미남과 야수
[Handsome man vs Beast]
내 기분은 내가 정해. 오늘은 행복으로 할래.
-이상한 나라의 앨리스 中-
-1-
사실 카게야마의 애인, 경영학과의 아이돌, 미남, 혹은 그냥 오이카와 토오루 선배가 심심하게 만들 때는 많았다. 좀 더 솔직히 말하면, 사귀는 게 확실한 걸까를 고민하게 되는 순간도 있었다.
“무디네. 토비오는.”
종종 오이카와 선배가 의미심장하게 웃으면서 말해주는 저 말처럼 카게야마가 무딘 게 아니었다면, 아니 보통 정도의 섬세함만 갖추었어도 둘의 관계는 이미 박살이 나서 깨진 유리조각이 되었을 것이고, 발에 자근자근 밟혀 피투성이 발걸음을 만들어 내었을 것이다. 그렇지만 천행으로 카게야마는 무뎠다. 그것도 종종 분위기를 못 읽는 정도를 넘어서서 멍청하다는 말을 들을 정도로 무뎠다.
“그래서 좋아.”
‘좋아해.’가 아니라 ‘좋아.’였다. 그 미묘한 어감의 차이도 카게야마는 당연히 몰랐다.
“공개 연애는 부담스럽지?”
“네?”
“토비오쨩, 이제 겨우 입학한 신입생인데, 3학년 선배와 스캔들은 역시 버거울 거야.”
“어...그건..”
사실 상관없었지만, ‘네.’라는 대답을 요구하는 눈동자 앞에서 카게야마는 잠자코 고개를 끄덕였다. 오이카와 선배가 자신을 부담스러워하거나 싫어할 거라는 생각에서는 아니었다. 무디고, 둔한 카게야마는 오이카와가 알코올향이 진하게 감도는 입술을 뺨에 부비고 나서.
“우리 사귈까?”
라고 한 말을 믿었다. 그리고 다시 어깨를 꽉 잡으며 능숙하게 입술을 부딪치고, 카게야마가 놀라면 나오는 버릇대로 헤 벌린 입술 안으로 혀를 밀어 넣어 온 몸과 안을 점령하면서,
“좋아하니까.”
라고 했던 말도 믿었다. 주어가 없었던 ‘좋아하니까.’라든지 오이카와 토오루 선배의 술버릇이라든지, 조금은 후에 알게 된 나쁜 소문 등등은 카게야마의 단순한 세상에는 어울리지 않는 것들이라서 모조리 삭제 당했다. 좋아한다고 했다. 사귀자고 했다. 그리고 우리는 사귄다. 오이카와 선배와 나는 서로 좋아하고 사귀는 사이야. 결론은 예쁜 모양이었고, 상대의 진심이나 의중 같은 것을 이것저것 재어 보지 않아 군더더기 없이 깔끔했다.
그렇지만 문제였던 것은 연애의 맞은편에 있는 사람은 반대로, 세상에서 제일 복잡한 내면을 가진 남자, 오이카와 토오루였다는 것이었다.
-2-
그래서 그 결과로, 오늘 카게야마는 잔뜩 구겨진 배구경기 표를 손에 쥐고 노려보며 서 있게 될 것이다. 오이카와는 편안하게 디자인 되어 있는 의자에 몸 을 푹 파묻고, 핸드폰 자판을 두드렸다.
[오늘은 안 되겠네. 미안해요, 토비오쨩.]
[하지만 이미 표 예매했는데..]
[토비오쨩이 그런 것도 할 줄 알아? 대단하네. 어린애인지 알았는데.]
[칭찬인가요?]
[칭찬이에요. 그러니까 내일 봐☆.]
칭찬 받았다. 라는 사실에 입술 선이 물결치고 있을 것이 눈에 보일 듯 선했다. 일주일 전부터 잡혔던 약속, 어제 다시 한 번 확인할 때까지 오케이였던 것이 두 시간 전에 뒤집혀도 칭찬 한 마디에 마냥 좋아서 꼬리를 흔드는 것은 강아지 같았지만, 생긴 것은 고양이를 닮은 귀여운 후배. 오이카와는 문자를 주고받는 것을 멈춘 후에도, 핸드폰 화면을 위로 올려 예전에 나눴었던 대화를 쭉쭉 훑어보면서 웃었다.
“그 기분 나쁜 웃음 좀 치울 수 없냐?”
“돈 주고도 못 사는 오이카와상의 진심어린 미소라구요?”
“시꺼먼 속에서 나온 웃음이 무슨..”
“맞아. 시꺼먼 속이지.”
오이카와는 [카게야마 토비오입니다.]라고 정직하게 왔던 첫 문자로 돌아가서야 핸드폰을 눈에서 떼며 대꾸했다. 녹아내릴 것처럼 뜨거운 날씨였지만, 카페는 시원했고 커피는 딱 좋을 만큼 진했다. 물어뜯은 흔적이 없는 깨끗한 빨대에 입술을 대고, 쭉 빨아들이자 씁쓸하고 시원한 것이 목구멍을 타고 콸콸콸 쏟아져 내린다. 뱃속까지 얼어붙을 것 같은 기분이었다.
“아예 약속을 잡지 말았어야지.” 책망하는 말에,
“그러다가 다른 사람이랑 약속 잡아 버리면 오이카와상이 많이 속상하지 않겠어?” 한들한들 진심을 내뱉었다.
“어디 가서 내 친구라고 말하지 마라, 못된 자식아.”
“못됐지.”
흐응거리는 콧노래도 잠시, 오이카와는 여태껏 보고 있던 핸드폰의 전원을 끄고, 품 안에서 같은 디자인 다른 색깔의 핸드폰을 꺼냈다. 여러 개의 부재중 메시지가 와 있는 핸드폰이었다. 바로 전의 핸드폰을 보던 것과는 사뭇 다른 표정이었다.
“하지만 오이카와상이 그 정도로 나쁘진 않아요. 원래대로라면 무리해서라도 가려고 했었거든. 배구 싫어하지만.”
“무리 같은 소리 하네.”
“진짜야. 사실 오늘 토비오쨩을 만나지 못하는 이유는 히토미때문이 아니거든요.”
“그럼 사쿠라씨 때문이냐?”
“아니.”
그는 화면에서 눈을 떼지 않으며 낮은 목소리로 대답했다.
“본가.”
“....”
“거긴 빠질 수가 없잖아.”
양이 별로 줄어들지도 않았는데, 하얀 앞치마를 입은 점원이 와서는 리필을 권유해왔다. 세련된 미소로 거절하는 오이카와에게 그녀는 서비스라며 쿠키가 담긴 작은 접시를 내밀었다. 둘은 물론이거니와 이와이즈미까지 접시 밑에 깔린 냅킨에 무엇이 적혀 있을지 예상할 수 있었다. 그리고 그것을 오이카와가 버리지 않을 것이며, 적어도 한 번쯤은 만날 것이라는 것도 그는 알았다. 편력이었다.
-3-
애인이 심심하게 하면 연락해. 라는 말에 혹한 것은 아니었다. 하지만 카게야마가 정말로 좋아하는 팀의 경기였고, 오이카와에게는 말 못 했지만 사실 어렵게 구한 표였다. 혼자 가려고 하니 어딘가 남은 한 장이 아까워서 카게야마는 결국 핸드폰 연락망에서 즐겨찾기에도 없는 ‘쿠로오 테츠로 선배’의 이름을 찾기 시작했다.
“쿠....로오, 테츠로. 맞나?”
“응, 그거 내 이름 맞아.”
“우아아아?!”
귀 가까이에서 들려오는 중저음의 허스키 보이스에 두 손에서 핸드폰이 번쩍 공중에 들렸다. 뜨거운 것을 만지듯이 몇 번 손바닥 위에서 콩처럼 볶아지던 것을 꽉 두 손으로 다시 잡자, 한껏 높아진 맥박 수가 얼굴에 붉은 기로 고스란히 찍혔다.
“언, 언제 오신 겁니까?”
카게야마는 어딘가 화가 난 표정으로 숨결이 느껴질 만큼 가까이 다가와 있는 쿠로오에게 소리 높여 물었다.
“열세 번째 이름부터 같이 보고 있었지.”
“네?”
“집중하면 주변 잘 못 보는 스타일이지?”
“네?”
“신입생 핸드폰에 연락처가 그거 밖에 없어도 되는 거야?”
네? 라는 대답이 나오는 자동 기계처럼 꼬박꼬박 대답하던 카게야마는 잠깐 기시감에 정신을 빼앗겼다. 저 비슷한 말을 오이카와에게서도 한 번 들었던 적이 있었다.
‘애인 휴대폰에 연락처 많은 건 싫은데.’
전혀 다른 내용인데도 소재가 같았던 탓인지 단숨에 의식의 수면을 솟구쳐 오른다. 카게야마는 고개를 털어 오이카와 선배의 잔상을 지웠다. 생각하면 오늘은 좀 속이 쓰릴 것 같아서였다.
“애인이 정말 심심하게 했나 봐?”
남자의 눈은 두 개 중에서 딱 하나만 제대로 보였다. 그럼 내가 반만 보듯이, 저 사람도 반만 볼 수 있나? 라는 영양가 없는 생각이 잠시 들었다. 사실은 잘 알지 못하는 선배. 아웃사이더로 잘 알려져 있을 뿐, 누구도 잘 알지 못한다는 선배였다. 카게야마의 암청색 눈동자가 오늘도 여전히 제멋대로 뻗쳐 있는 까만 머리카락을 지나, 겁주는데 익숙해져 있는 노란색 눈동자를 지나 마침내, 커다란 손에 닿았다.
“어? 선배도 혹시 배구 좋아하십니까?”
커다란 손에 잡혀 있는 것은 놀랍게도 알록달록한 배구공이었다. 흐름에 맞지 않는 엉뚱한 대답을 하며, 그제야 카게야마는 쿠로오의 복장이 운동복 차림이라는 것도 깨달았다.
“고등학교 때까지 했었지.”
“저도 그렇습니다!”
“알아. 카게야마 후배는 유명한 선수였으니까.”
경영학과에 지원해서 들어온 자신과는 달리 추천 입학으로 들어온 후배였다. 사실은 배구팀을 창단하고 싶었던 학교에서 스포츠 학과를 제때에 만들지 못해서, 우수한 선수를 다른 학과에 편법으로 집어넣었다는 것은 유명한 추문이었다. 당연히 기존 학과생들의 반발이 심했고, 스포츠 학과가 생긴다고 해도 명문대의 명문과라는 명함을 거절하고 전과를 할지에 대한 회의적인 시각도 있었다. 그래서 그 중 하나인 카게야마 토비오에 대한 평가는 박하기 그지없었다. 그렇지만 그런 여론과는 달리.
“절 아셨습니까? 그럼 혹시, 쿠로오 선배도 전과를 하시게 되나요?”
동그란 만큼 따로 굴리는 머리가 없는 후배는 스포츠 학과를 목이 빠지게 기다리고 있다는 것이 확실했다. 사실 강의실보다 체육관에서 더 자주 볼 수 있으니 말 다했지. 쿠로오는 지긋이 웃고, 손가락 끝으로 배구공을 핑그르르 솜씨 있게 돌렸다.
“나는 아니야. 오이카와도 아니고.”
“아..”
“그렇지만 배구는 좋아해. 오이카와도 좋아했었지.”
“네?”
“처음 들었어? 미야기 현에서 왔으니 잘 몰랐을 수도 있겠네. 꽤 유명했어. 고등학교 들어가기 전까지는.”
“처음 들었어요.”
“고등학교에서는 진로를 바꿨으니까, 말해주지 않으면 카게야마는 모르는 게 당연해.”
카게야마는 잠시 오이카와와의 대화를 더듬어 보았다. 배구 얘기를 많이 했었던 것 같았다. 하지만, 시종일관 부드럽게 웃으며 이야기를 모두 들어주면서도 정작 자신의 이야기는 왜 하지 않았을까. 생각에 잠겨 기우뚱 기우는 볼에 배구공을 가져다 댄 쿠로오는 얼굴이 바로 서도록 살짝 밀었다.
“우웨..?”
“그래서 오늘의 일정은?”
“눼?”
계속 어그러지는 발음에 카게야마는 볼에 닿아 있는 공을 두 손으로 잡아들었다. 순순히 빼앗겨준 남자는 시골에서 갓 상경하여 세상물정을 모르는 체육계 후배의 저지 주머니에서 구겨져 있는 표 끄트머리를 솜씨 있게 잡아 빼냈다.
“배구 경기 보러 가려는 거였어?”
“아, 그게.. 오이카와 선배가 바쁘셔서.”
“그럼 나랑 갈까?”
“정말 그래도 됩니까?”
반짝 하고 눈에 빛이 켜졌다. 크리스마스 꼬마전구 같은 빛이었다. 작고 그렇게 밝지도 않지만 보는 사람을 기분 좋게 하는 종류의 노란 등. 쿠로오는 씨-익 웃고 표를 소리 나게 흔들었다.
“대신 저녁은 내가 사 줄게.”
“아닙니다! 저녁은 괜찮습니다.”
“애인이 싫어할까봐?”
“네? 오이카와 선배는 그런 건 많이 신경 쓰지 않으십니다.”
“그래? 그럼 저녁까지 먹는 걸로 해. 후배에게 얻어 보려니 쑥스러워서 말이야.”
카게야마는 몇 번 눈을 빠르게 깜박였다. 이 선배가 원래 이런 선배였나. 라고 물으면 아닌 것 같았다. 것 같은 이유는 사실 풍문도 잘 알 수 없는 과의 변두리에 살고 있는 카게야마였기 때문이었다. 가장 바빠야 하는 3학년이지만 학교에서 자주 보기가 힘들고, 오더라도 강의만 듣다가 바람처럼 사라져 버린다고 했다. 그렇지만 조 과제에는 성실하고, 학점도.. 나름 좋고. 향도 좋고.
“응?”
또다시 대화의 흐름을 잊은 채, 카게야마는 코끝을 킁킁 거리며 공기 중에 연하게 흩어져 있는 향의 흔적을 기를 쓰고 들이마셨다. 쿠로오는 대화중에 갑자기 코를 찡긋대더니, 자신의 티셔츠 자락을 잡고 얼굴을 박아 넣는 후배의 정수리를 말없이 내려다보았다. 그리고는 손으로 뒷머리를 긁적였다.
“아무리 나라도 이렇게 적극적인 대시는 약간 부끄러운데, 카게야마군.”
“혹시 향수 뿌리십니까?”
“페로몬은 항상 나온다고 생각하지만, 향수는...”
누가 들으면 왜 부끄러움은 자기 몫이냐며 목을 놓을 대답을 느물느물 내어놓던 쿠로오가 멈칫했다. 두 손으로 한가득 옷을 쥐고 입과 코까지 파묻은 채, 위로 치켜 뜬 푸른색 눈동자가 아까보다 더 크게 반짝이고 있었다.
“생각해보니 뿌렸었네.”
본심과는 달리 솔직하게 대답이 나와 버렸다.
“이거 자주 뿌리십니까?”
이것은 신데렐라의 유리 구두였다. 오이카와 토오루 선배의 향이기도 했다. 전혀 다른 두 사람의 공통점에 약간 흥분한 카게야마는 신나서 티셔츠를 잡아 당겼다. 오이카와라는 말에 살짝 웃음을 굳힌 쿠로오가 낮은 목소리로 대답했다.
“그다지.”
오이카와 선배에게서는 항상 이 향이 감돌았다. 그래서 신입생 환영회의 그 선배라고 생각했지만, 정작 당사자에게는 말하지 못한 카게야마의 비밀이었다. 그런데 여기서 같은 향의 다른 선배를 만나 버렸다. 신기함에 어딘가 기쁜 표정으로 쿠로오를 올려보자, 그는 뺨을 몇 번 긁적이더니 싱긋 웃어 보였다.
“특별한 날에만 뿌리는 건데, 오늘 하고 오길 잘했네.”
“이 향, 저 좋아합니다!”
“그래. 나도 좋아해.”
“네?”
“특별한 날에만 쓸 만큼 좋아해.”
선배는 능숙하게 후배의 손에서 자신의 티셔츠를 떼어냈다. 손자국이 가득 남아 있는 것을 탕탕 털어 펴고, 그는 가볍게 턱짓으로 방향을 결정했다.
“그럼 늦기 전에 가볼까.”
“네! 오늘 감사합니다!”
“그건 헤어지면서 하면 되는 인사고.”
“네! 그럼 오늘 잘 부탁드립니다!”
“....그래그래.”
이 후배의 단어장을 펴 보면 처음은 아마 ‘네!’ 일 것이다. 그 다음은 ‘네?’겠지. 쿠로오는 주머니에 손을 넣은 채, 휘적휘적 앞서 걸었다. 사실은. 오늘이 심심할 수밖에 없는 날이라는 것을 알고 있었다. 그는 주머니 속에서 손가락을 움직여 시끄럽게 울리는 핸드폰을 종료시켰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