의사와 의사 동기와 조폭이야기 <에필로그(2년후)+잡담>

 

 흐릴 것이라는 예보와는 달리 날이 좋았다. 왠지 시작부터 행운인 거 같아서 남자는 하늘을 보며 씨익 웃었다. 건들거리는 몸은 들어갈 때보다 오히려 건강해졌다. 규칙적으로 먹고, 운동한 덕이었다. 그렇다고 다시 돌아가고 싶은 건 아니었고, 거기서 좀 세상과 단절되어 있었다고 해서 죄가 사라지는 것도 아니었지만 값을 치룬다는 것은 역시 나쁜 기분이 아니었다. 남자는 등에 진 짐을 다시 한 번 고쳐 메고, 숨을 크게 들이마셨다. 이게 바깥공기라는 거구나.

  빠아앙-!

 시끄럽게 울리는 클락션 소리에 무심코 고개를 돌렸다. 처음부터 마중 나올 사람은 없다고 생각해서 자신일 거라는 생각은 못했다. 그런데 왠지 그 검은색 차량은 쿠로오가 보기를 기다렸다는 듯이 차창이 내려가고.

 “쿠로오씨!”
 "의사선생?"

 2년 전보다 머리가 조금 더 길어진 의사 선생이 차창 밖으로 몸을 빼고 손을 흔들었다. 에에? 쿠로오는 진심으로 놀라서 손을 늘여뜨리고 입을 벌렸다. 온다고 짤막한 편지를 남기기는 했지만 당연히 안 올거라고 생각했다. 그보다 동기가 보내 줄 리가 없다고 생각했는데. 하는 순간 그 뒤로 조그맣게 동기의 얼굴도 눈에 띄었다. 불만스러운 듯이 핸들에 몸을 기대고 있었지만, 왠지 쿠로오는 그가 웃고 있는 것 같기도 했다. 왜지. 그는 소름이 오소소 돋는 것을 느꼈다.

 “이거 갚으러 왔습니다!”

 의사선생의 손에는 포장 하나 되지 않은 콘돔이 상자 째 흔들리고 있었다. 2년 전과 조금도 바뀌지 않는 촌스러운 문구가 눈에 띄는 빨간색으로 표시되어 있었다. 자신을 내보내 준 교도관을 비롯해서 꽤 많은 사람들이 이 진귀한 광경을 놓치지 않고 눈에 담았다. 뼈에 사무치는 수치감에 쿠로오는 두 손으로 얼굴을 가렸다. 나는 친절하지만 부끄러움은 아는 남자야. 의사선생. 게다가 이제 막 사회로 나온 새파랗고 파릇파릇한 영혼이었는데. 벌써부터 더럽혀져 버렸어.

 “쿠로오씨!!”
 “미안한데, 나 차에 태워주고 주거나 아니면 모르는 척 해 주면 안 될까.”

 자신임을 알리고 싶지 않아서 웅얼거리듯 내뱉은 말이었다.

 “네? 잘 안 들립니다! 이거 2년 전에 빌려썼던 ㅋ-”

 거기까지는 차마 하게 할 수 없었던 츠키시마가 카게야마의 입을 막았다. 그렇게 한 팔로는 카게야마를 틈없이 끌어안은 채, 한껏 몸을 기울인 의사선생은 2년 더 성숙해진 표정으로 입가를 비스듬히 띄워 올린다. 그리고는.

 "아, 그 때는 참 잘 썼습니다. 쿠로오씨."
 
 라고 말한다. 쿠로오는 지난 2년 간, 츠키시마가 이 날을 얼마나 고대하고 있었을지가 손에 잡힐 듯 분명하게 느껴졌다. 
 이 망할 의사 선생.

 드라마에서 악역을 맡았다고 해서, 배우들이 사이가 나빠지라는 법은 없지?
 라고 생각하면서 정말로.  -끝-

 

<비하인드 스토리들>


1. 츠키시마는 여자에게 인기가 있는 편이었고, 카게야마는 종종 남자를 끌어당기는 편이었다. 대학교 시절 츠키시마에게 집착하던 여자 선배가 있었다. 여러 가지 이유가 있지만, 츠키시마가 애인을 만들지 않은 이유에는 그 여자 선배 일도 있었다. 그래서 집착하는 것에 질색하게 된 것인데, 카게야마와 연애를 하면서 츠키시마는 그 여자를 조금은 이해하게 되었다.
2. 토비오에게 연애감정을 느꼈던 사람은 츠키시마나 쿠로오가 다는 아니다.
3. 본편 시점 이후에, 그리고 쿠로오를 만나기 전 시간 동안 둘은 잘 지낸다. 토비오는 종종 츠키시마를 화나게 하는데, 그럴 때는 '무조건 들어주기'를 해야 한다. 가장 처음에 무조건 들어줘야 했던 것은 병원에서, 둘만 야근 중일 때..(두둔!!) 토비오가 진찰의자(그 산부인과에서 쓰는 다리 벌려지는 의자!)에 앉아서 하는 역할극 섹스였다. 그 후로 토비오는 없는 센스를 갈고 닦으며 잘못하지 않으려고 정말 조심했다. 몰입한 츠키시마는 무섭다. 라는 것이 카게야마의 감상이었다. 재밌지만 들킬까봐 두 번은 역시.. 라는 것이 츠키시마 쪽 감상.
4. 그런 것 치고는 병원 사람들은 금방 알아차렸다. 그렇지만 둘의 관계를 실제적으로 인정한 적은 없고, 사람들도 한 편으로 믿고 싶지 않아(..)해서 그냥저냥 둘은 애매한 관계로 끝까지 남았다. 그러나 둘이 빠진 회식 자리에서 이름은 자주 오르내린다. 여러 가지 방면으로.
5. 3번과는 달리 츠키시마는 카게야마를 화나게 하는 일은 없다. 사실 카게야마는 버럭은 잘 하지만 감정적으로 화가 나는 일은 별로 없다. 수술실에서 버럭버럭 하는 것도 사람에 대해서 하는 것이 아니라, 행동에 대해서 하는 것이다. 그래서 사람이나 상황을 가리지 않고 화를 내서, 병원장 딸을 울렸다. 츠키시마는 이를 '카게야마의 패기'라고 부른다.
6. 츠키시마 아버지 일로 린치를 당하기도 했지만, 당시 수술 담당자였던 의사가 손을 썼던 덕에 일할 병원을 구하는 것이 쉽지 않았다. 지금 있는 병원은 그럴 때, 둘을 받아준 곳이었다. 결과적으로 잘 된 거긴 하지만 그래서 병원을 옮기는 일을 어려워 하는 부분도 있다.
7. 그렇지만 츠키시마는 유학에 대한 동경을 한 적은 있다. 카게야마는 그다지 외국을 좋아하진 않는다.
8. 자수에 대한 보상으로 쿠로오는 어린 시절 친척에게 빼앗겼던 재산에 대해 청구할 수 있도록 법적 조언을 받을 수 있게 되었다. 2년 동안 감옥에서 좋은 변호사를 만나 그것을 준비했다. 그 후에 잘 풀려서 의사선생들 보기에 조금 당당해진 쿠로오다. 본편 기준 5년쯤 지나면 재산은 쿠로오가 조금 더 많아진다. 와 억울해.라고 말한 츠키시마는 쿠로오를 가끔 금수저님이라고 불렀다. 그래도 누가 더 상대를 부러워하는지는 명확하다.
9. 외전을 쓴다면 역시 전부터 생각한대로 오이카와의 귀환. 참.. 어느 분야라도 능력쩌는 선배 역할로는 오이카와 토오루상이 최고다. ㅠㅠ
10. 원래의 엔딩이랑은 조금 달라졌는데, 쿠로오의 조직이 친절한 남자를 잡기 위해 토뵤선생을 납치하는 활극이 초기 버젼이었다. ㅋㅋㅋㅋㅋ 쿠로오랑 츠키시마 둘이 그 날 밤 이야기 하다가 그 사실을 깨닫고, 같이 차 운전해서 들이닥쳤지만 천운이 따라주는 토뵤선생은 하필 그 때, 맹장이 터진 보스에게 응급처치 중이었음. 그래서 문을 들이박으면서 등장한 차는 응급차량이 되어서 삐뽀삐뽀....그런 이유로 조직에서 나오는 일도 잘 풀리고, 토뵤선생은 뒷골목 형님의 은인님이 되어 행복하게 살았다는 스토리...?
11. 둘은 집을 합치지는 않는다. 의외로 자신의 공간이 있다는 것이 중요한 두 사람. 그렇지만 보통 같이 지낸다. 쓸데없이 돈 낭비 중. 다만 서로의 집에 서로의 옷이랑 속옷 같은 것이 엄청 많아져서, 같은 집에서 자고 와도 병원 사람들이 실눈뜨고 지켜보는 경우가 좀 줄음.
12. 10번처럼 엔딩이 났다면 아마 엔딩 문장은 <클리셰가 왜 클리셰인지에 대하여>였을 듯. 그러나 지금으로 바뀌면서 우리의 이야기도 여기서 완결되었다.로 변경되었다.
13. 쿠로오와 의사선생들은 콘돔 사건 이후로도 종종 교류를 하게 되는데, 토비오가 술을 너무 먹고 싶어하면 가끔 쿠로오가 몰래 다른 컵에 타준다. 쿠로오는 이야기를 참 잘 들어주는 친절한 남자여서 술친구로서 토비오가 매우 좋아한다. 츠키시마는 가끔 있는 일이라 모른 척 해 주지만, 컨디션이 안 좋으면 그걸 빌미로... 무조건 들어주기를...ㅎㅎㅎㅎㅎㅎ
14. 그렇게 지내다보니 어느 날, 쿠로오는 카게야마의 거짓말을 눈치채게 된다. "날 찼으면 포기하게는 해 줘야지." 쿠로오는 그렇게 말하면서 웃는다. 혹시 츠키시마에게 무슨 일이 생기면 이라는 가정하에 쿠로오는 계속 카게야마의 곁에 있는다. 참 나쁜 생각이지만 츠키시마 역시 자신에게 무슨 일이 생긴다면, 이라는 가정 하에 쿠로오를 묵인하는 부분도 있다. 둘 중 누구도 카게야마가 먼저 사라지는 상상은 하지 못했다. 카게야마는 츠키시마가 자신의 곁에 영영 함께 있을 거라고 생각한다. 그리고 쿠로오 역시, 언제부터인지는 모르지만 '언제라도 떠날 사람'은 아니게 되었다. 
15. 만우절날 장난으로 '나 곧 유학갈거야, 너는 어떻게 할래?'라고 이야기한 쪽은 츠키시마. '나는 유학 싫어. 안 갈래.'라고 해 버린 카게야마선생이 사건을 키웠고, 결국 일파만파로 퍼진 소문에 왠지 모를 오기까지 겹쳐져서 츠키시마는 캐리어까지 챙기게 된다. 눈 앞에서 캐리어 가방 손잡이까지 잡자 그제야 츠키시마 옷자락 끝만 잡고, 말은 한 마디도 못하는 카게야마 선생. 끝까지 가지 말라는 말은 안 하는 카게야마에게 폭발한 츠키시마가 몸으로 다그치자 그제야 '안 갔으면 좋겠어. 가지 마.' 라고 어렵게 진심을 꺼낸다. 유학을 가고 싶어하는 츠키시마도 알고 있고, 대학교 선배에게 데여서 집착은 싫어하는 츠키시마도 알고 있어서 잡으면 안돼. 안돼. 하고 있었던 토비오 선생님. 일단 한번 말하고 나니 그 다음에는 소리도 제대로 못 내고 눈물만 마구 쏟아내면서 이런 말 한다고 날 싫어하지 마. 하는 토뵤 선생에 덕통사고를 당한 츠키시마가 술술술 스스로 죄를 고백하고, 드물게 제대로 삐진 토뵤선생에게 카레 정찬을 몇번 바친 후에야 다시 해피엔딩. 그 후로 만우절에 하는 모든 츠키시마의 말을 믿지 않는 토비오 때문에, 곤란한 일도 생기곤 했다. 너 오늘 긴급수술 잡혔더라->오늘 하는 말은 다 거짓말->토뵤 선생 어디갔어!!!!
16. 15번의 일 이후로, 츠키시마는 유학에 대한 모든 책자를 치웠다. 그 날이 너무 인상적이어서 메모를 해 두었는데, 내용은 '집착은 그 대상이 누구냐에 따라 불호가 갈리는 것이다.'였다. 

+ Recent posts