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의사와 의사동기와 조폭이야기>
집에 오자마자 샤워부터 한 카게야마는 텅 빈 집안에서 스멀스멀 기어 나오기 시작하는 고요함을 피해 텔레비전을 틀었다. 평소에는 거들떠보지도 않던 것이었다. 리모컨에 따라 이리저리 바뀌는 채널을 부지런히 쫓는 눈동자로 수없이 많은 장면들이 들어왔지만 사실은 머리속으로 하나도 입력되진 않고 있었다. 피곤하지만 잠은 안 오고, 배는 텅 비었는데 뭔가 먹고 싶은 생각이 없었다. 카게야마는 자신이 지금 무척이나 스트레스를 받고 있다는 것을 알고 있었다. 하지만 알면 뭐해. 해결할 방법이 없는데.
“...이제 기분이 풀려?”
복도에 흐르는 팽팽한 긴장이 무색하게, 동기는 아무렇지 않게 일어나서 멀리 날아가 부서진 안경을 집어 들고 그렇게만 말했다. 씩씩거리는 자신을 바라보던 시선의 온도는 차갑고, 그 안에서 느껴지는 거리가 너무 멀어서 오히려 얻어맞은 것은 자신이라는 생각까지 들었다. 사실 틀린 말은 아니었다. 자신을 너무나 잘 알고 많은 일을 해주는 츠키시마이지만 중요한 순간에 전전긍긍해 하는 것은 자신이었다. 사실 츠키시마는 내가 아니어도. 거기까지만 생각하고 카게야마는 고개를 좌우로 세게 젓고, 팔 사이로 얼굴을 묻었다.
***
딩동딩동-디잉동.
도어벨 소리가 시끄럽게 울었다. 카게야마는 혹시나 하는 생각에 벌떡 일어나, 카메라도 확인하지 않고 무심코 문을 열었다가, 문 밖에 서 있는 사람을 보고 그대로 문을 당겼다. 그러나 닫히기도 전에 문 사이에 발이 들어오고, 문짝을 잡은 손은 카게야마보다 큰 힘으로 자신 쪽으로 당긴다. 자신의 의도와는 달리 점점 벌어지는 문틈에 열이 받는다. 정말 일이 터지려고 들면, 동시에 터지는 법이었다. 기어코 활짝 열린 문틈으로, 역시 활짝 웃는 뻔뻔한 남자의 얼굴을 보며 카게야마는 인상을 확 구겼다.
“와- 오랜만인데 문전박대라니 섭섭하네.”
“쿠로오씨..............”
“내가 칼을 안 꽂고 와서 그래?”
남자는 여전히 가볍게 웃으면서 농담을 던졌다. 받아줄 여력이 없는 카게야마는 한숨을 쉬고 문을 잡아당기던 손에 힘을 풀었다. 그러자마자 쿠로오는 문 안으로 쑥 들어와서, 가벼운 옷차림의 카게야마를 온 힘을 다해 끌어안았다.
“켁-” 숨이 막혀 내는 소리에.
“여전히 분위기를 모르는 의사선생이야.”
어깨에 마구 턱을 비비면서 어리광을 부리는 남자는 사실 오랜만에 맡아보는 의사선생의 체향을 마음껏 들이마시고 있는 중이기도 했다. 아기를 씻길 때 쓰는 바디젤 향이 은은하게 배여 있었다.
“방금 샤워했어? 혹시 나 기다리고 있었던 거야?”
“.....아니에요. 그리고 그냥 가주세요.”
카게야마는 다른 말이나 화를 낼 기력도 다 떨어져 힘없이 요구했다. 그리고 그 요구에 대한 대답은 입맞춤으로 돌아왔다. 팔 사이로 들어온 손이 카게야마를 살짝 들어 올려 벽으로 밀고는, 팔뚝을 타고 올라가 손목을 잡아 쥐었다. 벗어나려는 카게야마의 다리 사이에 자신의 무릎을 넣어 앉히듯이 받치고 쿠로오는 일견 게걸스럽기까지 해 보이는 키스를 계속했다. 약간 들린 몸에 발끝만 간신히 바닥에 닿아 있는 카게야마는 이러지도 저러지도 못하고 쿠로오에게 휘둘렸다.
“ 쿠로-, 윽, 앗, 오..씨!!!”
오히려 그 날보다 더 호흡을 따라오지 못하는 조그만 입술을 입 안에 다 넣어버리고 이를 세워 잘근잘근 씹자 입술은 한층 더 부들부들하게 풀어졌다. 피가 몰려 빨갛게 색이 변한 입에 마지막으로 쪽-하는 소리가 나게 뽀뽀를 한 뒤에야 상대가 떨어져나갔다. 오늘만 두 번째 입맞춤이었다. 카게야마는 문득 첫 번째 상대자를 떠올리고, 우울한 기색으로 쿠로오를 밀쳤다.
“츠키시마 선생이랑 또 무슨 일 있었어?”
“이게 누구 때문인데요.”
“에..나 때문?”
“...아니에요. 제 잘못이에요.”
조금 생각을 한 뒤, 풀이 죽은 목소리로 대답하고 카게야마는 거실 쪽으로 몸을 돌렸다. 그러나 뒤에서 확 끌어당긴 힘으로 다시 쿠로오의 품에 익숙한 듯 안겨진다. 아까보다 좀 더 노골적으로 허리를 감싼 손이 옷자락 안쪽으로 밀려들어왔다. 살결을 만지는 손에 묻어있는 농염한 성적 의도에 카게야마는 입술을 꽉 깨물고, 쿠로오의 팔을 잡았다. 기를 쓰며 밀어내려고 했지만, 좀처럼 밀려나지 않는 단단한 팔이었다. 오늘 정말 다들 왜 이러지. 카게야마는 몸을 빼려고 비틀면서 쾅쾅 발을 굴렀다.
“좀, 하지 마세요!”
“우울하면 또 내가 기분 좋게 해 줄까?”
“아니요. 그거 싫어요.”
“난 좋은데. 토비오랑 지금 당장이라도 또 하고 싶어.”
머리카락 끝이 오그라들도록 낮은 목소리가 귀 가까이에서 들려왔다. 쫑긋하게 서버린 귀를 물어뜯고, 혀를 살짝 내밀어 안쪽으로 밀어 넣자, 품 안에서 몸이 팔짝 뛰어올랐다. 정신없이 휘몰아치는 이유 없는 공세에 질색하는 자신과 애정을 갈구하다 지친 몸을 맡겨버리고 싶은 자신이 공존한다. 그것은 모순이었다. 이러면 안 되는 거였다. 카게야마는 끈적한 소리가 나는 귀에서 쿠로오를 털어버리기 위해 고개를 마구 뒤흔들었다. 쿵 소리가 나게, 쿠로오의 발을 밟고, 아야야, 하는 틈을 타서 품에서 달아나 버렸다.
“전 싫어요. 하나도 기분 안 좋아져요.”
좀 더 확실하게 의사를 타진하고는 그대로 방으로 도망가려고 했지만, 도착하기도 전에 잡혀서 거실 소파 위로 넘어뜨려졌다. 다리가 얽히고, 팔이 뒤로 꺾여서 짓눌려진다. 조금 위험한 게 아닌가 하는 생각이 그때서야 들었다. 푹 수그려진 고개에 곱게 드러난 목을 한번 깨물고 쿠로오는 빙글빙글 웃었다. 사냥에 성공한 고양이처럼 득의양양한 표정이었다.
“토비오가 싫다고 해서 안할 수 있는 거 아닌데.”
동기 때처럼 쉽게 떨칠 수 없는 사내의 무게에 헉 소리가 났다.
“싫어요. 쿠로오씨-”
온 몸이 붙잡혀 있는 채로, 카게야마는 계속 고개를 저었다. 팔꿈치가 강아지 발처럼 박박 소리를 내며 소파를 밀어냈다. 어떻게든 몸을 일으키려고 할 때마다, 툭툭 건드려 쉽게 다시 무너뜨리면서 쿠로오는 카게야마를 털실뭉치처럼 가지고 놀았다. 건장함과는 다소 거리가 먼 가벼운 몸이 마구 굴려진 끝에, 결국 제풀에 지쳐 나가떨어질 때까지 시간은 얼마 걸리지 않았다. 조그맣게 입을 벌리고 학학 거리면서 카게야마는 결국 쿠로오의 품에 고개를 묻었다. 밥도 못 먹고, 정신적으로도 시달린 머리에 완전히 녹초가 되어 버린 몸은 뜨끈하게 열기가 올라오는 단단한 가슴 안에 여름날 초콜릿처럼 녹아내렸다. 구렁이 담 넘어가듯이 술렁술렁 자신의 뜻대로 굴려대는 상대방에게 억울함을 표하면서 다소 거칠게 이마를 비볐다. 땀이 날락 말락 하는 가느다란 머리카락에 코를 박아 넣고 쿠로오는 양껏 카게야마를 끌어안았다.
“의사선생은 내가 없어져서 놀라지 않았어?”
“3일 뒤에는 가신다고 했었으니까, 그런 거라고 생각했어요.”
“처음을 가져간 남자에게 그렇게 매정해도 되는 거야?”
“...아니 그건.”
“처음 아니었어?”
“그게 아니라요.”
결국에 또 입을 다무는 쪽은 카게야마였다. 떠날 사람이라고 생각했다는 말이 상대에게 주는 상처를 정확히 알지 못했지만, 라면을 사러 나갔던 날, 자신의 질문이 사실은 츠키시마의 뜻이었다는 말을 꺼내지 못한 것처럼 본능적인 반응이었다. 지금 자신을 쓰다듬고 있는 남자는 손뿐만 아니라, 머리카락마저 거칠었다. 몸에는 여기저기 상처가 많이 나 있었다. 그래서 카게야마는 쿠로오에게 동기에게처럼 아무 말이나 할 수가 없었다.
“쿠로오씨.”
“응” 말은 무섭게 하면서도 더 이상 옷을 벗기려 들지도, 만지려고 들지도 않는 남자는 다정하게 대답해왔다.
“상처 다 나으셨어요?”
“걱정 돼?”
“네. 이젠 아프지 않으신가요?”
카게야마의 손에 아랫배에 조심스럽게 닿았다. 둥근 손끝이 머뭇거리다가 자신이 치료했던 그곳을 살그머니 어루만진다. 자극적이라고 느꼈지만 쿠로오는 카게야마가 하고 싶은 대로 하도록 내버려 두었다.
“흉이 지지 않았으면 좋겠어요.”
“그건 어렵지 않을까? 아무리 의사선생이 했다지만 워낙에 깊어서..”
"하나가 더 생기겠네요."
"어차피 이거 하나도 아니라 괜찮아."
담담하게 대답하는 쿠로오를 보니 불현 듯 어린 시절이 떠올랐다. 카게야마를 담당했던 주치의는 ‘보이지 않지만 너의 정신 이곳저곳에는 상처가 나 있다’는 표현을 사용했었다. 고칠 수 있지만 깊은 상처는 흉터를 남기는 법이고, 그렇게 남은 흉터는 안고 가야 하는 것이라고도 했다. 살아보니 참 맞는 말이었다. 그래서 쿠로오를 치료할 때, 가장 신경 쓴 것도 그거였다. 흉터가 없었으면 좋겠다. 여기에 박혀 있던 칼을 아무도 몰랐으면 좋겠다. 평탄한 삶을 살아왔다는 증거처럼 매끈해졌으면 좋겠다. 마치 인과의 앞뒤가 바뀌어 매끈한 살결이 평탄한 삶을 증명이라도 할 수 있는 것처럼 주의를 기울였다. 쿠로오는 상처를 만지는 카게야마의 손을 잡아 조용히 입을 맞췄다. 재미없는 얘기는 그만 하자.
“츠키시마 선생이 많이 혼냈어?”
“네..”
“혼내기만 했어?”
“...이제 저를 안 봐요. 절 싫어해요.”
곧 눈물이 뚝뚝 떨어질 것 같은 표정이었다. 쿠로오는 그 표정과 또 그 동기의 행동이 하는 의미가 무엇인지 너무나 쉽게 알아차릴 수 있었다. 어쩌면 이미 서로가 알고 있을 이유에 대해서 외면해버리는 것은 모두 ‘그 날’ 때문인 걸까. 남자는 손에 쥐고 있던 손가락을 입에 넣어 살짝 깨물면서 웃었다.
아, 정말 그런 것이라면 우습기 짝이 없는 일이었다.
단 하룻밤의 일로 무너질 것이었다면,
나는 너의 수많았던 날들을 시샘하고 넘어서지 못할 벽처럼 생각할 필요가 없었던 것이다.
“모두 얘기했어?” 그 날 있었던 일 전부를.
“...하려고 했는데..들어주려고 하지 않아서. 그리고 뭐라고 얘기해야 할지 모르겠어요.”
다소 억울하다는 목소리를 감미롭게 귀에 담으며 쿠로오는 혀로 끊임없이 손가락을 건드렸다. 으으.. 하면서 빼내려는 것을 꾹 잡고, 눈으로 끊임없이 상대를 간음한다. 상대를 너무 잘 알아서, 오히려 넘겨 짚어버리게 되는 사각지대를 파고든 것은 자신이었다. 서로에게 억울하고, 서로에게 상처를 주도록 만든 것이 눈앞의 사람이라는 것을 모르는 의사선생은 발그레 하게 달아오른 얼굴로 버릇처럼 고개를 저었다. 영락없이 아기였다. 자신에게 있어선 둘 다 모두 어린이에 불과했다.
병원 밖의 세상은 이래. 너희가 죽어라 걸어온 세상을 등지고 음습한 곳만 파고들어간 누군가는 이런 방식으로 원하는 것을 얻기도 해. 그래서 억울한 사람도 생기는 거지만, 그게 세상이야. 내 세상은 항상 그랬어.
“너무하네. 츠키시마 선생. 이렇게 혼자 내버려 두고. 잘 알지도 못하면서.”
알면 이번에 배에 꽂히는 것은 칼이 아니라 메스겠지. 그런 생각을 하며 쿠로오는 손가락과 손가락 사이를 말끔하게 핥아 내렸다. 입술을 꼭 깨물고, 쏟아지려는 무의식적인 신음을 참는 입가가 더할 나위 없이 색정적이었다. 경계가 희미해진 눈매 속에 선명한 푸른색 눈동자. 자신과는 다른 세계의 사람. 누운 쪽으로 쓸려 내려온 검은색의 머리카락. 언제나 가지고 싶고, 뺏고 싶은.
“또 하자.”
웃음기 하나 없는 소리로 제안했다. 카게야마는 고개를 저었다.
“너랑 또 하고 싶어.”
타액으로 젖어든 손바닥 깊숙이 입을 맞추며 다시 제안했다.
똑똑한 의사 동기 선생이 잘못된 것을 눈치 채기 전에 해야 한다.
“이번에는 정말 기분 좋게 해 줄게.”
혼자 남아 약해진 네가 흔들려도 아무도 잡아주지 않는 지금 당장.
***
“...싫어요.”
카게야마는 쿠로오의 입술이 닿아 있는 손가락을 오므리고, 끌어당겼다. 던진 질문이 장난이 아니었듯이, 돌아온 답변 역시 가벼운 것이 아니었다. 그대로 몸을 일으키려는 카게야마의 허리가 쿠로오에게 재차 잡혔다. 반쯤 그에게 올라탄 자세로 의사는 자신의 손으로 치료했던 수상한 남자를 내려다보았다. 한 번도 자신을 이상하게 본 적이 없었던 사람이었다. 하고 싶은 말을 모두 해도 계속 귀를 기울여주고 재미있다고 말해주었다. 드물게도 자신의 보살핌이 필요했던 사람이기도 했다. 술을 많이 먹이고 ‘기분 좋은 일’을 시키긴 했지만, 그래서 동기와 돌이킬 수 없을 만큼 사이가 벌어져 버렸지만. 그래도.
“저는 쿠로오씨 좋아해요.”
카게야마의 손이 다시 한 번 상처를 만지작거렸다. 또 날 들어 올리네. 쿠로오는 입 꼬리를 끌어당겨 웃었다. ‘싫어요.’ 뒤에 따라 나온 소리라서 사실은 그러고 싶지 않았는데, 막상 들으니 웃지 않을 수가 없었다.
“앞으로 나쁜 일은 안하셨으면 좋겠어요. 그래도 내가 고칠 수도 없을 만큼 다쳐오지는 마세요.”
맥락 없이 중간만 뭉텅뭉텅 내미는 말이었다. 그러나 대충 알아들을 수 있어서 되묻지도 않고 가만히 듣고 있는 쿠로오의 손이 카게야마에게 잡혔다. 의사는 자신보다 큰 남자의 손을 두 손으로 잡고 자신의 심장 부근에 대고 눌렀다.
“갑자기 심장이 빨리 뛰는 건 교감신경에 온 자극 때문이에요. 그런데 그 자극이 쿠로오씨가 좋아서인지, 아니면 그 날 때문에 몸이 떨려서 그런지 모르겠어요. 사실 저는 감정에 대해서는 잘 몰라서 많이 틀려? ....어.. 잘 틀려요.”
자신이 제대로 된 표현을 사용하는 것인지를 생각해보는 눈동자가 한 바퀴 구르고 제자리를 찾았다. 쿵쿵 울리는 박동이 조금 안정을 찾을 때까지 쿠로오는 잠자코 기다렸다. 이윽고 조금은 침착해진 목소리로 의사는 다시 말을 이었다.
“그러니까 ‘틀린다.’는 건 소뇌를 다친 사람에게 교뇌 수술을 하는 거랑 비슷한 겁니다.”
“이번에는 정말 무슨 말인지 못 알아듣겠는데, 의사선생.”
“수술이 잘못 되면 사람이 많이 다치니까, 어디가 잘못 되었는지 제대로 모르면서 하면 안 된다는 뜻이에요.”
감정에도 이론처럼 정답이 있으리라고 믿는 의사선생은 시험문제를 풀듯이 자신의 마음을 털어놓고 있었다. 말을 돌리려면 얼마든지 그럴 수 있겠지만, 원한다면 언제라도 넋을 놓게 만들 수 있었지만 의사 선생의 표정이 너무 진지해서 그러고 싶은 생각도 들지 않았다.
“그래서 그 날은 제 잘못이었어요.”
쿠로오의 손을 잡고 있는 힘이 강해졌다. 또 잘못 하면 안 돼. 카게야마는 신중하게 말을 골랐다. 잘못한 것은 돌이킬 수 없었다. 몫은 그대로 받아두고, 앞으로. 잘못이 남긴 흉터를 끌어안고 다시 앞으로.
“저는 쿠로오씨가 좋지만, 같이 기분 좋은 일은 할 수 없어요.”
“왜?”
“그건.”
의사선생의 얼굴에 생기처럼 붉은 기가 돌았다. 상처에 지쳐도 굴복하지 않고, 자신의 감정을 직관하는 강인한 눈동자는 파랗게 빛났다. 기대와 달리 혼자 남아도 약해지지 않는 빛이었다. 이것저것 따지지 않고, 재어 보지 않아서 만인에게 공평할 수 있었고, 솔직할 수 있는. 쿠로오는 잡힐 듯 다가온 어떤 예감에 차게 웃었다. 어쩌면 자신은 처음부터 둘 중 더 강한 쪽을 잘못 알고 있었던 게 아닐까. 그래도 조금은 늦게 결론을 내려주는 편이 좋았는데. 조금만 더 시간을 주면 좋았을 텐데. 의사선생. 하지만 모든 이들의 시간은 공평하게 흘러가지 않는 법이라 자신에겐 짧았던 순간이 의사선생에겐 충분히 긴 시간이 되었다.
그렇게 명확히 결론이 내려진 단단한 세계에 두 발을 딛고 서서 카게야마는 쿠로오의 손을 내려놓았다. 그건. 카게야마는 똑같은 말을 반복하며 말을 꺼냈다. 선명해진 눈빛 속에는 자신이 내린 답에 대한 확신과, 그 답이 주는 기분 좋은 깨달음을 가득 담고 있었다.
“츠키시마가 싫어할 일은 하고 싶지 않기 때문이에요.”