 옷이 온통 풀어헤쳐진 몸에는 울긋불긋한 자국이 뒤덮고 있었다. 그 중 가장 흉하고, 가장 검푸른 자국을 목에 매단 채 카게야마는 정신을 잃고 있었다. 눈썹 한번 꿈틀거리지 않으며 중년의 사용인은 그 모습을 자연스럽게 받아들였다. 벽으로 다가간 그는 작은 주인의 옷보다 조금씩 품이 작은 옷을 맵시 있게 정돈하여 옷걸이에 걸었다. 깨어나면 입힐 요량이었다. 남자는 그것을 보고 희미하게 웃었다.

“당신은 눈치가 참 빨라.”
“칭찬 감사합니다. 작은 주인님.”
“하지만 조금 더 빠를 필요도 있어요.”

목에 건 넥타이의 매듭을 묶어 가며, 남자가 말했다.

“나를 계속 ‘작은 주인님’이라고 부를 필요가 있나.”
옷에 묻은 작은 먼지를 털어내며, 사용인은 슬며시 입술을 끌어올렸다. 오히려 더 홀가분해진 표정으로 그는 뒤를 돌아, 허리를 깊이 숙였다.

“죄송합니다. 아츠무 도련님.”

방 어딘가. 아주 뜨거운 곳에서는 큰 주인이. 아니 늙은 주인이 마지막 숨을 쉬고 있을 것이다. 그는 남자의 말대로 눈치가 빨랐고, 자신이 어느 편에 허리를 숙여야 하는지 잘 알고 있었다.

“앞으로는 미야侑가의 주인님으로 모시겠습니다.”

새로운 대저택의 주인은 미소를 띠우며 그를 바라 보았다. 태생부터 몸에 배인. 그야 말로 남을 누르는 듯한. 그러나 흉폭하다기 보다는 세련되고도 부드러운 눈빛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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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Blind Game # 1

The End.



으아. 너무 긴 한 편이었습니다.ㅠ0ㅠ
2부는 한달 가량 후에 시작할 예정입니다. 1부에서 풀리지 못한 많은 이야기들을 이어나가도록 하겠습니다. :) !!
2부는 아마도 [그들이 얼마나 서로를 사랑했었는지]에 대한 이야기가 될 것 같습니다.
그동안 감사했습니다.

Blind Game




◆◆◆


요원의 네 번째 손가락이 눈매 안쪽, 옴폭하게 패인 곳을 지나 뺨으로 미끄러졌다. 다른 손가락들 역시 각자의 위치에서 카게야마의 얼굴, 그 어딘가를 훑어 내린다. 양 손 모두, 그런 과정 끝에 엄지손가락으로 턱을 받쳐지고, 고개가 손 안으로 모두 들어왔다. 그러는 동안에도 옆집 남자는 계속 눈을 감고 있었다.

“무슨 생각해요?”

오이카와가 물었다. 방금 어깨 바깥으로 떨어진 옷은 새것답게 바스락거리는 소리를 크게 냈다. 두 사람은 반쯤 벗어던진 차림으로 침대 위에 마주보고 주저앉아 있었다. 시선이 도망갈 곳은 아무데도 없었다. 피할 수 없이 적중된 물음은 결국 상대의 눈을 뜨이게 만들었다. 더딘 뜨임이었다.

“…그냥.”

짧고 불성실한 대답을 하는 목소리가 친숙했다. 처음으로 듣는 반말이어서 그럴까. 색다르면서도 그랬다. 오이카와는 다시 한 번 입을 맞췄다. 그리고 그 방향대로 힘을 주었다. 뒤로 젖혀져 가는 몸이 결국 늦겨울 갈대처럼 꺾여서 눕혀졌다.

“우…으. 으응.”

혀가 섞이면서 나는 소리는 애 같기 그지없고, 중간 중간 섞이는 물기는 성숙했다. 뺨을 잡고 있던 손이 목을 그 안에 쓸어 담았다가 쇄골을 지나 가슴에 안착했다. 허리끈까지 풀어헤쳐진 차림이 되는 동안, 신음소리 한번 내지 않은 남자이지만 심장은 쿵쾅쿵쾅 뛰어대고 있어서 귀여웠다. 마치 유카타의 텍 같이 속엣 것을 알려주는 그런 것. 오이카와는 목을 한번 깨물며 짓궂게 웃었다.

“설마 옛 애인 생각?”
“….”
“우와, 진짜? 나쁘다. 토비오쨩.”
“하, 하아.”

호칭이 뒤바뀌는 순간 남자의 숨이 크게 튀었다. 어쩌면 그것은 연하의 상대에게 이름이 불리는 괘씸함 때문일지도 모른다.

“그 사람이 나랑 얼마나 닮았는지 궁금해.”
“….”
“얼마나 인상적인 사랑을 했었길래, 아직도 못 잊는 건지도 궁금하고. 나보다 잘생길 수는 없을 거고, 좋은 사람이었어?”
“….”

불그스레한 빗금이 촘촘히 그어진 볼을 했으면서 카게야마는 오이카와를 꽤 매섭게 노려보고 있었다. 당장이라도 자신을 밀어내버릴 것 같아서 요원은 달래듯이 쪽쪽 소리 내서 입을 맞췄다.

“으…ㅅ.”
“알았어요. 이제 이런 얘기 그만 할 테니까 그렇게 보지 마. 오이카와씨 또 상처받으니까.”

부드럽게 말을 굴리며, 이미 깨물었던 목을 다시 한 번 혀끝으로 문지르자 미약한 발버둥이 일어났다. 그러나 거부보다는 회피에 가까운 몸짓이었다. 자신의 직감을 믿으며 요원은 카게야마를 온 몸으로 꽉 끌어안았다. 그 스스로도 답답할 정도로 끌어안고서.

“…지금 하려는 게 싫은 건 아니죠?”

조심스럽게 물었다. 품 안의 움직임이 갑작스레 끝을 맺는다. 두근거리기도 긴장되기도 하는 침묵이 짧게 이어졌다. 그리고.

“…응.”

옆집 남자가 조그맣게 대답했다. 오이카와는 빌어먹게 사랑스러운 거짓말쟁이를 꽉 끌어안아주었다. 지금은 상대의 눈을 보고 싶지 않았다. 흔들리고 있으면 싫을 것 같아.

“저기.”
고민을 아는지 모르는지 팔 안에서 나름대로 기를 쓰던 상대가 기어코 고개를 내밀었다. 새빨갛게 된 얼굴을 한 남자는 어딘가 기묘한 눈빛이었다.
“이런 거 물어봐도 될지 모르겠는데.”
“으응?”
“오이카와야말로 나랑 자는 거 괜찮아?”

옆집 남자는 앞머리가 가지런했지만, 홀로 뾰족한 머리카락 한 줌 가량이 있었다. 마치 그것처럼 엉뚱한 질문이었다. 그러나 그런 말을 던지는 표정 자체는 꽤나-이 지경에 이르러서도 인정하기 쉽진 않았지만- 사랑스러워서 오이카와는 최대한 부드럽게 웃었다.

“갑자기? 괜찮지 않을 이유가 어디 있어?”

보란 듯이 자신과 닮은 남자와 잤던 요망한 남자였다. 요원은 다시 한 번 상상해 보았다. 남자의 허벅지 안쪽 깊숙한 곳에 납작하게 붙여져 있는 초소형 권총이나 나이프를. 혹은 어금니를 깨물면 흘러나오는 맹독을.

“나.”
그런데 확 붉어진 얼굴을 한 남자는.
“잘, 잘 못할 수도 있거든.”
“?!?”
“소리 같은 것도 잘 못 내고.”

이 남자 무슨 소리를 하고 있는 거지. 오이카와는 그때처럼 독특한 박자로 깜박이는 상대의 눈을 바라보며 할 말을 잃었다.

“하고나서 후회 하지 않았으면 좋겠는데….”

전 애인이 혹시 얼굴만 잘생긴 개새끼였나. 듣도 보도 못한 말을 하는 옆집 수의사는 오이카와의 침묵을 뭐라고 받아들였는지 옷자락을 꽉 잡았다. 입술도 턱이 자글자글해질 정도로 세게 올려 다물고 있었다. 사생결단을 내는 표정이었다. 아니, 당신 원나잇 하지 않았었어? 왜 이렇게 긴장하는데. 요원은 옆집 남자의 손등을 부드럽게 쓸었다.

“카게야마씨. 오늘 내가 하자고 한 거예요.”

그리고 상대의 판판한 가슴 위에 팔꿈치를 올리고 턱을 괸 채 웃었다. 눈가를 슬쩍 흐리며 짓는 미소가 심각하게 섹시해서 카게야마의 눈동자가 사방팔방으로 튀기 시작했다.

“오이카와씨는 감이 좋아서.”
그는 이번에야말로 제대로 먹혀든 미소를 한껏 꽃피웠다.

“전혀, 그럴 리 없을거라고 생각해.”

◆◆◆



“안 받아?”
“어.”
“냅둬. 잠이나 자고 있겠지.”

오랜만에 휴일인지라, 둘은 술자리를 함께 하고 있었다. 처음에는 오이카와도 부를 요량이었는데, 어떻게 된 건지 연락이 되지 않았다. 비상시에 가동되는 업무용 핸드폰으로 걸어볼까 하다 그는 곧 고개를 저었다. 용도에 맞지 않을 뿐더러 휴가는 존중해주는 것이 인지상정이다. 사실 어디서 뭘 하고 있든지 임무에 지장을 줄 녀석은 아니었지만. 그렇지만.
설마 카게야마와 있는 건 아니겠지. 이와이즈미는 한참 전화기의 까만 화면을 노려보다가 하나마키에게 물었다.

“마츠카와에게는 연락 또 없었어?”
“맛층이라면, 아까 통화 불능 지역이라고 연락이 왔던 걸 제외하면 아직. 한창 인터뷰를 할 시간 같은데.”

우물거리며 안주를 집어 삼키던 하나마키가 젓가락 끝으로 톡톡 접시를 두드렸다. 언제 비상이 뜰지 모르는 상태였기 때문에 둘 모두 맥주 한 잔을 느린 속도로 비울 뿐이었다. 다행히 마츠리의 마지막 날이어서인지 상가는 늦은 시간까지 문을 열고 있었다. 유카타 차림 일색인 도로를 바라보며 가벼운 트레이닝복의 사내들이 잔을 들었다. 챙. 맑고 경쾌한 소리가 우중충한 분위기를 갈라냈다.

“위험하진 않겠지.”
“설마.”
“비행기 예약은 내일이었나.”
“응, 저녁 7시.”

안주는 양이 적지만 꽤 맛있는 편이었다. 그래서였는지, 생각보다 술잔이 자꾸 들렸다. 그렇게 황금빛 맥주가 사라진 자리에는 자글자글한 맥주 거품이 흰 자국을 남긴다. 아쉽지만 더 시킬 수는 없었다. 잔을 빙글빙글 돌리던 하나마키는 먼 곳에서 슬슬 터지기 시작하는 불꽃을 골똘히 응시했다.

“헤에. 그런 사건들이 연이어 있었는데도 대규모 마츠리라니 대단한 곳이네. ‘안전 불감증’인 건지.”
“배치된 경찰 병력을 꽤 늘렸다고 들었어. 그래서 작전도 늦춰진 거고. 어쨌든 알게 모르게 윗선에서 손을 써두기도 했겠지. 입막음이라든가.”
“그렇구나. 일할 때는 그렇게 휴식이 좋더니만, 막상 휴일이 되니 어째 심심하네―.”

마주칠 손바닥 짝이 없어서인지 평소보다 조용하던 하나마키 입에서 그런 말이 흘러나왔다. 이와이즈미는 싱겁게 웃고 맥주 대신 물로 입을 헹구어 냈다. 칙칙. 뭘 만드는지 주방 안쪽에서 김이 빠지는 소리가 나왔다. 창 밖에서 삼삼오오, 혹은 연인, 그리고 가족들이 따뜻한 색감의 풍경을 만들어 내고 있었다. 날씨도 좋아서 훌륭함이 더해진 축제의 밤이었다. 정말로 평화로워 보였는데. 왠지 그에겐.

“어. 폭풍전야 같기도 하고 말이야.”

그렇게 보이기도 했다.

◆◆◆


“천재였지.”

노인의 첫 마디는 그것이었다. 쉽사리 듣기 힘든 그 말을 이 집에 온 뒤 몇 번째 듣는지 몰랐다. 빈번한 횟수는 특별함이 사라지게 만드는 법이었다. 마츠카와는 솔직히 수의사와 카게야마 도련님을 연결시키지 못했다. 어쩌면 전부 노인네의 망상이거나 부모가 자식에 대해 거는 과대하고도 눈먼 기대 같은 게 아닌가 하는 생각도 들었다.

“나는 그처럼 빛나는 재능을 두 번 보지 못했다네. 지금까지도 말일세. 내가 아니었더라도 분명히 누군가는 그 아이를 후원했을 거야. 나는 그저 선점했을 뿐이지.”
“예…. 그런데 그렇게 아끼셨으면서, 왜 지금은.”

어떤 말을 써야 할지 고민하며 말을 애매하게 끊자, 상대가 입술을 뒤집으며 웃어 보였다. 허옇게 세월이 슬어 있는 잇몸을 드러내는, 숨이 넘어가는 웃음소리였다.

“왜 지금은 연락도 듣지 못하고 지내는지. 그 말인가?”
“공들여 키우셨다고 하시니 하는 말입니다.”
“젊은 자네는 모를 수 있겠지만, 허허. 자식은 부모의 뜻대로 되지 않는 법이라네. 그들은 독립적인 개체들이지.”
“하지만.”

마츠카와는 이번에도 부정의 접사를 내어 놓고 입을 닫았다. 노인은 번뜩이는 시선을 던져 왔다.

“토비오가 내 자식은 아니라는 이야기를 하고 싶은가?”
“…실례했습니다.”
“아니, 맞는 말이야. 그리고 나도 그 아이의 이야기를 하고 있었던 것이 아니라네.”
“네?”
“나에게도 당연히 친자가 있었지. 이 집에서 토비오와 같이 자란 손주 말일세.”

그의 시선이 방구석을 희미하게 딛고 사라졌다. 어린 사내아이들이 뛰는 발걸음 소리가 귀에 걸렸다가 흩어져 부서졌다. 그는 입가를 부드럽게 흐리며 웃었다.

“토비오는 내 뜻대로 되던 아이였네. 그 아이의 재능과 합치되는 삶을 주었고, 그 아이도 받아들였지. 배우고 깨우치고, 창조하고. 마음대로 되지 않았던 것은 내 손주였다네. 카게야마와 연락을 끊고 살게 된 것도 손주 때문이었고.”
“손주와 무슨 일이… 있었는지 여쭈어 봐도 됩니까.”
“자네, 천재天才를 맞닥뜨린 적이 있나.”

후견인은 눈을 덮으려고 드는 묵직한 눈꺼풀을 번뜩 들어 올리며 나직하게 물었다. 마츠카와는 침착하게 상대를 바라보았다.

“어느 분야라도 두드러지는 재능을 가진 사람이 있기 마련이니 당연히 만나보았습니다.”
“맞닥뜨린다는 것은 그런 게 아니야. 그저 보는 게 아니라 살아 숨 쉬는 공간에서, 내가 성과를 보이고 싶은 분야에서, 그와 경쟁해보고 좌절해보고. 그럼에도 불구하고 이끌려본 적이 있냐는 거지.”
“그런 건…글쎄요. 아니요. 없었던 것 같군요.”

마츠카와는 고개를 저었다. 차분한 목소리와 거친 골골거림이 공존하여 만들어 내는 말의 내용은 맹폭하여 그로서는 전혀 공감할 수가 없었다. 그럴 줄 알았다는 듯이 노인은 굳어 있는 청년을 향해 소리 없이 입을 벌리며 웃었다.

“범인凡人이, 아니 수재秀才가 천재天才를 그런 방식으로 만나면 두 가지 뿐이야. 죽여 버리고 싶을 정도로 질투하거나 혹은 그 자체를 갈망하게 되거나.”

노인은 별안간 눈을 크게 뜨며 몸을 기울였다.

“내 손주. 수재였던 내 손주는 어느 쪽이었을 것 같나.”

◆◆◆


반복해온 훈련과 적응이 불가능한 실전들은 남자를 잘 조각하고 완성해 놓았다. 하나하나가 탄력이 있었고, 못나거나 부족한 곳 없이 완벽하게 구성되어 있는 몸은 언제나 보는 쪽의 감탄을 어렵지 않게 이끌어 내곤 했다. 지금도 그랬다.

“왜 날 똑바로 못 봐요. 너무 잘생겼어?”
“그렇지, 않. 읏.”

짓궂은 질문을 던지자 남자는 고개를 털어내듯 저었다. 그러면서도 자신의 팔을 꽉 잡고 있었다.

왜 이렇게 됐지.
를 생각하면 어이가 없을 정도였다. 자신은 이렇게 쉽게 사랑에 빠진 적이 없었다. 직업의 특성 상 항상 긴장해야 했고, 누구와 내밀한 밤을 나눈다는 것은. 그건 그냥 첩보영화 속에서 로맨스를 추가하기 위한 설정일 뿐이지 현실과는 괴리되어 있는 것이었다. 그런데 지금. 심지어 자신이 의심하던 사람과 충동적이면서 내일이 없는 선택을 하고 있었다. 다시 생각해봐도 이게 말이 되나. 오이카와는 그렇게 생각했고.

“앗. 윽-. 흐윽.”

그 생각을 순식간에 배반하며 카게야마의 몸을 열었다. 사실은 화면 속으로 이미 보았던 장면이었다. 수의사는 눈을 꾹 감고 베개나 이불을 물어뜯고는 했다. 날개 뼈가 도드라지게 세우며 바들바들 떨곤 했었는데. 스크린이 제거된 실물이 주는 감상이란 남다른 법이라서, 오이카와는 좀 더 많은 것을 깨달을 수 있었다. 수의사는 익숙하지 않았다. 능숙하지 못했다. 무엇에 쫒기는 것 같았고, 두려워하는 것처럼 느껴지기도 했다.

“혹시, 아파요?”

노곤한 목소리로 묻자, 상대는 거의 즉각적으로 고개를 저었다. 참으로 씩씩한 부정이었지만, 입술 안에는 역시 이불이 가득 물려 있어서 믿을만하지 못했다. 오이카와는 볼부터 시작해서 계속 입을 맞췄다.

“간…지러워. 읏. 으으.”

입술에 잔뜩 들어가 있던 힘이 풀리도록 천천히. 그리고 부드럽게. 물려 있던 천을 스스로 뱉고 마침내. 자신과 맞물릴 때까지 아주 느리게. 움직이고 싶은 쾌감을 누르느라 고통스러울 정도였지만 그는 아주 끈질기게 상대를 풀어냈다.

“아, 으…. 으응.”

어느 순간 다리가 느긋하게 감겨왔다. 허리를 쓸고 허벅지가 엉켜갔다. 발가락 끝까지 말랑말랑해지고, 푸른 밤이 녹아내렸다. 그렇게 시작점이 동등해지고 나서야 오이카와는.

“아, 아아, 악, 아, 읏. 으으. 윽.”

천천히 그 이상의 지점으로 상대를 이끌어가기 시작했다. 입술 밖으로 흘러나오는 소리는 쾌락으로 가득 차 깨끗했다. 주춤거리면서도 제법 잘 따라오는 상대에 오이카와는 신이치씨를 비웃을 수밖에 없었다. 긴장하지 말고 참지 말아 달라니. 그렇게 멍청한 말도 없었다.
토비오쨩이 못 느낀 건 전적으로 네 탓이었거든.

◆◆◆



“토비오. 걔랑 뭐 하고 놀았어?”

카게야마는 숨과 침을 한꺼번에 꿀꺽 삼켰다. 커다란 공기덩어리가 단단한 형체라도 있는 듯 목을 타고 힘들게 넘어갔다. 사지 중 잡힌 것은 아무것도 없는데, 꼼짝달싹할 수가 없었다. 조금이라도 거리를 두려고 뒷걸음질을 한 결과로 벽에 짓이겨지다시피한 등이 배겨왔다. 이런 건 부당한 대우라고 생각했다. 그래서 있는 힘껏 노려보았지만, 상대는 그저 호의적으로 웃으며 손을 잡아 왔다.

“걔랑 이렇게 손도 잡았어?”
“그랬어.”

상대의 시선은 무서웠지만, 스스로 나쁜 일이라고 생각하지 않았다. 어디에도 그런 걸 나쁘다고 하는 책은 없었다. 그래서 카게야마는 고개를 당당하게 쳐들고 대답했다.

“윽.”
그러나 목소리가 쑥 들어갈 만큼 손이 세게 잡혔다. 열기 같은 숨이 느껴질 정도로 얼굴이 다가왔다.
“정말? 키스도 했어?”
“…했, 어.”

그것은 약간의 반항이기도 했다.
대답에 야멸차지기 시작한 눈동자 속으로 스르륵 안광이 스며들었다. 그것은 외부가 아닌 내부의 빛이었다. 위험하고, 또 위태로운 비이성의 빛. 그토록 공격적인 눈빛을 한 상대는 그러나, 입술을 당겨 부드럽게 웃었다.

“그럼.”
꿀이라도 떨어질 것 같은 다정한 목소리였다.
“잠도 잤어?”

손목뼈가 바깥쪽으로 꺾였다. 의도적으로 기를 꺾으려는 상대였다. 그러나 카게야마는 외려 더 빳빳하게 고개를 들고 눈을 마주했다.

“네가 알 필요가 없잖아.”
“그 말 너무 섭섭하네. 할아버지께서 아시면 난리 나겠는데.”
“…할아버지한테는.”
“아시면 가만있지 않으실걸. 나야 토비오에게 개인적으로 처벌을 내리겠지만. 할아버지는 다르실 거야. 그렇게 되면 걔가 무사할까?”

사근사근하게 웃으면서 그는 칼을 꽂았다. 어디가 가장 약한지를 알고 있는 상대가 단번에 꽂아 넣은 것이었다. 막힌 말문은 트이지 못하고, 고개가 땅을 향한다. 재고의 여지가 없는 담백한 패배였다. 남자는 웃었다.

“그래서 했어요, 아니면 안했어. 말해 봐. 어서.”
승자는 패자의 손목을 그대로 우그러뜨릴 것처럼 잡으며 다그쳤다. 여전히 부드럽고 낭창낭창하게 그리고 조용한 말들로.

“…안 했어.”
“정말?”

그는 눈동자 안으로 들어가기라도 할 것처럼 깊이 얼굴을 들이밀었다. 마지못해 카게야마는 다시 한 번 고개를 끄덕였다. 사실이기도 했다. 우리는 아름답고 멋진 시간을 보냈지만 섹스를 하진 않았다. 그것을 후회해야 할까. 손이 놓아지자마자 카게야마는 벽에 등을 미끄러뜨리며 주저앉았다. 머리가 아팠다.

“잘했어. 다행이네. 토비오가 착한 아이라서.”

안심했다는 듯 상대가 웃었다. 그 역시 무릎을 수그려 앉았다. 그대로 옹기종기 숙여진 머리를 한동안 보고 있던 그는 갑작스레 머리카락을 한줌 쥐고 들어 올려 벽으로 밀쳤다. 쾅. 거친 소리가 났다. 그는 일그러진 얼굴 속 코끝에 입을 맞추고 볼을 비볐다. 귓바퀴에 입술이 닿았다.

“그래도 ‘처벌’은 받아야지.”
그가 속삭였다.
“어떤 걸 줘야 무서워서 다신 시도도 못할까.”

◆◆◆



방은 견디기 힘들 정도로 더웠다. 죽겠구만. 이라고 생각하며 마츠카와는 넥타이를 두 번째 단추까지 확 당겨 내렸다. 그러나 그렇다고 이야기의 집중이 방해되지는 않았다. 온도 정도로 정신을 빼앗기기엔 이상하고 그로테스크한 이야기였다. 그는 허리를 조금 펴 앉았다. 벨트에 장식처럼 달린 녹음기가 제 기능을 해 주길 바랄 뿐이다.

“내 손주가 그렇게까지 토비오에게 집착할 거라고는 생각하지 못했지.”
“그래서 그 집착 때문에. 도대체 무슨 일을 한 겁니까.”
“사람을 죽였다네.”

목소리는 아주 차분했다. 높낮이의 변화도 거의 없었으며 그저 소리를 조금 낮췄을 뿐이었다. 그것이 더 소름끼치는 일이었다. 마츠카와는 소리 없이 숨을 들이켰다.

“17살 때 일이었지. 학교 옥상에서 밀어버렸고. 상대 아이는 즉사했었네.”

노인은 뇌까리듯이 나이와 사인을 읊었다. 무게감이라고는 없어서 마치 게임이라도 설명하고 있는 것 같은 말투였다. 어두운 방 안에 스산한 열기가 흘러갔다. 마츠카와는 관자놀이를 타고 흐르는 식은땀을 느꼈다. 손주라고 해도 결국 자식이었다. 그가 저지른 살인에 대해 저렇게 담담하게 말할 수 있는 부모가 있을 수 있을까. 있다면 정상일까.

“토비오와 마음이 통했었던 것이 이유였지. 나야 잘은 모르고 손주의 선에서 정리되어 버렸지만.”
“….”
“아, 그러고 보니 형사님이었군.”

처음 보았을 때보다 오히려 힘이 돌아온 표정으로 노인은 웃었다.

“걱정하지 마시게나. 당연히 손주는 대가를 치렀다네.”
“…그렇군요.”

그런 말 밖에 할 수 없었다. 그러나 17세라면 아직 성인이 되기 전의 나이였다. 집안은 출중했다. 과연 엄벌을 받았을까. 그러니까 17세에 이미 사람을 죽인 그 어린 살인자는 아직 사회에서 격리되어 있는 것이 맞을까. 마츠카와는 그것이 궁금했지만 섣불리 물어볼 수가 없었다.

“토비오는 참으로 충격을 받았던 것처럼 보였네.”
“….”
“말 수도 확연하게 줄고, 방에 틀어박혀 잘 나오지 않았었지. 그리고 17살이 끝나가던 겨울. 이 집에서 사라졌어. 찾지 말아달라는 메시지와 함께. 그게 끝이었네. 우리의 인연은.”
“찾아 보려고는 하셨습니까.”
“한동안은 그랬지. 무척 그랬네. 자네의 상상 이상일거야.”

노인은 그 말을 굉장히 자랑스럽게 내뱉었다.

“하지만 말했듯이 그 아이는 천재야. 숨고 싶다고 결심했다면 찾을 수가 없지. 자네도 아마 ‘카게야마 토비오’에 대해 많이 조사해 보았을 것이네. 여기까지 온 것만 봐도 유능하다는 건 알 수 있지. 하지만.”
그는 입술을 쭉 찢어내며 웃었다.

“아무리 털어 봐도 깨끗하지 않았나? 그 아이.”

마츠카와는 뜨거운 숨을 내뱉었다. 사실이었다. 완벽할 정도로 깨끗하여 무엇 하나 찾을 수 없었다. 핸드폰의 주소록도 갤러리도 모두 깨끗했던 것은 물론이거니와 어떤 웹사이트에도 방문 흔적이 남아 있지 않았다. 생각해 보니 그랬다. 완벽하게 숨어 있었다. 적어도 지금까지는.

“….”
문득 불안한 생각이 그를 스쳐 지나갔다.
“이런이런. 자네, 생각보다 상냥한 사람인가 보군.”
끌끌끌. 무거운 웃음소리가 흐르고, 노인은 허리를 바로 세웠다.

“말해두지만 구태여 ‘토비오’를 다시 찾아 데려올 생각은 없다네. 나는 어린 시절의 후원자일 뿐이고, 그저 그 아이의 소식을 알고 싶었을 뿐이야. 제 발로 돌아오면 모를까 잡아올 생각은 없으니 안심하시게나.”
“저도 말해두는 거지만, 제게 카게야마 토비오에 대해 물으셔도 말씀드릴 수 있는 건 없습니다.”
“알고 있네. 경찰이란 그런 거지. 마땅히 옳은 것이고.”

그는 문득 마츠카와의 어깨 너머로 시선을 던졌다. 괘종시계가 있는 곳이었다.

“자아. 시간이 너무 늦었군.”
노인은 옆을 계속 지키고 있던 남자에게 고개를 끄덕였다.

“형사님께서는 아마도 토비오와 내 손주, 그리고 살해사건에 대해 좀 더 궁금해 하실 테니 좀 도와주겠나. 나는 피곤해서 더 이야기를 할 수가 없군.”
“그러겠습니다.”

그 말을 기다렸다는 듯이 남자는 깍듯하게 고개를 숙였다.

◆◆◆


“전자문서들은 토비오 도련님께서도 이곳을 떠나실 때, 복구가 불능하게 파괴시키셨던 관계로 드릴 수 있는 것이 없습니다. 다만, 앨범이라든지 수기 기록 등은 보여드릴 수 있답니다. 보시겠습니까?”
“네, 부탁드립니다.”

길고 좁은 복도였다. 어두운 곳이기도 했다. 역사가 얼마나 오래된 집안인지는 알 수 없으나 남자 둘이 간신히 옆으로 지나갈 것 같은 복도의 양 옆 벽에는 마츠카와로서는 알 수 없는 시대의 옷들을 입은 자들의 초상화가 나열되어 있었다. 촛대를 들고 걸어가도 어색하지 않을 복도였다. 뚜벅뚜벅, 구둣발 소리를 먹어치우는 양탄자 또한 긴 시간 이곳에 있었음을 증명하듯 낡은 것이었다.

“카게야마 도련님께서는.”
앞서 가던 남자가 입을 열었다.

“정말 수의사를 하고 계신 겁니까.”
“예, 뭐. 그렇습니다. 실력도 있고, 평판도 나쁘지 않은 편이구요.”
“어렸을 때는 동물들과 교감하는 편은 아니셨기에 조금 당황스럽긴 하군요.”
“아, 그건 지금도 그렇습니다.”

마츠카와는 매번 동물에게 거절당하는 카게야마를 떠올리고 피식 웃었다. 사실, 그가 이곳에 와서 한 생각 중 가장 정상적인 것이었다.

“행복해 보이셨습니까?”
“그것까진 제가 모르겠습니다. 일단 저에게 중요한 문제도 아니구요.”
“하긴. 그렇겠군요. 여깁니다. 마츠카와씨.”

고풍스런 문양이 달린 문 앞에 멈춰선 남자는 허리춤에서 열쇠꾸러미를 꺼내어 자물쇠를 열었다. 기름칠이 잘 되어 있는 듯 부드럽게 잠금이 돌아가고 문은 이제 당기기만 하면 열 수 있었다. 그는 옆으로 비켜섰다.

“도련님께서 쓰시던 방입니다. 관련된 모든 자료는 여기에 넣어두었으니 내키는 대로 보셔도 좋습니다.”
“감사합니다.”

마츠카와는 고개를 가볍게 숙였다. 남자는 역시 살짝 목례를 한 뒤 물러섰다.

“그런데.”
문손잡이를 잡은 채, 요원이 가볍게 발을 잡는 질문을 던졌다. 복도의 끝으로 걸어가려던 남자가 발을 멈추고 뒤를 돌았다.

“적당히 넘어갈 수 있는 말이 많을 텐데, 왜 카게야마씨는 아무런 이야기를 하지 않거나, 혹은 거짓말만 했을까요.”
“하하. 도련님께서 그러셨습니까?”

그는 입 꼬리를 끌어 웃었다.

“그건 우리 도련님께서 ‘꾼’이 아니시기 때문이겠죠.”
“네?”
“마츠카와씨. 이건 작은 주인님. 즉, 큰 주인님의 손주 되시는 분의 말씀을 빌리는 것이지만. 혹시 거짓말을 가장 그럴 듯하게 하는 법이 뭔지 아십니까.”

어둠 속에서 파충류의 그것처럼 번들거리는 눈이 가늘게 휘어졌다. 입을 벌리면 가늘게 둘로 찢어진 혀가 보일 것 같은 교교한 인상이 얼굴에 어리고 흩어졌다.

“글쎄요.”
“진실에 섞는 겁니다.”
“….”
“그리고 그 거짓을 알아차리도록 하는 거죠. 그렇게 되면 진실도 거짓처럼 느껴지기 마련입니다. 그래서 진실조차 믿지 못하게 눈을 흐리는 것. 그것이 소위 ‘꾼’들의 방식입니다. 물론 카게야마 도련님께서는. 이 집안에서 자라셨지만 끝까지 그런 거짓말은 하지 못하셨습니다.”
“그럼 작은 도련님 쪽은?”
“아, 그 분이라면.”

그는 또 한 번 자부심 가득한 미소를 지었다. 마치 이 집안의 아이덴티티 같은 똑같은 미소였다.

“제가 아는 한, 가장 완벽한 ‘꾼’이셨습니다.”

◆◆◆


핏줄 안으로 열풍이 불어 닥쳤다. 끈끈하게 이어진 몸이 대부분 같은 박자로, 가끔은 다른 박자로 함께 움직였다. 눈앞이 어릿어릿할 정도로 반짝였다. 카게야마는 제대로 보이지 않는 상대를 품안으로 끌어당겼다. 순순히 그에 따라준 요원의 숨은 아주 거칠어서 벗은 상체에 호흡이 닿는 것만으로도 몸 안쪽이 간질거렸다.

“아, 으….”

쉰 목소리로 계속 소리를 내며, 카게야마는 눈을 꾹 감았다. 멀미가 날 것 같았다. 역시 그는 달랐다. 다를 거라고 생각했지만, 그 이상으로 달라서 적응할 수가 없었다. 그것을 좋아해야 하는지, 슬퍼해야 하는지 수의사는 알 수가 없었다.

◆◆◆


“하룻밤 묵게 해주시기까지 하다니, 정말 감사했습니다.”
“보다시피 남는 게 방인 곳입니다. 큰 주인님께서도 적적함을 덜었다며 오히려 좋아하셨으니 괘념치 마시지요.”
“다행이군요.”
“그보다 통신이 되지 않아 불편하셨겠습니다. 숲을 벗어나시면 바로 연결이 될겁니다.”

마츠카와는 고개를 느리게 끄덕였다. 집사처럼 보이는 상대는 관례적인 웃음을 지어 보였다.  

“그런데 벌써 가시는 겁니까. 비행기 시간은 아직 넉넉하실 텐데.”

집이 남향이어서 그런지 거실은 따뜻하고 밝았다. 작지만 고급스러운 케이크와 빵, 커피 등으로 꾸며진 아침상까지 준비되어 있었다. 간밤에는 내리 자료를 살펴보느라 자지 못하여 입맛은 없었지만 성의를 생각하여 마츠카와는 작은 빵 두어 개와 커피 대여섯 모금쯤을 마셨다.

“그렇긴 한데, 되도록 일찍 돌아가 보려 합니다. 자리를 오래 비우는 것도 좋지 않고.”
“아무래도 그렇죠. 그나저나 답은 찾으셨는지요?”

비운 잔에 쪼로록. 소리와 함께 물을 따르며 상대가 물었다. 마츠카와는 멍하니 있다 번뜩 정신을 차린 듯이 고개를 두어 번 흔들었다.

“아, 예. 도움이 되었습니다.”
“그것도 다행입니다.”

마치 어린아이를 칭찬하는 듯한 미소를 지으며 그가 공손하게 대답했다.

“카게야마 도련님께 별 일이 없으셨으면 합니다.”

그것 역시 무척 의례적으로 들리는 말이었다.

◆◆◆


마츠카와는 차에 구비되어 있던 500ml짜리 물통을 남김없이 비웠다. 공항까지는 꽤 멀었고 운전을 하려면 정신을 좀 더 차리는 편이 좋을 것 같았다. 위험하지 않도록 불편한 낮잠을 좀 자다가 갈까 했던 생각은 백미러로 저택을 보는 순간, 순식간에 사라졌다.

“이상한 집이야.”

그는 고개를 저으며 차에 시동을 걸었다. 저택은 뒤편으로 멀어져 가고, 깊고 울창한 숲을 통과하자마자 통신 연결음이 울렸다. 마츠카와는 지체 없이 이와이즈미에게 전화를 걸었다.

“괜찮냐.”
신호 한 번이 채 가기도 전에 연결되었다. 목소리도 평소보다 빨랐다. 얼마나 기다리고 있었을 지가 눈에 보이는 반응이라 그는 피식 웃음을 터뜨렸다.

“팀장~. 누가 보면 우리 사귀는 줄 알겠어.”
“똥 같은 소리 하면 죽여 버린다.”
“그래그래~ 나도 사랑해.”

능글맞음을 10스푼쯤 첨가하여 대답하자 블루투스 스피커 너머로 온갖 소리가 들려왔다. 이른 아침이라 텅 빈 사무실 안에서 혼자 감정을 발산하고 있을 팀장을 떠올리면서 마츠카와는 천천히 자동차의 속도를 높였다.

“소득이 없지는 않았어.”
“어떤 면에서?”
“천재라던데.”

가장 많이 들어야 했던 단어부터 시작하여 마츠카와는 하나하나 설명해 나갔다. 음산한 집안의 분위기, 100세도 넘어 보이는 큰 주인, 작은 주인이라 불리는 손주, 카게야마 토비오에게 얽힌 치정, 살인, 도주, 잠적.

“그게 뭐야.”
이와이즈미는 짧은 머리를 흐트러뜨리며 소리를 높였다.

“말은 안 되지만 상황에는 맞지. 털어도 아무것도 나오지 않는 거라든지, 폐쇄적인 성격이라든지. 해킹 건도 그렇고.”
“증거는.”
“남겨진 기록으로 보았을 때, 신빙성은 있었어. 학위들이라든지 그런 것들. 어떻게 종이로만 남겨져 있는지 모르겠지만…. 가짜 같지는 않았어. 일련번호는 따로 따왔으니까 나중에 조회해보면 될테고.”
“그럼 오이카와에 대한 행동에 대한 이유는?”
“그거.”

마츠카와는 천천히 차를 좌회전 시켰다. 아직 외진 외곽을 벗어나지 못해서 도로는 한산했다. 표지판에는 슬슬 ‘공항’표시가 뜨기 시작했다.

“치정 사건 말인데. 상대사진이 남아 있었어.”
“응. 사망자를 말하는 거지?”
“어. 다갈색 곱슬머리, 붉은 갈색 눈동자, 남자치고 흰 피부. 잘생겼던데.”
“뭐?”
“누구 생각 안 나냐.”
“그건.”

오이카와잖아. 마침 화이트 보드에 띄워져 있던 요원의 사진을 보며 이와이즈미가 수화기를 고쳐 쥐었다. 마츠카와는 ‘공항’으로 가는 표지판을 확인하고, 그 반대 방향으로 차를 돌렸다.

“내 눈이 잘못되지 않은 이상. 똑같이 생겼던데. 오이카와가 17살이라면 딱 그렇게 생겼을 것 같아.”
“그건 또 무슨 소리야. 죽은 사람이잖아.”
“맞아. 그래서 내가 생각해 봤거든.”

그는 차량에 설치된 네비게이션을 바라보았다. ‘아오바죠사이 사립고교’가 찍혀 있었다. 카게야마 토비오의 졸업장에 주소가 나와 있던 것을 따로 적어두었다. 그러니까 그 곳은 수의사가 다닌 학교이자, 작은 주인이 다녔던 학교이기도 했으며, 또한. 그 사망사건이 일어났던 장소이기도 했다. 그는 그 곳에 가볼 참이었다.

“우리. ‘오이카와 토오루’에 대해선 얼마나 알고 있지?”
“…뭐?”
“생각해보면.”

풍경은 시시각각 다시 바뀌어 가고 있었다. 다시 녹음이 짙어지고 생활 소음들이 사라졌다. 도로까지 뻗은 아름드리 나무들의 그늘이 지나치는 차량에 검은 그림자를 덧씌우고 또 덧씌웠다.

“‘소비재’를 거치지 않은 경력은 좀 이상하지 않아?”
“그거야.”
“우리가 아무리 서로에 대한 정보를 공유하지 않는 곳이라고 해도, 2년이거든. 팀장이 그랬지. 포트폴리오에 나와 있는 게 ‘현재’ 뿐이었다고. 파악이 어렵다고 투덜댔었잖아.”

이와이즈미는 부드럽게 웃고 있는 호남의 얼굴을 새삼 마주했다. 사실이었다. 경험을 통해서 그 현재가 사실임을 확인하긴 했지만, 확실히 정보가 적었다. 자신에 대해 말하는 법도 없었다. 하지만 대부분의 요원은 그것을 갖춰야 할 미덕이라고 배운다. 잘 지켰다고 의심하는 것은 아니지 않나. 팀장은 이를 악물고 머리카락을 다시 득득 긁었다.

“마츠카와. 너 설마 오이카와를 의심해?”
“내가? 아니.”

요원은 중간중간 네비게이션을 확인하며 조심스럽게 운전을 계속했다. 이미 밤을 지낸 피로는 사라진 이후였다. 아오바죠사이 고교. 그냥 검색으로는 나오지 않는 소인원제의 기숙사형 학교라는 것이 알고 있는 전부였다. 아마도 말 그대로 로얄 중에서도 초로얄 블러드를 위한 학교로 지어졌을 것이다. 혹은 망나니들을 가둬두거나.

“이름도 다르고. 죽은 사람이잖아. 만약 사진처럼 그가 정말로 ‘오이카와 토오루’와 그렇게 닮았다면 천재 수의사씨가 한 행동들 대부분이 수긍이 가기도 해. 어쨌든 자신 때문에 죽었던 연인이 살아 돌아와 있는 것처럼 느껴질 테니까.”
“그런데?”
“그 집이 이상해서 그런가. 나는 어디까지가 진짜인지 모르겠어. 여튼 다 믿을 수가 없거든.”

그는 다소 힘이 빠진 미소를 지었다.

“그래서 내 눈으로 확인하고 싶어. 그들이 준비해놓은 ‘완벽한’ 자료 말고.”
“…일단 복귀하는 건 어때. 인원을 충원 받아서 다시 가는 걸로 하고.”
“아아. 이미 학교에 도착했어. 그리고 시간은 충분해. 7시 비행기였지.”
“마츠카와.”
“돌아가면 바로 보고 할 테니까 자지 말고 기다려. 팀장.”
“마츠-”

요원은 통화 종료 버튼을 눌렀다. 고개를 하나 지나자, 지금까지의 산이 거짓말이었던 것처럼 평탄하고 넓은 지대가 펼쳐졌다. 산을 하나 밀어버린 것과 다를 바 없이 거대한 학교였다. 고딕 형식을 따른 듯 정교한 무늬를 가진 첨탑 형식의 건물이 갈색과 잿빛, 그리고 붉은 빛깔로 세워져 있었다. 마츠카와는 정문을 막고 있는 철문 앞에 차를 세웠다.

[사립 아오바죠사이 고교]
라는 명패가 반들거리며 빛을 반사했다.

◆◆◆


“마츠카와씨가 공항에 가지 않았다구요?”
“네.”
“음. 사실 그럴 것 같았어요.”

젊은 남자는 휴식 차 눈을 가리고 있던 안대를 끌어내리며 웃었다.

“사람들은 참 멍청해. 이건 함정입니다. 라고 말해줘도 꼭 그리로 기어들어가거든.”
“어떻게 할까요?”
“두세요.”

그는 짧게 대답했다. 그리고 화려하게 장식된 자수 주머니 속에서 생고기 조각을 꺼내어 손 위에 올렸다. 후드득. 지척에 있던 새장 안에서 거대한 날갯짓 소리가 들렸다. 쯧. 그는 혀를 차서 가볍게 새장 속의 매를 진정시켰다.

“바보같은 선택도 일단은 존중해야 하니 말이에요.”

피가 뚝뚝 떨어지는 신선한 고기였다. 젊은 사내는 새장의 문을 열고 손을 그 안에 넣었다. 질긴 근육을 어렵지 않게 찢어낼 맹금류의 뾰족한 부리가 손바닥에 닿았다. 그러나 그는 위축되지 않았다. 잘 훈련된 것은 아무리 맹수라고 할지라도 주인을 해하지 못하는 법이다.

“다만.”
그 기대에 어긋나지 않게 매는 고기만을 솜씨 좋게 빼어갔다.

“처벌은 내려야죠.”

날 것을 찢어 발기고, 목 뒤로 넘기는 소리가 들렸다. 남자의 손바닥에는 핏자국이 흥건하게 남아 있었다.

◆◆◆

“하나같이 고집만 세서 말을 들어먹질 않아.”
“누구 소리야?”
“아.”

팀장은 이마를 문지르며 뒤를 돌았다. 샌드위치를 하나 물고 출근한 하나마키가 의뭉스런 표정을 짓고 있었다. 이와이즈미는 답답하다는 듯이 큰 한숨을 쉬며 의자에 털썩 주저앉았다.

“마츠카와가―”

  삐빅, 삐빅, 삐빅.

소음에 가까운 소리와 함께 순식간에 방 전체가 붉게 물들었다. 막 자리에 앉았던 팀장이 자리에서 벌떡 일어섰다. 하나마키는 입에서 샌드위치를 뱉어내고 그대로 쓰레기통에 처박았다. 모든 컴퓨터가 동시에 켜지고, 팀원들의 업무용 핸드폰이 울리기 시작했다.

“설마?”
“비상소집이야.”

하필이면. 이와이즈미는 마츠카와를 대신할 백업 인력을 호출하고 화이트 보드의 핫라인코드를 입력했다. 화면 전체가 새까맣게 변한 것도 잠시, 인근 지도와 함께 복잡하게 암호화된 문서가 화면으로 출력되었다.

“긴급?”
하나마키가 헤드셋을 끼며 물었다.
“어. 1등급이네.”

암호 표를 맞출 필요도 없이 그대로 읽어 내리며 팀장이 대답했다. 다 읽기도 전에 두 명의 인물 사진이 수신되었다. 이와이즈미가 낮게 욕설을 내뱉었다.

“파일이 탈취 당했어. 빼돌리기 전에 지금 당장 수거해야 해.”
“미쳤네.”
“오이카와에게 연락해. gps 전송하고, 추격전용 차량으로 바로 출발하라고 해.”
“다른 조작은 필요 없어?”
“저쪽은 부둣가를 향하고 있으니까 그쪽 차량 통제가 가능하도록 사고를 좀 내줘. 급한 대로 경찰로 바리케이트를 치자.”
“오케이.”


왜 하필 지금이지. 팀장은 이 수상한 우연에 대해 잠시 생각했다 곧 지워버렸다. 지금 당장은 작전의 성공만을 상상하고 구체적인 내용을 구상해야 할 순간이었다. 그는 두 손으로 얼굴을 마구 문질렀다. 새빨갛게 된 얼굴을 들어 올리자, 화면에는 ‘오이카와 토오루’가 긴급 명령을 수신했다는 메시지가 떠올라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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