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의사와 의사 동기와 조폭이야기>

 


 “술을 해독하는데 라면이 좋다는 것은 근거가 없는 소리입니다. 성분으로 따지자면 라면이 아니라 츠키시마가 먹어야 하는 건 사실-”
 “한 마디만 더 말하면 뽀뽀해 버릴 거야.”
 “?”

  카게야마는 뽀뽀와 숙취해소에 대한 상관관계를 생각하느라 복잡한 표정으로 고개를 갸웃했다. 그 틈을 타서 벽에 걸린 목도리로 입까지 모조리 감아버린 쿠로오는 구석에서 굴러다니던 장갑도 잘 찾아서 손에 끼워 주었다. 둘은 지금 숙취에 시달리는 츠키시마를 위해서 라면을 사러 나가던 길이었다. 사실 쿠로오는 그다지 나가고 싶지 않았지만, 카게야마가 헛개나무 열매를 생으로 사와서 먹일까봐 걱정이 되어서 동행을 결정했다. 카게야마의 옷은 맞지 않는 관계로 츠키시마의 것 중에서 품이 큰 것을 골라 걸친 쿠로오가 거울을 보고 머리를 한번 후드득 털어냈다.

 “모자 드릴까요?”
 “그럴까?”

 마침 필요한 것을 건네 오는 것에 마다하지 않으면서 씨익 웃었다. 간만의 외출이었다.

 

 ***

 

 “성분표 분석해봤자 소용이 없어. 의사선생.”

 이런 건 다 사기야. 라고 덧붙이면서 쿠로오는 카게야마가 미간을 찡그리면서 뚫어져라 보고 있던 라면 봉지를 뒤에서 뺏어 들었다. 팔을 위로 한껏 올리자 쿠로오보다는 작은 키 때문인지 고개도 까닥 따라왔다. 눈이 마주치자 손에 든 라면을 찰랑찰랑 흔들어 주었다.

 “그래도 간기능이 약화된 사람이 먹게 되는 거니까.”
 “이럴 시간에 숙취 해소 음료나 하나 사서 곁들어 주는 게 좋을걸.”

 씨익 웃는 쿠로오를 카게야마는 신기하게 바라보았다.

 “쿠로오씨는 츠키시마랑 많이 다르네요.”
 “응?”
 “잘 웃고, 화도 안 내고, 느긋하시고. 하지 말라는 것도 없으시고.”
 “좀 그런 편이지. 그런 사람을 사회에서는 ‘친절한 남자’라고 불러.”

 네에. 조금은 성의 없게 대답하면서 카게야마는 여러 종류의 라면이 열을 지어 있는 정리대로 다시 시선을 돌렸다. 평소에 라면은 잘 먹게 하지 않아서, 되는 김에 몇 개 더 사가고 싶은 마음이었다. 자신이 좋아하는 것과 츠키시마가 종종 먹던 것, 그리고 왠지 쿠로오가 잘 먹을 것 같은 것을 하나하나 골라서 쿠로오가 들고 있는 장바구니에 담던 카게야마가 생각난 듯 물었다.

 “쿠로오씨는 친절한 남자신데 왜 배에 칼을 맞으셨어요?”

 미소가 보일 듯 말 듯 흔들렸다. 커다란 손이 카게야마의 머리를 덮듯이 내려와서 이리저리 휘젓는다. 결이 좋은 머리카락이 온통 흩날리고, 내리 누르는 힘에 고개가 수그러들었다. 장난처럼 한 행동에 카게야마는 바둥거리며 ‘그만하세요!’라고 응수했지만, 사실 장난인지 아닌지는 표정을 볼 수 없어서 알 수 없는 것이었다.

 “그런 질문을 할 때는 조금 지나지 않았어?”

 아프지 않게 이마가 눌리면서 고개가 젖혀졌다. 그때서야 마주하게 된 쿠로오씨의 눈은 평소와 조금 다른 느낌이었다.

 “아니면, 나한테도 관심이 좀 생기는 건가.”

 아이를 대하는 것처럼 이마를 지나 머리를 쓸어내린 손이 등을 향하더니 꽉 자신에게 당겼다. 코가 박힌 품에서는 츠키시마와 쿠로오의 체향이 모두 나고 있었다. 누구때문인지 모르지만 기분이 좋아졌다. 또, 놓아줄 것 같지도 않아서 카게야마는 다른 생각 같은 거 하지 않고 가만히 있었다. 심장소리가 좋았다. 어렸을 때부터 그랬다. 가만히 귀를 기울여 듣고 있으면 다른 생각이 나지 않았다.

 “그런 거면 좋겠네.” 라고 말하고,
 “의사선생이 그렇다고 하면 너무 기쁠 텐데.”

 또 그렇게 말하는 쿠로오한테 차마 츠키시마가 꼭 물어보라고 했다는 말을 할 수가 없어서 카게야마는 그냥 가만히 있었다. 카트에는 라면이 열다섯 개째 담기고 있었다.

 

***

 

 어느 쪽이냐고 한다면 운이 없는 쪽이었다. 그것도 더럽게 없는 쪽이었다. 누구에게 이야기해도 기구하다는 말이 먼저 돌아오는 인생길이었다. 유복한 집에서 태어났지만, 부모님은 알 수 없는 사고에 휘말려 돌아가시고, 중학교에 들어가는 나이였던 자신은 그대로 친척집에 맡겨졌다. 맡겨진 것은 재산까지 포함이었는데, 성인이 되던 해에 남은 것이 없었다. 또, 3살 위의 친척 형은 나쁜 짓을 많이 시키는 편이었다. 들키기라도 한 날에는 모두 자신의 잘못이 되는 나날들은 점점 무기력을 학습시켰고, 쿠로오는 자주 집을 나가게 되었다.

 룰러 코스터라도 탄 듯이 오르내리는 삶에서 균형을 잡기란 그토록 어려운 것이다. 믿을 것이 사라진 틈새로 스며들어오는 쉽고 나쁜 것들을 거절하는 건 점점 더 어려워졌다. 자신의 위한 호의처럼 보인 것들은 사실 나락으로 떨어진 물귀신들의 손짓이었다. 수렁처럼 변해버린 일상은 점점 지저분해졌다. 담배, 술, 폭력, 여자, 약. 나쁜 것들로만 가득 채워져 있다는 것을 알면서도 어물쩍 거절하지 못했던 성격은 결국 거절이 배신이 되어버리는 세계까지 쿠로오를 천천히 이끌어 갔다.

 “친절한 남자가 왜 칼을 맞았냐면..”
 “얘기해주시는 겁니까?”
 “못 해 줄 것도 없지. 의사선생은 모르는 세계겠지만 내가 있는 곳에는 보스가 있어.”

 엄지손가락을 흔드는 쿠로오를 보며 카게야마는 곰곰이 생각하다가,

 “병원장님 같은 건가요?”
 “조금 다르지만...뭐 비슷하지. 어쨌든 보스가 시키는 건 다 해야 하는데 친절한 남자가 그러질 못했어.”
 “뭘 시키셨는데요?”

 손에 들린 봉지가 달랑달랑 흔들렸다. 숙취해소약을 사러 들어간 약국에서 약사와 약성분을 두고 전투적인 토론에 들어가려던 카게야마의 뒷덜미를 잡아끌고 나온 길이었다. 이제 오피스텔까지는 얼마 남지 않은 거리로 낮에 오히려 한산하고 어두운 뒷골목이 나타났다. 이런 이야기를 하기 딱 좋은 장소였다. 쿠로오는 보는 것만으로도 오싹한 미소를 지었다.

 “아주 나쁜 짓.” 아마도 너의 반대편에 서 있는.
  “....?”

 쿠로오는 입을 다물었다. 카게야마는 말없이 걸었다. 봉지의 부스럭거리는 소리만 골목길에 이리 저리 반사되어 크게 울린다. 묵직해진 분위기를 어쩔까 싶던 차에.

 “원래 누가 나쁜 짓을 시키면 하지 않는 겁니다.”

 뭘 그런 것을 가지고 그러냐는 듯한 말투로 늦은 대답을 해 왔다. 아마도 이제 생각이 끝난 것 같았다. 그 예상이 정답인 듯 카게야마는 점점 빨라지던 걸음을 멈추고, 쿠로오를 보며 짐짓 어른스럽게, 아니 정말 어른은 맞지만- 말했다.

 “다음에도 하지 마세요.”
 “...그럴까?”
 “또 그런 일로 칼을 맞으면 제가 고쳐드릴게요.”
 “이건 뭐 고맙다고 해야 하는 건지, 또 칼을 맞으라는 말인지 알 수가 없네.”
 “저는 수술을 정말 잘하니까 좀 더 깊이 맞고 오셔도 됩니다.”
 “역시 칼을 맞으라는 쪽이었구나. 의사선생.”

 “그리고 좋아하고.”
 “...뭘?”
 “?..수술이요.”

 와. 정말 들었다 놨다 하네. 쿠로오는 새삼 이 의사선생 옆에서 십년을 넘어 지냈다는 츠키시마가 대단하다고 느껴졌다.

 

***

 

 살아가면서 가장 외로웠던 순간이 언제냐고 물어보면 비오는 날의 하교라고 답할 것이다. 재수 없게 갑자기 비가 내리면 자신은 정문 앞에서 손바닥을 펴고 내리는 빗방울을 받으면서 그치길 기다렸다. 한 때, 당연하게 왔었던 누군가인데, 더이상 올 거라는 기대는 하지 못하는 그 시간이 제일 외로웠다. 그런데 자신의 삶은 항상 불운이라는 비가 내렸다. 그런 생각을 하던 순간은 사실 핏방울이 뚝뚝 떨어뜨리며 이대로 죽는구나 싶었던 때였다. 참 나쁜 삶인데도 죽는 것이 또 싫어서 한없이 울적했다. 쿠로오는 더이상 움직이지 못하고 차가운 벽에 기대어 눈을 감았다. 아, 빌어 먹게도 죽는 날까지 비가 왔다.

 “어디 아프십니까?”

 긴 코트를 입고 주저앉는 남자가 자신을 들여다보고 있었다. 자신의 배에는 아직 칼이 꽂혀 있고 줄줄 흐르는 피가 바닥에 흥건하다. 도망쳐야 되지 않겠어? 라고 말하고 싶었지만 쿨럭쿨럭, 기침만 나왔다. 상대방 코트 밑자락이 바닥에 끌려 젖어 가고 있었다. 그런 데에는 일말의 신경을 두지 않고, 남자는 골똘히 자신의 얼굴을 살폈다. 그리고는

 “피가 많이 날 때에는 체온을 유지하는 게 중요합니다.”

 라고 말하며, 자신의 머리 위에 있던 우산을 기울여 쿠로오에게 씌워 주었다. 곧 죽을 것 같았던, 그래서 인생의 가장 외로운 순간이 주마등이 되어 흐르는 순간의 남자에게 그것은 굉장히 결정적인 장면이 되었다.

 

 “뭐야, 뭘 이렇게 많이 사왔는데. 라면 가게라도 차릴 셈이야?”
 “아냐, 나는 의사야.”
 “....그걸 말하는 게 아니잖아.”

 봉지를 들여다보면서 이야기를 나누는 둘을 보며 쿠로오는 그런 생각을 했다. 내 어린 시절, 미숙했던 꿈을 그대로 꾸어서 의사가 되었다면 널 일찍 만났었을까. 내 인생에 사고라는 브레이크가 없었다면 츠키시마 선생보다 널 먼저 만나게 되었을까. 드라마에서 보면 주인공끼리는 첫 눈에 사랑에 빠지는 경우가 많지만, 현실에서는 좀처럼 인정받지 못하는 꿈의 이야기였다. 그런 얘기를 했다가는 한낱 가벼운 사람 취급을 받는다. 하지만 더 많은 시간을 공유해왔다는 이유로, 또 먼저 만났다는 이유로 상대의 감정이 자신의 것보다 당연하게 가벼울 거라는 생각은 역시 억울한 일이었다. 라면의 물을 올리고 끓어오르길 기다리면서 쿠로오는 그런 생각을 했다.

 한 번만 더 나쁜 짓을 하고 싶다고.

+ Recent posts