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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Blind Game



비가 내렸다. 소리는 없는데 양은 많은 비였다. 낮게 깔린 구름은 잿빛이었고, 빗방울은 투명했다. 공기는 원래 보이지 않는 것이고, 빗방울 또한 투명한데. 눈앞이 왜 부옇게 되어 있는지에 대해 카게야마는 생각해 보고 있었다. 어려운 문제는 아니었지만, 왠지 풀 수가 없었다. 도돌이표처럼 똑같은 질문을 하며 어린 소년은 무릎을 세우고 팔로 양껏 끌어안았다.
날씨 탓인지, 이곳까지 달려오느라 그랬는지 까만 구두는 흙투성이로 엉망이 되어 있었다. 작은 잎사귀나 부스러진 나뭇가지 끄트머리 같은 것들도 같이 붙어 있어서 반들거리게 닦았던 것이 아무런 소용이 없어져 버렸다. 그렇지만 혼이 날 일은 없을 것이다. 사람들은 오늘 그에게 모두 친절했다. 필요 이상으로 과하게 친절했다. 좋진 않았다. 가장 밑바닥에 깔린 것은 ‘동정’이었기 때문이었다. 그런 건 받고 싶지가 않아서 모조리 바닥에 흘려둔 채, 카게야마는 이곳에 숨어 있었다.

“여기서 뭐해?”
솔직히 성가시다고 생각했다.
“….”

그 때는 5월이었다. 덩굴장미가 어찌나 소담하게 만개했는지 빗속에서도 색감은 조금도 기가 죽지 않아 화려했다. 앞에 서 있는 소년 또한 그러했다. 옅은 회색의 조끼와 흰 와이셔츠, 검은 반바지는 동화 속에 나오는 소공자처럼 완벽해 보였다. 몸집에 맞는 우산은 잡지 모델처럼 어깨에 사뿐하게 얹고. 이런 흙길을 어떻게 걸어온 건지, 구두에서도 광택이 흘렀다. 그는 친절하게 웃으면서 손을 내밀었다.

“어른들이 찾고 있어.”

카게야마는 시선을 내리깔았다. 반갑지 않은 소리였다. 유일하게 마음에 드는 건, 상대의 목소리에는 슬픔이나 동정 같은 것이 눈에 보이게 묻어 있진 않았다는 점이었다. 행동거지와 달리 실제의 나이는 어려서 일지도 몰랐다. 카게야마가 알기에 그 아이는 자신과 동갑이었다.

“이따 갈 거야.”
딱딱한 대답에, 상대는 온유하게 웃었다.
“카게야마 군은 보기보다 어설프네.”
“뭐?”
“싫은 일은 피해 있는 다고 해서 끝나지 않잖아. 네가 와야 부모님 장례식도 끝나지.”

허공에 떠 있던 손이 까만 머리 위에 안착했다. 5월의 비를 잔뜩 맞아 있는 머리카락은 손가락을 거부하듯 착 가라앉아 있었다. 카게야마는 있는 힘껏 상대를 노려보았다. 어린 볼은 단단하게 굳어 있었다. 누가 봐도 공격적인 태도였다. 그러나 상대는 주눅 들지도 겁을 먹고 물러서지도 않았다. 다만. 빙그르르. 어깨 위에서 우산이 한 바퀴 돌았다.

“빨리 끝내달라고 말씀드려 볼게. 내 말은 들어주실 걸.”

소공자는 머리 색깔조차 금색이었다. 아주 옅은 갈색이 도는 금발. 그렇게 온통 반짝반짝 빛이 나는 모습을 하고 그는 또 한 번, 아주 달콤하게 웃었다.

“저기.”
“….”
“토비오라고 불러도 돼?”

어쩐지 기뻐 보이는 얼굴이었다.

-2-

몸이 따끈따끈했다. 머리가 아플 만큼 오랜 목욕 후였다. 노곤하게 풀어진 살에서는 어린아이의 부드러운 향내가 났다. 피부에 닿는 순간 녹아내릴 것 같이 섬세한 올의 희고 커다란 목욕수건이 머리부터 등허리, 허벅지까지를 모두 덮었다. 어른 셋이 뒹굴어도 넉넉할 만한 침대였다. 그러나 10살 박이 소년 둘은 이불을 둥지처럼 만들어 놓고 다닥다닥 몸을 붙이고 누웠다.

“토비오.”

눈매를 가득 채우는 푸른 눈동자가 천천히 움직였다. 두껍고 커다란 책에만 향해 있던 것을 자신에게 돌리는 데에 성공한 상대는 그것에 만족하지 않고, 품 안으로 동그란 머리를 끌어들였다. 답답해서 카게야마는 머리를 뒤흔들었다.

“하지 마.”
“책 재밌어?”
“응.”

불편할 자세일 텐데도 시선은 책에서 떨어지지 않는다. 작은 글씨들이 빽빽하게 들어차 있는 책이었다. 군데군데 복잡한 도식과 그래프도 그려져 있었다. 하지만 일견 차가워 보이기까지 하는 동그란 얼굴에 난해함은 떠올라 있지 않았다. 잠깐씩 눈 사이를 좁히는 경우도 있었지만, 얼마 지나지 않아 곧 풀리기 마련이었다. 그렇게 고른 속도로 책장이 넘어가는 것과 그것을 읽고 있는 카게야마를 지그시 보던 소년은 웃으며 코를 머리카락 안에 박아 넣었다.

“토비오는 시시하지 않아서 좋아.”
“?”
“우리 학교 녀석들은 다 엉터리거든.”

내일은 신학기가 시작되는 날이자, 카게야마의 입학날이었다. 방 한구석에는 두 아이의 짐이 산더미 같이 쌓여 있었다. 아무리 가문의 보증이 있어도 수준 이하의 학생을 받기는 어렵다며 학교는 난색을 표했지만, 무지막지한 입학성적 앞에서는 할 말이 없었다. 멍청이들. 그는 아직 물기를 모두 잃지 않아 더 보드라운 까만 머리카락의 향을 맘껏 들이마시며 중얼거렸다.

-3-


“도대체 뭐였어?”

말 그대로 골이 울렸다. 사고의 후유라는 것은 시간이 지날수록 확실해지는 법이라 근육의 욱신거림 역시 점점 크기를 키워간다. 당장 병원으로 가는 것이 올바른 일이라는 것을 알면서도 오이카와는 본부를 선택했다. 정보가 새어나가 탈취당한 것. 충분히 그럴 수 있는 일이었다. 하지만 새어나간 것이 ‘정보’가 아닌 ‘요원’이라면. 그것은 그냥 넘길 수 없었다.

“나도 몰라.”

의자에 앉아 있던 이와이즈미는 팔짱을 굳건하게 끼고 낮은 목소리로 대답했다. 오이카와는 머리카락을 쓸어 넘겼다. 물러서지 않는 두 시선이 부딪쳐 차가운 광채를 만들어 냈다.

“이와쨩이 모르면 누가 알지?”
“나도 알고 싶어. 빌어먹을.”

팀장은 의자를 박찰 듯이 상체를 앞으로 기울였다. 그는 모든 것이 거짓말이라고 했다. ‘모든 것’의 범위는 어디까지를 뜻하는 거지. 이와이즈미는 미간에 손을 짚으며 고개를 숙였다. 오이카와는 팔짱을 단단히 끼고 선 채, 그의 정수리를 내려 보았다.

“노출된 건 확실하다고 볼 수 있는 거지?”
“아마도.”
“도대체 어디서?”
“되려면 어디서든지 될 수 있지.”
“그건 그러네. …그럼 이대로 끝낼 거야?”
“….”

가뜩이나 어려운 문제를 푸는 중인데, 상대는 난이도 최상급의 질문만 골라서 던져댄다. 입 안이 썼다. 건조한 입술을 사정없이 비벼대고 팀장은 고개를 들었다.

“우리가 ‘Main team’이긴 하지만, 이 프로젝트에 들어 있는 팀의 전부는 아니니까. 아마도 교체되게 되겠지.”
“오이카와씨, 많이 억울한데.”
“죽고 나서는 억울해 할 수도 없어. 그리고 우리 팀은 처음이지만. 대부분은 일 년에 한두 번씩 겪는 일이니까 색다를 것도 없고. 따지자면 특이할 정도로 우리가 잘 한 편이지.”
“그건 그렇지.”
“그것보다. 오이카와, 너.”

이와이즈미는 카게야마에 대해 이야기를 꺼낼 요량으로 고개를 들었다가 그대로 말을 멈췄다. 입이 살짝 벌어져서 굳어졌다. 구겨진 것은 둘째 치고, 와이셔츠 소매와 앞쪽이 피투성이였다. 팀장은 과격하기 그지없었던 운전을 다시 한 번 상기하고는 이마를 쳤다.

“…치료부터 받아.”

양복 안주머니에서 지부에서 제공한 카드를 꺼내 주며, 그는 침착하게 제안했다.

“본부에 보고가 올라가면 결정이 내려올 거야. 어차피 지난 번 카게야마 건도 있고.”
“매번 결정이 늦어.”

카드를 받아들며 오이카와가 중얼거렸다. 끝이 흐린 말인데도 용케 알아듣고 팀장이 피식, 짧은 웃음을 지었다.

“위험하지 않다는 조건하에, 다섯 번째 임무까지 끝낼 수 있도록 말은 해 볼게.”
“으응. 오이카와씨. 실패를 모르는 요원이라는 명성은 꼭 지키고 싶으니까.”
“다른 이유가 있는 건 아니고?”
“그건 또 무슨 소리?”
“임무가 끝나면 여기를 떠나야 하니까 말이야.”

그때까지 하고 있었던 인 이어를 떼어 서랍에 넣으며, 팀장은 뼈를 담아 말을 떠나보냈다. 나가려 몸을 돌리던 것을 멈추고, 오이카와는 그를 다시 한 번 보았다. 아무것도 모르겠다는 천진난만한 표정이었다.

“그게 뭐?”
“수상한 이웃남자와도 끝인 거니까 말이야.”
“….”

아무 말도 하지 않고, 그들은 서로를 바라보았다. 오이카와는 어젯밤, 자신이 누구와 있었는지에 대해 말해야 한다고 생각했다. 이와이즈미는 카게야마 토비오로 추정되는 사람이 던진 메시지에 대해 설명해야 한다고 생각하고 있었다. 그러나 첫 말을 어떻게 꺼내야 할지 알 수가 없어서 둘은 꽤나 오랫동안 침묵에게 그 시간을 맡기고 있었다.

“사실….”

삑삑, 삐삐삑.
마침내 결심한 이와이즈미가 먼저 입을 열려는 순간, 직통 라인에 붉은 빛이 들어왔다. 지부장이었다. 이 통화는 누군가와 함께 있을 때 받을 수 없었다. 그는 한숨을 쉬며 오이카와에게 손짓했다. 나가달라는 제스쳐였다.

“몸 상태가 어떤지 체크하고 보고하는 거 잊지 말고.”
“오늘 일에 대한 브리핑은?”
“내일 오전에 할게. 마츠카와가 돌아오면 그 내용도 합해야 할 것 같고. 어쨌든 말할 게 많으니까 지각하지 마라.”

오이카와는 천천히 고개를 끄덕였다. 팽팽한 긴장이 끊어져서인지 머리가 유달리 아파왔다.

-4-


“늦었습니다.”
“엣?”

설마 아직까지 집에 있을 거라고 생각하지 못했던 요원은 침대 옆 바닥에 주저앉아 있는 카게야마를 멀뚱멀뚱 바라보았다. 초대했을 때는 정작 소파의 끄트머리에 앉아 있더니, 지금은 흡사 집 주인처럼 편안한 자세다. 여지없이 고양이였다. 그런 생각을 하든 말든 수의사는 눈초리가 잠시 가늘어져서는 오이카와의 위 아래를 대놓고 훑어보았다.

“임무였습니까?”
“으응?”

말을 흐리면서. 요원은 내심 귀가하기 전에 옷을 갈아입어 다행이라고 생각했다. 내상에 가까웠던지라 반창고 같은 것도 없었는데, 직업적 특색인지 수의사는 생각보다 빠르게 상대의 상태를 눈치 챘다. 부스스. 머리카락이 잠시 솟는 듯하더니 가라앉았다.

“혹시 다쳤습니까?”

어쩐지 말 속에는 책망과 걱정이 동시에 들어 있어 죄책감이 들었다. 그러나 한편으로는 원-나잇이라고 벽을 칠까봐 내심 걱정하던 요원의 마음을 단박에 풀리게 하는 종류의 것이었다. 후자 쪽에 좀 더 무게를 실으며 오이카와는 싱글싱글 웃어 보였다.

“그렇게 많이는 아니고.”
“제 눈으로 확인해도 됩니까.”
“어쩌지. 오이카와씨, 동물 아닌데요.”
“비슷해요.”
“어디가?!”
“?? 사람도 동물의 한 종류지 않습니까.”
“그거 틀린 말은 아니지만.”

그런 공통점이라면 세상 생물체의 1/3 정도는 공유하고 있지 않을까. 요원은 약봉지를 신발장 위에 놓아두고 신발을 벗었다. 고개까지 기울여가며 일거수일투족을 쫓는 시선을 뒤에 달고 그는 구급약품 통과 함께 고분고분히 카게야마의 앞에 앉았다. 오이카와보다는 작지만 평균적으로는 큰 편에 속하는 손이 이마와 목 뒤를 차근차근 짚었다. 살짝 찡그린 채, 진지한 표정으로 수의사는 열을 체크했다.

“체온… 조금 높습니다.”
오이카와는 대답하지 않았다. 다만 즐거워 보이는 눈으로 지척에 앉은 남자를 물끄러미 보았다.
“으응. 이제 더 높아질 거 같은데.”
“?”

정말 그러했다. 손이 닿은 부분에서부터 기분 좋은 열기가 흩어지고 있었다. 자각하는 거 같지는 않았지만, 어디선가 찾아 주워 입은 오이카와의 티셔츠는 조금 커서 보는 눈이 즐거웠다. 보란 듯이 약봉지를 올려두며 병원을 다녀온 티를 냈는데도 샅샅이 살펴보는 게 얼토당토않기도 했다. 오이카와는 그가 자신을 보는 만큼, 고스란히 상대에게 돌려주었다. 놀이 같은 진료에 열중할 때는 별 변화가 없던 표정은 시선을 알아채자마자. 퍼엉. 하며 꼬리를 폭발시켰다. 놀리고 싶어 죽을 것 같아.

“근데 왜 말이 다시 올라갔어요?”
“…. 어. 그게.”
“어색해서 그래요?”
“….”

대답은 없었지만, 정답인 것 같았다. 요원은 그에게 몸을 기울였다. 그리고 눈동자가 채 모두 커지기도 전에, 날렵하게 힘을 써서 카게야마를 바닥에 눕혔다.

“응?”
“어쩔 수 없네. 오이카와 씨가 더 노력해야지.”
“오, 오이카와?”
“반복하면 익숙해지기 마련이라니까.”
“지금 너, 다쳤, 는데.”
“응응. 잘하네. 토비오쨩.”
“그렇게 부르. 으….”

병원에서 준 안정제 때문인지 정신이 조금 나른했다. 걱정거리와 고민거리는 저 멀리 흩어지고, 눈앞의 사람만이 선명하다. 나 분명히 물어 볼 게 많았는데. 라고 생각했지만. 그것보다 빠르게 손이 먼저 움직였다. 오이카와는 평소보다 훨씬 더 급하게 움직였다. 인정하고 싶지 않지만.

‘임무가 끝나면 여기를 떠나야 하니까 말이야.’
그 말이 마음 깊은 곳에 똬리를 틀고 있었다.

-5-


나는 오이카와를 적극적으로 끌어안았다. 허벅지에 닿은 옆구리를 힘주어 조였다. 몸 안의 수분을 모두 날려버릴 만큼 뜨거웠다. 좋아. 너무 좋아서 견디기가 힘들어.

“하.”
짧게 끊어지는 숨을 다른 것으로 판단했는지, 움직임이 멈췄다. 얼굴이, 이미 가까웠던 얼굴이 더 가까이 다가와 눈을 마주친다.
“혹시 지금 아팠어?”

명랑하고 촉촉하던 목소리는 어느덧 허스키해져 있었다. 눈동자 속에는 불씨가 들어 있어 평소보다 더 붉게 빛났다. 속눈썹을 떨고 있었다. 허리가 간헐적으로 움칠거린다. 몰아붙이고 싶어 하는 남자의 본능은 그런 것들을 통해 생생하게 전달되고 있었다. 그렇지만. 몸을 버티는 팔뚝에 온통 핏줄을 세우면서도 오이카와는. 토오루는.

“조금 더 천천…히 할까?”

나를 보고 있었다. 다친 곳은 괜찮을까. 생각하면서도 스스로의 마음에 져버려 몸을 맡겨버린 나와 너는 이토록 다르다. 가끔 타인의 상냥함은 스스로에 대한 질책이 되기도 하고, 죄책이 되기도 했다. 지금이 그러했다. 그렇지만 좋아. 좋아. 카게야마는 고개를 저었다.

“나.”
그리고 팔을 뻗어 목을 감쌌다. 마음은 풍선과 비슷해서 가득 차면 터질 수밖에 없는 것이다. 변명하자면. 이래서는 안 된다고 나는 계속 생각했었다. 그럴 자격이 없다고 생각했다. 넘어가면 안 되는데. 도망가 버려야 하는데. 그러기 위해 최선을 다했다는 비겁한 변명을 반복하면서 나는 너를 더 강하게 안았다.

“응?”
정말 안 되는데.
“…네가 좋아.”
미처 끝까지 표현하지도 못한 말이었다. 마음이 견디지 못해 조금 흘러나온 끝만 보고도, 토오루는 기쁘게 웃었다.

“아직도 사랑한다던 그 사람보다 더?”
그것이 얼마나 허망한 질문이지를 안 다면.
“아. 이건 너무 매너 없는 질문이었나.”
서둘러 끝을 감추는 네게 말해 줄 수 있다면.

“토비오쨩.”
말하자면 이건 장미를 씹는 것과 같았다. 더할 나위 없이 향긋한 비밀이 입 속에서 박살이 났다. 현기증 나는 단 향과 날카로운 비밀의 가시가 입 안을 부수어 냈다. 그것이 꽃을 더 빨갛게 피워 냈다. 원래 그런 것이다.
말하지 못한 사랑이란 원래 그런 것이다.

-6-


“징계 위원회?”

이와이즈미의 목에 핏대가 불거졌다. 시퍼렇게 보이는 핏줄들이 울룩불룩 솟아나 있었다. 그는 주먹 안의 볼펜을 으스러뜨릴 것처럼 쥐고 침착하게 다시 자리에 앉았다.

“이유가 뭡니까. 지부장님.”

임무의 실패, 정보의 유출, 민간의 피해. 굉장히 사업적이고 객관적인 이야기들이 흘러갔다. 팀장은 그 말을 하나하나 귀담아 들으며 숨을 들이켰다. 폐가 곧 터질 것처럼 부풀어 올랐다.

“말씀이 뭔지는 알겠습니다. 부족했다는 것에 대해서는 승복합니다.”
그는 한 번도 쉬지 않고 그렇게 말했다. 그리고 모아두었던 숨을 모조리 내뱉었다.
“하지만 같은 상황에서 지부장님은 어떻게 하셨을 것 같습니까.”
상대는 말이 없었다.
“우리 팀보다 잘 할 수 있을 거라고 생각하십니까? 제기랄. 아니, 어떤 팀을 데려다 놓아도 이렇게는 못할걸.”
흥분을 가라앉히라는 말은 귓바퀴에 닿지도 못하고 분노에 태워졌다. 이와이즈미는 수화기를 우그러뜨릴 기세로 잡았다.
“이의제기를 할 겁니다.”
[소용없을 걸세. 이건 중앙지부의….]
“그게 중앙지부의 말이라고 한다 해도 말입니다. 현장에서 일어나는 모든 일에 대한 1차 책임은 어차피 팀장인 제게 있으니까요.”

그는 화이트보드에 띄워져 있는 팀원들의 사진을 보며 못을 박았다.

“그러니 ‘오이카와 토오루’ 요원에 대한 중앙지부 소환 명령은 불응합니다. 중앙지부가 이해 못한다면.”
숨이 한번 끊어졌다 다시 이어졌다.

“그쪽에서 나한테 연락하라고 해!!!!”

상대의 대답을 들을 것도 없이 그는 전화기를 거칠게 내려놓았다. 뚜뚜뚜. 잘못 내려진 수화기에서는 그런 소리가 났다.

-7-


“팀장이 소리 지르는 거 오랜만에 보네.”
“하나마키였냐. 미안. 못 볼꼴을 보였다.”
“그런 건 어차피 많이 봤어. 이거나 먹어.”

어느새 방에 들어와 있던 하나마키는 느물느물 웃으면서 도시락을 내밀었다. 맛이 좋기로 소문난 근처 가게의 것이었다. 입맛은 없었지만, 거절하는 것도 내키지가 않아서 이와이즈미는 도시락을 받아 열었다. ‘이거나 먹어.’라는 싱거운 말과 달리 팀장이 가장 좋아하는 메뉴인 아게다시도후까지 알뜰하게 챙겨져 있었다.

“퇴근은?”
“마츠카와 보고 들어가려고 했지. 나야 오이카와처럼 다친 게 아니니까.”
“아. 그러고 보니 돌아올 때가 됐나?”
“연락이 없긴 한데, 비행기를 잘 탔으면 그렇겠지.”
“….”
“지금 팀장 눈빛이 어딘가 이상한데.”
“뭔가. 둘이 같이만 있지 않으면 대화가 상당히 정상적이구나 하는 생각이 들어서.”
“뭐야. 세트 취급 그만 두라고.”
“미안하다.”

웃음기가 살짝 마른 대화를 끝으로 둘은 말없이 식사를 계속했다. 하나마키는 통화의 내용을 묻지 않았다. 엄격히 지켜져야 하는 규칙이었기 때문이었다. 궁금하다고 해서 묻는 것은 오이카와 정도일까. 물론 생각이 없다 기보단 공동의 규칙 위에 자신의 룰이 있기 때문일 것이다. 이런 방면에서 고지식한 면이 있는 이와이즈미와 놓고 본다면, 결국 둘은 전혀 다른 성격인데 상성이 훌륭했다. 좋은 팀이지. 우수하고. 이런 상황 속에도 안정감을 주는 구성원에 말없는 찬사를 보내며 하나마키는 새우튀김을 베어 물었다.

“본부에서.”
그런데 의외로 이야기는 팀장에게서 먼저 꺼내졌다. 하나마키는 말없이 물을 들이켰다.
“오이카와를 징계 위원회에 보내겠다고 했어.”
“화 낼만 했네.”
“‘카게야마 토비오’에 대해서는 별다른 혐의를 찾을 수가 없다고 했고.”
“….”
“정보의 유출은 파악해 보겠지만, 내부자의 소행이라기 보단 우리 팀의 실수 쪽에 무게를 두고 있는 것 같아.”
“미치겠군.”

하나마키는 밥을 뒤적거리며 가볍게 말을 던졌다.

“임무는?”
“새로운 팀이 와서 마무리 지을 계획.”
“뭐가 그렇게 다 쉽대. 그 사람들은.”

여기서는 하나하나가 어려운 것들뿐이었다. 이래서 입으로 일하는 사람과는 상종을 말아야 하는 것이다. 코웃음을 칠 말이 너무 많아서 아플 지경이었다. 코끝을 훌쩍거리며 하나마키는 시계를 한 번 살폈다.

“그래서 내가 생각을 해 봤는데 말이야.”

이와이즈미는 젓가락을 가지런히 모아 내려놓으며 말했다. 음식은 아직 많이 남아 있었다. 그저 기계적으로 넘긴 것에 불과한 모양이었다. 하나마키 쪽도 식욕이 뚝 떨어져 먹던 것을 멈추고 팀장을 보았다. 착 가라앉아 있는 평온한 표정이었다.

“해킹 좀 해 보자.”
그런 얼굴로 정면에 폭탄을 던졌다. 서포터는 마음의 준비를 하며 반찬을 뒤적였다.
“어딜?”
“중앙 지부.”

손에서 젓가락이 툭 떨어졌다. 하나마키는 천정을 보고 하- 길게 한숨을 쉬었다. 사실 오이카와와 이와이즈미의 가장 큰 차이점은 이런 것이었다. 오이카와는 숨 쉬듯 돌발적인 사고를 치는 편이지만 큰 문제가 되는 법이 없는 반면. 이와이즈미 같은 경우에 사고는 별로 안쳐도.

“보안 최고등급 메인 서버로.”
한 번 치면 제대로 치곤했다.

-8-


“책임은 내가 질 거야. 여차하면 나한테 협박당했다고 해.”
“팀장. 오이카와랑 사이좋게 징계위원회에 가고 싶어?”
“필요하다면.”

하나마키는 입 꼬리를 쭈욱 끌어올렸다.

“아이고. 중앙은 왜 위험한 사람을 건드리고 그래.”

그는 식사를 걷어치우고 바퀴 달린 의자를 밀어 컴퓨터 앞으로 이동했다. 항상 본체 옆에 걸려 있는 헤드셋을 끼고 전원을 켠 하나마키는 자신의 옆으로 의자를 끌고 온 이와이즈미에게 씨익 웃어보였다.

“원하는 대로 해드릴 테니까, 한 가지만 약속해. 팀장.”
“뭐든지.”
“혹시라도 네가 나를 협박했다고 하면 가만 안 둔다.”

스크린의 빛이 시시각각 바뀌고 있었다. 개성적인 분홍머리카락에 그 다채로움이 아롱졌다. 그는 손가락을 좌우로 흔들고 의기양양한 표정을 지어 보였다.

“나도 건드리면 위험한 사람 역할이 좋으니까.”
“그건…. 나중에 생각해. 일단 뚫을 수 있는지가 관건이니까.”
“아, 사실은.”

하나마키는 세 개의 모니터에 각각 다른 화면을 띄워 놓고 가볍게 말을 받았다. 현란하게 손가락이 움직였다.

“백화점 씨가 선물을 주고 갔거든.”
“선물?”
“이미 뚫어놓은 길을 삭제하지 않았어. 말하자면 메인서버를 향하는 뒷길을 만들어 놓은 거지. 그리고 그 뒷길에 대한 경로지도도 같이 주었고.”
“도대체 왜?”
“나야 모르지.”

팀장은 잠시 카게야마 토비오의 얼굴을 떠올려 보았다. 이럴 줄 알았으면 육감이고 자시고, 그냥 무시했어야 했을까. 하는 생각도 들었다. 그러나 그렇지 않았다고 해도 이런 일이 안 일어났을 거라는 보장은 어디에도 없었다. 왠지 그런.
예감이었다. 그는 하나마키의 의자를 꾹 더 세게 쥐었다. 서포터는 이미 완전히 몰두해 있었다. ‘해킹’이란 것은 흔적을 지우는 일이 중요한 법이라 누군가 길을 뚫어 놓았다고 해서 주의할 일이 없는 것은 아니었다. 신중하고 빠르게 경로를 따라가며, 하나마키는 입을 열었다.

“나는 백화점 씨가 의심스럽다는 팀장의 의견에도 동의하지만.”
“….”
“우리에게 해를 끼치지 않을 것이라는 오이카와의 의견에도 동의하는 바야.”
“그건 두고 봐야지.”
“어련하시겠어. 쨘, 들어갑니다. 이제 돌이킬 수 없어요.”

화면에는 도트로 표시된 하나마키가 열쇠를 번쩍번쩍 들어 올리고 있었다. 마지막으로 의견을 묻는 하나마키에게 이와이즈미는 망설이지 않고 고개를 끄덕였다. 철컥. 열쇠가 자물쇠에 끼워지고. 비밀의 문이 열렸다.

-9-


아, 솔직히 너무 아프다.

오이카와는 침대에 누운 채로 그런 생각을 했다. 어제는 진통제로 버텼던 것일 뿐인지 몸 상태는 엉망이었다. 반쯤 감긴 눈으로 바라본 천정은 평소보다 높았다가 낮았다가를 반복한다. 그대로 계속 보다가는 어지럼증이 날 것 같아서 돌아눕자. 정면에 곤히 잠든 카게야마의 얼굴이 보였다.

“….”
결국 궁금했던 것은 하나도 묻지 못했다. 이쪽은 그렇게 만들어놓고 잘도 자는 얼굴에 심술을 부려볼까 싶었지만. 그는 곧 그런 생각을 그만 두었다.

“네가 좋아.”
라니. ‘네가 좋아.’라니. 예의 ‘사랑하고 있어.’보다 한 끗발 떨어지는 게 좀 아쉽긴 하지만, 이 남자에게서 그 정도의 애정표현이 나왔다는 것은 괄목할 만한 성과였다. 히죽거려지려는 입술을 근엄하게 내리 누르며 그는 마음껏 카게야마의 얼굴을 바라보았다. 모래시계는 생각보다 조그만 것이었고, 그래서 흘러가는 시간이 좀 아까웠다.

“토비오쨩.”
“….”

제 딴에는 조용한 목소리였는데 남자가 눈을 떴다. 거기에 그치지 않고 푸른 눈은 금세 잠을 털어내고 선명해 졌다. 오이카와와는 달리 날카로운 눈매가 왠지 한풀 꺾여 있었다.

“내가 깨웠어?”
“…아니.”

완전히 놓아 버린 말에도 짧은 대답 외에는 다른 반응이 없었다. 카게야마는 그저 빤히 요원을 보고 있었다. 그러다가 별안간.

“오이카와.” 성을 부르고,
“네, 네.”
“토오루.” 이름을 불렀다.
“응, 응.”
“임무가 끝나면 떠날 거지?”
“….”

이불 밑으로 손이 손을 찾아 들었다. 누구도 듣고 있지 않는데도 작고 낮은 목소리는 왠지 비밀스럽고, 좀 더 깊은 이야기를 나누는 것처럼 느껴졌다. 그야말로 손끝에 걸려 있는, 상대의 손을 놓지 않고 오이카와는 고개를 저었다.

“찾아올 수 있는 걸.”
“아냐. 오지 않아도 괜찮아.”

진심으로? 지금 이 순간에? 요원은 그 날. 약에 취해 과거의 사랑을 고백했던 눈동자를 직시하며 속으로 물었다.

“설마 오이카와씨와 인조이 였을 뿐이에요?”

그리고 밖으로는 한없이 가벼운 질문을 던지며. 얼굴이 웃고 있길 바랐다. 성공했는지 실패했는지 알 수 없게끔, 상대는 표정의 변화가 없었다. 다만 이불 속의 손이 조금 더 가깝게 닿고.

“네가 다치지 않으면 좋겠어.”
“….”
“마음이든, 몸이든.”

푸른 눈이 깊은 곳을 꿰뚫었다. 쿵쾅쿵쾅. 엉망으로 심장이 뛰었다. 정말 그거면 되냐고 들쑤시고 싶었는데, 그래서는 안 될 것 같다는 생각도 들었다. 이것은 나에게 하는 이야기가 아니라 카게야마, 스스로에 대한 이야기인지도 몰랐다. 다리도 마음도 그 때 다쳐버린 걸까. 그 사람과의 일에서.
오이카와는 자신의 이마부터 시작해서 어깨와 팔뚝, 팔꿈치를 천천히 만져보는 손길에 몸을 맡겼다. 다시 약을 먹은 것처럼 나른해지는 기분이었다. 다치지 않겠다고 자신 있게 말해주고 싶었으나, 그럴 수는 없었다. 사실은 머지않은 언젠가 오늘처럼 눈을 떴을 때, 옆에 없을 수도 있는 직업이었다.
그 마음에 밀려. 끝끝내 오이카와는 카게야마에게 아무것도 묻지 못했다.

-10-


“이와쨩! 중요한 브리핑이라 늦지 말라고 했으면서! 으응?”

오이카와는 아직 따끈한 우유빵을 우물거리며 항의의 말을 던지다 멈췄다. 여전히 형광등이 켜 있는 사무실의 안은 열기로 가득했다. 브리핑 룸에서 한참을 기다려도 아무도 없어 들어와 본 건데, 찾던 두 사람은 상기된 얼굴로 이곳에 앉아 있었다. 심지어 일어날 생각도 없어 보였다.

“뭐에요? 무슨 일이 또 생겼어?”
“많지.”

이와이즈미는 깊게 끼고 있던 팔짱을 풀어내며 나지막이 대답했다. 오이카와는 주변을 버릇대로 훑어보았다. 어제 저녁이었을 것이 분명한 도시락은 그대로 열려 있었고, 두 사람은 전혀 잠이 들었던 기색이 없었다. 그리고 있어야 하는데도 이 자리에 없는 사람 또한 찾아냈다.

“마츠카와는?”
“돌아오지 않았어.”
“왜?”
“…짐작은 되지만 말로 하고 싶지 않아.”
“도대체 무슨 일인데 오이카와 씨만 쏙 빼놓는 거야.”
“이제부터 말할 거니까 잘 들어.”

팀장은 굳은 얼굴을 한 채 일어서며 말했다. 그리고 손에 들고 있던 문서를 내밀었다.

“이건 뭐에요?”
“이번 임무에서 회수해야 하는 자료가 총 5개라고 했었던 거 기억하냐.”
“알아. 두 개는 회수했고, 하나는 빼앗겼고, 하나는 망가졌지.”
“응. 그런데 아니었어.”
“무슨 소리야.”

의미를 알 수 없는 대답에 반문하여 오이카와는 그것을 받아 들였다. 그렇게 두껍지 않은 문서철이었다. 요원은 천천히 첫 장을 넘겨보았다.

“….”
집중할 때, 유독 붉어지곤 하는 눈동자였다. 이와이즈미는 차분하게 그 모습을 보고 있었다.
“이거.”
“처음부터 그딴 파일 같은 건 없었어. 다섯 번째를 숨기기 위해 그럴듯하게 만들어 낸 것에 불과해.”

하나마키는 밍밍해진 스포츠 음료를 쭉 빨며 의자에 몸을 기댔다. 오이카와는 머리카락을 한 번 쓸어 넘기고 다시 파일을 읽어 내렸다.

“그 기억조작기계에 대한 자료는 실제를 비롯해서 어떤 것도 남아있지 않아. 유일한 성공 사례를 끝으로 개발자가 전부 파괴시키고 사라졌거든.”

서포터는 벽의 어느 한 점을 뚫어지게 바라보며 조금 빠르고 격양된 어조로 말을 이었다.

“몇년 간 복구를 위해 지지고 볶았던 것은 사실이지만 결국 실패했어. 만든 사람이 단독으로 하던 연구였고, 원래도 기록을 하지 않는 성격이었다고 해. 결국 뭔가 있는 것 마냥 다른 국가의 시선을 돌리려는 것뿐이었지. 빌어먹을. 작전마다 정보가 유출될 때부터 알아봤어야 하는데.”

그랬다. 첫 번째 작전부터 시작해서 모든 작전은 어느 정도의 정보 유출이 있는 상태에서 시작되었다. 그리고 그에 대한 중앙 지부는 무딘 반응을 보이곤 했다. 생각해 보면 그랬다. 그들은 굉장히 중요한 자료라고 이야기하면서도 한편으로는 자료가 노출되는 것에 대해 관대하게 굴었다. 그 과정에서 많은 소비재와 요원이 죽었으리라. 하나마키는 나직하게 욕설을 내뱉었다.

“다른 쪽에서도 정보가 거짓이었음을 이제는 눈치 챘을 거야. 하지만 진짜 목적까지는 찾지 못했겠지. 찾았을 때는 이미 늦었을 거고.”

오이카와는 귀로는 설명을 듣고, 눈으로는 정신없이 파일을 읽어 내렸다. 자신이 이야기를 덧붙이는 것이 방해가 된다고 생각했는지 이와이즈미는 말이 없었다. 얼마 지나지 않아 붉은 핏줄이 돋은 눈동자가 문서의 마지막에 다 달았다. 그대로 굳어진 것이 종이 위로 천천히 들어 올려져 하나마키의 옆얼굴에 닿았다.

“사실이야?”
“응.”

하나마키는 침착하게 대답했다. 여전히 시선을 벽에 둔 채로. 그는 손 안의 음료수를 구겼다.

“그토록 많은 인재를 쏟아 부어서라도 손에 넣고 싶었던 존재.”
“….”
“자료가 사라진 지금 유일하게 그 기계를 재현할 수 있는 사람.”

빈 캔이 속절없이 어그러뜨려졌다. 서포서는 고개를 돌려 오이카와를 마주했다.

“그러니까 이번 임무의 진정한 목표는.”
그리고 힐끗 입 꼬리 한쪽을 불편하게 들어올렸다.

“‘카게야마 토비오’였어.”

손에서 떨어진 종이가 제멋대로 흩어져 낙하했다. 오이카와는 다시 주워 들기 위해 허리를 숙였다. 가장 먼저 집어든 종이 위에는 새벽까지 같이 있었던 옆집 남자, 그 30세의 평범한 수의사라고 소개하던 카게야마 토비오의 사진이 있었다.
그는 그것을 주워들었다. 서류 속 ‘카게야마 토비오’는 타인처럼 낯선, 차가운 표정으로 오이카와를 바라보았다.

-11-


카게야마는 벨소리를 시끄럽게 울려대는 핸드폰을 바라보았다. 모르는 번호였다. 그러나 누구일거라는 예감은 있었다. 아니길 바라면서 그는 천천히 통화 버튼을 눌렀다.

[오랜만이야.]

그러나 본디 예감은 좋지 않은 것일수록 잘 맞는 법이었다. 그토록 오랜 시간이 지났음에도 전혀 낯설어지지 않은 남자의 목소리가, 독특한 억양이 귀에 꽂혔다. 카게야마는 가방을 쥔 손에 힘을 주었다. 어쨌든 지금은 한 낮의 거리였다.

“….”
[어땠어? ‘오이카와 토오루’를 다시 보게 된 건.]
“….”
[네 유일한 성공작이잖아.]

좋았어? 슬펐어? 절망했나. 희열을 느꼈나. 자극을 받았나, 혹은 주었나. 그 어느 쪽이라도 즐거울 것 같았다. 남자는 탁상을 반복적으로 두들기며 대답을 기다렸다.

“너.”
그리고 마침내 오랜만에 듣게 된 목소리에 입가가 참을 수 없이 치솟았다.
“나한테 어떻게 그를. 다른 사람도 아닌 그를. 그리고 그 때, 그런 거짓말을.”
[모두를 재능으로 찍어 누르는 오만한 말투. 정말 그리웠어.]

숨을 죽인 웃음소리가 핸드폰을 타고 넘었다. 카게야마는 온 몸을 부르르 떨었다. 공포이기도 했고, 분노이기도 했다.

[그 날. 더없이 ‘착한 아이’같았던 모습도 다시 보고 싶고.]
“….”
[그러니 이제 돌아 와 줄래?]

푸른 눈이 가늘게 일그러졌다. 그대로 핸드폰을 던져 버리고 싶은 마음을 누르며 카게야마는 천천히 고개를 저었다. 발치에 져 있는 그림자가 보였다. 새까맸다. 의아하여 시선을 올려보자.

[아. ‘돌아 와 줄래’는 적절한 표현이 아니겠네.]

두 남자가 자신의 앞에 서 있었다. 선글라스를 쓰고 있는 검은 양복 차림의 남자였다. 반사적으로 수의사는 뒤를 돌아보았다. 어느새 거리는 한산해져 있었고, 뒤는 인적이 드문 골목길이었다. 여기는 분명 한낮의 길거리였는데, 전화가 온 타이밍은 너무 절묘해서 사각지대에 도달해 있었다. 그것을 모두 아는 남자가 또 다시 낮고 얕게 웃었다.
토비오.

[돌아 와.]
“가지 않을 거야.”
[돌아오게 될 거야.]
“돌아갈 거면 나오지도 않았어.”
[그런 말을 할 거면 진작 도망쳤어야지. ‘오이카와 토오루’와 연애를 하는 게 아니라.]
“….”
[5년이 지났어. 네 연구에 따르면 뇌세포가 재생되고 안정되는 기간이지. 실험이 정말로 완벽하게 성공을 했는지가 판가름되는 순간에 도달했다는 뜻이잖아.]
“…넌 분명히 그가 죽었다고 말했어.”
[내가? 그랬었나.]
“그 것 때문에 나는. 지금까지 계속.”
[토비오.]

목소리가 한결 짙어졌다. 아마도 통화는 공유되는지 남자 중 좀 더 키가 큰 쪽이 다가와 손을 내밀었다. 손수건이 놓여 있었다. 그러나 그 이상의 행동은 없었다. 핸드폰을 더 힘주어 잡으며 카게야마는 그것과 남자를 번갈아 노려보았다.

[어쨌든 살아있잖아. 그럼 앞으로도 그가 정말 살아있을 수 있는지 판단해줘야지.]
“오이카와는 누가 봐도 정상이야.”
[100% 확신할 수 있어? 사전 실험에서 얼마나 죽었지. 얼마나 많은 사람이 제정신을 놓아 버렸더라. 네가 제일 잘 알잖아. 그런데도 정말 상관없어?]

수화기 너머 마른 침이 꿀꺽 넘어가는 소리가 들렸다. 남자는 승리를 확신하며 웃었다.

[정말 상관없다면 무시하고 가도 좋아. 하지만 그럴 수 있을까.]
“개자식.”
[멍청이 소리 밖에 모르더니 많이 늘었네. 또 어디가 얼마나 바뀌었는지 궁금해. 빨리 와. 토비오.]

시종일관 상대는 여유로웠다. 빠드득 소리가 나도록 이를 갈며, 카게야마는 상대의 손에 있는 손수건을 낚아챘다. 잘 훈련된 두 명의 남자는 묵묵히 곁을 지키며 다만 기다리고 있었다. 눈을 한번 감았다 뜨고, 그는 손수건에 코를 박아 넣고 숨을 들이켰다.
비강 안쪽을 찔러오는 강렬한 향이 느껴졌다. 3초도 필요하지 않았다. 온 몸의 힘을 놓치며 정신을 잃은 카게야마를 남자들은 익숙하게 안아 들었다.

-14-


“중앙 지부에서는 이미 카게야마 토비오의 소재를 파악하고 있었어. 하지만, 다시 도망쳐 버릴까봐 선뜻 나서질 못했던 것 같아. 그가 지부를 떠나면서 자료 뿐 아니라 서버를 모조리 파괴시켰던 것에 대한 대비도 필요했고.”
“말하자면 이쪽에도 미끼나 방패 같은 게 필요했던 거지. 내세울 만한 걸로-.”
“그게 나였단 말이지.”

오이카와는 달달 떨리는 입술로 웃었다. 두 사람은 즉시 입을 다물었다. 그런 침묵 속에서 그는 다시 손에 든 문서를 뚫어져라 바라보았다. 카게야마 토비오와 연관된 제 1의 인물로 자신이 지정되어 있었다. 유일한 실험 생존자. 설명은 간단하고 명료했다. 그러나 아무런 기억도 나지 않았다. 나는 분명히 그를 여기서 처음 보았다. 확신 속에서 오이카와는 천천히 고개를 들어서 팀원들을 바라보았다.

“내가 그 실험의 유일한 성공체라 이거야?”

개발자가 흥미를 둘 만한 존재. 선뜻 떠나지 못하고 주변을 맴돌만한 미끼. 눈 속에서 불이 번뜩였다. 누구를 향한 분노인지, 혹은 몰이해에서 오는 충격 때문인지 알 수 없었다.

“한 가지만 묻자.”
혼란스러운 와중에 이와이즈미는 오이카와의 양 팔을 잡고 눈을 똑바로 응시했다.
“너. 정말로 기억이 없는 거냐.”
“장난해? 그럴 리 없잖아. 나는 내가 어디서 태어났고, 어떻게 자랐는지 모조리 기억하고 있어. 그렇지만.”

자신 있게 외치던 눈이 한풀 수그러들었다. 이마를 손으로 누른 채, 오이카와는 고개를 좌우로 저었다.

“토비오쨩이나 그 실험은 기억에 없어. 그래. 그런 실험이라면 정말 성공적이었네. 빌어먹을.”
“하나도?”
“이와쨩. 내가 거짓말을 하는 것 같아? 이렇게 오랜 기간 동안에?”
“….”

두 눈동자는 살벌하리만치 강한 강도로 부딪쳤다. 어깨를 잡은 팀장의 손등에 드드득 푸른 핏줄이 돋았다. 오이카와는 아픈 내색도, 시선을 흐트러뜨리지도 않고 그를 마주했다. 하나마키는 입을 굳게 다물고 둘을 보고 있었다. 마침내 천천히 손아귀의 힘이 풀렸다. 팀장은 자신의 자리를 찾아 앉았다. 둘의 시선이 그를 따라갔다. 단단한 어깨가 한껏 솟았다가 제자리를 찾았다.

"좋아."
그는 두 손을 마주 잡았다. 표정은 편안했고, 눈동자는 고요했다.

“그럼 이제. 어떻게 할 지 생각하자.”
  

-16-

“와.”

남자는 탄성에 가까운 느낌으로 웃었다. 기억보다는 어쩐지 침대가 작았다. 하지만 시간에 따라 사물은 낡아갈 뿐이고, 어린 아이는 자라나기 마련이었다. 결국 좁아짐에 대한 이유는 침대가 아니라 그곳에 눕혀진 사람에서 기인된 것이다.

“토비오.”
그는 손을 뻗어 힘없이 꺾여 있던 고개를 들어올렸다. 그리고 자신의 무릎에 정성스레 받히고 천천히 허리를 숙였다.
“….”

입술이 맞닿았다. 그는 희미하게 열려 있던 입 속으로 물고 있던 조그만 캡슐형 알약을 넘기고, 살짝 깨물어 터뜨렸다. 진득한 각성제가 이를 축이고, 혀를 넘어가 목구멍 뒤로 흘러들어간다.

“으….”
몇 번 뒤척이던 고개가 결국 사납게 뒤흔들렸다. 약효의 쓰디씀을 고스란히 보여주며 미간이 뒤틀렸다. 토해내려는 듯 가슴이 덜컹거리기를 몇 번. 마침내 천천히 눈이 뜨여지고.

“안녕?”

자신을 이곳으로 다시 부른, 마치 어제 헤어진 듯 인사를 해오는 상대를 바라보았다. 오른쪽 눈썹 위부터 비스듬히 잘려 있는, 다갈색이 도는 금색 머리카락. 짙은 검은 색 눈썹. 여유 있게 보이도록 하는 유순한 눈의 모양새. 익숙한 모든 모습. 카게야마는 입술을 꾹 다물고 과거를 노려보았다.

“무서운 표정이네.”
“…후회하게 될 거야.”
“후회라면 지난 시간동안 이미 많이 했어. 그러니까.”

그는 손가락으로 얄밉게 튀어나온 입술을 꾹 눌렀다. 그대로 볼로 미끄러진 손은 목 뒤로 향해 머리를 받쳐 올렸다. 아직 제대로 힘이 돌아오지 않은 고개는 상대의 뜻대로 끌어올려지고, 돌려볼 새도 없이 다시 입술이 마주쳤다. 그 다음에는 볼, 그리고는 이마. 그는 애교 넘치는. 그리고 한 편으로는 부드럽기 그지 없는 모습으로 카게야마에게 자신을 인식시켰다.

“우으….”
“이번엔 네 차례야. 토비오.”

아니, 그는 후회조차 할 수 없게  해 줄 생각이었다.

-17-

  
  “그러니까 ‘카게야마 토비오’는 날 알고 있었던 거네.”
“오이카와, 진정해.”
“여기서 뭘 어떻게 진정해?”

요원은 의자에 소리가 나도록 주저앉았다고, 곧바로 다시 일어섰다. 불현 듯 스치는 생각이 있었다.

“오이카와 토오루씨.”
분명히 나를 그렇게 불렀다. CCTV의 일로 집에 왔을 때. 그는 그렇게 나를 불렀다. 한 번도 통성명을 하지 않았고, 문패에는 성 밖에 없는데도 그는 나의 풀 네임을 정확하게 알고 불렀었다. 왜 몰랐지.

“멍청하게.”
“오이카와.”
“알아. 이와쨩. 나는. 지금 이성만 남기려고 노력 중인거야.”

오이카와는 두 손을 마주 잡았다.

“이 일은 중앙 지부에서 시작된 거야. 그 말은 즉.”
“카게야마 토비오의 후원자 집안과 중앙 지부 사이에 유착이 있다는 거지.”
“그거 어디까질까?”
“알 수 없지.”
“좋아. 그럼 최악으로 가정하고 시작하자.”

이와이즈미는 화이트보드 앞에 섰다. 평소처럼 화면을 켜진 않았다. 전산을 사용하는 것은 위험한 일이었다. 그는 검은 색 마카로 ‘카게야마 토비오’를 가운데 쓰고 돌아섰다.

"중앙 지부에서는 말도 안 되는 구실로 오이카와를 불러들이려고 하고 있어. 그 말은 카게야마 토비오 역시 확보할 단계가 되었다고 생각하는 거지.”
“보호해야 할까?”
“아냐. 그걸로 될 일이었다면 카게야마가 우리에게 이런 사실을 밝히지도 않았겠지. 어쩌면 이미 확보되었을 수도 있고.”
“그럼?”
“네게 달렸어.”

팀장은 진지한 표정으로 오이카와를 바라보았다.

“나는 마츠카와가 이를 조사하다 행방불명이 되었다고 생각해. 그리고 그를 찾아내서 보호하는 것을 최우선으로 삼을 거야.”

설득력 있는 이야기를 들으며 요원은 이를 악물었다. 나쁜 생각은 하고 싶지 않았다. 자신의 탓이라고 생각하고 싶지도 않았다. 하지만 그것은 쉽사리 하기 힘든 일에 속했다. 그는 바지 주머니 속 라이터를 쉴 새 없이 만지작거렸다.

“오이카와. 카게야마 토비오는 자신이 어떻게 될지 알고 있으면서도 자신이 도망치는 대신 미끼 역할인 우리에게 이 사실을 알려 왔어. 나는 그것을 역으로 자신을 미끼삼아 도망치라는 신호로 받아 들였어.”

 나는 네가 다치지 않았으면 좋겠어.

“원한다면 그렇게 할 수도 있어.”

 마음이든, 몸이든.


팀장은 보드에 기댄 채 천천히 말을 이어 나갔다.

“어떻게 하고 싶어?”
“나는.”

오이카와는 큰 고민 없이 서두를 떼었다.

“지금 우리의 가정에 약간의 문제가 있다고 생각해.”
“어떤?”
“가령 내가 성공 실험체라고 쳐도. 나 때문에 카게야마 토비오가 도망가지 않았다는 것은 설득력이 떨어지는 일이야.”
“아, 그거 나도 동의.”

하나마키가 가볍게 손을 들어 올렸다. 오이카와는 잠시 그를 보았다가 다시 팀장에게 고개를 돌렸다.

“더 있어. 무언가. 반드시 나여야 했던 이유가.”
“…그럼.”
“그러니까 그 이유를 알지 못하면, 영원히 벗어날 수 없다는 거야. 카게야마 토비오를 확보했다고 해서, 우리를 놓아준다는 보장은 없는 거지.”
“그래서?”
“별 수 있어? 어울려 줘야지.”

웃음 치고는 차갑고 경멸스러운 것이 입가에 어렸다. 오이카와는 자신만만한, 한편으로 오만하기까지 한 표정을 지어 보였다.

“징계 위원회 보내줘.”
“오이카와.”
“너희가 마츠카와를 찾는 동안, 나는 토비오 쨩을 찾아 봐야겠어. 사실 정말 궁금해. 내가 그에게 뭐였는지. 왜 그렇게 굴었는지. 왜 나를 보호하려고 했는지까지 전부.”

그는 부글부글 끓는 숨을 애써 삼켜냈다.

“나는 전부 알아야겠어. 이와쨩.”

 

-18-

  

“정말? 안 보낸다고 하지 않았어요?”
“지부장의 설득이 먹힌 것 같습니다. 작은 주인님.”
“뭐, 번거로울 뻔 했는데 잘 됐네요.”

남자는 상체에 와이셔츠를 걸치고 하나하나 단추를 잠그며 웃었다. 우르릉. 창 밖에는 짙은 구름 안쪽으로 번개가 번뜩이고 있었다. 등불을 하나도 켜지 않아 어두운 방에는 오로지 그 간헐적인 빛만이 전부였다. 그렇게 가끔 노랗게 변할 때에야 비로소.

“….”

또 다른 남자가 보였다. 옷이 온통 풀어헤쳐진 몸에는 울긋불긋한 자국이 뒤덮고 있었다. 그 중 가장 흉하고, 가장 검푸른 자국을 목에 매단 채 카게야마는 정신을 잃고 있었다. 눈썹 한번 꿈틀거리지 않으며 중년의 사용인은 그 모습을 자연스럽게 받아들였다. 벽으로 다가간 그는 작은 주인의 옷보다 조금씩 품이 작은 옷을 맵시 있게 정돈하여 옷걸이에 걸었다. 깨어나면 입힐 요량이었다. 남자는 그것을 보고 희미하게 웃었다.

“당신은 눈치가 참 빨라.”
“칭찬 감사합니다. 작은 주인님.”
“하지만 조금 더 빠를 필요도 있어요.”

목에 건 넥타이의 매듭을 묶어 가며, 남자가 말했다.

“나를 계속 ‘작은 주인님’이라고 부를 필요가 있나.”
옷에 묻은 작은 먼지를 털어내며, 사용인은 슬며시 입술을 끌어올렸다. 오히려 더 홀가분해진 표정으로 그는 뒤를 돌아, 허리를 깊이 숙였다.

“죄송합니다. 아츠무 도련님.”

방 어딘가. 아주 뜨거운 곳에서는 큰 주인이. 아니 늙은 주인이 마지막 숨을 쉬고 있을 것이다. 그는 남자의 말대로 눈치가 빨랐고, 자신이 어느 편에 허리를 숙여야 하는지 잘 알고 있었다.

“앞으로는 미야侑가의 주인님으로 모시겠습니다.”

새로운 대저택의 주인은 미소를 띠우며 그를 바라 보았다. 태생부터 몸에 배인. 그야 말로 남을 누르는 듯한. 그러나 흉폭하다기 보다는 세련되고도 부드러운 눈빛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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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Blind Game # 1

The End.



으아. 너무 긴 한 편이었습니다.ㅠ0ㅠ
2부는 한달 가량 후에 시작할 예정입니다. 1부에서 풀리지 못한 많은 이야기들을 이어나가도록 하겠습니다. :) !!
2부는 아마도 [그들이 얼마나 서로를 사랑했었는지]에 대한 이야기가 될 것 같습니다.
그동안 감사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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