휘슬 소리가 날카롭게 귀를 찔렀다. 마지막 공이 떨어지고 난 직후의 일이었다. 마치 공이 떨어지길 기다렸다는 듯이 시작된 소리가 경기의 끝을 알려온다. 아직 끝나지 않았다는 잔열과는 반대로, 공을 떨어졌고. 네트가 코트를 가르듯 주심의 호루라기 소리는 패자와 승자를 냉철하게 가려냈다. 듀스까지 가는 접전이었던 터라 결과적으로는 딱 2점 차이였다. 승패는 그 정도의 차이만 있으면 되는 일이었다. 승자를 향한 환호가 코트 안으로 우레와 같이 쏟아져 내린다. 전국 대회 결정전. 쿠로오는 마지막 득점을 가져왔던 자신의 손바닥을 바라보았다. 저릿저릿했다. 통증인지, 아니면 승리가 주는 여운인지. 그것도 아니면.
“이겼다고 생각해?” 의문인지.
나른한 눈매에 작고 매서운 기를 가진 눈동자가 네트 너머를 향했다. 똑바로 마주하게 된 얼굴은 땀에 한가득 절여져 있었으며, 떠올라 있는 표정은 패배에 대한 아쉬움보다는 분노에 가까웠다. 팀원들의 함성 소리를 뒤에 두고, 쿠로오는 몸을 완전히 돌려 상대편의 주장을 마주했다.
“결과가 그러네.” 그는 최대한 감정을 자제하여 짤막하게 대답했다.
“기세등등할 거 없어.”
오이카와는 손등으로 이마의 땀을 닦아냈다. 그리고 주먹을 내지르는 것처럼 손을 뻗어 네트를 꽉 움켜쥐었다. 부들부들 떨리는 손가락과 힘이 한껏 들어가 핏줄이 솟아난 팔, 핏발이 서 있는 눈과 입술의 모양 모두가 그가 느끼는 분노를 표현해 내고 있었다.
“나는 너한테 진 게 아니니까. 테츠로.”
그 해, 전국 대회에 진출한 것은 네코마 중학교였다. 대부분 우승팀의 주장에게 돌아가는 최우수 선수 상은, 이례적으로 준우승 팀인 아오바죠사이로 돌아갔다. 수상자는 오이카와 토오루였다.
미남과 야수
[Handsome man vs Beast]
나는 나 자신에게 두렵지 않다고 말을 한다.
-곰돌이 푸 中-
-1-
쿠로오는 짧게 웃었다. 그는 오이카와 토오루의 살벌한 눈동자가 무슨 말을 쏘아붙이고 있는지 모조리 알아들었다. 생각해보니 꽤 오랜만에 본 얼굴이었다. 관리된 몸이 그리는 한없이 남자다운 실루엣 위로 적당히 곱상한, 잘생긴 얼굴. 그렇지만 지금은 꼬리로 갖고 싶은 것을 감싼 채 경계를 세우는 적군. 그는 천천히 응전을 시작했다.
“뭐가 문제지. 같은 경영학과니까 ‘내 후배’기도 한 것 같은데.”
“다 같은 선배는 아니지. 어깨동무를 할 정도의 교류같은 게 없었잖아. 갑자기 친한 척 하면 후배는 부담스러워 한다고.”
“배구도 같이 하고, 배구 경기도 같이 보고, 저녁도 같이 먹은 사이면 ‘갑자기’는 아니지, 안 그래?”
“배구?”
오이카와의 눈매가 한껏 찡그려졌다. 사고 속에서 배구 경기라는 말이 재빨리 꽂힌다. 그는 여전히 상황 파악을 못하고, 자신을 반기고만 있는 카게야마에게 날카롭게 시선을 던졌다.
“정말이야?” 라고 묻는 말에,
“네! 전에 말씀드렸던 선배가 쿠로오 선배였습니다.”
아무렇지 않게 사람 환장하게 하는 대답을 돌려주었다. 오이카와는 자신의 머리에서 털려나간 어이가 바닥으로 떨어지는 소리를 들었다. 내재되어 있는 대부분이 떨어진 것이라 제법 크게 울리는 소리였다. 그는 어금니를 꽉 깨물었다. 제대로 따져 묻지 않고 넘겨 버렸던 것은 분명히 실수였지만, 어찌되었건 오늘 후배의 의도 없는 공격은 의도가 있는 누군가에 의해 제대로 들어 먹힌 것이 사실이었다. 시선은 또다시 카게야마를 떠나 쿠로오를 향했다. 도둑고양이. 그런 말이 들릴만한 눈빛이었다.
“오이카와. 너야말로 ‘내 후배’라는 호칭이 생길만큼 카게야마와 가까운 줄은 몰랐네.”
그 고양이는 늦봄의 하품처럼 여유롭고 나른하게 되받아쳤다. 여전히 어깨를 꽉 잡은 채였다.
“강의도 전혀 다른데 어떻게 친해졌을까. 뒤에서 만나기라도 한 건가.”
“뭐.”
라고 받아칠 말이 마땅하지 않았다. 어쨌든 비밀연애였고, 들키고 싶지 않은 부분이기도 했다.
“쿠로오 선배.” 그러나 공격은.
“응?”
“저랑 오이카와 선배 사이를 알고 있다고 하지 않으셨어요?”
전혀 다른 방향에서 들어왔다.
“...”
“...”
듣는 이를 환장하게 하는 대답은 상대를 가리지 않아, 그렇게 광대역 어그로에 성공한 카게야마는, 본인만 그 사실을 모르고 쿠로오와 오이카와를 공평하게 한 번씩 바라보았다. 그리고 아무 문제도 없는 태연한 목소리로.
“배고픕니다.”
꽤액. 소리만큼 엉뚱한 말을 내어 놓았다.
“밥, 먹으러 갈까요?”
세상에서 가장 불편한 겸상을 제의되었다.
-2-
쿠로오와 오이카와가 가지고 있는 몇 안 되는 공통점 중 하나는 학교 식당을 이용한지 꽤 오래되었다는 것이었다. 원하는 곳에서 원하는 것을 먹어도 되는 정도의 재력에, 그것을 딱히 드러내지도 숨기지도 않는 편이었던 두 사람은 약간은 멀뚱한 표정을 하고. 좁은 의자에 큰 몸을 구겨 앉았다. 조금만 몸을 움직여도 삐걱대는 소리가 나는 플라스틱 의자는 어딘가 불편하고, 여러 가지 음식이 뒤섞인 냄새가 후덥지근한 증기 사이로 옅은 소독약 내음까지 덕지덕지 묻어 공간을 떠돌았다. 그것만도 불편했는데. 대강의실에서 하는 수업이 끝났는지 우르르 몰려 들어온 사람으로 인산인해를 이루기 시작한 식당에서 오이카와는 나직하게 한숨을 흘려보냈다. 예민한 귀에 듣고 싶지 않은 많은 소리가 잡혔다.
“오이카와 선배다.” 속삭이는 목소리와,
“저 선배가 쿠로오 선배야? 나 신입생 환영회에서 보고 지금 처음 봐.” 숙덕숙덕 나누어지는 수다 속에서.
“근데 저 둘이 밥을 같이 먹을 정도로 친했나?”
라는 의문으로 수렴되어가는 과정들. 경영학과에서는 유명한 두 사람이었다. 생긴 것, 키, 성적, 입고 다니는 옷과 가방, 차. 뿐 아니라 서로 교류가 없기로도 유명했다. 그런 둘이 함께 앉아 밥을 먹고 있는 풍경이 눈 앞에 펼쳐졌으니, 어찌보면 당연한 결과였지만, 사방에서 시선이 문을 똑똑 두들긴다. 그런 종류의 호기심은 게임 속 두더지처럼 여기저기서 둥근 머리를 드러내면서도 막상 눈을 돌릴 라 치면 쏙쏙 숨어버렸다. 그렇다보니.
“많이 불편한 자리네.”
쿠로오가 먼저 수저를 들며 입을 열었다. 이 자리를 만든 후배님께서는 지금 늦게 나오는 카레를 마중하러 친히 자리를 뜬 상태였다. 오이카와는 힐끗 쿠로오의 어깨 너머 카게야마가 있는 곳을 살폈다. 한참이나 긴 줄에 서서는 뭘 그렇게 생각하는지 시시각각 남이 말도 못걸을 정도로 엄격한 표정을 지었다가, 좋은 듯 입술이 물결쳤다가를 반복한다. 못생긴 토비오. 또다시 심술궂게 애인의 가격을 후려치며 오이카와는 자신의 앞에 놓인 뜨거운 우동 그릇을 보았다. 먹고 싶은 것이 아닌 가장 빨리 나올만한 것으로 고른 것이었다. 김이 퍼지는 그릇 안에는 동그랗고 노란 유부가 동동 반쯤 잠겨 떠다니고 있었다.
“나는 이것보다 불편한 자리를 일주일에 한 번씩 꼬박꼬박 가거든. 인내심이 없는 누구와 다르게.”
“너도 안 가면 되잖아.”
“정말 마음 편한 소리하네. 장남씨.”
“주말을 그렇게 비워서 카게야마가 많이 심심해하던데.”
오이카와는 딱 소리가 나게 젓가락을 둘로 쪼갰다. 그리고 우동그릇 속을 휘휘 저었다. 카게야마가 무슨 생각을 하든지, 네가 상관할 일은 아니지. 라는 뾰족한 말이 쿡쿡 마음에 상처를 남기고 슬며시 사라졌다. 굳이 그런 말을 할 것까지는 없었다. 그는 다만 헛숨 빠지는 웃음을 지었다.
“그래서 놀아준 거야? 내 애인인걸 알면서.”
“분명히 말해두지만 나는 뺏으려는 게 아니야.”
“그럼 지금 하는 짓거리들은 뭐라고 생각해야 하나. 짝사랑?”
“주우려는 거지.”
면발을 몇 개 힘없이 말고 있던 젓가락이 기울어졌다. 애써 집었던 것들이 모조리 다시 그릇으로 돌려놓아졌다. 오이카와는 젓가락 끝을 그릇에 담은 채, 눈만 살짝 올려 쿠로오를 바라보았다.
“곧 버릴 거잖아.”
아니야? 라고 되묻는 눈동자가 차가웠다. 진심과 달리 안 버릴 건데? 라는 유치한 반문을 하고 싶어지는 눈동자였다. 그러나 둘은 서로의 바닥까지 알고 있는 사이였다. 유치한 허세를 부릴 나이 또한 아니었다. 입맛이 딱 떨어졌다. 오이카와는 젓가락으로 괜시리 그릇 안을 휘저었다.
“남이 버린 게 뭐가 좋아서? 줍게 만드는 게 미안하기까지 하네. "
“버렸다고 다 쓰레기가 되는 건 아니지.”
쿠로오는 두 손으로 그릇을 들고 후루룩 국물을 마셨다. 싼 맛이었다. 가장 좋은 재료로 정성을 넣어 끓인 것이 아니라, 단가를 맞추고 일당에 합당할 정도의 노력을 첨가해서 만든 보편적인 맛이었다. 그렇지만 꽤나 입맛에 맞았다. 식사란, 언제나 무엇을 먹느냐보다, 누구와 먹느냐가 중요한 법이었다.
“가치를 모르고 버리는 경우도 많거든.”
탁, 하는 소리와 함께 그릇이 탁자에 놓여졌다. 이제 겨우 건드리기 시작한 오이카와의 것과는 전혀 다르게 바닥을 보이고 있는 것이었다.
“그리고 나중에 후회하는 사람도 있어.”
쿠로오는 자신이 먹은 것을 차례차례 트레이에 정리해 넣으면서 덧붙였다. 한 편을 유달리 짙게 가리고 있는 검은 머리카락 속에서 흉터가 남아 있는 노란색 눈동자가 서늘하게 모습을 드러냈다. 드르륵, 소리 나게 의자를 뒤로 밀고 일어난 쿠로오는 건너편 오이카와에게 몸을 기울였다. 무표정한 얼굴 속 차가운 그늘의 눈동자가 활짝 열리고 자신의 속을 내보인다. 잘 봐. 라고 말하고 있는 것이었다. 오이카와는 거절하지 않고 그 안을, 쿠로오 테츠로의 내심을 똑바로 들여다보았다.
“너 꼭 그래라.”
그러나 더 볼 것도 없이 솔직한 본심을 털어놓으며 상대는 슬며시 웃었다. 쿠로오는 오이카와의 어깨를 한 번 꾹 잡았다 놓으며 자리를 떠났다.
-3-
“쿠로오 선배는 어디 가셨습니까?”
“이 다음 스케줄은 우리끼리니까 적당히 돌려보냈어. 혹시 섭섭해?”
“이렇게 빨리 말입니까?”
“아, 섭섭한 건 아닌데, 의외라서요.” 사실 배구팀 이야기를 같이 하기로 했었다.
오이카와는 평소 버릇대로 말하며 자신의 앞에 앉은 후배를 바라보았다. 그래. 언젠가는 버릴 것이었다. 정계와 재계는 복잡하게 얽혀 있기 마련이고, 그에게는 미래 배우자의 후보가 이미 여럿이었다. 꽤 깊은 관계로 들어선 사이도 있었다. 말하자면, 잠깐의 애인이 되는 것 외에 카게야마 토비오가 들어올 자리는 이미 없었다. 그렇게 밖에 내 앉혀 둔 사람이었다. 이 빌어먹을. 빌어 처먹을 정도로 귀여운 후배가 들어올 곳은 이미 없다는 것을 나도 알고, 쿠로오도 아는데. 너만 모르지.
“토비오.” 사실.
“네?” 내 말 하나하나가 최고인 네가.
“나는 토비오가 조강지처면 좋겠어.” 끝까지 몰랐으면 좋겠어.
“조...뭐라고 하셨습니까?”
“조.강.지.처. 이 말 몰라요?”
“모릅니다. 가르쳐 주세요.”
말은 그렇게 하면서도 카레에 홀딱 빠져, 들을 생각도 없어 보이는 태평한 얼굴이 얄미워서 코끝을 잡고 살짝 눌렀다.
“뭡니까!” 찡긋거리며 고개를 휘둘러 손을 떼어낸 카게야마가 빨간 코를 하고 물었다. 가끔 자신을 여자로 착각하는게 아닌가 싶을 정도로 상냥하고 부드럽게만 대해주던 것이 언제부턴가 짓궂어 지고 있는 것이 이상했다. 그래도 딱 잘라 싫진 않았다. 내가 이상한가. 카게야마는 고개를 다시 휘휘 저었다.
“다른 선배한테 눈 돌리지 말고 나만 보는 후배가 되란 말이야.”
“제가 눈을 왜 돌려요.”
눈에 당신 필터가 껴 있는데. 카게야마는 차마 뒷말까진 내뱉지 못했다. 오이카와 선배 있는 곳만 유난히 눈이 부시다는 이상한 말 같은 건 할 수 없었다. 같이 배구를 할 수 있게 되어서 정말 좋다는 말도 왠지 하기 힘들었다. 결국 카게야마는 고개를 숙이고 카레만 마구 퍼 입안으로 밀어 넣었다. 상대편에서는 먹는 기색이 없었다. 다만 정수리에 시선이 계속, 따갑게 꽂혀왔다.
-4-
“여기요?”
휘둥그런 눈동자가 건물의 저 끝부터 반대편 끝까지 훑어갔다. 한 시야에 들어오지도 못할 만큼 넓은 건물이었고 고개를 꺾어야만 끝이 보이는 높은 건물이었다. 사실 일본에서 가장 유명한 호텔 중에 하나였다. 오이카와는 자신의 차키를 대기하고 있던 사람에게 맡겼다. 몇 가지를 체크하는 와중에도 후배는 여전히 이리저리 몽구스처럼 고개를 세우고 호텔을 시선으로 만지작거리는 중이었다. 그대로 두면 하루 종일도 그럴 것 같아서, 그는 뺨을 톡톡 두드려 자신에게 주의를 돌렸다.
“만다린 오리엔탈. 이름도 못 들어봤어?”
“네. 만다린이라니..이상한 이름이네요.”
그렇게 6성 호텔은 이상한 이름을 가진 높고 넓은 호텔로 전락했다. 오이카와는 이젠 제법 익숙해진 후배의 엉뚱한 대답에 한번 웃고, 손을 잡아끌었다. 회원카드를 보여주고, 이름을 대자 VVIP 전용 문이 열렸다. 스위트룸으로 직행하는 엘리베이터가 고급스러운 장식을 하고 둘을 맞이했다. 카게야마를 먼저 태운 오이카와는 승강기의 속도를 완행 쪽으로 돌리고 가장 꼭대기 층을 눌렀다. 느릿느릿 올라가는 전용 엘리베이터의 한 면이 통유리로 되어 있어 주변의 경관이 한 눈에 들어왔다가, 점차 발밑으로 사라졌다.
“엄청 신기합니다!”
유리벽에 바짝 붙어서 내려다보는 카게야마의 뒷모습을 오이카와는 복잡한 기분으로 바라보았다. 그날의 휘슬 소리가 만드는 꼬리에는 여러 가지가 달려 있었다. 저는 오이카와 선배가 좋으니까요. 주우려는 거지. 곧 버릴 거잖아. 나중에 후회하지. 너 꼭 그래라. 모든 말이 휘몰아쳤다. 혼란 속에서 그는 엘리베이터의 속도만큼이나 천천히 후배에게 다가갔다. 그리고 뒤에서 껴안고 배를 감싸 자신에게 끌어당겼다.
“오이카와 선배?”
코를 묻어도 아무런 향도 없는 후배였다. 유일하게 나는 것은 본연의 살 내음뿐이었다. 부드럽고 인간적이고. 불순물이 아무것도 섞이지 않은 그런 내음. 어깨에 고개를 숙인 채, 오이카와는 오랫동안 잊혀 지지 않을 상대방의 체향을 들이마셨다.
“토비오.”
유리창을 통해 서로의 눈이 마주친다. 카게야마는 깜짝 놀랄 정도로 날이 서 있는, 그리고 불붙어 있는 오이카와의 눈동자를 마주했다. 네. 무언가에 홀린 것처럼 후배는 얌전히 대답했다. 손가락이 더 세게 배를 끌어안고, 그에 따라 뱃속이 간지러워졌다. 마치 그 날. 그 새벽의 꿈처럼.
“오늘 하는 게.”
“섹스인 건 알고 있어?”
듣는 사람이 그대로 녹아 버릴 것 같은 목소리였다. 오이카와는 팔 안에서 오르락내리락 하는 카게야마의 몸을 느꼈다. 조금씩 더 커져 가는 오르내림이. 오늘에 대한 상대의 기분을 여과 없이. 언제나 그랬듯이 거침없이 보여준다. 아무것도 걸러지지 않은 날 것 그대로의 호감과 기대와, 믿음이 쏟아져 내렸다.
“무섭지 않아?”
물을 것도 없이 너는 오늘이 처음이다. 남자고 여자고 가리지 않고 똑같이 오늘이 처음이다. 그런 네 상대는 나야. 사귄 지 이제 겨우 두 달 남짓 되며, 만난 날 수는 그보다 턱없이 적은, 숨기는 것이 많은 남자 선배. 왠지 무섭지 않아? 사실은 자신의 두려움을 감추려고 내뱉은 질문에.
“무섭습니다.” 카게야마는 솔직하게 대답했다.
“그렇지만.”
“하고 싶어요.”
나는 당신이 너무나 좋아서.
계산도 없이 다 주는 말이 부웅, 소리를 내며 크게 휘둘러졌다. 피할 길이 없었다. 오이카와는 그 말의 처음부터 끝까지 가시들이 박혀 있다고 생각했다. 귀로 흘러들어와 자신의 심장을 직격하고 내리 찔러버렸을 것이다. 그렇지 않고서야 이렇게 미친 듯이 제멋대로 뛸 리가 없었다. 아니면 진짜 미쳤나. 뭐가 특별하다고. 얘가 뭐라고 내가 구축해왔던 세계가 전부 뒤로 밀려 나가지. 아무것도 생각이 안 나지. 건물의 1층에서 승강기를 탈 때, 미처 못 탄 게 아닐까. 그는 여유롭게 보이길 바라며 간신히 웃었다.
“토비오쨩, 이제 보니 조르는 거 잘하네.”
“제가 조르는 겁니까?”
“응. 싫지 않으니까 이따가도 많이 졸라줘야 해?”
“대체 뭘 더..졸라야..” 약간의 항의가 담긴 대답이 끝나기도 전에.
땡,
하는 소리와 함께 엘리베이터가 멈췄다. 오이카와는 천천히 팔을 풀었다. 속박이 풀리자 카게야마는 천천히 돌아서서 유리창에 비친 허상이 아닌 실상을 마주했다. 그는 눈동자의 색감이 달라졌다고 생각했다. 왠지 모르게 멈칫하는 팔을 꽉 잡은 선배는. 그 어느 때보다 달게 웃으면서.
“곧 알게 될 거야.”
라고 말했다. 방으로 들어가기도 전에, 이미 그는 카게야마에게 입을 맞추고 있었다. 좋을만한 게 없는데도 홀딱 빠져버리게 되는 입술을 먹고, 먹고, 또 먹으면서 오이카와는 1층으로 똑바로 직하강하며 시시각각 바뀌는 숫자를 보았다. 연인과의 첫 섹스를 앞둔 것치고는 이상한 생각이지만, 그는 이 후배와의 섹스가 그렇게 황홀하지 않기를 바라고 있었다. 자신에게도, 또 카게야마에게도.
그럴 리는 없을걸.
날카로운 예감이 그 바람을 비웃었다.
그리고 아까부터 계속 주머니 속 핸드폰이 요란하게 울리고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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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는 나 자신에게 두렵지 않다고 말을 한다.]의 의미.
카게야마 : 오이카와 토오루
오이카와 토오루 : 카게야마 토비오(,그리고 쿠로오 테츠로)
쿠로오 테츠로 : 오이카와 토오루
주의! 고교 이름을 중교 이름으로 사용했습니다. 아오바죠사이는 미야기현에 있지 않고, 도쿄에 있는 설정입니다. :) 올리고 나니 생각나서 덧붙여 두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