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오이카게]
승자독식
勝者獨食
0.
“가자, 쿠니미.”
어깨를 잡으며 킨다이치가 하는 말에, 쿠니미는 고개를 끄덕였다. 팀은 패배했고 제왕은 쫓겨났다. 적을 뿌리치기 위한 빠른 토스가 가져온 것은 팀원들의 외면이었다. 스스로에 대해서 오만했던 것은 아니지만, 또한 오만했던 천재의 과거는 쐐기처럼 박혀 코트를 박살내었다. 만지는 자를 다치게 할 것이 분명한 간극을 메울 수 있는 방법은 더이상 없었다.
감독은 세터를 교체했다. 그리고 팀은 패배했다.
“…그래.”
가지고 있던 물을 두어 번 꿀꺽 마시고, 뚜껑을 닫으며 쿠니미가 일어섰다. 유니폼은 축축했고 온 몸에 땀 냄새가 진하게 났다. 나도 열심히 했다는 반증이라서 자랑스럽기도 하고, 아무렇지 않기도 했다. 소금기가 짭짤하게 느껴지는 입술과 이마를 수건으로 닦아내며 그는 자신의 가방을 들었다.
“카게야마는?”
쿠니미는 아무렇지 않게 물었다. 킨다이치는 눈에 띄게 고개를 훽 돌렸다. 얼굴이 붉어지고 있었다.
“알게 뭐야, 그런 녀석 따위.”
이상할 정도로 과한 흥분 속에서 죄책감이 옅게 비친다.
“그 자식도 이제 정신을 차리겠지.”
“애초에 그런 토스 말도 안 되고.”
“윽박지르기나 하고 말이야. 누군 놀고 있는 것처럼.”
줄줄줄 이어져나가는 말도 다를 게 없었다. 쿠니미는 어깨에 걸린 스포츠백을 열어 놓은 채, 소지품 중 빠진 게 없는 지 꼼꼼하게 체크하고 있었다. 흘려들은 것은 아니었다. 그렇지만.
“그래서 카게야마는 어디 갔는데?”
대충 다섯 마디 정도를 듣고 나서 그는 다시 한 번 물었다. 킨다이치의 입술이 한일자로 다물어졌다. 사실 이미 벌어진 일이었다. 가장 잔인한 형상으로 깨어진 컵에 관심은 없었다. 다만 궁금했다.
“몰라. 하지만 뻔하지.”
왜 이렇게까지 되어 버렸는지가 궁금했다.
“오이카와 선배한테 가지 않았겠냐?”
인과를 구성하는 비하인드 스토리는 반드시 있는 법이었다.
1.
“자자, 정렬, 정렬.”
때는 여름이었다. 인터하이가 얼마 남지 않은데서 기인한 열기는 고스란히 연습으로 치환되어 체육관을 달구고 있었다. 이제 막 입부한 1학년은 그들 나름대로의 패기를, 2학년은 이제 곧 3학년의 자리를 대신해야 한다는 부담감을. 3학년은 마지막 기회라는 절박함을 서로 겨루고 있는 시기였다. 어느 때보다 강한 유대와 함께 끝이 따가운 긴장이 포효하고 있었다. 짙은 파랑의 유니폼을 입은 주장은 그 가운데로 확실하게 등장하며, 주의를 집중시키는 박수를 쳤다.
“오늘 부 활동은 여기서 끝이야. 개별 연습을 할 부원들은 뒷정리 잊지 말고.”
“감사합니다!!!”
“고생하셨습니다!!!”
철저한 위계질서가 있는 운동부였다. 정해진 시간이 되어 훈련이 끝난다는 간단한 지시도 주장의 입에서 떨어져야 의미가 있었다. 마무리 스트레칭을 하던 부원들은 큰 소리로 인사를 복창하고 뒷정리를 시작했다. 오이카와도 스포츠 타월로 이마의 땀을 닦았다. 더운 숨이 같이 묻어 나왔다. 오늘도 끝이다.
“오이카와 선배!!!”
아닌가. 익숙한 목소리에 귀가 바짝 섰다.
고작해야 13살. 어리고 쪼그만 꼬맹이는 득달같은 기세로 2년 연상의 중학생 앞으로 걸어왔다. 하아. 쿠니미는 한숨을 쉬었다. 주장은 눈에 힘을 풀고 눈썹을 치켜 올렸다. 더할 나위 없이 비꼬는 표정이 된 얼굴로 돌아선 그의 앞에는 아니나 다를까. 지 얼굴만 한 공을 들고 있는 동그란 얼굴이 천진하며 무지한 표정으로 서 있었다.
“오늘도 헛수고네, 토비오쨩~ 아~무리 끈질기게 물어봐도 오이카와상은 어차피 안 가르쳐 줄 건데~.”
그는 후배의 손에 들린 공을 재빨리 빼앗아 들고 손가락 위에 올렸다. 솜씨 좋게 회전하는 손목에 공이 뱅글뱅글 위태롭게 돌았다. 그러나 정작 빼앗긴 상대는 미간을 좁히고 고개를 기울였다.
“네? 뭘 안 가르쳐 주시는데요?”
“뻔하잖아. 서브 토스 요령 물어보는 거잖아요?”
“?? 저 그 거 아닌데요.”
“엣.”
통, 통통. 통통, 데구르르르.
손에서 떨어진 배구공이 모두의 생각 위로 한 번씩 튀어 올랐다. 활동은 끝났지만, 정리가 끝나지 않아 부원들이 거의 남아 있는 시간이었다. 볼 바스켓에 공을 주워 넣던 킨다이치도, 네트를 품대로 접어 넣던 쿠니미도 사이좋게 시선을 둘에게 돌렸다.
그렇게 수많은 관심 속에서, 주인공인 ‘카게야마 토비오’는.
“오이카와 선배!”
매번 악당 선배의 역할을 하던 ‘오이카와 토오루’에게.
“좋아합니다!!!”
갑작스러운 히로인 역할을 부여했다.
“저랑 사귀어 주세요!”
불쌍한 킨다이치. 급작스럽게 자신의 동기에게 서브 남주인공 역할을 안겨주며 쿠니미 아키라는 입술 끄트머리를 올렸다. 배구 밖에 모르는 줄 알았는데 생각보다 훨씬 무대포인 구석이 있었다.
2.
부활동이 시작되기 한 시간 전이었다. 쿠니미는 손목시계를 한번 확인하고 체육관을 다시 보았다. 이미 네트도 준비되어 있었고, 배구 볼통도 가득가득 채워져 가지런히 놓여 있었다. 누가 했는지는 뻔했다. 쿠니미는 스트레칭 중인 카게야마 곁에 스포츠 백을 소리 나게 내려놓았다. 어제 대히트를 친 스캔들의 주인공이 거꾸로 된 시선을 던져왔다. 터무니없이 천진한 눈이었다.
“오이카와 선배랑은 풀었어?”
쿠니미는 담백하게 직구를 던졌다.
“므어?”
허리가 잔뜩 늘어난 채인 동갑내기 부원은 멍청한 반문을 했다. 멍청한 목소리였다. 그럴 줄 알았다. 쿠니미는 배구화를 신고, 끈을 꽈악 당겼다.
“…어제 일.”
“어제? …아. 그거.”
이번에는 옆구리를 확 늘려 발끝을 잡으며 동기는 대수롭지 않은, 그러나 애매모호한 대답을 내어 놓았다. 운동화 매듭을 두 번 단단히 묶은 쿠니미는 일어서서, 무릎 끝으로 카게야마의 허리를 꾹 눌렀다.
“으.....”
고양이 허리처럼 계속 늘어난 옆구리가 유니폼 밑으로 비쳐보였다. 쿠니미는 눈을 깜박였다. 여름이라 그런지 모기에 물어 뜯겨 있었다. 고개까지 완전 수그린 카게야마의 손끝이 발가락도 넘어 바닥에 닿아 있었다. 유연했다. 얼굴은 왕에게 진상될 소나무처럼 딱딱한데 말이다.
“못 풀었어?”
당장이라도 한 대 때릴 기세처럼 붉어졌다가 곧 냉정해지던 선배의 얼굴을 상기하며, 쿠니미가 다시 물었다. 우으응. 이상한 소리를 한번 낸 카게야마의 몸이 고무줄처럼 탄력 있게 제자리로 돌아왔다. 약간 상기된 얼굴이 스트레칭을 도와주던 동기를 올려 보았다.
“오해? 그런 거 없었는데.”
“그럼 혼 안 났어?”
“혼났어. 그런 건, 남들 있는데서 하는 거 아니라고.”
“흐응.”
오이카와 선배다운 대답이었다. 쿠니미는 자리에 주저앉았다. 자세를 잡자 카게야마가 어깨에 손을 올려왔다. 곧, 작은 무게가 실렸다. 쿠니미는 탄력 받은 고양이처럼 날렵하게 앞으로 상체를 내리 눌렀다. 생각보다 시시했다.
“아, 그리고 거절당했어.”
“당연하잖아.”
좀 더 극적인 전개도 재밌을 것 같았는데.
“당연해?”
“당연하지.”
“난 받아주실 때까지 할 거야. 서브토스도 배울거고.”
아, 그렇게까지 극적일 필요는.
3.
“오이카와상!! 서브 토스 요령 가르쳐 주세요!”
“싫거든요! 얄미운 토비오쨩에게는 절대로, 안 가르쳐 줄 건데?”
“오이카와!! 1학년 괴롭히지 말라고 했잖아!!”
여느 때와 다름없는 흐름이었다. 어떤 부끄럼도 보이지 않는 얼굴로 카게야마는 다시 오이카와의 뒤를 쫓았다. 적어도 ‘토비오쨩은 뻔뻔하다.’는 오이카와의 평가에 쿠니미는 동의를 표했다.
“혹시 어제 일, 헛것이었냐?”
“아니.”
공을 정리하던 킨다이치가 긴가민가한 표정으로 물어오자, 쿠니미는 간단하게 답했다. 이미 기울어져 있던 고개가 한층 경사를 높였다. 팡, 파앙, 팡. 쿠니미는 손에 들어 있던 공을 땅으로 내리치고 가볍게 몇 번 미팅시켰다. 조금 친해진 동기는 옆에서 떠나지 않고 서성거렸다. 후. 그는 마침 돌아오는 공을 두 손으로 잡았다.
“신경 쓰이기라도 해?”
“뭐? 아니? 아니? 내가 왜?”
“…난 좀 쓰이네.”
“진짜?”
“안 쓰이는 쪽이 이상한 거 아닌가?”
좋다고 했다. 눈에 띄게 실력이 출중한 동갑내기 사내아이가 같은 배구팀 주장이 좋다고 고백하고는 차였고, 그럼에도 불구하고 오늘도 뒤를 쫓아다니는 상황이었다. 신경이 쓰이지 않는 쪽이 부자연스럽다. 무기력한 눈동자를 잠깐 동그란 뒤통수에 두었던 쿠니미는 곧 돌아섰다. 물론 개입할 생각은 없었다. 킨다이치가 어깨를 툭 쳤다. 쿠니미.
“…설마 진짜 사귀진 않겠지?”
3명에서 2명이 된, 유망한 신입 둘은 서로 눈을 마주했다. 눈동자에는 같은 결론이 들어 있었다. 그럴 리 없다. 그런데.
4.
사귄대.
5.
“정말?”
어금니에 카라멜이 쫘악 달라붙었다. 혀로 살살 문질러 녹이면서, 쿠니미는 기가 막힌 소문을 되새겼다.
6.
어쩔 수 없었다고 생각한다.
7.
졸졸졸졸. 주어 뒤에 동사가 오는 것처럼 당연하게 카게야마는 오이카와의 뒤를 쫓았다. 그러니까 일종의 문법이자 공식이었다. 오이카와 뒤의 카게야마, 오이카와 옆의 카게야마, 때론 오이카와 앞의 카게야마 토비오. 오이카와의 팬클럽을 헤치고 들어가는 카게야마 토비오. 13살. 이제 막 초등학교를 졸업한 배구부 1학년.
“토오루쨩, 오늘 저녁에 같이 영화 보러 갈래?”
“으응? 나?”
“그건 안 됩니다.”
“꺄앗!”
가끔은 좀 웃겼고,
“오이카와 선배는 저와 사귀고 있어서 안 됩니다.”
가끔은 좀 위태로워 보였다.
“토비오쨩,”
다른 사람 눈을 의식하여 후배의 팔을 잡고 종종종 사라지는 쪽은 언제나 오이카와 쪽이었다. 그는 뒤돌아서 마음이 상한 여학생들에게 입모양으로 ‘미안’이라고 말하고 있었다. 2년 치보다 더 컸던 체격 차에 그 일은 언제나 수월했다. 마치 그걸 겨냥한 듯 보이기도 했다. 두 사람이 사라진 풍경 속, 남은 사람들은 그들에 대해 또 소문을 만들어 내었다. 마침 그 자리에 있던 쿠니미는 그저 소금 캬라멜을 씹었다.
“쟤 도대체 왜 저래.”
“뭐가?”
또 우연히 옆에 있던, 킨다이치는 질색하는 얼굴을 하고 있었다. 그는 소름이 오소소 돋은 팔을 슥슥 쓸어내렸다.
“자랑할 일이야? 적당히 해야지.”
“서브 가르쳐 달랄 때도 저랬잖아.”
“그거랑 이거랑 같아?”
“다를 게 있어?”
쿠니미는 간단하게 답했다. 카게야마 토비오의 세계는 원래 단순하고 무지했다. 무식하게 보일 정도로. 타인의 이해도 바라지 않았다. 왕에게 그런 걸 요구하면 목이 날아가지. 그는 코웃음을 쳤다.
“카게야마는 그런 거 구분 못 할걸.”
무릇 어떤 왕이든지 공평하게 가지고 있는 특성으로, 그 애는 배구를 독식하고 싶어 했다. 승리에 대한 탐욕, 뒷받침해 주는 재능, 아직 덜 자란 몸, 성장은 시작도 못한 사회성, 덜 떨어진 표현력. 하나하나 열거하다 보면 그게 ‘카게야마 토비오’였다.
“난 쟤가 왜 저러는지 알겠어.”
그러니까 결국 같은 문제였다. 독식하고 싶은 거다. 오이카와 토오루를. 그가 생각하는 가장 완벽한 배구를. 쿠니미는 카라멜 껍질을 주머니에 구겨 넣었다.
“이해하는 건 아니지만.”
“민폐잖아. 오이카와 선배에겐.”
“그러게.”
도대체 왜 장단을 맞춰주는 거지. 쿠니미는 가끔 동기가 버거웠다. 자신에게도 그럴 진데, 선배는 어떨까 상상해본 적이 있었다. 그렇게 모든 것을 가진 후배가 전력으로 뒤를 쫓는다. 그것도 애정까지 요구하면서. 끔찍할까. 패배감을 느낄까. 아니면, 그 역시 자신을 독보적이라고 느껴서 아무렇지 않을까.
그는 오이카와 뒤를 쫓아 멀어지는 카게야마를 보았다. 주장의 뒷모습을 쫓았다. 사실 그가 이해하지 못하는 것은 주장 쪽이었다.
8.
“토비오쨩을 왜 받아 주냐고?”
오이카와 선배는 특유의 장난스러운 표정을 지으며 어깨를 들썩였다. 쿠니미는 잠자코 기다렸다. 숙제를 하지 않아 담임교사에게 잡혀 있는 카게야마는 아직 오지 못한 시간이었다. 둘만 있는 부실에서 선배는 개인 라커의 문을 닫았다.
“아직 어린 아이잖아. 어쩔 수 없지.”
“저도 동갑이에요.”
“나이가 같다고 해서, 다 똑같이 대하긴 어렵지.”
그야말로 나이답지 않은 이야기를 꺼내면서 오이카와는 가방에서 유니폼을 꺼내 입었다. 성장기의 2년이란 차이가 크게 지는 법이라 쿠니미와는 달리 근육이 단단히 완성되어 있었다. 그렇지만 카게야마와 달리 쿠니미는 그런 것을 질투하거나 동경하지 않았다. 어차피 날 격차에 대해서 흥분하고 노력으로 이겨보려고 하는 건 카게야마 토비오 정도니까.
“글쎄. 사귄다고 해도 뭘 하고 있는 것도 아니고…. 토비오쨩. 아마 소꿉장난 같은 생각을 하는 거 아닐까. 넌 엄마 역할 해, 나는 아빠 역할 할 거니까. 뭐 그런 거 있잖아요?”
글쎄요.
“어차피 나 곧 졸업이고, 계속 뒤에 달고 다닐 수는 없잖아. 졸라지는 건 서브토스요령만으로도 벅차거든. 그나저나.”
그는 침착한 미소를 지으며 쿠니미의 어깨에 손을 올렸다.
“쿠니미쨩이 이런 걸 물어오다니 의외인데~.”
“소문을 듣는 거 보다야 이편이 정확할 것 같아서요.”
“엣. 소문 꽤 무성한가 보네. 그래서, 보기에 어때?”
“소문이요?”
“아니, 배구부원으로서의 토비오쨩.”
고쳐보니 어느새 주장의 얼굴이었다. 역시 상대하기 녹록한 사람이 아니었다. 쿠니미는 일학년이 되어 발끝으로 시선을 모았다. 질문의 답은 쉬웠지만 내밀기가 쉬운 것은 아니었다. 카게야마 토비오는 별로 좋은 평을 받지 못 했다. 처음에는 선망과 질투가 섞여 있던 것이, 지금은 혐오가 좀 섞였다. 그러니 최초의 감정들은 이제부터 더 탁하고 어둡게 변색을 시작될 것이다. 쿠니미는 입을 꾹 다물었다. 오이카와는 그 대답 없는 얼굴에 등을 돌리고 저지를 걸쳤다.
“가엾고 단순한 토비오.”
등 뒤에 1번이 빛나고 있었다.
“조금 걱정이 되네.”
존경할만한 주장이고 선배였다. 그런데. 연인에게는 어떨까. 라이벌에게는? 9. 시라토리자와에게 패배했고, 오이카와 선배는 최우수 세터상을 수상했다. 운 것은 딱 그 날뿐이었고, 선배도 후배도 모두 다시 연습에 매진했다. 어차피 다들 배구는 계속 할 거니까. 기회는 끝이 아니지. 목도리 위로 입술을 끄집어내며, 쿠니미 하얀 숨을 흘려보냈다. 겨울이었다. “우아, 우아아, 우아아아.” 두고 온 게 있다며, 부실로 돌아갔던 킨다이치가 헐레벌떡 뛰어왔다. 쿠니미는 그의 긴 다리가 이상한 방향으로 꼬이고, 마침내 서로에게 튀어나온 돌이 되어 넘어지는 것을 보았다. 긴 몸은 넘어지는 것 이상의 속도로 일어섰다. 얼굴이 시뻘개져 있었다. “우허어어.” 손가락은 제멋대로 이상한 방향을 가리켰다. 커다란 손이 머리 양옆을 잡았다가, 체육관을 향했다가, 입을 막았다가. 아주 바빴다. 쿠니미는 그저 고개를 끄덕였다. “두고 온 거, 교복 마이지?” “어, 우어어, 맞, 아니야, 집, 집에 있어.” “같이 등교했었잖아. 너 입고 있었거든.” 쿠니미는 무음의 난동을 부리는 중인 킨다이치 옆을 쿨하게 지나쳤다. 그런데 팔이 잡혔다. “가지 마!!” 결국 직접적인 요구 사항이 입에서 흘러 나왔다. “왜?” 가지 말라면서도 차마 따라오진 못하는 얼굴이 벌겋게 익어 있었다. 한겨울인데 말이다. 쿠니미는 주머니에서 소금 카라멜을 꺼내 킨다이치에게 던졌다. “그거나 먹고 있어.” 저벅저벅. 뽀작뽀작. 발밑에서 눈이 짓눌리며 소리를 내고 있었다. 어제 내린 눈이었는데, 날이 추워서인지 녹지 않았다. 아, 오이카와 선배와 카게야마는 아직 사귀고 있었다. 10. 부실 문은 열려 있었다. 그러나 쿠니미는 들어가지 않았다. 들어갈 필요까지는 없었다. 킨다이치를 쫓아낸 그것이 생각보다 시끄러웠기 때문이었다. “으, 으읏.” 그는 머리카락을 한번 뒤로 쓸어 넘겼다. 머리 스타일 때문에 손가락 사이를 빠져나온 것이 다시 시야를 가리는 것은 순식간이었다. 부실의 철제 데스크가 철컹거리는 소리가 났다. 어쩌면 개인 라커일 수도 있었다. 소리는 어설펐다. 그러나 제법 요란한 움직임에 문틈이 조금 더 밀렸다. 그래서 그저 아주 약간. 눈동자만 돌리면 되었다. 초점만 잘 맞춰주면 볼 수 있었다. 바닥을 나뒹구는 최우수 세터상패와, 금속 책상에 올라앉은 길고 늘씬한 다리 두 개와, 그 다리 사이에 있는. “….” 작고 가느다란 팔이 자신보다 한 품 이상 큰 상대를 가두려고 애쓰고 있었다. 그것이 버거워 바둥거리면서도 포기하지는 않는 행동들에는 집념이 고스란히 묻어 있었다. 탐욕스러워. 배구와 애정에 대해서. 고작 12살이면서도 대단히 탐욕스러웠다. “오이, 카와 선배.” “토비오쨩은 왜 자꾸 날 부를까. 아직도 부족해?” “….” 쿠니미는 조용히 부실의 문을 닫았다. 손잡이를 꽉 잡아 소리가 나지 않게, 문을 다물린 후에 조심스럽게 놓았다. 그것만으로도 안과 밖이 조금은 분리되는 기분이었다. “좋아. 윽, 해요.” 그럼에도 불구하고 어린 탐욕은 넘실거리며 문과 벽, 바닥의 틈을 비집고 흘러 나왔다. 저런 애정을 받는 게 좋을까. 저런 애정을 주는 게 좋을까. 배구도 그렇지만. 사랑도 참 귀찮게 하는 동기였다. 좋아해요. 좋아해요, 오이카와 선배. 좋아합니다. 끊기지 않은 말이 새록새록 새어 나왔다. 손을 내밀면 잡힐 것 같은 그 직선적인 애정에도 상대는 답을 주는 법이 없었다. 어쨌든 선배의 말처럼 소꿉놀이는 아니었다. 별다른 것을 안 하는 것도 아니었다. 어쩌면. 오이카와 선배는 카게야마를 얕본 것인지도 몰랐다. 11. “적어도 부실에서 그러는 거 아니지!” “왜?” “거긴 공동장소잖아!” “다 집에 갔었는데. 그 후에도 공동장소냐?” “누, 누가 올 수 있잖아!!!” “누가 왔었는데?” “내, 내가 왔!!!” “…봤어?” “중요한 건 그게 아니잖아!!” 쾅! 밀쳐진 몸이 사물함에 부딪쳤다. 순간 쿠니미는, 그 앞에서 키스하던 두 사람이 떠올랐다. 그리고 그것은 킨다이치도 마찬가지였는지, 본인이 밀쳐놓고 아무 말도 하지 못하고 있었다. 넘어지지 않게 라커의 손잡이를 뒤로 잡은 채로, 카게야마는 자신보다 키가 훨씬 큰 동기를 노려보았다. 매번 그쯤이면 말을 접던 킨다이치였지만 이번만큼은 지지 않았다. “너, 배구부에 왔으면 배구만 하란 말이야!” “너 지금 배구라고 했냐?” 얼음장보다 차가운 대답이었다. 몸을 제대로 세운 카게야마는 바닥에 떨어져 있던 무릎보호대를 주워들었다. 그리고 거친 손놀림으로 먼지를 털어냈다. “그, 그래!!” 셋 중에 가장 작은 애한테 잠시라도 눌렸던 것에 대한 반발심인지, 킨다이치가 더 큰 소리로 외쳤다. “요새 네 토스 치기가 얼마나 힘들어졌는지 알아?” “그게 내 탓이야?” “뭐?” 안 그래도 새파란 눈동자에 날이 섰다. 동그랗게 느껴지던 눈매가 날카로워 지고 있었다. 그래. 키가 작아 눈에 띄지 않았지만, 조금씩 하고 있었을 신체적 성장은 그렇게 가장 불편한 상황에서 모습을 드러냈다. 카게야마는 턱을 치켜들었다. 그것만으로도 상대를 내려다보는 듯 했는데. “네가 느린 게 아니라?” 가시 왕관이 조금씩 동그란 머리를 감싸며 자라나고 있었다. 12. “좀 더 빨리 뛰란 말이야!!” “더 빨리!” “빨리!!!!!” 13. 가끔은 생각했다. 누구라고 해도, ‘오이카와 토오루’의 뒤를 잇는 세터라면 부족했을지도 모른다고. 하지만 카게야마 토비오는 그런 정도가 아니었다. 팀을 비정상으로 만들고 있었다. …. 가끔은 생각했다. 문제는 ‘카게야마 토비오’만은 아니었을 거라고. 여러 가지 다른 이유가 있었을 거라고. 하지만 찬찬히 돌이킬 여유가 우리는 없었다. 가장 좋은 핑계가 앞에 있었다. 흠 잡을 게 그거 밖에 없었을지도 모른다. 어쨌든 둘은 나쁜 방식으로 계속 비교되고 있었다. 2년 차이 연인들은 졸업 후에도 라이벌이었다. 입방아에 내리 찧어지는. 14. 조그맣지 않은 목소리가 찬물처럼 주변을 고요하게 만들었다. 눈치가 없는 세터는 ‘곧 가겠습니다.’하는 말로 짧은 통화를 끝냈다. 그리고 자신에게 꽂혀 있는 시선들을 털어내지도 않고, 부실을 나갔다. 소리 나게 닫힌 문이 시작점이었다. 하. “아직도 오이카와 선배냐.” “저 새끼는 오이카와 선배 밖에 없지.” 점점 더 불쌍해지는 오이카와 선배. 쿠니미는 입 속에 소금 카라멜을 털어 넣고 우물거렸다. 달콤쌉사름한 맛이 동그란 입 안에 퍼졌다. “헤어지자고 해도 계속 찾아왔다던데.” “진짜? 누가 그래?” “누구더라…. 모르겠네. 어쨌든 나 오이카와 선배 집 앞에 서 있는 거 봤어. 편의점 가는 길이었거든. 한 밤중에.” “와, 코트에서만 자존심 부리나 봐.” “고백도 계속 했었잖아.” 쿠니미는 입을 우물거리다가 내리 걸리던 것을 손바닥 위에 뱉어냈다. 미처 다 벗겨내지 못한 은박지 조각 두 세 개가 눅눅히 젖어 있었다. 무릇 훌륭한 왕일지라도 사생활은 흠이 되는 법인데, 불만이 극에 달한 제왕에게 스캔들이란 얼마나 까기 좋은 소재인가. 상대가 오이카와 토오루만 아니었으면 이 정도로 끝나지 않았겠지. 아니, 어쩌면. “오이카와 선배도 진짜 피곤하시겠다. 졸업 후에도 뭔.” “아오바죠사이에서 고백도 많이 받으셨다고 했는데.” 상대 때문인가. 15. 정신을 차려보니, 혼자 남아 있었다. 킨다이치는 감독님의 호출에 등떠밀려 나간 모양이었다. 쿠니미는 천천히 경기장 문을 빠져나갔다. “얏호, 쿠니미쨩 아냐? 오랜만이야.” “오이카와 선배?” “키가 꽤 컸네? 오이카와상의 초섬세함이 아니면 못 알아볼 뻔 했어~?” 여전히 조금 시끄럽고 밝아 보였다. 그리고 아오바죠사이의 운동복이 잘 어울리는 체격이 되어 있었다. 쿠니미는 손가락으로 걸고 있던 수건이 툭 떨어지자 얼른 허리를 굽혀 주워 올렸다. “…여긴 어쩐 일이세요?” “후배들의 경기인데 보러는 와야지. 뭐, 늦어서 결과만 들었지만.” “카게야마는요?” 그는 킨다이치에게 물었던 질문을 똑같이 돌려 보았다. 경기 내용에 대해서 더 물어보려던 선배의 얼굴이 의아함에 펼쳐졌다가, 곧 원래대로 돌아왔다. “아아, 토비오쨩이라면 여기서 보기로 했는데 어쩐지 없네. 전화도 안 받고.” 오이카와는 곤란하다는 듯 웃었다. 부드러운 미소였다. “경기 중에 무슨 일이라도 있었어?” 당연히 있었다. 그 애는 열심히 했는데 거부당했다. 혼자서 싸우고, 혼자서 저버렸다. 배신을 당했다. 당신이 아군의 박수갈채를 받으면서 최우수 세터상을 받은 그 대회에서. 패배하고 배신당하고. 망신도 당하고. 뭐 그랬다. “최악이었어요.” “으응?” “당연한 결과에요.” “?” “걔는 3년 내내 당신이랑 코트에 섰거든요. 우리가 아니라.” 아시잖아요. 당신만 봤어요. 쿠니미는 차근차근 담아 두었던 말을 내뱉었다. 키타이치 배구부 전체를 대표해서 그렇게 말했다. 우리의 세터가 당신 뒤만 쫓느라고 우리는 보지 않았다고. 거절하지 그러셨어요. 받아주지 않으셨으면 되는데. 그럼 배구로만 쫓아갔려 했을텐데. 전부를 독식하려고까지는 하지 않고. “토비오쨩이…. 그랬어?” 그는 미묘하게 입술 끝이 틀어져 있었다. 여기는 코트 밖인데, 쿠니미는 극렬한 패배감을 느꼈다. “그래서. 선배는, 카게야마랑 계속 ‘소꿉놀이’ 중이신 거예요?” “어라. 쿠니미쨩. 그게 무슨 소리야.” “….” “보지 않았어?” 오이카와는 눈이 보이지 않을 정도로 생글생글 웃었다. “그 날 말이야. 부실 앞에서.” …아. “안 떠나고 계속 있었잖아.” 알고 계셨구나. 16. 그것은 자리를 떠나기 직전의 일이었다. 덜커덕. 커다란 소리가 났다. 쿠니미는 돌리려던 몸을 잠시 멈췄다. 급격한 방향 전환에 운동화 속 발가락이 꼿꼿하게 섰다. 그건 분명 앞뒤가 바뀌는 소리였다. 그러니까 위아래가, 안고 있던 자와 안겨 있던 자가 뒤바뀌는 그런 소리였다. 그리고. “토비오.” “아, 아악, 윽.” “토비오쨩.” “아아, …아아아,” “토비오.” 아까와는 비교도 안 될 만큼 커다란 잡음이 쿵쿵쿵 울리기 시작했다. 신음이라고 생각되던 소리에 물기가 배여 들었다. 쿠니미는 상상할 수 있었다. 근육이 이제 막 형성된 가느다란 다리가 열리는 것을. 커다란 손아귀에 잡혀 있는 발목을. 분홍색의 흉터 없는 무릎이 어깨 너머로 제껴져 가는 것을. 그리고 그 사이에 자리 잡은 남자가 주장의 유니폼 바지를 조금 내리는 장면 같은 것을. 17. “그런 걸 토비오쨩이 할 수 있을 리 없잖아.” 오이카와는 웃으면서 그렇게 말했다. 오른손 두 번째 손가락을 살랑살랑 흔들면서 날 가르쳤다. 소꿉놀이로 시작했을 것이 분명한 그 애의 연정을 그 이상의 것으로 부러 격상시켰노라. 더 집요한 뿌리를 내리도록 잘 키워냈노라. 라고. 18. 생각해보면. 19. 사랑과 동경을 구분한다는 것은 쉽지 않은 일이었다. 그런 위태로운 경계에서 네가 가지고 있는 동경이, 사실은 사랑이었음을 처음부터 알지는 못했을 거다. 그 애는. 그러니까 누가 가르쳐 줬겠지. 몰랐었는데. 20. 그게 당신이었다. 일은 그렇게 된 거였다. 사실. . 당신이 그 애를 독식했던 것이다. == 리퀘 글이었습니다.ㅠ0ㅠ 너무 늦게 드려서 죄송해요!!ㅜㅜ
“네, 끝났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