매사가 그런 법이지만 , 이 또한 굉장히 단순하게 시작된 이야기였다.

 

 나 유학가려고.”

 아무렇지 않게 던져진 말에 덜꺽. 하는 소리와 함께 수저가 떨어졌다. 누군가의 성격처럼 깨끗하게 닦여 있는 판유리로 덮인 식탁 위였다. 먼저 말을 꺼낸 쪽은 아무렇지 않게 젓가락을 들어 초밥을 집어 들어 입에 넣었다.

 

 재깍, 재깍. 재깍.

 

 침묵 속에서 시계는 똑같은 소리를 계속해서 내며 시간을 흘러 보냈다. 그렇게 고인 시간이 한참이 되어 가는데도, 상대에게서는 아무런 대답이 돌아오지 않는다. 약간 늦은 식사였던지라 미적지근해진 초밥을 잘 씹어 목구멍 너머로 밀어 넣은 의사 동기는 여전히 묵묵부답을 시전 중인 의사를 마주 보았다.

초밥 몇 개를 한꺼번에 넣어서 볼이 잔뜩 부풀어 올라 있었는데, 목구멍으로 넘어가는 것은 아무것도 없었다. 못 볼 것이라도 본 것처럼 눈을 크게 뜨고 손은 여전히 젓가락을 들고 있는 모양대로 굳은 동기였다. 마치 흘러가는 시간이 의사만 피해가는 것처럼 정지된 자세다. 여기까지는 딱 예상한 대로였다. 의사 동기는 픽, 하고 속으로 웃음을 짓고 젓가락 끝으로 접시를 톡톡 두들겼다.

 

 “너는 어쩔래?”

 

 재깍재깍.         째각.

 

 

 

  <의사와 의사 동기와 만우절 이야기>

    

 

-1-

 

 “아즈네, 그거 급하게 처리할 일이야?”

 “아니, 아주는 아니야.”

 “그럼 지금 가지 마.”

 “?”

 “왜라니, 못 들었어?”

 

 어이가 없다는 표정으로 반문하는 상대를 바라보던 간호사는 들고 있던 펜 끝으로 TV를 가리켰다. 뉴스에서는 기상 예보가 시작되던 참이었다. 저게 뭐? 라고 말하는 태평한 얼굴이 화면을 확인한 후 빠르게 사색으로 변해간다.

 

 “설마?” 믿고 싶지 않아하는 말에,

 “발동됐어.” 친절한 직장동료는 온점을 찍어주었다.

 “맙소사.”

 

 그랬다. 오늘 오전 병원에서는 다시 츠키시마 케이의 기상예보가 발동되었다. 사실 그 표현은 조금 부적절한 감이 있었다. 우선 예보가 될 수 없다는 점이 그러했고, 일단 발동되면 다른 날씨는 예보하지 않는다는 점 또한 그러했다. 저기압과 태풍. 천둥과 번개. 그게 전부였다. 아즈네반사적으로 결재 일자를 확인했다. 다행히 하루 이틀 정도 여유가 있었다. , 하고 숨을 내쉰 그가 소중한 것을 대하듯 품에 결재판을 안았다. 그리고.

 

 “설마 둘이 싸웠어?”

 자연스럽게 츠키시마 케이의 기상예보 발동에 가장 큰 지분을 차지하는 상대에 대한 질문이 이어졌다. 질문을 들은 상대는 애매모호한 표정으로 고개를 기울였다.

 “그걸 모르겠어.”

 

 보통 같이 발령되곤 하는 예보였다. 손바닥이 마주해야 박수가 쳐지듯이, 싸움은 둘이 하는 법이라서 보통 이런 날엔 카게야마 토비오의 일기도도 꽤 볼만한 모습이곤 했었다. 그런데 오늘은 아니었다. 그 쪽 일기도는 구름이 잔뜩 낀, 그러나 번뜩번뜩 천둥번개가 치는 것이 아니라 오로지 풀죽은 모습뿐이었다. 그래서 병원 사람들은 분명히 카게야마 선생님의 크나큰 잘못이 있었을 거라고 예측했다. 그리고 하루라도, 아니 한시라도 빨리 수술실의 폭군님께서 S의 의사새끼님께 사과를 해 주었으면 좋겠다고 생각했다. 자신들을 위해서. 그리고 병원의 안녕을 위하여.

 

-2-

 

 “츠키시마!”

 “...”

 “츠키시마.”

 “....”

 “....케이.”

 “?”

 

 항복하듯 이름을 부르고 나서야 대답이 돌아왔다. 그러나 고개는 여전히 화면만을 향하고, 자판을 두들기는 소리는 시끄럽게 방을 채운다. 원래대로라면 가볍게 노닐어야 하는 기다랗고 얇은 의사 동기의 손가락은 실로폰이라도 치는 거처럼 힘주어, 팡팡팡 키보드를 치고 있었다. 다다다다다다다. 울리는 기계의 소리를 들으며 카게야마는 쭈볏쭈볏 등받이 없는 의자 위에 앉았다. 드르륵 하고 바닥에 다리가 끌리는 소리까지 들었으면서, 가까이 다가온 온기를 알아챘으면서도 동기의 어깨는 움직이지 않는다. 그에 입술이 삐죽이 튀어나왔다가 사르르 사그라들었다.

 

 “뭐 봐?”

 “유학 서류.”

 

 화면 속에는 보란 듯이 유학에 대한 수속 서류가 띄워져 있었다. 카게야마도 알고 있는 곳이었다. 굉장히 유명하고, 굉장히 비싸고, 굉장히 멀다. 몸이 화면으로 들어갈 것처럼 기울었다. 파란 눈동자가 정신없이 움직인다. 읽어 보려고 하고 있는 것이다. 귀를 뒤로 잔뜩 접어 내리고 바르르 떠는 토끼 같은 동기. 츠키시마는 입에 물고 있던 막대사탕을 혀끝으로 굴려 입 안 반대편으로 밀어 넣었다.

 

 “여기 가는 거야?”

 “....” 사탕은 다시 한 번 반대편으로 데굴데굴.

 “멀어.”

 “, 멀지.” 이로 깨물어 버릴 것처럼 물었다가 다시 놓고.

 “오래 있다 와?”

 “, 그럴 거야.” 결국.

 “....”

 “....”

 

 와드득. 입 안에서 부숴 졌다. 혀에 온통 퍼진 단 맛이 기분 나쁘다. 앙상하게 남은 막대를 입술에 여전히 문 채, 츠키시마는 가볍고 짧게 숨을 뱉었다. 손가락 끝을 만지작, 만지작. 시계는 그 날처럼 재깍, 재깍. 눈은 여전히 화면을 헤매고, 어깨는 바닥으로 꺼질 것처럼 내려앉아 있었다. 그런데도 왜 말을 못 해? 같이 가자고, 혹은 가지 말라고. 최소한 가는 거 싫어. 라는 말 한 마디가 그렇게 어려워? 잘게 잘린 사탕조각을 다시 잘고 잘게 부수며 동기는 끓는 속을 뜨거운 숨으로 뱉어냈다. 평소에 넘치던 패기는 도대체 어디로 간 걸까. 내 집 앞에 와서 당당히 너랑 잘 거야.’라고 말하던 동기가 맞긴 한가. 츠키시마는 지금 보이고 있는 카게야마의 소심함을 도저히 이해할 수 없었다. 이 소심함의 시작으로 다시 돌아가면, 일이 터진 것은 어제였다.

   

-3-

 

 어제는 만우절이었다. 평소라면 그런 식의 장난과는 억만년 정도 떨어져 있는 카게야마와 츠키시마였다. 다음날이 오프여서 평소처럼 같이 자고 일어나 초밥을 꺼내 먹을 때까지만 해도 장난을 칠 생각도 별로 없었다. 그러니까 사실은 그냥 충동적으로 내뱉은 말이었다. 아무리 눈치 없는 동기라도 거짓말이지?’ 정도는 물어볼 줄 알았다. 그렇게만 물어봐도 더 속일 생각이 없었다. 속일 생각을 하지 않아도 속일 수 있는데 구태여 그런 일을 할 필요가 없었다는 쪽이 더 가깝지만. 그런데.

 

 “난 못 가.”

 

 이상하게도 한참동안 말이 없던 동기는 그런 대답을 내어 놓았다. 기가 차서 츠키시마는 눈을 들어 카게야마를 바라보았다. 동기는 필요 이상 진지한 얼굴이었다. 거기서 일단 무언가 삐끗했다는 생각이 들었지만 설마설마했었다. 어쨌든 거기까지였다면 그냥 넘어갈 수도 있었다. 거짓말이었어. 라는 말을 재빨리 던지고 만우절이라는 개념을 가르쳐 주면 될 일이었다. 그런데 눈치도 없고, 센스도 없는 동기가.

 

 “건강하게 잘 다녀와.”

 

 라며. 그 자리에서 자신을 외국으로 보내버렸다. 그러더니 자리에서 일어나 설거지통에 식기를 와르르 쏟아 버리고는 집에 가 버린 것이다. 첫 대답이 나올 때보다 더 신속하게 이루어진 일이었다. 내가 만우절 장난을 당한건가? 처음 츠키시마는 그렇게 생각했다. 그런데 지금 하는 꼴을 보니 모두 진심이었다. 혼자 가라는 말까지 전부 진심이다. 속이야 어떻든 간에 거짓말은 아니라는 사실에 뒤통수를 제대로 맞은 기분이었다. 방금 전까지 침대 위에서 조금의 틈도 허용치 않고 붙어 있던 동기가 보여준 배신이었다. 역시 카게야마는 자신의 속에 천불을 내려고 태어난 것 같다. 라고 생각하며 그는 이를 악물었다.

 

 그래, 생각해보면 자신의 잘못이었다. 이 단순한 동기에게 너무 고차원의 장난을 쳤지. 내 죄야. 그는 백번 양보했다. 그렇게 생각했다. 그래서.

 

 “아직 취소할 수 있어.”

 라고 던졌다. 솔직히 조금 자존심이 상했지만 이 정도는 접어줘야 알아먹을 것이라고 생각했다. 그런데.

 “...아니야.”

 

 와, 좋아하지도 않고 배운 적도 없는 욕이 나오려고 해서 의사 동기는 다시 한 번, 이를 꽉 다물었다. 그러나 이젠 정말 더 이상 참을 수가 없었다. 그는 회전의자를 휙 돌려 옆에 앉아 있던 동기를 마주 보았다. 그리고 한껏 오그라들어 있는 토끼의 턱을 꽉 잡았다. 어제부터 피하려고만 하는 짙푸른 눈동자를 똑바로 잡아챘다.

 

 “이번이 마지막 기회니까 잘 대답해.”

 “..

 

 . 이겠지. 고개를 얕게 끄덕이는 것에서 볼살이 밀렸다 돌아가는 것을 보며 츠키시마는 크게 숨을 다잡았다. 안경을 쓴 얼굴은 의사의 전형적인 표본인 것처럼 이지적이고 날카로웠다. 그 얼굴로 자신을 좀 봐달라는 듯이 굴면서도, 입 밖으로는 전혀 다른 이야기를 꺼내놓는 이율배반적인 동기를 뚫어져라 보면서 의사는 천천히 힘주어 한 마디, 한 마디를 던졌다.

 

 “정말 나 혼자 유학 가?”

 “.....”

 

 세상이 무너진 표정이 이거겠지. 자신이 없이 살아온 날보다, 함께 살아온 날이 더 많은 동기였다. 같이 있는 것이 당연했고, 없어지는 것은 상상하지 않았다. 애정은 두 번째로 미뤄놓더라도 갑작스러운 존재의 박탈이 주는 스트레스는 상당할 수밖에 없었다. 그냥 평소처럼 가지 마. 하고 말하면 되는 일인데, 이 단순한 문제를 복잡하게 꼬아버리는 고집이 이해가 가지 않아서 미간이 사정없이 좁혀진다. 내가 여기까지 했으니까 너도 뭘 좀 해 봐. 머뭇거리던 입술이 안으로 한번 들어가 모습을 감추었다가 천천히 내밀어지고.

 

 “.........”

 

 응이다. 분명히 응이라고 했어. 츠키시마는 정말로. 턱이 아프도록 이를 꽉 물어뜯었다. 가만 안 둘 거야. .

 

 


Chapter-15

의문의 여인

(Mysterious Woman)


 

 

 

15-1

 

 


 “츠키시마에게서 연락이 끊겼어.”

 

 스가와라는 불안한 표정으로 소식을 전했다. 이미 알고 있었던 듯 다이치는 미동도 없이 폭풍우가 한참인 창밖을 보고 서 있었다. 강인해 보이는 뒷모습은 카라스노에 들이닥친 불행을 막아서려는 듯이 결연하고 빈틈이 없었다. 그러나 그것은 또한 풍랑 속에 홀로 서 있는 등대같이 외롭고 약해 보이는 것이기도 했다.

 

 “센티넬들의 집합은 어떻게 됐지?”
 “모두 도착했어. 하지만 그렇다고 해도 우리가 아오바죠사이를 이길 수 있을까?”
 “없겠지. 아무리 셈을 해 봐도.”

 

 누군가를 연상시키는 바람은 날카로운 손톱을 가진 것처럼 창문을 흔들고 사정없이 긁어내렸다. 빗방울은 변덕스럽고 거친 바람에 흩날리며 아래로 쏟아지는 것이 아니라 옆으로 흩날리다가 급작스럽게 방향을 바꾸어 정면으로 와락 달려들어 오기도 했다. 스가와라는 버릇처럼 왼손 약지에 끼워진 반지를 돌렸다. 누구보다 무사히 돌아오길 바랐다. 역시 츠키시마를 대신해서 차라리 자신이 가는 편이 좋았을까. 그런 후회가 몸서리치게 몰려들었다.

 

 “하지만 그렇다고, 무력하게 부당함을 받아들일 수는 없지.”

 

 다이치는 결단을 내렸다승률이 낮은 도박이지만, 세상 어떤 확률도 0은 없는 법이다. 0에 가깝다고 해도 기적은 언제나 존재한다. 또한. 적어도 히나타를 돌려받는 데는 기적이 필요하진 않았다.

 

 “스가-. 시라토리자와에 연락을 부탁해.”
 “아오바죠사이가 아니라, 시라토리자와에?”
 “이대로라면 누구도 돌려받지 못해. 그럴 수는 없지. 국제 재판을 신청할 생각이다.”

 

 수장의 말은 담담했다. 그리고 논리적으로도 크게 어긋남은 없었다. 하지만 스가와라는 두 손을 힘주어 마주 잡았다. 지금 같은 경우에, 그것은 최후의 보루를 지키고 남은 것을 버린다는 뜻에 가까웠다. 누가 최후의 보루이고, 누가 남은 것인가. 반지에 박혀 있는 장식 보석이 아프게 손가락뼈를 찔러왔다. 평소 자신의 의견을 크게 밝히는 법이 없는 그는 한참을 망설이다가 어렵게 다시 입을 열었다.

 

 “재판에 가면 반드시 카라스노가 유리하리라는 보장은 없어. 그렇다고 한다면 차라리.”
 “알고 있어. 하지만 전쟁을 치르기 전에 먼저 해 볼 수 있는 유일한 방법이야. 나는 어떤 이유라 할 지 라도 이 땅에서 전쟁이 시작되는 것은 원치 않아.”

 

 카라스노의 국토 위에서 질 것이 뻔한 전쟁을 벌일 생각이 다이치에겐 없었다. 개인의 생각이나 가치관과는 상관이 없는 단지 수장으로서 내린 결정이었다. 그는 눈을 부릅뜨고, 창문 밖 혼돈이 몰아치는 바람 속을 노려보았다.

 

 “모두 돌려받는 것은 꿈에 불과하지. 약한 나는 전부를 구할 수 없어. 그렇다면 하나라도 돌려받을 수 있는, 그리고 카라스노의 피를 흘리지 않는 쪽을 선택해야 해.”
 “다이치. 하지만 그렇게 되면.”
 “이건 수장으로서의 결단이야.”

 

그는 몸을 돌려, 부수장이자 자신의 든든한 친구인 스가와라를 바라보았다. 짧고 깔끔하게 손질된 머리스타일처럼 꾸밈이 없는 성정의 다이치는 내린 결단에 대해 돌이키는 법도 없었다. 수수하지만 단단한 그의 앞에서 간혹 스가와라는 뼈를 깎는 죄책감을 느끼곤 했다. 모든 일을 카라스노’라는 기준에 따라 결정하며 망설이거나 번복하지 않는 확신 있는 지도자 밑에, 부수장이라는 자리를 맡고 있는 것이 과연 가당키나 한 일일까. 하는 것에서 출발하는 생각이었다.

 

 

15-2

 


 “우시지마님.”

 

 시라부는 굵직하고 남자다운 필체가 적힌 서신을 잘 접으며 우시지마를 불렀다. 커다란 소파에 파묻히듯이 누워 책을 읽고 있던 우시지마는 시선만 들어 자신의 가이드를 바라보았다. 아오바죠사이에서는 두어 시간 정도를 더 미룬 회담 시간을 제의해 왔고, 시라토리자와 측에서 그것을 받아들임에 따라 할 일 없이 한가한 시간이었다. 원체 우시지마의 곁을 지키는 것을 좋아하는 시라부를 제외한 나머지 측근들은 할 일이 많이 없는 답답함을 견디지 못하고, 나가버린 참이었다. 그래서 조용한 가운데, 가이드는 우시지마의 허리 즈음에 앉아 서신을 그에게 내밀었다가 받기도 전에 다시 내려놓았다.

 

 “이건 득이 될 것이 없는 서신입니다. , 거절한다고 해도 아무도 모를 것이기도 합니다.”
 “시라토리자와는 패자의 나라이기 전에, 법칙의 나라다. 법이 모두에게 공평하지 않다면 존재의 가치를 증명할 수 없지.”
 “당신의 말은 모두 옳습니다. 하지만 우리가 이를 공명하게 해결하려고 하면, 추후에 그 가이드에 대한 소유를 주장하기도 어려워집니다.”
 “시라부, 나를 깨운 이유가 무엇이지?”
 “그건..”

 

 가이드는 조용히 고개를 숙였다. 우시지마는 엄한 시선을 부드럽고 올바르게 던졌다.

 

 “패자의 자리에 대한 자긍심, 오이카와 토오루에 대한 의심, 시라토리자와에 대한 애국심, 나에 대한 충정. 이유는 여러 가지 일 수 있다. 2년 전, 처음 본 너는 어림에도 불구하고 상황에 대한 판단이 좋은 아이였기 때문에 무엇이 가장 큰 이유였는지 따로 묻지 않았지만.”

 

 잠시 말을 멈춘 그는 소파의 팔걸이와 등받이에 기대고 있던 상체를 바로잡아 앉았다. 그리고 시선은 들고 있던 책으로 다시 돌려졌다. 2년 전, 흥미롭게 보았던 책을 미처 다 읽지 못하고 다시 동면에 들어갔었다. 항상 있던 일인지라 우시지마는 크게 생각하고 있지 않았는데, 시라부가 챙겨 와서 건네준 것이었다. 고마운 일이었다.

 

 “내 이유를 묻는다면 법칙계 센티넬로서의 책임을 다하기 위해서라는 한 가지 뿐이.”

 “알고 있습니다. 하지만.”

 “시라부. 우리의 조국 시라토리자와 역시 아오바죠사이를 비롯한 다른 나라처럼 SS센티넬을 동면시키지 않고 소비할 수도 있다. 그러려고 들었다면, 그런 방식으로 약소국부터 하나하나 집어 삼켜서 그들의 센티넬을 우리의 것으로 바꾸고 하나의 제국을 만들 수도 있었겠지.”
 “우시지마님.”
 “너는 영민하니 내가 하고 싶은 말을 이미 알고 있을 것이다. 네가 나를 깨운 이유 중에 가장 큰 것이 무엇인지는 이미 알고 있다. 나 또한, 다음에는 과연 깨어날 수 있을지에 대해 번뇌하면서 영면에 들지 않아도 되는 삶이 매혹적인 것도 사실이지.”
 “제가 바라는 것이 그것입니다. 그래서 저는 그 가이드를 당신에게 바치고 싶습니다.”
 “알고 있다.” 그는 가벼이 한숨을 지었다.

 “하지만 네가 가벼이 밀쳐버린 저 서신이 나에게 새삼 패자로서의 의무를 일깨워 주는군.”

 

 시라부는 할 말을 찾지 못하고 몸을 엎드렸다. 우시지마는 읽던 책에 갈피를 끼워 표시하고는 옆으로 치웠다. 그리고 서신을 집어 들어 천천히 펼쳤다.

 

 “나는 세상의 법칙을 다루는 센티넬. 예언의 코즈메 켄마처럼 특별하게 주어진 능력에는 그만한 대가도 책임도 따르는 법이지. 그렇기에 카라스노와 오이카와 사이의 일을 제 3자의 입장에서 중재하기로 결정했다.”

 

 우시지마는 손을 뻗어 자신에게 얼굴이 보이지 않게 숙인 시라부의 머리를 쓸어내렸다. 목덜미에는 자신이 남긴 흔적이 흉하게 남겨져 있었다. 아직도 자신보다 어린 나이였지만 자신이 몇 해를 다시 차가운 관 속에서 지내고 나면 알지도 못한 사이에 훌쩍 추월해 갈 것이다. 그것은 사실 두려운 일이기도 했다. 하물며 자신이 그러한데, 자신에게 모두를 바치기로 마음먹은 이 자에게는 또 어떨 것인가. 우시지마는 되도록 감정을 나타내는 법이 없는 얼굴을 조금 일그러뜨렸다.

 

 “그가 정말 소문만큼 대단한 가이드라면, 나를 영면에서 벗어나게 해 줄 수 있겠지. 하지만 그러고 나면 시라토리자와가 가지고 있던 가치가 사라진다. 나는 거기까지 타락하지 않을 생각이다.”

 

 시계의 초침 소리가 침묵 사이를 오고가며 규칙적으로 울렸다. 소리는 시간은 지금도 흐르고 있으며, 공평한 것이라는 사실을 조금씩 두 사람에게 이해시켰다. 시간. 규칙. 공평. 모두 자신을 둘러싼 명제들이었다. 다시 한 번 가벼운 한숨을 지으며 우시지마는 시라부에게서 손을 거두고 치워두었던 책을 다시 잡았다. 말을 많이 하는 법이 없는 그로서는 드물게 긴 대화였다. 그의 가이드는 꽤 오랜 시간동안 움직이지 않고, 곁에 머물러 있었다. 그리고.

 시라토리자와는 오전에서 정오로 연기되었던 오이카와 토오루와의 면담 시간을 역으로 거절했다. 그리고 당일 오후에 국가의 이름을 걸고, 공적인 성명을 서신으로 보내왔다.

 

 [본국은 두 국가의 분쟁에 대해 패자의 자격으로 관여하겠습니다. 또한 그 결정은 센티넬가이드 국제협약에 따라 명시된 재판에 의할 것을 선언합니다.]

 

 

15-3


 

 

 오이카와는 팔을 아무렇게나 휘둘렀다. 선을 긋듯이 손날이 지나간 방향대로 피잉-하는 소리와 함께 바람이 일어나 잡다한 것들을 박살냈다. 벽에 걸려 있던 커다란 거울도 깔끔하게 둘로 갈려 바닥에 떨어지고 조각조각 다시 부숴 진다. 그것도 모자라 오이카와는 흩어진 거울조각을 자근자근 발로 밟았다.

 

 “협약? 관여? -짜증나게, 정말.”
 “그만해. 성질을 부린다고 해결될 일이 아니잖아.” 언제나처럼 이와이즈미는 오이카와를 만류했다.

 “오이카와상은 생각할 것은 다 하면서 성질을 부리고 있어.”

 

 털썩, 소리 나게 주저앉은 뒤로 망토가 날개처럼 사뿐하게 가라앉았다. 다리를 꼬고 먼 곳을 보면서 오이카와는 버릇처럼 손바닥 안에 작은 바람을 만들었다 풀어버리기를 반복했다. 이와이즈미는 묵묵히 그 모습을 지켜보았다.

 

 “카라스노의 속내야 빤한 거 아니야? 어차피 증거는 모두 이쪽에 있어서 아오바죠사이의 유죄를 증명하기 쉽지 않은데도 무리하게 국제에 이 사실을 밝히는 건 치비쨩 때문이지.”

 잘 손질된 결 좋은 머리카락이 바람에 부드럽게 흩날린다.

 

 “분란이 될 여지가 있는 토비오쨩을 애매하게 두더라도 일단 확실한 자기 소속부터 돌려받고 싶은 거야. 나름 괜찮은 방안이긴 하지만 이건 왠지 소심한 결정인데.”
 “그렇게 보이는 얼굴은 아니었는데 의외군.” 이와이즈미는 카라스노 수장의 듬직한 얼굴을 떠올리며 나지막하게 말했다.
 “그러니까 이와쨩이 테러집단에 대해 말해주면 좋잖아. 카라스노의 사절쨩에게 테러집단과의 내통죄를 씌워버리면 모든 게 깔끔하게 끝날 텐데.”

 

 솜씨 좋게 작은 열쇠가 손 안에서 뱅글뱅글 돌아갔다. 가볍게 탓하는 말투에 이와이즈미의 남자다운 입술은 더 단단하게 돌처럼 굳어졌다. 날카로운 시선으로 친구를 관찰한 그는 어깨를 한번 으쓱했다. 그 날, 피 칠갑을 한 자신의 어깨를 잡고 고개를 젓던 그대로의 모습이었다. 순순히 그 의심을 인정하면서도 테러집단에 대해 이야기하는 것은 거절했다. 배신자의 낙인이 가져올 피해 같은 것은 두려워하지 않는 남자다. 그래서 분명히 다른 이유가 있을 것이라는 생각은 오이카와 쪽도 하고 있었다. 하지만 묵직한 남자의 또 다른 속내를 어디까지나 믿고 있을 뿐. 들을 자신까진 없어서 오이카와 역시 조개처럼 입을 꽉 다물었다.

 

 “, 이런 협박 같은 걸로는 이와쨩을 움직일 수는 없겠지. 오이카와상은 이와쨩의 그런 면을 좋아하니까 한 번 참아 주는 거야. 하지만 두 번은 당연히 누구도 안 돼. 내가 다시 묻는다면 그 땐, 무조건 대답해 줘야 해.”

 

 또한 그 날처럼 침묵이 선언으로 떨어졌다. 각자의 생각 속에서 두 사람 모두 그 날은 되도록 오지 않기를 바랐다. 바람이 난동을 부려 엉망이 된 방에서 그나마 제법 모습을 갖추고 있는 테이블에 다리를 올려 까닥이면서 오이카와는 눈을 가늘게 떴다.

 

 “하지만 지금 시점에서 사실. 오이카와상이 이상한 건 카라스노가 아니라 토비오쨩을 데려간 의문의 집단이야.”
 “...?”
 “이미 충분한 시간이 흘렀어. 목표가 였다면 이미 각인은 해제되었어야 해. 토비오쨩을 죽이던지, 죽음 직전까지 다치게 하던지 해서 말이야. 그런데 나, 멀쩡하단 말이야. 기껏 요란법석을 떨면서 데려가 놓고, 이건 좀 이상하지 않아?”

 

 생각에 잠겨 있던 그는 손가락 안에서 돌아가던 열쇠를 제대로 쥐었다. 아오바죠사이의 가이드 장치는 열쇠 없이 해제되지 않고, 억지로 하려고 했다간 폭발해 버린다. 해킹의 시도까지 묵살할 만한 강력하며 단순한 체계의 장치였다. 물론. 좀 더 간단하게 발목을 자르는 방법도 있긴 했다. 하지만 그것은 장치만을 해제하는 것이라 효과가 느리게 나타난다는 단점이 있었다. 또한 그렇게 되는 순간, 오이카와는 카게야마 토비오의 고통과 가이드 장치가 사라져 낮아진 가이딩을 느껴야 정상이었다.

 

 “내가 아무렇지 않잖아.”

 

 정말 이상할 정도로 아무렇지 않은 상태였다. 오이카와는 다시 한 번 상황을 정리했다. 구획이 나누어져 있는 카테고리 안에 하나하나 자신이 알고 있는 것을 집어넣어 보았다. 카게야마를 데려간 것이 카라스노가 아니라고 생각한 까닭은 자신의 손 안에 카라스노의 좋은 센티넬들을 쥐고 있기 때문인 것처럼, 테러집단이 아니라고 생각하는 까닭은 그들의 최종 목표와 다른 행보 때문이었다. 이미 결론이 내려진 사실들은 의심할 것도 없는 논리였다. 그에 기반하여 오이카와는 다시 한 번 의심하고, 결론을 재배열했다. 그리고 힐끗 눈썹을 올렸다. 빛이 들어온 듯이 상념이 밝아졌다. 사실 최초의 명제만 건져내고 나면 모든 것이 들어맞는 가정이 하나가 있었다.

 

 어쩌면.
 목표는 오이카와 토오루가 아니다.

 그렇게 되면.
 목표는 카게야마 토비오였다.

 

 그게 맞다면아오바죠사이를 뒤흔들고, 카라스노까지 날려버린 이 어마어마한 템페스트가 사실은 지극히 개인적인 일이 되어 버린다. 물론 카게야마의 좁은 인간관계를 생각했을 때, 그다지 가능성이 높지 않은 것도 사실이지만 초기의 명제만 바꾸면 화살표는 일렬로 정렬될 수 있었다. 그래. 어쩌면 조직이 아니라 개인의 일이다. 오이카와는 자신의 예측을 입 밖으로 내지 않고 친우의 고집스러운 옆모습을 바라보았다. 조금 달라진 눈빛이었다. 만일.

 

 지금의 이 생각이 맞다면, 그 개인은 아마도 이와쨩이 쉽게 말해줄 수 없는 사람일 확률이 높았다. 그렇다는 것은 앞으로도 몇 번을 물어도 대답해주지 않을 것이다. 고어렵게 됐네. 고집스러운, 그리고 자신을 한번 배신한 친구의 얼굴을 낱낱이 살피면서 오이카와는 알고 있는 이와쨩의 주변 인물을 하나하나 떠올리고, 용의자를 지워갔다.

 

 

15-4

 


 똑똑또옥, .

 

 츠키시마는 어디선가 끊임없이 떨어지는 물소리에 눈을 떴다. 물 먹은 솜처럼 축축 처지는 몸이 한없이 무거웠다. 자신의 몸은 걸레라고 표현해도 딱히 틀릴 것이 없어 보였다. 지저분한 냄새가 났고, 물과 피와 체액이 뒤섞여 정체를 알 수 없게 되어버린 액체에 젖어 있었다. 그럼에도 죽지 않은 것은 아마도 치료계 센티넬에 의해 딱 죽지 않을 만큼만 고쳐졌기 때문인 듯 했다. 상대의 수완과 살아나게 된 불운에 짜증을 내며, 그는 발가락 끝부터 천천히 움직여 보았다. 뽑혀나갔다가 다시 돋아나길 반복하여 넝마가 된 몸에 어울리지 않게 윤기가 나는 새 것이었다.

 

 ‘말하지 않으면 쓸모없는 사절쨩이 되어 버리는데. 아니면, 눈앞에 히나타 소요를 데려다 놓고 시작해야 말을 하려나?’

 “...”

 

 그는 천장에 시선을 고정하고 짧게 웃었다. 처음부터 자신은 쿠니미가 쉬운 방법으로 각인을 해제할 거라고 생각하진 않았다. 그는 오이카와와는 본질적으로 다른 사람이었다. 물론 그라면 반드시 다른 방법을 찾으려 하겠지만, 그 전에 카라스노가 망해버리겠네. 고단한 눈을 감고 그는 자신의 능력이 어디까지 돌아왔는지 가늠하기 위해 집중했다. 송곳니로 혀를 살짝 긋듯이 깨물자 따끔한 아픔과 함께 피가 스며 나왔다. 퐁글퐁글 솟아나는 것이 멈추길 기다리면서 츠키시마는 천천히 숫자를 세기 시작했다.

 

 1,2,3
 나의 기억에 무슨 짓을 한 사람이 있다. 사람인지 뭔지 알 수 없지만 덕분에 나의 기억에서는 아무것도 찾을 수 없을 것이다.

 

 67,68,69
 카라스노의 최우선은 히나타 쇼요의 귀환이다. 히나타는 지금 저항할 수 없는 상태이고, 그를 걸고 하는 고문을 견뎌낼 자신이 없다.

 

 234,235,236
 한번 죽은 것은 어떻게 해도 살릴 수 없다. 아무리 뛰어난 센티넬이어도 생명을 되돌릴 수 없다는 것을 무수한 실험을 통해 자신은 알고 있었다. 그리고. 시체는 할 수 있는 말이 없다.

 

 생각을 모두 끝내도 피는 여전히 흐르고 있었다. 작은 상처 하나 다스리지 못할 정도로 약해진 것으로 보아서, 가이딩 역시 가장 최소한으로 맞춰놓은 듯 했다. 내가 그렇게 삶에 미련이 있는 것처럼 보였나. 츠키시마는 아직도 피가 흐르는 혀를 제대로 잇새로 밀어 넣었다길 것도 없었던 삶이 처음부터 차례로 흘러갔다. 아무것도 모르고 행복했던 시절부터 바닥이 없던 절망에 빠졌던 시기와 지금도 후회하는 일들이 손에 잡힐 듯이 선연하다그리고.

 

 왕님에게 하고 싶었던 말이 떠올랐다. 다시 만난다면 하겠다는 결심은 사실 다시 보지 못하기 때문에 전한 것이었다. 츠키시마는 죽어도 카게야마에게 그 일을, 그 밤에 일어났던 일을 말할 수가 없을 것 같았다. 들키고 싶지조차 않았다. 시선이 얼룩지는 것을 보고 싶지 않다. 비겁하지만 다른 표현을 찾을 수가 없이 마음이 그랬다. 그래서 사실 그는 지금 날아가는 자신의 목숨이 아깝지는 않았다. 미완성의 복수 또한 생각만큼 아쉽지는 않았다. 놀랍게도 그 아이의 생각이 가장 많이 났다. 세상에.

 

 “무섭네. 왕님의 횡포.”

 

 내가 너에게 저질렀던 일에 대한 빚을 갚는 심정으로 했다면 믿어줄까. 내 말을 들어줄까. 다른 것은 그냥 괜찮았지만, 죽을 자리에서 쏟아져 나오는 진심을 감당하기가 조금 힘들었다. 그림자 안에 두고 절대 돌아보지 않던 그 감정들이 죽음을 틈타서 머리 위로 쏟아져 내리고 있었다. 무거워. 츠키시마는 짤막하게 웃었다. 그래.

 

 “...그러니까 이제 다시는 보지 말자. 왕님

 

 자신은 지옥으로 떨어질 것이다. 그러니까 정말 다시는 카게야마를 어디서도 보고 싶지 않았다. 치열하기만 했던 삶을 뒤로 하고, 그는 눈을 감았다. 그리고 있는 힘을 다해 혀를 깨물어 잘라냈다생각해보면 그는 언제나 자신이 제법 괜찮게 죽을 자리를 찾고 있었는지도 몰랐다.

 

 

15-5

 


 “쿠니미, 우리는 아오바죠사이의 멸망을 바라는 게 아니다.”

 

 이리하타는 나직하고 힘 있는 목소리로 쿠니미를 질책했다. 말대꾸를 하는 법이 없이 고개를 숙인 상대는 이리하타가 내민 꾸짖음을 경청했다. 다만 겹쳐진 손 위에 올려 진 엄지손가락이 손등을 반복적으로 쓸어내릴 뿐이었다.

 

 “다만 바른 길을 걷고자 하는 거였을 뿐이야. 이대로라면 약해진 각인의 여파로 오이카와는 폭주하게 될 거고, 그렇게 되면 아오바죠사이는 끝이야.”
 “하지만 각인이 유지되도록 둘 수도 없었습니다.”
 “그것도 맞아. 나는 지금 그 가이드를 데려온 자체를 탓하고 있는 게 아니다. 그 과정이 너무 위험했고, 데려온 이후에 상황의 악화를 방치하는 것에 대해 이야기 하고 있는 거야.”

 

 조근조근하게 설명하는 내용에는 틀린 것이 없었다. 쿠니미는 두 손을 꼭 모아 바특하게 쥐었다.

 

 “카라스노로 돌려주는 것도 방법이고, 가이드를 가지고 오이카와 토오루와 협상을 진행하는 방법도 있어. 우리가 쓸 수 있는 카드는.”
 “이름이...”

 “...?”

 “가이드가 아니라 '카게야마 토비오'입니다.”

 

 메마른 목소리가 가시처럼 뾰족하게 돋아났다. 쿠니미는 이리하타를 똑바로 바라보며 호칭을 정정했다.

 

 “카게야마는 우리와 똑같이 생각할 수 있는 사람이에요. 자신이 어디로 가고 싶은지 정도는 스스로 결정하게 두면 안 됩니까? 이리하타상은 그런 세상을 만들기 위해서 조직을 만드신 거라고 알고 있습니다.”

 

 이리하타는 냉정해진 눈빛으로 상대를 바라봤다. 그의 두터운 손이 담배갑을 집어 들고 몇 개 남지 않은 것을 꺼내어 입에 물었다. 동그랗게 말린 끝에서 불꽃이 피어오르고, 까맣고 붉은 것이 뒤섞여 매캐한 연기를 뿜어낸다.

 

 “네가 떠나기 전에, 우리는 목표와 수단에 대한 이야기를 했었지.”

 담배 연기가 뱀처럼 흐느적거리며 천정으로 솟아올라간다.

 “너에게 내 목표를 강요한 적은 없다. 쿠니미. 아니, 난 누구에게도 그런 적은 없어. 그 말은 누구도 나에게 자신들의 목표를 강제할 수 없다는 뜻도 된단다.”

 

 쿠니미는 다시 고개를 숙였다. 모든 세상이 나에게 널 포기하라고 이야기 하고 있다. 어려운 것을 요구하는 것은 아니었는데, 그냥. 그냥 네가 더는 다치지 않을 수 있도록 같이 있겠다는 것이 왜 이렇게 어려운 일이 되어 버리지.

 

 “만일 네 목표가 나의 목표를 위협하는 일이 있다면, 나 역시 가만히 있을 수는 없다. 여기에는 많은 사람의 목숨이 달려 있어. 다수를 위한 소수의 희생을 정당화 하자는 것이 아니다. 이번 일만큼은 다수가 희생한다 할지라도 소수를 구할 수 없는 경우라는 뜻이야.”
 “뜻은 알겠습니다.”

 

 쿠니미는 쥐어짜듯이 수긍의 대답을 꺼냈다. 이리하타는 그만으로 만족한 듯, 담배 연기를 깊이 들이마시고 소년을 피해 옆으로 흩어뜨렸다.

 

 “그럼..카게야마의 거취에 대해서.”
 “조금만 더 시간을 주세요.”
 “쿠니미.”
 “조금이면 됩니다. 모두의 목적을 위한 방법을 찾아낼게요. 만약 어떻게 해도 안 되면 그 때 이리하타상의 뜻에 따르겠습니다.”

 

 물론 쿠니미는 절대로, 누구에게도 카게야마를 넘길 생각이 없었다. 하지만 상대는 그것을 알 리 없는 사람이었고, 시간은 좀 더 필요했다. 고민하던 이리하타는 어렵게 고개를 끄덕였다. 주어진 기한은 일주일이었다.

 

 

15-6

 


 국제 재판으로 인해 나라의 밖과 안이 모두 시끄러워졌다. 매일 아침마다 신문은 불티나게 팔려나가고, 뉴스에서는 속보에, 다시 속보가 이어진다. 그렇지만 가장 중심에 서 있으면서도 카게야마의 일상은 뉴스와는 그다지 관련이 없이 굴러갔다. 연구소에서부터 지금에 이르기까지 세상의 소식과는 동떨어진 삶이었고, 구태여 그에게 소식을 전해줄 사람도 없었다. , 그런 일 외에도 카게야마는 할 일이 있었다.

 

 “...전혀 아니야.”
 “전혀?”

 

 카게야마는 쿠니미의 손을 놓으며 어깨를 축 늘어뜨렸다. 실망이라는 말을 그대로 녹여 붙인 표정에 쿠니미는 조금 웃음이 나왔다.

 

 “쿠니미, 내가 정말 할 수 있는 건 맞아? 뭔가 잘못 알고 있는 거 같은데.”
 “틀림없어. 내가 틀린 말 하는 거 봤어?”
 “아니.”

 

 반사적으로 대답한 카게야마는 두 손으로 머리를 마구 헝클이고는 하, 하고 깊이 한숨을 쉬었다. 자신의 말에 선선히 수긍하는 모습은 잊고 있던 과거를 떠올리게 만든다. 그것은 그립고, 좋으면서도 떠올려주길 바라기만 해야 하는, 가슴이 아픈 일이었다. 그 모든 감정을 무미한 표정 뒤에 숨기고 쿠니미는 부드럽고 가느다란 머리카락들이 부스스해진 뒤에야 다시 카게야마의 손을 잡았다. 그리고 끈기 있게 반복하여 말했다.

 

 “카게야마, 네가 가진 힘에 대한 주도권을 가진다는 이미지로 해봐.”
 “...주도...?”
 “네 스스로 이끌어 나가는 힘을 말하는 거야. 그러니까 네가 가이딩을 하기 싫은 상황이 되었을 때, 피할 수 있도록 상대에게 압박을 주는 거지.”
 “그런 건 들어본 적도 없는데..”

 

 네가 예전에 했었던 거야. 쿠니미는 목구멍까지 치받치는 말을 꾹 내리 눌렀다. 그 말은 필연적으로 킨다이치의 죽음을 떠올리게 하는 것이었다. 그래, 어쩌면 킨다이치의 죽음이 키워드일지도 몰랐다. 그 잔인했던 사건을 모조리 떠오르게 할 수 있다면, 그럼으로 인해서 자신의 능력을 깨우치게 된다면 너의 삶은 좀 더 편해질지도 모른다. 나는 그렇게 믿고 이 일을 시작했다.

 

 하지만손가락 하나 잡는 것이 어려웠던 쿠니미의 전부는 지금 두 손 안에 다른 누구도 아닌 자신의 손을 넣어 꼭 잡고 열중해 있었다. 사실은 이 순간만이 반복되도록 영원히 멈춰버리고 싶었다. 이기심이었다. 본래 한없이 이타적이라고 생각했던 애정은 실물을 앞에 두고는 걷잡을 수 없이 타올라 버렸다. 모두 태우고 남은 재를 모두 모아보니, 그것은 이기심과 닮아 있어 절망적이다. 재를 가슴에 품고 쿠니미는 비겁한 마음으로 입을 다물었다. 상처를 더 주고 싶지 않아서야. 이기심은 그렇게 합리화된 대답을 끊임없이 귓가에 속삭인다. 네가 이러는 동안 츠키시마는? 반대편에는 죄책감이 북처럼 불시에 머리를 강타했다. 불의 센티넬은? 카라스노는? 아오바죠사이는? . . . 한 번 시작되면 끊임 없이 둥. 둥. 둥.

 

 아직 일주일의 첫날이야. 쿠니미는 그런 말로 끊임없이 자신을 달랬다. 좋은 머리는 스스로에게 하는 얕은 거짓말을 간파해내고 '죄책감'이라는 올가미를 목에 걸고 당길 준비를 하고 있다해도 이미 어쩌지 못할 만큼 기울어져 있는 마음의 저울이었다집중하여 감은 눈을 바라보며 쿠니미는 쓸쓸하게 웃었다. 3년을 기다렸다. 일주일을 같이 있고 싶은 것이, 상처를 주지 않고 벗어날 힘을 가르쳐 주려는 것이 그렇게 나쁜 일은 아니라고 되새김질을 하며. 그는 카게야마의 손을 힘주어 잡았다.

 

 

15-7

 

 

 “죽어버린 거야, 사절쨩?”

 

 오이카와는 일그러진 얼굴로 웃었다. 그는 발끝으로 볼품없이 고개가 숙여진 츠키시마의 몸을 건드려 보았다. 입가에서 시작되어 있는 피의 흐름은 털이 엉망인 붓으로 그린 것처럼 턱과 목, 그리고 가슴에 제멋대로인 굵은 선을 내리 그어 놓았다. 푸르게 죽어버린 낯빛과는 반대로 완전한 적갈색이었다. 생기를 대신해서 몸에 피어나 있는 완연한 죽음의 색채에 홍차색 눈동자가 안쪽에서부터 바르르 떨었다. 왠지 이 말없는 시체가 주는 서늘함이 있었다.

 

 “뭔데, 사절쨩.”

 

 그는 그 감정을 지우기라도 할 것처럼 목소리를 높였다. 대답이 돌아올 리가 없었다. 그래서 커지는 고요함이 입을 크게 벌려왔다. 그는 크게 소리 내어 침을 삼켰다.

 

 “왜 혼자 죽어버린 건데.”

 

 짜증날 정도로 자존심도 높고, 누구를 위해 죽는다는 것은 생각할 수도 없이 냉정해 보였다. 그런 게 자살을 해 버렸다. 밝힐 수 없다는 견고한 결의가 만들어 낸 죽음이었다. 허무했다. 시시한 끝이었다. 오이카와는 사실 이 시시하고 허무한 죽음을 만들어 낸 것은 자신이 아니라고 생각했다. 차가운 손끝은 어떤 다잉 메세지도 만들고 있지 않지만, 이 죽음에는 분명한 가해자가 있다. 누구를 위한 죽음인가. 도대체 넌 누구를 위해, 누구를 감추려고 죽었어.

 

 “토비오쨩이 좋았어? 나에겐 못 주겠어?”
 “그래도 내가 앞으로 해치워야 하는 상대는 누군지 알려주고 갔어야지.”
 “...별 수 없이 오이카와상은 이제 네 시체를 넘어 가야겠네. 괜찮아. 아무렇지도 않아요. 그렇지만 후회하게 만들어 줄 거야. , 죽었는데도 후회를 할 수 있나?”

 

 핏자국이 붙어 뻣뻣해진 금발을 손으로 슥슥 흩어뜨리면서 오이카와는 건조하게 말했다. 살려줄 생각도 없었지만 자신의 의도대로 하나도 되지 않은 것에 기분이 더러웠다. 오이카와는 반드시 카게야마를 찾아내서 이 의자에 앉혀 주리라고 결심했다. 아직 각인은 깨지지 않고 있었다상대가 보이기라도 하는 것처럼 오이카와는 매섭게 츠키시마의 시체 너머를 한참이나 노려보다가 감옥을 나섰다. 두꺼운 철문이 무겁게 닫혔다.

 

 

15-8

 

 
 “누마지리-!”

 

 테루시마는 해먹에 누워 다리를 건들거리며 목소리를 높였다. 열려 있던 방문으로 들어온 남자는 배를 벅벅 긁으며 크게 하품을 했다. 이미 정오인 시간인데, 방금 일어난 기색이 역력했다. 까치집에 가깝게 흐트러진 앞머리를 바쁘게 정돈하는 사내를 보던 테루시마가 몸을 빙글 돌려 턱을 받쳤다.

 

 “죠젠지에서의 연락은 다시 없었어?”
 “.”

 

 ‘죠젠지라는 말이 떨어지기 무섭게 사내의 기색이 변했다. 차렷 자세로 몸을 붙인 그는 턱을 당기고 정자세로 테루시마를 대했다. 느릿하고 유연한 놀림으로 몸을 일으킨 테루시마는 해먹의 가장자리에 걸쳐 다리를 벌리고 앉았다. 입은 여전히 웃고 있지만 오만하기 그지없는 눈빛이었다.

 

 “혹시 돌아가실 생각이십니까?”
 “아니, 일단은 카라스노로 갈 생각이다.”

 

 바닥에 두 다리를 한 번에 내리고 바르게 선 남자는 해먹에 걸쳐 놓았던 겉옷을 휘둘러 어깨에 걸쳤다.

 

 “다만 그 여자에 대한 다른 소식이 없었는지 알고 싶었을 뿐이야.”
 “별다른 이야기는 없었습니다.”
 “그래? 그럼 쿠니미 아키라를 만나야겠네.”

 

 품에서 꺼낸 사진을 손가락에 끼우고 흔들거리며 테루시마가 웃었다.

 “이 사진, 도대체 어디서 났을까. 죠젠지 나라 전체가 찾아도 못 찾던 거였는데 말이야.”

 

 

  §§§

 

 “그런 사연으로 왔어. 쿠니미 아키라. 궁금한 내용에 대해서는 지금 당장 말해줬으면 좋겠고, 거짓말은 섞여 있지 않았으면 하는데.”
 "...일단 앉으시죠.”

 

 연락 없이 찾아온 테루시마에도 당황하지 않고 쿠니미는 자리를 권했다. 항상 가려져 있던 남자의 어깨가 드러나 있었다. 그리고 그곳엔 죠젠지의 문양이 박혀 있었다. 하지만 수장에게만 허락되어 새길 수 있는 표식과는 조금 다른 것이었다. 쿠니미는 잠깐 그 검은 문신에 시선을 두었다가 떼어냈다.

 

 “아오바죠사이에는 키타이치 연구소 외에 센티넬 전담 연구소가 하나 더 있습니다.”
 “...들어본 적이 없는 것 같은데.”
 “다른 나라에는 잘 알려지지 않은 연구소입니다. 대외적으로는 대학으로 알려져 있습니다. 저 또한 키타이치 연구소에서 있었던 일 때문에 잠시 가 있게 되면서 알게 된 곳입니다.”

“‘오이카와 토오루의 폭주를 말하는 건가. 그런데?”

 “그 곳은 아오바죠사이가 아니라 다른 나라의 센티넬에 대해서 주로 연구를 합니다.”
 “비밀로 그런 걸 하다니 왠지 기분이 나쁘네.”
 “딱히 그것만 하는 곳은 아니고, 센티넬이나 가이드에게 지급되는 약물들도 대부분 그곳에서 만들어 집니다. 센티넬과 가이드의 육성을 담당하는 키타이치와 다루는 분야가 다르다는 쪽이 더 정확하겠네요.”

 

 쿠니미는 잠자코 잔을 들어 목을 축였다. 그렇게 나쁜 기억은 아니었지만 돌아올 때, 고생을 좀 했던 터라 좋은 기억 또한 아닌 곳이었다.

 

 “제 능력은 타인의 마음을 듣는 것이기 때문에, 여러 가지 좀 독특한 훈련을 받았습니다. 그러니까 연구소 사람들이 미리 머릿속에 넣어둔 기밀을 읽어서 빼내는 것이었습니다.”

 

 당연한 말이지만 대부분 가짜 기밀이 사용되는 훈련이었다. 그런데 쿠니미의 능력을 좋게 본 담당 연구원에 의해서 실전과 같은 훈련이 딱 한번 있었다. 진심으로 숨긴 기밀은 정말 읽기 까다로워서 엄청 신경질이 나고 답답했던 기분이 새록새록 떠올라 쿠니미의 미간이 좁아졌다. 테루시마는 잔에는 입도 대지 않고, 발만 까닥이며 쿠니미의 설명을 들었다.

 

 “그리고 그 마지막 테스트는 죠젠지에 대한 내용이었구요. 테루시마씨의..그러니까 나이 상 아마도.”
 “큰 형에 대한 이야기였겠네.”

 

 테루시마는 눈을 가늘게 뜨며 웃었다. 건들거리던 발이 테이블 위로 올라갔다. 소파 등받이로 몸을 눕히는 것이 마치 맹수의 허리 놀림같이 위세가 좋았다. 쿠니미는 다시 한 번 목을 축였다.

 

 “. 그리고.”
 “시미즈 키요코에 대한 이야기였겠지.”

 

 쿠니미는 침묵으로 수긍했다. 시미즈 키요코. 사진 속, 그녀였다.

 

 

15-0

(죠젠지)

 

 

 “안녕하세요. 시미즈 키요코라고 합니다.”

 

 공손하게 두 손을 모아 허리를 숙여 인사하는 여자를 앞에 두고, 테루시마는 잠시 하늘을 올려다보았다. 일 년 중 대부분이 맑은 날인 사막답게, 오늘도 쨍쨍한 햇빛이 눈이 부신 날이었다. 그런데 왜 자신은 천둥을 맞은 것처럼 아무 생각이 안 날까. 손에 들고 있던 아이스크림이 바닥으로 떨어져 흙투성이가 되어 버렸다. 그것을 본 형은 시원스럽게 소리를 내어 웃었다.

 

 “유우지도 나처럼 키요코씨에게 반해버렸구나.”
 “테루시마씨, 그런.. 부끄러운 소리를..”

 

 성으로 남편이 될 사람을 부르던 정숙함을 가진 여자의 머리카락은 어깨를 조금 넘는 길이였다. 어깨를 움츠리며 시선을 옆으로 내리는 모습은 청순했지만, 입가의 점은 왠지 모르게 시선을 잡아끄는 아찔함이 있었다. 그래, 결과적으로 보았을 때, 그녀에겐 매력이 넘치다 못해서 철철 흐르고 있었다. 테루시마는 입을 닫을 생각도 못하고 헤, 시미즈를 바라보았다. 자신은 그렇게 시미즈를 만났다. 형의 아내가 될 사람으로서. 돌이켜 생각해보면 참으로 가슴 아픈 첫사랑일 수도 있었던 여자였다.

 

 

15-0

 


 죠젠지는 사막을 근거지로 둔 유목민족의 특성을 가지고 있는 나라였다. 그 특성은 유전의 발견으로 인해 더 이상 물이 부족하지 않은 시대가 된 뒤에도 이어져, 지속적으로 부계적 전통이 강한 나라에 속했다. 힘에 의한 서열화도 여전히 가지고 있어서 가장 상위 개념을 다루는 센티넬이 죠젠지의 상징적 리더가 되는 것이 이 나라의 절대적인 룰이었다. 그래서 아오바죠사이에서는 바람의 센티넬이 최정상에 서듯이 죠젠지의 리더는 대대로 대지의 센티넬이었다.

 

 하지만 공교롭게도 테루시마의 형은 장남이면서도 가장 상위 개념을 다루는 센티넬은 아니었다. 그는 모래 폭풍의 센티넬이었고, 그와 10살의 터울을 진 막내 테루시마가 가장 상위의 대지 센티넬로 태어났다. 나라를 맡기기에는 테루시마는 어렸고 성정도 불같은 부분이 있었기에, 죠젠지는 이례적으로 형을 지도자로 선택했다. 물론 대외적으로 그의 형은 대지 센티넬로 공표되었다. 죠젠지의 긴 역사 속에서 첫 번째 사례는 아니었다. 때에 따라서 피를 부르기도 하는 변칙이었지만, 테루시마는 죠젠지의 수장 같은 자리에는 크게 관심을 두지 않을 나이였고, 자유분방한 성격이었기에 큰 문제가 없이 승계절차가 시작되었다.

 

 그 해는 테루시마가 15살 때였다. 그의 형은 강력한 가이드와의 결혼을 통해 안정적인 승계를 꾀했다. 다테공 출신이라고 하는 시미즈 키요코였다. 16살로 형과의 나이 차이가 컸지만 큰 문제가 되진 못했다. 그뿐인가. 신부에게 육체적 각인의 경력이 한 번도 없는 순결함을 요구하는 관행도 결국 그의 결단 앞에서 무너졌다. 얌전한 얼굴을 하고 뜻밖이네. 테루시마는 껌을 질겅질겅 씹으면서 형과 아버지의 싸움이 형의 승리로 끝나는 것을 구경했다. 그녀의 무시무시하기까지 한 가이딩 능력은 모든 결점을 가릴 만하기도 했었다.

 

 결국 신부의 뜻에 따라 조용한 결혼식이 이루어졌고 같은 날, 테루시마에겐 추방 명령이 떨어졌다. 절대적인 지도자를 위협하는 존재를 두기엔 죠젠지는 경직된 나라이기 때문이었다. 그런 결정에도 사실 테루시마는 불만이 없었다. 죠젠지는 위급 시, 나라를 위해 돌아온다는 조건 하에 무한한 경제적 지원을 약속했고, 형은 대지계열 센티넬의 전형적인 성향으로 매우 관대하고 포용력 있는 사람이었기 때문이었기에 생명의 위협을 느낄 일 또한 없었다.

 

 “억울하지 않아?”

 떠나게 되는 날, 자신을 깊이 끌어안고 나서 귓가에 속삭인 친구의 질문에도, 테루시마는 길게 웃으면서.

 

 “나는 자유로운 게 좋아.” 라고 대답했다.

 

 실제로 그러했다. 대지에 속박된다는 생각만 해도 끔찍한 자신에게 왜 가장 상위 개념이 붙어 버렸는지 알 수 없는 일이었다. 나라를 나서자마자 테루시마는 죠젠지에서 금지되어 있는 피어싱부터 시작했다. 혓바닥이었다. 사실 누가 부른다고 해도, 언제가 되어도 돌아갈 생각은 없었다. 힘과 돈을 가지 자에게 바깥세상에는 재미있는 일들이 많았다.

 

 

15-0

 


 그렇게 시간이 흘러 18살이 되었다. 다루는 개념이 최상위였기에 테루시마는 곧 SS 센티넬로 각성을 시작했다. 각성은 괴로운 것이었고, 나라에 속해 있지 않아 제대로 된 가이드를 받을 수 없는 테루시마에게는 더더욱 그러했다. 그는 닥치는 대로 가이드를 샀다. 그러나 어떤 가이드도 자신을 해갈시켜주진 못했다. 그렇다고 폭주하거나 죽고 싶지도 않았다. 그러기에 인생은 너무 재미있고, 이제 18. 자신의 꽃은 피어나기 시작한 때였다.


 극한의 괴로움 속에서 테루시마는 결국 자신의 혀를 독에 담그고, 그도 모자라자 귀를 찔러 고막을 터뜨렸다. 다섯 개의 감각이 세 개가 되고 나서야 테루시마는 평안해질 수 있었다. 들리지 않아도 상관없었다. 남은 감각으로 보기에도 세상은 충분한 것이었다. 불만은 가지지 않고 청각을 대신할 구음을 익혔다. 좋은 시력이었기 때문에 어렵지 않았다 돈도 있고, 의욕도 있고, 테루시마의 삶이 어려워질 것은 딱히 없었다. 다만 먹는 것에 독이 있을까봐 조금 더 조심하고, 귀에 들리지 않는 것은 진동으로 파악하려고 애를 쓰는 정도로 불편함 없이 살아갈 수 있었다. 거기에 더해 세 개가 된 감각은 나머지 감각을 세밀하게 사용하도록 발전시켜서 예전보다 훨씬 더 능숙하게 흙을 다룰 수 있게 된 점도 좋았다. 아무리 생각해봐도 자신은 꽤 운이 좋은 편이다. 나라를 짊어져야 하는 부담감 없이, 즐길 수만 있는 인생에 힘은 넘치도록 있었다. 테루시마는 콧노래를 부르면서 하고 싶은 것을 하고, 하기 싫은 것을 하지 않으면서 여기저기를 떠돌았다.

 

 그리고 뒤늦게 죠젠지로부터 연락을 받았다.
 벌써 2년도 전에 큰 형이 죽었다는 내용이었다.

  
 형제 중에는 테루시마나 혹은 형만큼이라도 강력한 센티넬은 없었기에 죠젠지는 하루 빨리 테루시마가 돌아와 주길 요청했다. 당연히 테루시마로서는 돌아갈 생각이 눈곱만큼도 없었다. 더 멀리 멀리 도망가 버릴 생각이었다. 어차피 센티넬이 있다는 명목과 죠젠지의 부만으로도 약소국이 될 리가 없었다. 가진 것은 불의 센티넬 밖에 없었는데, 그마저도 사라져서 완전히 몰락한, ‘녹슨 왕좌의 카라스노와 그의 모국은 전혀 다른 나라였다. 그래서 죄책감 같은 것도 없었다. 하지만.

 받은 편지의 마지막 문구가 이상했다.

 

 형이 죽기 일주일 전부터 그의 센티넬 능력이 약해지기 시작한 것 같다는 의문이었다. 그리고 죽음과 때를 같이하여 시미즈 키요코는 죠젠지에서 모습을 감추었다. 형의 시체에서 타살의 흔적은 없었고, 사실 그녀가 도망칠 이유도 충분한 부분도 있었다. 죠젠지의 부계 사회에서 그를 승계하여 자리에 오를 사람에게는 전 지도자의 모든 것이 고스란히 바쳐지기 때문이었다. 그러나 테루시마는 이 일에서 어딘가 석연치 않음을 느꼈다.

 

 한 번 일어난 일은 두 번 일어날 수 있다.
 하지만 두 번 일어난 일은 반드시 세 번 일어날 것이다.

 

 죠젠지의 오래 된 격언이 자꾸 떠올랐다. 고국에서는 비밀로 부쳐졌지만, 사실 테루시마는 형과 아버지의 다툼에서 흘러나왔던 시미즈의 비밀을 하나 더 알고 있었다. 그녀가 맺었던 육체적 각인이 풀어진 이유에 대한 내용이었다당시에는 그다지 이상하게 생각하지 않았던 것은 각인의 해제가 센티넬의 죽음으로 인한 것이었기 때문이었다. 그것은 부부가 사별하는 것처럼 흠이 되지 않는 이유였기에 완고한 아버지가 뜻을 꺾을 수 있던 것이기도 했다. 원래 미인이 겪은 불행에는 누구나 관대해지는 법이니까.

 

 하지만생각해보면 탄탄한 기술력으로 활발한 무역을 이끌던 다테공이 갑작스럽게 쇄국을 선언한 것은 시미즈가 죠젠지로 넘어온 이후의 일이었다. 그녀와 각인했던 센티넬이 누구였을지 이제와 알 수 없었지만 테루시마는 왠지 그가 일반적인 센티넬은 아니었을 것이라는 예감이 들었다. 그리고 그녀의 불행이 우연이 아니라면만약 무언가를 노린 것이었다면. 그것의 다음 차례는 자신에게서 시작하지 않을까 하는 생각도 들었다. 테루시마는 그런 불안을 안고 살고 싶지는 않았다그래서 지체하지 않고 죠젠지에 '시미즈 키요코'의 행방을 찾아줄 것을 요청했다.

 그러나 어디에서도 찾을 수가 없었다. 시미즈 키요코는 그대로 세계에서 증발해버린 듯 모습을 감추었다. 어떻게 그럴 수가 있을까. 테루시마는 종종 그녀를 떠올리면 미지로부터 시작되어 자신을 엄습해오는 두려움을 감출 수가 없었다. 그렇지만 한편으로는 사라진 그녀를 찾아내어, 그녀가 가진 비밀을 낱낱이 밝혀내고 무력화 시켜 잡아두는 것 또한 상상했다. 실물이 아닌 상상은 더 신성해져 가는 법이었다. 그녀는 나날이 매혹을 더해갔다. 가지고 싶은 욕망은 갈수록 진해지고, 어느 순간에는 목표가 되어 버렸다. 그렇게 갖지 못한 것이 없었던 남자는 단 하나 손 안에 쥐어보지 못한 것을 탐하는 즐거운 상상 속에서 10년에 가까운 세월을 살았다. 천성이 위태로운 남자는 자신을 가장 공포에 질리게 하는 것에서 가장 큰 즐거움을 찾았던 것이다. 그리고 마침내, 지금 단서를 손에 쥐었다.

 쿠니미 아키라가 준 오래 된 카라스노의 사진 속에는
 거짓말처럼 약혼 드레스를 입고 있는 그녀가 있었다.

 

 

15-9
 

 

 “시미즈 키요코의 수상한 행적에 대해서 아오바죠사이 역시 조사 중인 것 같았습니다. 하지만, 그 외의 이야기는 모릅니다. 읽을 수 있는 정보도 거기까지였고..”
 “난 거짓말을 싫어해.”

 

 테루시마는 품속의 사진을 꺼내 천천히 흔들었다.

 

 “그럼 이 사진이 설명이 안 되잖아.”
 반듯하게 앉아있는 자세 그대로 시선만 살짝 내려갔다미미하게 찡그려진 얼굴이 다시 원래대로 돌아가고결심한 듯 천천히 입을 열었다.

 “제가 카게야마를 아오바죠사이에서 데리고 나온 것은 지금이 처음은 아니었습니다.”

 “호오..?”

 “사실은 이미 3년 전에 처음 했었던 일이었고, 그 당시에 카게야마를 맡겼던 곳이 카라스노였습니다. 안전한 곳인지 당연히 조사를 해보았고, 그 과정에서 개인적인 경로를 통해 알게 된 것입니다. 개인적인 경로는 말씀드릴 수 없습니다.”
 “그렇다고 해도 넌 죠젠지 사람이 아니잖아. 애 하나 맡기는 건데, 굳이 그녀에 대해 파고들 필요가 있었나?”

 

 테루시마는 담배에 불을 당기며 가볍게 되물었다. 쿠니미는 느리게 눈을 깜박이며 한숨을 지었다. 새침해 보이기도 하는 표정이 답답하다는 빛을 옅게 비친다. 담배를 쥔 손가락이 여유 있게 까닥거렸다.

 

 “짐작하고 있으시겠지만.”

 “카게야마와 그녀가 너무 닮았기 때문이었습니다.”

 

 , 둔탁한 소리와 함께 두 손이 마주쳐졌다. 테루시마는 그대로 손을 비비면서 입술을 당겨 웃었다.

 

 “역시. 나만 생각한 건 아니었네.”

 

 담배를 입에 물고 잘근잘근 씹자 잿빛 연기가 이빨 사이로 새어 나왔다. 소파의 팔걸이에 팔꿈치를 기대고 손끝으로 관자놀이를 문지르면서 테루시마는 한참 동안 말을 골랐다. 자신의 기세를 숨기는 법이 없는 거친 눈동자가 맞은편의 센티넬과 무릎을 톡톡 두들기는 자신의 반대편 손을 분주히 오고 간다.

 

 “그래서 네 결론은? 둘이.. 정말 관계가 있었어?”
 “너무 공으로 먹으려 하시네요.”

 쿠니미는 차분하게 웃었다. 상대의 속눈썹이 크게 한 번 떨고서는 입가를 찢으며 마주 웃어 왔다.

 

 “원하는 게 있나 보네. 듣지 않아도 왠지 알 거 같은데.”
 “, 바로 그겁니다. 카게야마를 건드리지 마세요.”
 “스스로 원하게 되어도?”
 “설사 폭주 직전의 테루시마씨에게 카게야마가 옷을 다 벗고 달려들어도 안 됩니다.”
 “-날 고자로 만들어 버리다니 너무한걸.”

 

 손바닥 안쪽으로 고개를 더 깊게 괴면서 남자는 묘한 눈빛으로 쿠니미를 바라보았다. 고정된 것처럼 움직이지 않는 이목구비였다.

 

 “그러겠다고 대답했는데, 그 후에 네가 모른다거나 혹은 둘은 전혀 관계가 없다고 답하면 나만 억울한 거 아닌가?”
 “물론 그럴 수도 있습니다.”
 “그건 사기잖아.”
 “‘거래입니다. 거래를 할 때는 정보를 가진 자가 우위에 서는 게 당연하죠.”

 

 막힘이 없이 돌아오는 대답에 남자는 테이블을 한 손으로 짚고, 몸을 쭉 앞으로 뻗었다. 순식간에 상대의 지척으로 달려든 얼굴이 그도 모자라 매서운 눈초리로 응시해온다. 둥글게 튀어나온 안구의 번들거림 속에 무표정한 얼굴이 비쳤다. 볼이 홀쭉해지도록 빨아들여진 연기가 상대방의 얼굴에 잿빛으로 뿜어지고, 코끝에 부딪쳐 산산조각난다. 작게 벌어진 상대의 검은 입 속이 동굴처럼 어둡고 끝이 없어 보였다. 만약에.

 

 “정보만 홀라당 먹어 버리고, 내가 모르는 척 재미를 봐 버리면 어떻게 할 건데?”
 “그 땐, 제 모든 능력을 동원해서 영영 재미 따위는 못 느끼게 만들어 줄 겁니다.”
 “?”
 “다들 착각하시는데.”

 

 쿠니미의 차갑고 건조한 손이 테루시마의 입에서 담배를 꺼냈다. 그리고 익숙한 듯 돌려, 자신의 입술 사이에 끼워 가볍게 물었다. 얇은 담배개비의 끝이 아슬아슬하게 흔들렸다. 기침 하나 없이 능란하게 독한 궐련을 피우는 18살 소년은 금세 어른의 것으로 자신의 얼굴을 바꾸었다.

 

 “저는 그렇게 착한 사람이 아닙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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