매사가 그런 법이지만 , 이 또한 굉장히 단순하게 시작된 이야기였다.

 

 나 유학가려고.”

 아무렇지 않게 던져진 말에 덜꺽. 하는 소리와 함께 수저가 떨어졌다. 누군가의 성격처럼 깨끗하게 닦여 있는 판유리로 덮인 식탁 위였다. 먼저 말을 꺼낸 쪽은 아무렇지 않게 젓가락을 들어 초밥을 집어 들어 입에 넣었다.

 

 재깍, 재깍. 재깍.

 

 침묵 속에서 시계는 똑같은 소리를 계속해서 내며 시간을 흘러 보냈다. 그렇게 고인 시간이 한참이 되어 가는데도, 상대에게서는 아무런 대답이 돌아오지 않는다. 약간 늦은 식사였던지라 미적지근해진 초밥을 잘 씹어 목구멍 너머로 밀어 넣은 의사 동기는 여전히 묵묵부답을 시전 중인 의사를 마주 보았다.

초밥 몇 개를 한꺼번에 넣어서 볼이 잔뜩 부풀어 올라 있었는데, 목구멍으로 넘어가는 것은 아무것도 없었다. 못 볼 것이라도 본 것처럼 눈을 크게 뜨고 손은 여전히 젓가락을 들고 있는 모양대로 굳은 동기였다. 마치 흘러가는 시간이 의사만 피해가는 것처럼 정지된 자세다. 여기까지는 딱 예상한 대로였다. 의사 동기는 픽, 하고 속으로 웃음을 짓고 젓가락 끝으로 접시를 톡톡 두들겼다.

 

 “너는 어쩔래?”

 

 재깍재깍.         째각.

 

 

 

  <의사와 의사 동기와 만우절 이야기>

    

 

-1-

 

 “아즈네, 그거 급하게 처리할 일이야?”

 “아니, 아주는 아니야.”

 “그럼 지금 가지 마.”

 “?”

 “왜라니, 못 들었어?”

 

 어이가 없다는 표정으로 반문하는 상대를 바라보던 간호사는 들고 있던 펜 끝으로 TV를 가리켰다. 뉴스에서는 기상 예보가 시작되던 참이었다. 저게 뭐? 라고 말하는 태평한 얼굴이 화면을 확인한 후 빠르게 사색으로 변해간다.

 

 “설마?” 믿고 싶지 않아하는 말에,

 “발동됐어.” 친절한 직장동료는 온점을 찍어주었다.

 “맙소사.”

 

 그랬다. 오늘 오전 병원에서는 다시 츠키시마 케이의 기상예보가 발동되었다. 사실 그 표현은 조금 부적절한 감이 있었다. 우선 예보가 될 수 없다는 점이 그러했고, 일단 발동되면 다른 날씨는 예보하지 않는다는 점 또한 그러했다. 저기압과 태풍. 천둥과 번개. 그게 전부였다. 아즈네반사적으로 결재 일자를 확인했다. 다행히 하루 이틀 정도 여유가 있었다. , 하고 숨을 내쉰 그가 소중한 것을 대하듯 품에 결재판을 안았다. 그리고.

 

 “설마 둘이 싸웠어?”

 자연스럽게 츠키시마 케이의 기상예보 발동에 가장 큰 지분을 차지하는 상대에 대한 질문이 이어졌다. 질문을 들은 상대는 애매모호한 표정으로 고개를 기울였다.

 “그걸 모르겠어.”

 

 보통 같이 발령되곤 하는 예보였다. 손바닥이 마주해야 박수가 쳐지듯이, 싸움은 둘이 하는 법이라서 보통 이런 날엔 카게야마 토비오의 일기도도 꽤 볼만한 모습이곤 했었다. 그런데 오늘은 아니었다. 그 쪽 일기도는 구름이 잔뜩 낀, 그러나 번뜩번뜩 천둥번개가 치는 것이 아니라 오로지 풀죽은 모습뿐이었다. 그래서 병원 사람들은 분명히 카게야마 선생님의 크나큰 잘못이 있었을 거라고 예측했다. 그리고 하루라도, 아니 한시라도 빨리 수술실의 폭군님께서 S의 의사새끼님께 사과를 해 주었으면 좋겠다고 생각했다. 자신들을 위해서. 그리고 병원의 안녕을 위하여.

 

-2-

 

 “츠키시마!”

 “...”

 “츠키시마.”

 “....”

 “....케이.”

 “?”

 

 항복하듯 이름을 부르고 나서야 대답이 돌아왔다. 그러나 고개는 여전히 화면만을 향하고, 자판을 두들기는 소리는 시끄럽게 방을 채운다. 원래대로라면 가볍게 노닐어야 하는 기다랗고 얇은 의사 동기의 손가락은 실로폰이라도 치는 거처럼 힘주어, 팡팡팡 키보드를 치고 있었다. 다다다다다다다. 울리는 기계의 소리를 들으며 카게야마는 쭈볏쭈볏 등받이 없는 의자 위에 앉았다. 드르륵 하고 바닥에 다리가 끌리는 소리까지 들었으면서, 가까이 다가온 온기를 알아챘으면서도 동기의 어깨는 움직이지 않는다. 그에 입술이 삐죽이 튀어나왔다가 사르르 사그라들었다.

 

 “뭐 봐?”

 “유학 서류.”

 

 화면 속에는 보란 듯이 유학에 대한 수속 서류가 띄워져 있었다. 카게야마도 알고 있는 곳이었다. 굉장히 유명하고, 굉장히 비싸고, 굉장히 멀다. 몸이 화면으로 들어갈 것처럼 기울었다. 파란 눈동자가 정신없이 움직인다. 읽어 보려고 하고 있는 것이다. 귀를 뒤로 잔뜩 접어 내리고 바르르 떠는 토끼 같은 동기. 츠키시마는 입에 물고 있던 막대사탕을 혀끝으로 굴려 입 안 반대편으로 밀어 넣었다.

 

 “여기 가는 거야?”

 “....” 사탕은 다시 한 번 반대편으로 데굴데굴.

 “멀어.”

 “, 멀지.” 이로 깨물어 버릴 것처럼 물었다가 다시 놓고.

 “오래 있다 와?”

 “, 그럴 거야.” 결국.

 “....”

 “....”

 

 와드득. 입 안에서 부숴 졌다. 혀에 온통 퍼진 단 맛이 기분 나쁘다. 앙상하게 남은 막대를 입술에 여전히 문 채, 츠키시마는 가볍고 짧게 숨을 뱉었다. 손가락 끝을 만지작, 만지작. 시계는 그 날처럼 재깍, 재깍. 눈은 여전히 화면을 헤매고, 어깨는 바닥으로 꺼질 것처럼 내려앉아 있었다. 그런데도 왜 말을 못 해? 같이 가자고, 혹은 가지 말라고. 최소한 가는 거 싫어. 라는 말 한 마디가 그렇게 어려워? 잘게 잘린 사탕조각을 다시 잘고 잘게 부수며 동기는 끓는 속을 뜨거운 숨으로 뱉어냈다. 평소에 넘치던 패기는 도대체 어디로 간 걸까. 내 집 앞에 와서 당당히 너랑 잘 거야.’라고 말하던 동기가 맞긴 한가. 츠키시마는 지금 보이고 있는 카게야마의 소심함을 도저히 이해할 수 없었다. 이 소심함의 시작으로 다시 돌아가면, 일이 터진 것은 어제였다.

   

-3-

 

 어제는 만우절이었다. 평소라면 그런 식의 장난과는 억만년 정도 떨어져 있는 카게야마와 츠키시마였다. 다음날이 오프여서 평소처럼 같이 자고 일어나 초밥을 꺼내 먹을 때까지만 해도 장난을 칠 생각도 별로 없었다. 그러니까 사실은 그냥 충동적으로 내뱉은 말이었다. 아무리 눈치 없는 동기라도 거짓말이지?’ 정도는 물어볼 줄 알았다. 그렇게만 물어봐도 더 속일 생각이 없었다. 속일 생각을 하지 않아도 속일 수 있는데 구태여 그런 일을 할 필요가 없었다는 쪽이 더 가깝지만. 그런데.

 

 “난 못 가.”

 

 이상하게도 한참동안 말이 없던 동기는 그런 대답을 내어 놓았다. 기가 차서 츠키시마는 눈을 들어 카게야마를 바라보았다. 동기는 필요 이상 진지한 얼굴이었다. 거기서 일단 무언가 삐끗했다는 생각이 들었지만 설마설마했었다. 어쨌든 거기까지였다면 그냥 넘어갈 수도 있었다. 거짓말이었어. 라는 말을 재빨리 던지고 만우절이라는 개념을 가르쳐 주면 될 일이었다. 그런데 눈치도 없고, 센스도 없는 동기가.

 

 “건강하게 잘 다녀와.”

 

 라며. 그 자리에서 자신을 외국으로 보내버렸다. 그러더니 자리에서 일어나 설거지통에 식기를 와르르 쏟아 버리고는 집에 가 버린 것이다. 첫 대답이 나올 때보다 더 신속하게 이루어진 일이었다. 내가 만우절 장난을 당한건가? 처음 츠키시마는 그렇게 생각했다. 그런데 지금 하는 꼴을 보니 모두 진심이었다. 혼자 가라는 말까지 전부 진심이다. 속이야 어떻든 간에 거짓말은 아니라는 사실에 뒤통수를 제대로 맞은 기분이었다. 방금 전까지 침대 위에서 조금의 틈도 허용치 않고 붙어 있던 동기가 보여준 배신이었다. 역시 카게야마는 자신의 속에 천불을 내려고 태어난 것 같다. 라고 생각하며 그는 이를 악물었다.

 

 그래, 생각해보면 자신의 잘못이었다. 이 단순한 동기에게 너무 고차원의 장난을 쳤지. 내 죄야. 그는 백번 양보했다. 그렇게 생각했다. 그래서.

 

 “아직 취소할 수 있어.”

 라고 던졌다. 솔직히 조금 자존심이 상했지만 이 정도는 접어줘야 알아먹을 것이라고 생각했다. 그런데.

 “...아니야.”

 

 와, 좋아하지도 않고 배운 적도 없는 욕이 나오려고 해서 의사 동기는 다시 한 번, 이를 꽉 다물었다. 그러나 이젠 정말 더 이상 참을 수가 없었다. 그는 회전의자를 휙 돌려 옆에 앉아 있던 동기를 마주 보았다. 그리고 한껏 오그라들어 있는 토끼의 턱을 꽉 잡았다. 어제부터 피하려고만 하는 짙푸른 눈동자를 똑바로 잡아챘다.

 

 “이번이 마지막 기회니까 잘 대답해.”

 “..

 

 . 이겠지. 고개를 얕게 끄덕이는 것에서 볼살이 밀렸다 돌아가는 것을 보며 츠키시마는 크게 숨을 다잡았다. 안경을 쓴 얼굴은 의사의 전형적인 표본인 것처럼 이지적이고 날카로웠다. 그 얼굴로 자신을 좀 봐달라는 듯이 굴면서도, 입 밖으로는 전혀 다른 이야기를 꺼내놓는 이율배반적인 동기를 뚫어져라 보면서 의사는 천천히 힘주어 한 마디, 한 마디를 던졌다.

 

 “정말 나 혼자 유학 가?”

 “.....”

 

 세상이 무너진 표정이 이거겠지. 자신이 없이 살아온 날보다, 함께 살아온 날이 더 많은 동기였다. 같이 있는 것이 당연했고, 없어지는 것은 상상하지 않았다. 애정은 두 번째로 미뤄놓더라도 갑작스러운 존재의 박탈이 주는 스트레스는 상당할 수밖에 없었다. 그냥 평소처럼 가지 마. 하고 말하면 되는 일인데, 이 단순한 문제를 복잡하게 꼬아버리는 고집이 이해가 가지 않아서 미간이 사정없이 좁혀진다. 내가 여기까지 했으니까 너도 뭘 좀 해 봐. 머뭇거리던 입술이 안으로 한번 들어가 모습을 감추었다가 천천히 내밀어지고.

 

 “.........”

 

 응이다. 분명히 응이라고 했어. 츠키시마는 정말로. 턱이 아프도록 이를 꽉 물어뜯었다. 가만 안 둘 거야. .

 

 의사와 의사 동기와 조폭이야기 <에필로그(2년후)+잡담>

 

 흐릴 것이라는 예보와는 달리 날이 좋았다. 왠지 시작부터 행운인 거 같아서 남자는 하늘을 보며 씨익 웃었다. 건들거리는 몸은 들어갈 때보다 오히려 건강해졌다. 규칙적으로 먹고, 운동한 덕이었다. 그렇다고 다시 돌아가고 싶은 건 아니었고, 거기서 좀 세상과 단절되어 있었다고 해서 죄가 사라지는 것도 아니었지만 값을 치룬다는 것은 역시 나쁜 기분이 아니었다. 남자는 등에 진 짐을 다시 한 번 고쳐 메고, 숨을 크게 들이마셨다. 이게 바깥공기라는 거구나.

  빠아앙-!

 시끄럽게 울리는 클락션 소리에 무심코 고개를 돌렸다. 처음부터 마중 나올 사람은 없다고 생각해서 자신일 거라는 생각은 못했다. 그런데 왠지 그 검은색 차량은 쿠로오가 보기를 기다렸다는 듯이 차창이 내려가고.

 “쿠로오씨!”
 "의사선생?"

 2년 전보다 머리가 조금 더 길어진 의사 선생이 차창 밖으로 몸을 빼고 손을 흔들었다. 에에? 쿠로오는 진심으로 놀라서 손을 늘여뜨리고 입을 벌렸다. 온다고 짤막한 편지를 남기기는 했지만 당연히 안 올거라고 생각했다. 그보다 동기가 보내 줄 리가 없다고 생각했는데. 하는 순간 그 뒤로 조그맣게 동기의 얼굴도 눈에 띄었다. 불만스러운 듯이 핸들에 몸을 기대고 있었지만, 왠지 쿠로오는 그가 웃고 있는 것 같기도 했다. 왜지. 그는 소름이 오소소 돋는 것을 느꼈다.

 “이거 갚으러 왔습니다!”

 의사선생의 손에는 포장 하나 되지 않은 콘돔이 상자 째 흔들리고 있었다. 2년 전과 조금도 바뀌지 않는 촌스러운 문구가 눈에 띄는 빨간색으로 표시되어 있었다. 자신을 내보내 준 교도관을 비롯해서 꽤 많은 사람들이 이 진귀한 광경을 놓치지 않고 눈에 담았다. 뼈에 사무치는 수치감에 쿠로오는 두 손으로 얼굴을 가렸다. 나는 친절하지만 부끄러움은 아는 남자야. 의사선생. 게다가 이제 막 사회로 나온 새파랗고 파릇파릇한 영혼이었는데. 벌써부터 더럽혀져 버렸어.

 “쿠로오씨!!”
 “미안한데, 나 차에 태워주고 주거나 아니면 모르는 척 해 주면 안 될까.”

 자신임을 알리고 싶지 않아서 웅얼거리듯 내뱉은 말이었다.

 “네? 잘 안 들립니다! 이거 2년 전에 빌려썼던 ㅋ-”

 거기까지는 차마 하게 할 수 없었던 츠키시마가 카게야마의 입을 막았다. 그렇게 한 팔로는 카게야마를 틈없이 끌어안은 채, 한껏 몸을 기울인 의사선생은 2년 더 성숙해진 표정으로 입가를 비스듬히 띄워 올린다. 그리고는.

 "아, 그 때는 참 잘 썼습니다. 쿠로오씨."
 
 라고 말한다. 쿠로오는 지난 2년 간, 츠키시마가 이 날을 얼마나 고대하고 있었을지가 손에 잡힐 듯 분명하게 느껴졌다. 
 이 망할 의사 선생.

 드라마에서 악역을 맡았다고 해서, 배우들이 사이가 나빠지라는 법은 없지?
 라고 생각하면서 정말로.  -끝-

 

<비하인드 스토리들>


1. 츠키시마는 여자에게 인기가 있는 편이었고, 카게야마는 종종 남자를 끌어당기는 편이었다. 대학교 시절 츠키시마에게 집착하던 여자 선배가 있었다. 여러 가지 이유가 있지만, 츠키시마가 애인을 만들지 않은 이유에는 그 여자 선배 일도 있었다. 그래서 집착하는 것에 질색하게 된 것인데, 카게야마와 연애를 하면서 츠키시마는 그 여자를 조금은 이해하게 되었다.
2. 토비오에게 연애감정을 느꼈던 사람은 츠키시마나 쿠로오가 다는 아니다.
3. 본편 시점 이후에, 그리고 쿠로오를 만나기 전 시간 동안 둘은 잘 지낸다. 토비오는 종종 츠키시마를 화나게 하는데, 그럴 때는 '무조건 들어주기'를 해야 한다. 가장 처음에 무조건 들어줘야 했던 것은 병원에서, 둘만 야근 중일 때..(두둔!!) 토비오가 진찰의자(그 산부인과에서 쓰는 다리 벌려지는 의자!)에 앉아서 하는 역할극 섹스였다. 그 후로 토비오는 없는 센스를 갈고 닦으며 잘못하지 않으려고 정말 조심했다. 몰입한 츠키시마는 무섭다. 라는 것이 카게야마의 감상이었다. 재밌지만 들킬까봐 두 번은 역시.. 라는 것이 츠키시마 쪽 감상.
4. 그런 것 치고는 병원 사람들은 금방 알아차렸다. 그렇지만 둘의 관계를 실제적으로 인정한 적은 없고, 사람들도 한 편으로 믿고 싶지 않아(..)해서 그냥저냥 둘은 애매한 관계로 끝까지 남았다. 그러나 둘이 빠진 회식 자리에서 이름은 자주 오르내린다. 여러 가지 방면으로.
5. 3번과는 달리 츠키시마는 카게야마를 화나게 하는 일은 없다. 사실 카게야마는 버럭은 잘 하지만 감정적으로 화가 나는 일은 별로 없다. 수술실에서 버럭버럭 하는 것도 사람에 대해서 하는 것이 아니라, 행동에 대해서 하는 것이다. 그래서 사람이나 상황을 가리지 않고 화를 내서, 병원장 딸을 울렸다. 츠키시마는 이를 '카게야마의 패기'라고 부른다.
6. 츠키시마 아버지 일로 린치를 당하기도 했지만, 당시 수술 담당자였던 의사가 손을 썼던 덕에 일할 병원을 구하는 것이 쉽지 않았다. 지금 있는 병원은 그럴 때, 둘을 받아준 곳이었다. 결과적으로 잘 된 거긴 하지만 그래서 병원을 옮기는 일을 어려워 하는 부분도 있다.
7. 그렇지만 츠키시마는 유학에 대한 동경을 한 적은 있다. 카게야마는 그다지 외국을 좋아하진 않는다.
8. 자수에 대한 보상으로 쿠로오는 어린 시절 친척에게 빼앗겼던 재산에 대해 청구할 수 있도록 법적 조언을 받을 수 있게 되었다. 2년 동안 감옥에서 좋은 변호사를 만나 그것을 준비했다. 그 후에 잘 풀려서 의사선생들 보기에 조금 당당해진 쿠로오다. 본편 기준 5년쯤 지나면 재산은 쿠로오가 조금 더 많아진다. 와 억울해.라고 말한 츠키시마는 쿠로오를 가끔 금수저님이라고 불렀다. 그래도 누가 더 상대를 부러워하는지는 명확하다.
9. 외전을 쓴다면 역시 전부터 생각한대로 오이카와의 귀환. 참.. 어느 분야라도 능력쩌는 선배 역할로는 오이카와 토오루상이 최고다. ㅠㅠ
10. 원래의 엔딩이랑은 조금 달라졌는데, 쿠로오의 조직이 친절한 남자를 잡기 위해 토뵤선생을 납치하는 활극이 초기 버젼이었다. ㅋㅋㅋㅋㅋ 쿠로오랑 츠키시마 둘이 그 날 밤 이야기 하다가 그 사실을 깨닫고, 같이 차 운전해서 들이닥쳤지만 천운이 따라주는 토뵤선생은 하필 그 때, 맹장이 터진 보스에게 응급처치 중이었음. 그래서 문을 들이박으면서 등장한 차는 응급차량이 되어서 삐뽀삐뽀....그런 이유로 조직에서 나오는 일도 잘 풀리고, 토뵤선생은 뒷골목 형님의 은인님이 되어 행복하게 살았다는 스토리...?
11. 둘은 집을 합치지는 않는다. 의외로 자신의 공간이 있다는 것이 중요한 두 사람. 그렇지만 보통 같이 지낸다. 쓸데없이 돈 낭비 중. 다만 서로의 집에 서로의 옷이랑 속옷 같은 것이 엄청 많아져서, 같은 집에서 자고 와도 병원 사람들이 실눈뜨고 지켜보는 경우가 좀 줄음.
12. 10번처럼 엔딩이 났다면 아마 엔딩 문장은 <클리셰가 왜 클리셰인지에 대하여>였을 듯. 그러나 지금으로 바뀌면서 우리의 이야기도 여기서 완결되었다.로 변경되었다.
13. 쿠로오와 의사선생들은 콘돔 사건 이후로도 종종 교류를 하게 되는데, 토비오가 술을 너무 먹고 싶어하면 가끔 쿠로오가 몰래 다른 컵에 타준다. 쿠로오는 이야기를 참 잘 들어주는 친절한 남자여서 술친구로서 토비오가 매우 좋아한다. 츠키시마는 가끔 있는 일이라 모른 척 해 주지만, 컨디션이 안 좋으면 그걸 빌미로... 무조건 들어주기를...ㅎㅎㅎㅎㅎㅎ
14. 그렇게 지내다보니 어느 날, 쿠로오는 카게야마의 거짓말을 눈치채게 된다. "날 찼으면 포기하게는 해 줘야지." 쿠로오는 그렇게 말하면서 웃는다. 혹시 츠키시마에게 무슨 일이 생기면 이라는 가정하에 쿠로오는 계속 카게야마의 곁에 있는다. 참 나쁜 생각이지만 츠키시마 역시 자신에게 무슨 일이 생긴다면, 이라는 가정 하에 쿠로오를 묵인하는 부분도 있다. 둘 중 누구도 카게야마가 먼저 사라지는 상상은 하지 못했다. 카게야마는 츠키시마가 자신의 곁에 영영 함께 있을 거라고 생각한다. 그리고 쿠로오 역시, 언제부터인지는 모르지만 '언제라도 떠날 사람'은 아니게 되었다. 
15. 만우절날 장난으로 '나 곧 유학갈거야, 너는 어떻게 할래?'라고 이야기한 쪽은 츠키시마. '나는 유학 싫어. 안 갈래.'라고 해 버린 카게야마선생이 사건을 키웠고, 결국 일파만파로 퍼진 소문에 왠지 모를 오기까지 겹쳐져서 츠키시마는 캐리어까지 챙기게 된다. 눈 앞에서 캐리어 가방 손잡이까지 잡자 그제야 츠키시마 옷자락 끝만 잡고, 말은 한 마디도 못하는 카게야마 선생. 끝까지 가지 말라는 말은 안 하는 카게야마에게 폭발한 츠키시마가 몸으로 다그치자 그제야 '안 갔으면 좋겠어. 가지 마.' 라고 어렵게 진심을 꺼낸다. 유학을 가고 싶어하는 츠키시마도 알고 있고, 대학교 선배에게 데여서 집착은 싫어하는 츠키시마도 알고 있어서 잡으면 안돼. 안돼. 하고 있었던 토비오 선생님. 일단 한번 말하고 나니 그 다음에는 소리도 제대로 못 내고 눈물만 마구 쏟아내면서 이런 말 한다고 날 싫어하지 마. 하는 토뵤 선생에 덕통사고를 당한 츠키시마가 술술술 스스로 죄를 고백하고, 드물게 제대로 삐진 토뵤선생에게 카레 정찬을 몇번 바친 후에야 다시 해피엔딩. 그 후로 만우절에 하는 모든 츠키시마의 말을 믿지 않는 토비오 때문에, 곤란한 일도 생기곤 했다. 너 오늘 긴급수술 잡혔더라->오늘 하는 말은 다 거짓말->토뵤 선생 어디갔어!!!!
16. 15번의 일 이후로, 츠키시마는 유학에 대한 모든 책자를 치웠다. 그 날이 너무 인상적이어서 메모를 해 두었는데, 내용은 '집착은 그 대상이 누구냐에 따라 불호가 갈리는 것이다.'였다. 

 

 <의사와 의사동기와 조폭이야기>

 

 츠키시마는 헤드셋을 낀 채로, 음악을 듣고 있었다. 볼륨은 최대치로 올라가 있어서, 원래는 평안하기 그지없어야 하는 선율이 웅장하게 머릿속을 두드린다. 사실은 고막을 아프게 할 정도 커서 이미 엉망이 된 합주였다. 하지만 그렇게라도 하지 않으면 다른 생각에 정복당할 것 같아 츠키시마는 소리를 줄이지 않았다. 사실은 며칠 째, 불면의 밤이었다.

 며칠에 걸쳐 누적된 피곤에 무의식적으로 감고 있던 눈을 살짝 떴을 때, 우연히 인터폰에 불이 들어온 것을 발견했다. 무거운 몸을 일으켜 연결버튼을 누르자 조그만 모니터 너머에는 동기의 얼굴이 있었다. 이 시간에 온 것이 새삼 놀랍지는 않았다. 그러나 얼굴을 보고 싶은 건지 더 떨어져 있고 싶은지 잘 분간이 가지 않았다. 가만히 화면을 노려보고 있는데, 팍, 하고 화면이 꺼졌다가 얼마 지나지 않아 다시 초인종이 울렸다. 한숨이 지어졌다.

 “....설마.”

 헤드폰을 목덜미로 끌어 내리자, 머리를 장악하던 소리가 멀고 먼 곳으로 사라진다. 대신 엄청나게 시끄러운 초인종 소리가 그 자리를 차지했다. 설마 계속 저러고 있었던 건 아니겠지. 아무리 골똘히 바라봐도 낮은 화질의 화면에서는 표정이나, 얼어버린 피부 같은 것은 알 수 없었다. 옆집에서 귀찮은 클레임이 걸려 오기 전에 츠키시마는 음악을 끄고, 느리게 몸을 움직여 문을 열었다.

 “이 밤중에 무슨 일이야.”

 일단 문은 열었지만, 츠키시마는 옆으로 비켜서지 않고 기대어 섰다. 그리고는 여전히 팔짱을 낀 자세를 고수하며 동기의 머리끝부터 발끝까지를 훑어보았다. 집에서 입는 편한 복장에 맨발 슬리퍼 차림이었다. 차는 끌고 다니지 않는 동기의 사정과 거리는 꽤 되는 두 집 사이를 생각해보니 잔소리가 나오려고 했다. 하지만 츠키시마는 입을 꾹 다물었다.

 “나 술 마셨어.” 시작은 동기가 했다.
 “알아.” 동기의 옷자락에서 올라오는 냄새를 모를 리가 없다. 원래부터 싫어하던 냄새였고, 지금은. 지금은 혐오에 가깝다.
 “많이 마셨어.” 속도 모르고 하는 소리에,
 “...그럼 이제 집으로 가면 되겠네. 여기가 아니라.”

 냉정하게 대응해 주었다. 애초에 보는 눈을 신경 쓰는 타입이 아니었지만, 아예 다른 사람이 없는 프라이빗한 공간에서의 만남은 처음부터 날이 잔뜩 갈려 있었다. 츠키시마는 자꾸 일그러지려는 얼굴을 평소와 같이 만들기 위해서 계속 신경 써야만 했다. 동기의 단단하게 다물린 입가 또한 한일자처럼 직선이다. 하지만 어딘가 편안해 보이는 얼굴이어서 그게 새삼스럽게 화가 났다.

 “집에 가서 자든지, 아니면... 자든지.”

 계속 냉정해지려는 마음과는 달리 빈정거리는 말이 자꾸 튀어나갔다. 츠키시마는 똑같은 말이 주는 다른 상황을 떠올리며 불쾌한 표정을 지었다. 자신이 뱉은 침에 얼굴을 맞는 기분이었다. 당연하게도 동기의 표정 또한 한층 더 어마어마해졌다. 모든 것이 사실은 지나친 억측이라는 것을 알고 있었지만 브레이크가 걸리지 않았다. 자신은 오늘 고장 난 자동차였다. 아니, 그 때부터 그랬다. 매일매일 손질하고, 점검하여 문제없이 굴러가던 기계는 아주 작은 부스러기 하나로 퍼져 버렸다. 부릉부릉 소리만 나고, 연기만 내뿜으면서 원하는 대로 멈추지도 가지도 못한다.

 “나 속상해서 많이 마셨어.”
 “정말 술주정뱅이가 다 됐네.”
 “그 날도 속상해서 마셨어. 그리고 사실 너 때문이야.”
 “...나 때문이라고?” 그래, 라고 짧게 대답하면서 카게야마는 크게 고개를 끄덕였다. 츠키시마는 점점 더 동기가 알 수 없어졌다. 나?
 “오늘도 너 때문에 속상해. 그래서 술을 마셨으니까 돌아가면 또 쿠로오씨랑 잘지도 몰라. 아, 그리고 쿠로오씨가 돌아왔어.” 이건 그냥 술 취한 자의 횡설수설같이 들렸다. 그러나 중간에 끼어 있는 말이 사정없이 마음을 찌른다. 잠깐 풀리려던 마음이 도로 와르르 무너지고 거대한 돌산이 되어 내려앉았다.

 “...그러던지.”

 신랄한 대답과 함께 닫히려는 문을 동기가 두 손으로 재빨리 잡았다. 훅 끼쳐드는 알코올의 향에 희미하게 샤워젤 향도 섞여 있었다. 언젠가 한번 자신의 몸을 킁킁대더니 그 후로 어디선가 구해서 계속 사용한 것이었다. 20살 후반의 남자가 사용하기에는 다소 간지러운 향인지라, 정작 츠키시마의 것은 다른 것으로 바뀐 지가 꽤 되었지만 츠키시마는 그 향이 동기에게는 꽤 잘 어울린다고 생각했고, 바꾸지 않았으면 하는 마음도 조금쯤은 있었다. 물론 그렇게 말해준 적은 없었다. 카게야마가 고개를 들자 머릿결을 타고 향이 조금 더 진하게 전해져 왔다. 그에 화가 누그러지려고 하다가도, 이 얼굴이 누군가와 몸을 나눴을 생각을 하면 다시 번뜩 하고 꼬리를 휘둘러 왔다. 맞으면 꽤 아픈 가시 박힌 꼬리였다. 츠키시마는 문을 확 당겨버렸다. 그 통에 좁아지는 틈이 모조리 닫혀버리기 전에 온 몸으로 문이 닫히는 것을 틀어막은 카게야마가,

 “그치만 네가 가지 말라고 하면 안갈 거야.”

 라고 말했다. 츠키시마는 그 어떤 대답도 하지 않았다. 카게야마는 아직 남은 말이 있는지 숨을 크게 들이마시고 천천히 내뱉었다. 그러나 말은 꺼내지 못하고 입술만 몇 번이나 달싹거린다. 항상 그랬듯이 의사는 그 망설임을 끈기 있게 기다려주었다. 침묵 속에서 문을 꽉 잡고 있던 분홍색 손톱이 결국 하얗게 질렸다. 그런 후에야 결심이 선 눈동자가 츠키시마를 꿰뚫어 버릴 듯 바라보고. 그리고.

 “그리고 너랑 잘 거야.”

 

***


 “날 그 남자랑 같은 취급하지 마.”

 츠키시마는 생각만 해도 기분 나쁘다는 표정을 지었다.

 “나는 누구처럼 술김에 자고 그러는 사람이 아니야. 그런 질 나쁜 장난을 안 받아줘.”
 “이게 질 나쁜 장난이야?”
 “뭐?”
 “아까 낮에는 네가 기분 좋게 해 달랬잖아. 그게 더 질 나쁜 장난이지.”
 “어디서 알려준 말 그대로 읊지 마.”
 “...어떻게 알았지?”

 청산유수처럼 말을 굴리던 동기는 입을 딱 벌리고 경악했다. 쿠로오가 가르쳐 준대로 잘 흘러가는 대화라고 생각했는데, 어느새 상대는 한 수 위였다. 하지만 사실은 넘겨 짚어봤던 것일 뿐인 츠키시마는 ‘정답입니다’를 솔직하게도 외치는 동기의 표정에 제대로 골이 나버렸다. 신경질적으로 툭 치는 손길에 고스란히 밀려나는 동기의 얼굴을 보고,

 “내일 늦지나 마.”

 라는 말을 끝으로 정말 문이 닫혔다.

 전자식 도어 키가 자동으로 잠기는 소리를 들으며 카게야마는 가만히 서 있었다. 다시 초인종을 누르려고 올라가던 손가락이 멈칫하더니 버튼 주변만 배회하다가 누르지 못하고 다시 떨구어 졌다. 더 하면 정말 화를 낼 거 같았다. 어깨를 축 늘어뜨린 의사는 결국 몸을 돌렸다. 느릿느릿 걸어가는 발걸음이 무거웠다. 띵, 주머니의 핸드폰이 문자 도착을 알려 왔다. 찬바람이 부는 복도 가운데서 손을 후후 불어가며 화면을 열어보았다. 쿠로오였다.

 [성공? 실패?]
 [츠키시마는 여전히 제가 이제 완전히 싫은가 봐요.]
 [‘여전히’와 ‘이제’는 같이 쓸 수 있는 말이 아닌데, 의사선생]
 [꼭 츠키시마처럼 말씀하시네요.]
 [실패니까 돌아오면 나랑 자는 거야?]
 [그런 거 아니었어요.]
 [내기 아니었어?]
 [아니었어요. 그리고 저 지금 뭔가 엄청 부끄러워요. 원래 이런겁니까?]
 [나는 내기였는데.]

 각자 자신이 하고 싶은 말만 던지는 괴상한 흐름이었다. 문자판을 만지작거리며 뭐라고 보낼까 고민하던 차에 다시 한 번 띵-하고 음이 울렸다. 확 밝아진 화면에는.

 [그러니까 기대하고 있을게, 토비오♡]

 기가 막힌 답문에 입을 삐죽 내밀고 우-하고 짧게 소리를 냈다. 이래서는 집에 돌아가기도 힘들어서, 카게야마는 잠시 근처 아무 숙박업소를 가야 할지, 병원으로 가야 할지를 진지하게 고민했다. 하지만 와이셔츠 같은 거 여분을 들고 다니지 않았고, 지금 차림으로는 숙박업소나 수위실 중 어느 곳도 통과하기도 힘들 거 같았다. 어쩌지. 두 손으로 쥐고 있는 핸드폰의 화면을 들여다보면서 하던 고민은 어느새 자연스럽게 동기에게로 넘어갔다. 정말 어쩌지.

 “어렵다.”

 카게야마는 고개를 갸웃 흔들고는 별이라곤 없는 도시의 하늘을 올려다 보았다. 자신에게 츠키시마는 어려워서 마치 답이 몇 개인지 알려주지 않는 문제 같았다. 하나일 수도 있고, 모두가 답일 수도 있는 난해한 문제. 잠시 풀이방법을 더 고민하느라 서 있는 동안, 쿠로오에게서는 그 이상 연락이 오지 않았다. 얼마나 시간이 흐른건지 이제 맨발은 아플 정도로 차가워졌다. 발뒤축을 세워 살짝 구르고, 어디든지 가자라고 결정한 카게야마는 다시 걸음을 옮겼다. 그리고 뒤에서.

 
 현관문이 거칠게 열리는 소리가 들렸다.

 그 뒤를 잇는 가벼운 걸음소리에 돌아보기도 전에 커다랗고 건조한 손이 손목을 잡고 몸을 돌려세운다. 다음 순간, 방의 온기로 덮여져 있는 폭신한 홈웨어 속으로 파묻힌 코끝에 기분 좋은 섬유제의 향이 흘러들어왔다. 으와악! 진심으로 깜짝 놀란 소리를 내는 입 안으로는 옷감에 붙은 짧고 부드러운 실들이 밀려들어온다. 이미 꽉 끌어 안겨져서 틈 없이 밀착된 몸을 더듬어서 등을 껴안은 손이, 더 힘을 주어 날개 뼈까지 껴안고, 거기서 또 힘을 주어 어깨까지 껴안아 왔다. 구겨질 것처럼 몸이 꽉 조여들었다. 자신은 안겼다기보다는 상대의 양팔과 몸 사이에 끼인 것 같았다.

 “ㅡ으...”

 힘이 빠진 손에서 핸드폰이 떨어졌다. 시선을 내려 문자발신인의 이름을 본 츠키시마는 발끝으로 그것을 걷어차 버렸다. 매끈한 바닥 덕에 볼품없이 밀려가 모서리를 벽에 박더니 핏, 하고 전원이 꺼졌다. 만족이 가득한 눈빛을 지으며, 동기의 빨갛고 차가운 귀에 볼을 대고 누르자 온기 때문에 사르르 풀려가던 어깨에 다시 힘이 들어간다. 그런 어깨에 턱을 올린 채로 츠키시마는 불만이 서린 목소리로 말했다.

 “너, 그 남자한테 배워온 걸 나한테 쓰는 거 엄청 기분 나빠.”
 “그게...응, 미안해.”

 뭐라고 덧붙이려던 것을 그만두고 카게야마는 순순히 사과했다. 동기의 익숙한 온기가 너무 좋아서 입가가 엉망으로 풀어졌다. 츠키시마는 여전히 카게야마를 껴안은 채, 한 손만 올려 동글동글한 뒷머리를 자신에게 더 꾸욱 눌렀다. 기분은 나쁜데.

 “그래도 역시 보내진 못 하겠어.”

 여전히 예민한 목소리에는 분함이 잔뜩 담겨 있었다. 하지만 그에게 이보다 진심일 수는 없을 것이다. 카게야마는 동기의 대답을 놓치지 않으려고 귀를 세웠다. 천천히 몸이 떨어지고, 츠키시마는 자신을 똑바로 보고 있는 동기의 눈동자를, 자신 역시 정면으로 응시했다. 그리고.

 "가지 마."

 라고 말했다. 기다릴 것도 없이 세차게 고개를 끄덕였다. 뭐야. 그 바보같은 반응은. 그 남자가 밀당같은 거 안 가르쳐줬어? 라고 투덜거리면서도 동기는 자신의 볼을 두 손으로 감싸잡았다. 이제 무슨 일이 일어날 지 알 수 있었다. 카게야마는 가만히 눈을 감았다. 고개가 들리고 천천히 입술이 닿았다. 호흡이 섞였다. 

 아직 수술은 시작하지도 않았는데 벌써 기분이 좋았다.

<의사와 의사동기와 조폭이야기>

 

 집에 오자마자 샤워부터 한 카게야마는 텅 빈 집안에서 스멀스멀 기어 나오기 시작하는 고요함을 피해 텔레비전을 틀었다. 평소에는 거들떠보지도 않던 것이었다. 리모컨에 따라 이리저리 바뀌는 채널을 부지런히 쫓는 눈동자로 수없이 많은 장면들이 들어왔지만 사실은 머리속으로 하나도 입력되진 않고 있었다. 피곤하지만 잠은 안 오고, 배는 텅 비었는데 뭔가 먹고 싶은 생각이 없었다. 카게야마는 자신이 지금 무척이나 스트레스를 받고 있다는 것을 알고 있었다. 하지만 알면 뭐해. 해결할 방법이 없는데.

 “...이제 기분이 풀려?”

 복도에 흐르는 팽팽한 긴장이 무색하게, 동기는 아무렇지 않게 일어나서 멀리 날아가 부서진 안경을 집어 들고 그렇게만 말했다. 씩씩거리는 자신을 바라보던 시선의 온도는 차갑고, 그 안에서 느껴지는 거리가 너무 멀어서 오히려 얻어맞은 것은 자신이라는 생각까지 들었다. 사실 틀린 말은 아니었다. 자신을 너무나 잘 알고 많은 일을 해주는 츠키시마이지만 중요한 순간에 전전긍긍해 하는 것은 자신이었다. 사실 츠키시마는 내가 아니어도. 거기까지만 생각하고 카게야마는 고개를 좌우로 세게 젓고, 팔 사이로 얼굴을 묻었다.

 

 ***

 

 딩동딩동-디잉동.

 도어벨 소리가 시끄럽게 울었다. 카게야마는 혹시나 하는 생각에 벌떡 일어나, 카메라도 확인하지 않고 무심코 문을 열었다가, 문 밖에 서 있는 사람을 보고 그대로 문을 당겼다. 그러나 닫히기도 전에 문 사이에 발이 들어오고, 문짝을 잡은 손은 카게야마보다 큰 힘으로 자신 쪽으로 당긴다. 자신의 의도와는 달리 점점 벌어지는 문틈에 열이 받는다. 정말 일이 터지려고 들면, 동시에 터지는 법이었다. 기어코 활짝 열린 문틈으로, 역시 활짝 웃는 뻔뻔한 남자의 얼굴을 보며 카게야마는 인상을 확 구겼다.

 “와- 오랜만인데 문전박대라니 섭섭하네.”
 “쿠로오씨..............”
 “내가 칼을 안 꽂고 와서 그래?”

 남자는 여전히 가볍게 웃으면서 농담을 던졌다. 받아줄 여력이 없는 카게야마는 한숨을 쉬고 문을 잡아당기던 손에 힘을 풀었다. 그러자마자 쿠로오는 문 안으로 쑥 들어와서, 가벼운 옷차림의 카게야마를 온 힘을 다해 끌어안았다.

 “켁-” 숨이 막혀 내는 소리에.
 “여전히 분위기를 모르는 의사선생이야.”

 어깨에 마구 턱을 비비면서 어리광을 부리는 남자는 사실 오랜만에 맡아보는 의사선생의 체향을 마음껏 들이마시고 있는 중이기도 했다. 아기를 씻길 때 쓰는 바디젤 향이 은은하게 배여 있었다.

 “방금 샤워했어? 혹시 나 기다리고 있었던 거야?”
 “.....아니에요. 그리고 그냥 가주세요.”

 카게야마는 다른 말이나 화를 낼 기력도 다 떨어져 힘없이 요구했다. 그리고 그 요구에 대한 대답은 입맞춤으로 돌아왔다. 팔 사이로 들어온 손이 카게야마를 살짝 들어 올려 벽으로 밀고는, 팔뚝을 타고 올라가 손목을 잡아 쥐었다. 벗어나려는 카게야마의 다리 사이에 자신의 무릎을 넣어 앉히듯이 받치고 쿠로오는 일견 게걸스럽기까지 해 보이는 키스를 계속했다. 약간 들린 몸에 발끝만 간신히 바닥에 닿아 있는 카게야마는 이러지도 저러지도 못하고 쿠로오에게 휘둘렸다.

 “ 쿠로-, 윽, 앗, 오..씨!!!”

 오히려 그 날보다 더 호흡을 따라오지 못하는 조그만 입술을 입 안에 다 넣어버리고 이를 세워 잘근잘근 씹자 입술은 한층 더 부들부들하게 풀어졌다. 피가 몰려 빨갛게 색이 변한 입에 마지막으로 쪽-하는 소리가 나게 뽀뽀를 한 뒤에야 상대가 떨어져나갔다. 오늘만 두 번째 입맞춤이었다. 카게야마는 문득 첫 번째 상대자를 떠올리고, 우울한 기색으로 쿠로오를 밀쳤다.

 “츠키시마 선생이랑 또 무슨 일 있었어?”
 “이게 누구 때문인데요.”
 “에..나 때문?”
 “...아니에요. 제 잘못이에요.”

 조금 생각을 한 뒤, 풀이 죽은 목소리로 대답하고 카게야마는 거실 쪽으로 몸을 돌렸다. 그러나 뒤에서 확 끌어당긴 힘으로 다시 쿠로오의 품에 익숙한 듯 안겨진다. 아까보다 좀 더 노골적으로 허리를 감싼 손이 옷자락 안쪽으로 밀려들어왔다. 살결을 만지는 손에 묻어있는 농염한 성적 의도에 카게야마는 입술을 꽉 깨물고, 쿠로오의 팔을 잡았다. 기를 쓰며 밀어내려고 했지만, 좀처럼 밀려나지 않는 단단한 팔이었다. 오늘 정말 다들 왜 이러지. 카게야마는 몸을 빼려고 비틀면서 쾅쾅 발을 굴렀다.

 “좀, 하지 마세요!”
 “우울하면 또 내가 기분 좋게 해 줄까?”
 “아니요. 그거 싫어요.”
 “난 좋은데. 토비오랑 지금 당장이라도 또 하고 싶어.”

 머리카락 끝이 오그라들도록 낮은 목소리가 귀 가까이에서 들려왔다. 쫑긋하게 서버린 귀를 물어뜯고, 혀를 살짝 내밀어 안쪽으로 밀어 넣자, 품 안에서 몸이 팔짝 뛰어올랐다. 정신없이 휘몰아치는 이유 없는 공세에 질색하는 자신과 애정을 갈구하다 지친 몸을 맡겨버리고 싶은 자신이 공존한다. 그것은 모순이었다. 이러면 안 되는 거였다. 카게야마는 끈적한 소리가 나는 귀에서 쿠로오를 털어버리기 위해 고개를 마구 뒤흔들었다. 쿵 소리가 나게, 쿠로오의 발을 밟고, 아야야, 하는 틈을 타서 품에서 달아나 버렸다.

 “전 싫어요. 하나도 기분 안 좋아져요.”

 좀 더 확실하게 의사를 타진하고는 그대로 방으로 도망가려고 했지만, 도착하기도 전에 잡혀서 거실 소파 위로 넘어뜨려졌다. 다리가 얽히고, 팔이 뒤로 꺾여서 짓눌려진다. 조금 위험한 게 아닌가 하는 생각이 그때서야 들었다. 푹 수그려진 고개에 곱게 드러난 목을 한번 깨물고 쿠로오는 빙글빙글 웃었다. 사냥에 성공한 고양이처럼 득의양양한 표정이었다.

 “토비오가 싫다고 해서 안할 수 있는 거 아닌데.”

 동기 때처럼 쉽게 떨칠 수 없는 사내의 무게에 헉 소리가 났다.

 “싫어요. 쿠로오씨-”

 온 몸이 붙잡혀 있는 채로, 카게야마는 계속 고개를 저었다. 팔꿈치가 강아지 발처럼 박박 소리를 내며 소파를 밀어냈다. 어떻게든 몸을 일으키려고 할 때마다, 툭툭 건드려 쉽게 다시 무너뜨리면서 쿠로오는 카게야마를 털실뭉치처럼 가지고 놀았다. 건장함과는 다소 거리가 먼 가벼운 몸이 마구 굴려진 끝에, 결국 제풀에 지쳐 나가떨어질 때까지 시간은 얼마 걸리지 않았다. 조그맣게 입을 벌리고 학학 거리면서 카게야마는 결국 쿠로오의 품에 고개를 묻었다. 밥도 못 먹고, 정신적으로도 시달린 머리에 완전히 녹초가 되어 버린 몸은 뜨끈하게 열기가 올라오는 단단한 가슴 안에 여름날 초콜릿처럼 녹아내렸다. 구렁이 담 넘어가듯이 술렁술렁 자신의 뜻대로 굴려대는 상대방에게 억울함을 표하면서 다소 거칠게 이마를 비볐다. 땀이 날락 말락 하는 가느다란 머리카락에 코를 박아 넣고 쿠로오는 양껏 카게야마를 끌어안았다.

 “의사선생은 내가 없어져서 놀라지 않았어?”
 “3일 뒤에는 가신다고 했었으니까, 그런 거라고 생각했어요.”
 “처음을 가져간 남자에게 그렇게 매정해도 되는 거야?”
 “...아니 그건.”
 “처음 아니었어?”
 “그게 아니라요.”

 결국에 또 입을 다무는 쪽은 카게야마였다. 떠날 사람이라고 생각했다는 말이 상대에게 주는 상처를 정확히 알지 못했지만, 라면을 사러 나갔던 날, 자신의 질문이 사실은 츠키시마의 뜻이었다는 말을 꺼내지 못한 것처럼 본능적인 반응이었다. 지금 자신을 쓰다듬고 있는 남자는 손뿐만 아니라, 머리카락마저 거칠었다. 몸에는 여기저기 상처가 많이 나 있었다. 그래서 카게야마는 쿠로오에게 동기에게처럼 아무 말이나 할 수가 없었다.

 “쿠로오씨.”
 “응” 말은 무섭게 하면서도 더 이상 옷을 벗기려 들지도, 만지려고 들지도 않는 남자는 다정하게 대답해왔다.

 “상처 다 나으셨어요?”
 “걱정 돼?”
 “네. 이젠 아프지 않으신가요?”

 카게야마의 손에 아랫배에 조심스럽게 닿았다. 둥근 손끝이 머뭇거리다가 자신이 치료했던 그곳을 살그머니 어루만진다. 자극적이라고 느꼈지만 쿠로오는 카게야마가 하고 싶은 대로 하도록 내버려 두었다.

 “흉이 지지 않았으면 좋겠어요.”
 “그건 어렵지 않을까? 아무리 의사선생이 했다지만 워낙에 깊어서..”
 "하나가 더 생기겠네요." 
 "어차피 이거 하나도 아니라 괜찮아."

 담담하게 대답하는 쿠로오를 보니 불현 듯 어린 시절이 떠올랐다. 카게야마를 담당했던 주치의는 ‘보이지 않지만 너의 정신 이곳저곳에는 상처가 나 있다’는 표현을 사용했었다. 고칠 수 있지만 깊은 상처는 흉터를 남기는 법이고, 그렇게 남은 흉터는 안고 가야 하는 것이라고도 했다. 살아보니 참 맞는 말이었다. 그래서 쿠로오를 치료할 때, 가장 신경 쓴 것도 그거였다. 흉터가 없었으면 좋겠다. 여기에 박혀 있던 칼을 아무도 몰랐으면 좋겠다. 평탄한 삶을 살아왔다는 증거처럼 매끈해졌으면 좋겠다. 마치 인과의 앞뒤가 바뀌어 매끈한 살결이 평탄한 삶을 증명이라도 할 수 있는 것처럼 주의를 기울였다. 쿠로오는 상처를 만지는 카게야마의 손을 잡아 조용히 입을 맞췄다. 재미없는 얘기는 그만 하자.

 “츠키시마 선생이 많이 혼냈어?”
 “네..”
 “혼내기만 했어?”
 “...이제 저를 안 봐요. 절 싫어해요.”

 곧 눈물이 뚝뚝 떨어질 것 같은 표정이었다. 쿠로오는 그 표정과 또 그 동기의 행동이 하는 의미가 무엇인지 너무나 쉽게 알아차릴 수 있었다. 어쩌면 이미 서로가 알고 있을 이유에 대해서 외면해버리는 것은 모두 ‘그 날’ 때문인 걸까. 남자는 손에 쥐고 있던 손가락을 입에 넣어 살짝 깨물면서 웃었다.

 아, 정말 그런 것이라면 우습기 짝이 없는 일이었다.
 단 하룻밤의 일로 무너질 것이었다면,
 나는 너의 수많았던 날들을 시샘하고 넘어서지 못할 벽처럼 생각할 필요가 없었던 것이다.

 “모두 얘기했어?” 그 날 있었던 일 전부를.
 “...하려고 했는데..들어주려고 하지 않아서. 그리고 뭐라고 얘기해야 할지 모르겠어요.”

 다소 억울하다는 목소리를 감미롭게 귀에 담으며 쿠로오는 혀로 끊임없이 손가락을 건드렸다. 으으.. 하면서 빼내려는 것을 꾹 잡고, 눈으로 끊임없이 상대를 간음한다. 상대를 너무 잘 알아서, 오히려 넘겨 짚어버리게 되는 사각지대를 파고든 것은 자신이었다. 서로에게 억울하고, 서로에게 상처를 주도록 만든 것이 눈앞의 사람이라는 것을 모르는 의사선생은 발그레 하게 달아오른 얼굴로 버릇처럼 고개를 저었다. 영락없이 아기였다. 자신에게 있어선 둘 다 모두 어린이에 불과했다.

 병원 밖의 세상은 이래. 너희가 죽어라 걸어온 세상을 등지고 음습한 곳만 파고들어간 누군가는 이런 방식으로 원하는 것을 얻기도 해. 그래서 억울한 사람도 생기는 거지만, 그게 세상이야. 내 세상은 항상 그랬어.

 “너무하네. 츠키시마 선생. 이렇게 혼자 내버려 두고. 잘 알지도 못하면서.”

 알면 이번에 배에 꽂히는 것은 칼이 아니라 메스겠지. 그런 생각을 하며 쿠로오는 손가락과 손가락 사이를 말끔하게 핥아 내렸다. 입술을 꼭 깨물고, 쏟아지려는 무의식적인 신음을 참는 입가가 더할 나위 없이 색정적이었다. 경계가 희미해진 눈매 속에 선명한 푸른색 눈동자. 자신과는 다른 세계의 사람. 누운 쪽으로 쓸려 내려온 검은색의 머리카락. 언제나 가지고 싶고, 뺏고 싶은.

 “또 하자.”

 웃음기 하나 없는 소리로 제안했다. 카게야마는 고개를 저었다.

 “너랑 또 하고 싶어.”

 타액으로 젖어든 손바닥 깊숙이 입을 맞추며 다시 제안했다.
 똑똑한 의사 동기 선생이 잘못된 것을 눈치 채기 전에 해야 한다.

 “이번에는 정말 기분 좋게 해 줄게.”

 혼자 남아 약해진 네가 흔들려도 아무도 잡아주지 않는 지금 당장.

 

 ***

 

 “...싫어요.”

 카게야마는 쿠로오의 입술이 닿아 있는 손가락을 오므리고, 끌어당겼다. 던진 질문이 장난이 아니었듯이, 돌아온 답변 역시 가벼운 것이 아니었다. 그대로 몸을 일으키려는 카게야마의 허리가 쿠로오에게 재차 잡혔다. 반쯤 그에게 올라탄 자세로 의사는 자신의 손으로 치료했던 수상한 남자를 내려다보았다. 한 번도 자신을 이상하게 본 적이 없었던 사람이었다. 하고 싶은 말을 모두 해도 계속 귀를 기울여주고 재미있다고 말해주었다. 드물게도 자신의 보살핌이 필요했던 사람이기도 했다. 술을 많이 먹이고 ‘기분 좋은 일’을 시키긴 했지만, 그래서 동기와 돌이킬 수 없을 만큼 사이가 벌어져 버렸지만. 그래도.

 “저는 쿠로오씨 좋아해요.”

 카게야마의 손이 다시 한 번 상처를 만지작거렸다. 또 날 들어 올리네. 쿠로오는 입 꼬리를 끌어당겨 웃었다. ‘싫어요.’ 뒤에 따라 나온 소리라서 사실은 그러고 싶지 않았는데, 막상 들으니 웃지 않을 수가 없었다.

 “앞으로 나쁜 일은 안하셨으면 좋겠어요. 그래도 내가 고칠 수도 없을 만큼 다쳐오지는 마세요.”

 맥락 없이 중간만 뭉텅뭉텅 내미는 말이었다. 그러나 대충 알아들을 수 있어서 되묻지도 않고 가만히 듣고 있는 쿠로오의 손이 카게야마에게 잡혔다. 의사는 자신보다 큰 남자의 손을 두 손으로 잡고 자신의 심장 부근에 대고 눌렀다.

 “갑자기 심장이 빨리 뛰는 건 교감신경에 온 자극 때문이에요. 그런데 그 자극이 쿠로오씨가 좋아서인지, 아니면 그 날 때문에 몸이 떨려서 그런지 모르겠어요. 사실 저는 감정에 대해서는 잘 몰라서 많이 틀려? ....어.. 잘 틀려요.”

 자신이 제대로 된 표현을 사용하는 것인지를 생각해보는 눈동자가 한 바퀴 구르고 제자리를 찾았다. 쿵쿵 울리는 박동이 조금 안정을 찾을 때까지 쿠로오는 잠자코 기다렸다. 이윽고 조금은 침착해진 목소리로 의사는 다시 말을 이었다.

 “그러니까 ‘틀린다.’는 건 소뇌를 다친 사람에게 교뇌 수술을 하는 거랑 비슷한 겁니다.”
 “이번에는 정말 무슨 말인지 못 알아듣겠는데, 의사선생.”
 “수술이 잘못 되면 사람이 많이 다치니까, 어디가 잘못 되었는지 제대로 모르면서 하면 안 된다는 뜻이에요.”

 감정에도 이론처럼 정답이 있으리라고 믿는 의사선생은 시험문제를 풀듯이 자신의 마음을 털어놓고 있었다. 말을 돌리려면 얼마든지 그럴 수 있겠지만, 원한다면 언제라도 넋을 놓게 만들 수 있었지만 의사 선생의 표정이 너무 진지해서 그러고 싶은 생각도 들지 않았다.

 “그래서 그 날은 제 잘못이었어요.”

 쿠로오의 손을 잡고 있는 힘이 강해졌다. 또 잘못 하면 안 돼. 카게야마는 신중하게 말을 골랐다. 잘못한 것은 돌이킬 수 없었다. 몫은 그대로 받아두고, 앞으로. 잘못이 남긴 흉터를 끌어안고 다시 앞으로.

 “저는 쿠로오씨가 좋지만, 같이 기분 좋은 일은 할 수 없어요.”
 “왜?”
 “그건.”

 의사선생의 얼굴에 생기처럼 붉은 기가 돌았다. 상처에 지쳐도 굴복하지 않고, 자신의 감정을 직관하는 강인한 눈동자는 파랗게 빛났다. 기대와 달리 혼자 남아도 약해지지 않는 빛이었다. 이것저것 따지지 않고, 재어 보지 않아서 만인에게 공평할 수 있었고, 솔직할 수 있는. 쿠로오는 잡힐 듯 다가온 어떤 예감에 차게 웃었다. 어쩌면 자신은 처음부터 둘 중 더 강한 쪽을 잘못 알고 있었던 게 아닐까. 그래도 조금은 늦게 결론을 내려주는 편이 좋았는데. 조금만 더 시간을 주면 좋았을 텐데. 의사선생. 하지만 모든 이들의 시간은 공평하게 흘러가지 않는 법이라 자신에겐 짧았던 순간이 의사선생에겐 충분히 긴 시간이 되었다.

 그렇게 명확히 결론이 내려진 단단한 세계에 두 발을 딛고 서서 카게야마는 쿠로오의 손을 내려놓았다. 그건. 카게야마는 똑같은 말을 반복하며 말을 꺼냈다. 선명해진 눈빛 속에는 자신이 내린 답에 대한 확신과, 그 답이 주는 기분 좋은 깨달음을 가득 담고 있었다.

 “츠키시마가 싫어할 일은 하고 싶지 않기 때문이에요.”

 
<의사와 의사 동기와 조폭이야기 7> 

 

 병원에서는 지금 츠키시마 케이 대피령이 내려져 있었다. 시작은 여느 때처럼 사전 점검을 받으러 츠키시마에게 갔던 간호사가 눈물이 그렁그렁해서 뛰쳐나온 일이었다. 미리 계산해 놓은 마취약 용량에서 약간의 실수가 있었는데, 평소에도 찬바람이 쌩쌩 부는 얼굴이 그렇게까지 될 수 있다는 것을 처음 깨달았다는 감상평이 있었다. 그건 사실 기상이변 같은 일이었다. 츠키시마는 냉정하기로 이름 높았지만, 한편으로는 이성적이라서 필요 이상으로 누군가를 다그치는 일이 없었기 때문에 병원 내에서는 같이 일하기 나쁘지 않은 쪽에 속해 있었다. 마취약의 용량 실수가 위험하기 그지없는 실수라곤 해도, 사실은 오차 범위인 것도 맞았다. 그때까지만 해도 사람들은 오늘따라 예민하시네. 정도였다. 그런데.

 “다시 해오세요. 아니면 학교를 다시 가시는 것도 좋겠네요.”
 “이걸 일이라고 하신건가요? 이런 건 ‘방해’라고 부르는 편이 더 정확할 것 같은데요.”
 “그냥 그만두는 게 어떠세요? 그 편이 좀 더 생명을 구하는 쪽 같은데.”

 독설은 쉬지 않고, 불철주야 부지런히 일을 했다. 그에 간호사들과, 레지던트들과, 필요에 따라서는 동료교사까지 자존심이 산채로 화형당해야만 했다. 그것이 벌써 2주일 가까이 되어 가고 있었다. 휴가를 떠났다던 사람이 불시에 휴가를 철회하고 돌아왔을 때만 해도 ‘허허, 역시 천성이 의사셔.’라는 반응 일색이었던 것이, ‘우리를 벌하기 위해서 휴가를 접고 돌아온 도S 의사새끼.’가 되는 것은 얼마 걸리지 않았다. 사람들은 얼마든지 츠키시마의 휴가를 위해 자신의 월차를 포기할 생각이 있었고, 혹은 봉급을 털어 휴가비를 마련하자는 움직임도 작게나마 있었다. 비구름을 몰고 다니는 것 같은 저기압의 인상은 어떻게 해도 펴지지 않은 채, 시간이 지나가고 있었다. 이제 사람들은 서로의 얼굴만 봐도 한숨을 지었다. 예전에는 ‘카게야마 토비오의 일기도’가 있었는데, 요새는 ‘츠키시마 케이의 기상예보’가 선풍적인 인기를 끌었다. 물론 예보를 할 것도 없이 매일매일 저기압에 태풍상태였지만 말이다.

 게다가 오늘은 그 ‘폭군’이 복귀하는 날이었다. 사람들은 ‘병가를 내지 못해서 왔소.’라는 표정으로 출근했다. 이른 아침부터 카게야마 토비오의 방의 문패는 ‘OPEN’이라고 돌려져 있었다.

  

***


 “츠키시마.”
 “...”
 “나랑 얘기 좀 해. 츠키시마.”
 “...”

 에스프레소처럼 보이는 진한 커피를 벤티사이즈 컵으로 마시면서 차트를 확인하고 있는 츠키시마는 자신을 계속 부르는 카게야마를 없는 사람처럼 대했다. 있을 수 없는 풍경에 흥미를 느낀 것도 잠시, 차트를 전해주러 왔던 간호사는 불안에 차서 눈동자를 굴리고, 침을 삼켰다. 폭탄 돌리기 게임을 보는 것 같은 기분이었다. 츠키시마는 무표정한 얼굴로 차트를 간호사에게 건넸다.

 “이대로 진행하면 되겠네요. 두 시간 후로 준비해 주세요.”
 “츠키시마!”
 “일 하는 중이잖아. 기다려. 그 쪽은 이제 나가줄래요?”

 간호사는 그 말을 기다렸다는 듯이 고개를 꾸벅하고는 급한 걸음으로 방을 나갔다. 엑스레이 사진을 확인하느라 스탠드 불을 뺀 다른 불을 꺼두어 방은 어두웠다. 책상에 몸을 기대고 선 채, 츠키시마는 차갑기 그지없는 눈으로 카게야마를 내려 보았다. 여전히 커피를 입에 대고 마시면서 시선만 카게야마를 보는 것이 이제 ‘얘기해 봐’라고 말하는 듯한 태도였다. 카게야마는 왠지 주눅이 들어 두 손을 마주잡고 손가락 끝을 만지작거렸다.

 “왜 그냥 갔어?”
 “...”
 “연락도 안 받고..”
 “...”
 “지금도 말... 안 하고.”

 점점 수그러드는 목소리가 기어이 문장을 전부 꺼내지 못할 정도로 사라지자, 츠키시마는 마시던 커피 잔을 탁자에 올려두고, 팔짱을 깊이 꼈다. 좀 더 단호하게 닫힌 태도에 카게야마의 고개가 땅으로 떨어졌다. 숙여진 고개만큼 조그마해진 입술이 뭔가를 말하려는 듯이 달싹이고 멈추고를 반복했다. 츠키시마는 한 마디도 하지 않고 끈질기게 기다렸다. 그리고.

 “...미안해.” 마침내 카게야마는 항복 선언을 했다.
 “...” 물론 츠키시마는 상대방의 백기를 받아줄 생각이 없었다.

 “내가 잘못했어.”

 어깨까지 수그러들어서 더 작아 보이는 동기는 평소와 달리 완전히 저자세였다. 그것이 그 날의 일을 더욱 확실히 반증해 주는 것 같아서 츠키시마는 진정할 수 없을 만큼 분노가 치밀었다. 그 밤 이후로, 자신은 계속 화를 발산하고 다녔는데도, 화수분처럼 자꾸 채워지는 화는 이제 폭발을 한 걸음, 아니 반걸음도 남겨두지 않고 있었다.

 “뭘 잘못했어?”
 “내가.” 손에 핏대가 하얗게 솟을 만큼 강하게 쥐어 잡고.
 “쿠로오씨랑 기분 좋은 일을 해 버렸어.”

 동기는 여전히 제대로 말을 하는 법이 없었다. 츠키시마는 이를 악물고 웃었다.

 “기분 좋은 일? 너한테는 그게 기분 좋은 일이었어?”
 “그게 아니라..” 이제 실수를 깨달아 봐도 소용이 없었다.
 “몰랐네. 그리고 나한테 그걸 왜 사과하는지도 모르겠어.”

 그래, 더 화가 나는 것은 자신이 동기에게 이 사과를 받을만한 관계의 사람도 아니라는 것이었다.

 “애초에 네가 누구랑 술을 마시든, 섹스를 하든, 나랑은 상관없잖아.”
 “츠키시마, 화 내지 마.”
 “...그렇지, 생각해보니 내가 화 낼 일이 아니네.”

 신랄하게 말꼬리를 잡자, 동기의 눈동자는 패닉이 되어 뱅글뱅글 돌고 있었다. 츠키시마는 여기에 있는 것을 다 집어 던지고 싶은 기분이 들었다. 너는 왜 나에게 사과를 하고, 나는 너에게 왜 화를 내고 있는 거지. 사실은 그럴 일이 아니잖아. 계속 츠키시마를 괴롭히던 생각이 분노의 심지에 불을 붙였다. 이대로 계속 동기의 얼굴을 보는 것이 괴로웠다. 그래서 새파랗게 된 얼굴로 방을 나가려는 츠키시마의 팔을 카게야마가 잡았다. 아, 제발 이러지 마. 츠키시마는 끊어지려는 선을 간신히 붙잡으면서 매몰찬 얼굴로 카게야마를 보았다.

 “가지 마. 내가 다 잘못했어.”
 “너..”
 “내가 잘못했어.”

 츠키시마는 지금 자신이 보고 있는 동기의 표정이 무엇을 의미하는지 알고 있었다. 카게야마는 원하는 한 가지를 위해서 다른 모든 것을 포기할 수 있는 아이였다. 성격이기도 했고, 한 편으로는 그렇게 태어난 것이기도 했다. 눈을 가려놓은 타조처럼 앞으로만 달려가게 설계되어 태어났다. 그리고 그 길은 항상 의사였다. 그런데 지금은.

 지금은 자신이었다.

 츠키시마는 피식 헛웃음을 지었다. 카게야마에게 잡혀 있는 손을 빼어내서 결 좋은 머리를 쓰다듬자 무언가 기대하는 눈빛이 용서를 조르며 자신을 향해온다. 그대로 뒷머리를 잡고 확 당겨 고개를 꺾었다.

 “그 일을 용서받고 싶어?”

 아파하면서도 고개를 끄덕이는 동기를 보면서 츠키시마는 짓궂게 웃었다. 이미 심지는 모두 타 버렸고, 아무 소리 없이 폭탄은 터진 후였다. 휘몰아치는 감정에 자신을 놓아버리자, 자아는, 여태까지 쌓아왔던 모든 것들은 태풍 속의 연처럼 이리저리 찢겨 조각이 되고, 원래의 모양을 찾을 수도 없이 흩날렸다.

 “그럼 내 기분도 좀 좋게 만들어 줄래?”

 회의를 위해 방 한가운데 마련되어 있는 커다란 책상에 몸을 밀쳤다. 모서리에 부딪쳐 비틀거리는 몸을 살짝 들고 밀어서 무릎께까지 완전히 그 위에 눕히자, 깜짝 놀라 있는 눈동자가 바르르 떨렸다. 필요이상으로 묵직해서 청소 때마다 욕을 얻어먹던 데스크가 오늘만큼은 제대로 효용을 발휘하고 있었다. 단추를 잠그지 않고 입었던 흰 가운이 이불자락처럼 펼쳐진다. 고개를 들고, 몸을 일으키려는 동기 위로 올라타면서 츠키시마는 죄책감 없이, 그러나 애정이 아닌 다른 이유로 카게야마와 입을 맞췄다. 어깨를 잡고 밀려는 손목을 휘어잡아 귀 옆에 내리 누르고, 위라는 유리한 위치를 이용해서 사정없이 무게를 실었다.

 “츠키시마, 하지 마-”
 “왜 기분 좋은 일이라며.”

 그 사람이랑 기분 좋은 일을 했다며. 손목 두 개를 머리 위로 모아 한 팔로 내리 누르면서, 츠키시마는 자신의 목 끝까지 꽉 조여져 있던 넥타이를 더듬어 잡았다. 자꾸 손이 미끄러지려는 것에 신경질을 내며 확 당기자 그제야 매듭이 풀어지며 넥타이가 긴 끈처럼 변해 늘어졌다. 카게야마는 몸서리를 치면서 몸을 비틀었다.

 “무서워- 하지 마, 그만 해!!”
 “나랑은 싫어서 그래?”
 “하지 마!!!”

 결국 새된 소리를 내며 말끝이 올라갔다. 감정을 주체하지 못하는 손아귀에서 카게야마의 손이 빠져 나갔다. 츠키시마가 그것을 다시 잡기도 전에.

 
 철썩.

 뺨이 제대로 돌아갔다. 누군가 버튼이라도 누른 듯이 모든 행동이 정지되고, 무겁고 거북한 정적이 흘렀다. 거칠게 오르내리는 가슴에 맞추어 소리 나게 뱉어내는 숨소리만이 들리는 전부였다. 츠키시마는 다시 냉정해진 시선을 카게야마에게 돌렸다. 눈물이 그렁그렁 맺혀 있었다. 그에 한없이 더 차가워진 츠키시마가.

 “널 정말 이해 할 수 없어.”

 그건 카게야마가 제일 상처받아 하던 말이었다. 천천히 동기의 위에서 내려온 츠키시마는 방을 나섰다. 쾅, 하는 거친 소리와 함께 방에는 적막이 찾아왔다. 카게야마는 몸을 일으키려다가, 그대로 다리에 힘이 풀려 바닥에 넘어지듯 주저앉았다. 그리고는 혼자 남은 방에서 숨을 고르려고 애쓰면서 몸을 웅크렸다. 제대로 되는 일이 하나도 없었다.

 나도 잘못했지만, 너도 잘못했잖아. 사실은 그렇게 생각했다. 그렇지만 츠키시마는 사과를 할 때에는 자신의 잘못만 이야기하는 거라고 누누이 말해줬었다. 그래서 그런 건데. 억울하고 속이 상했다. 말을 들어주지 않으려는 것도 화가 났다. 다짜고짜 하려고 하는 것도 싫었다. 제일 싫어하는 말을 던지고 가는 것도 너무 억울했다.

 카게야마는 결국 참지 못하고 자리를 박차고 일어났다. 문도 거의 차버리듯이 열고는 성큼성큼 걸어가는 조금 더 키가 큰 동기를 쫓아서 달음박질쳤다. 막 업무를 시작한 종합병원의 복도에는 분주함이 가득했다. 환자와 의사, 그리고 간호사들이 지뢰처럼 펼쳐져 있는 복도 저 멀리 츠키시마가 보였다.

 
 “츠키시마!!!!!!!!!”

 고함에 가까운 소리에 멈칫 하면서 몸을 돌리는 순간, 카게야마 또한 동기의 바로 앞에 도착했다. 망설이지도 않고 카게야마는 온 무게를 실어 얼굴에 주먹을 날렸다. 몸이 그대로 넘어지고, 안경이 반짝 빛을 내며 날아가 저 멀리 떨어졌다. 바삭, 하고 부서지는 소리가 났다.

 종말인가?

 복도에 있던 모든 사람들의 머리속에 떠오른 단어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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